◈성경연구·강해[종합]/성경의 脈을 잡아라

[역경의 열매―문봉주 ⑻~(13,끝)] "말씀을 가르치든지, 배우든지 하십시오.”

영국신사77 2017. 2. 6. 22:37
  [역경의 열매―문봉주 ⑻] 영혼치료가 항암치료보다 고역
                                                                                2004.01.29 15:59:07


 도착한 날 서울대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결과는 위암 4기였다. 암덩어리가 위벽을 뚫고 나와 있는 심각한 상태였다.

“위암의 진행단계가 6기까지 있는데 만약 조금만 늦었으면 손도 못 댔을 뻔했습니다. 당장 수술해야 합니다.”

 담당의사는 수술한 뒤 항암치료를 꾸준히 받으면 된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런데 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가 추석 무렵이라 의사들이 없어 수술이 4일이나 늦어졌다. 암수술을 바로 눈앞에 두고 명절 연휴를 병원에서 보내는 일은 매우 힘들었다. 아내와 마로니에공원 근처의 한 카페에 바람을 쐬러 나갔다.

 연방 웃음을 떠뜨리고 있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좀더 일찍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앙을 회복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40대 중반에 이렇게 허무하게 죽음에 직면하지는 않았을 텐데….’

마주 앉아 있는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내에게 미안했다. 갑자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살려고 노력하는데 왜 망나니로 살 때는 아무 일을 하지 않으시다가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이때에…하나님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급기야 하나님께 따지기 시작했다.

“하나님, 세상으로 가던 길을 돌이켜 주님을 향해 잘 가고 있는데 왜죠?”

연휴 기간에 하루는 하도 속이 답답하고 허전해 아내와 함께 병원 복도를 걷고 있었다. 복도 끝 어디선가 찬송가 소리가 새어나왔다. 찬송가 소리를 따라갔다. 문을 열어보니 간호사들이 앉아 있었다. 간호사 신우회의 성경공부 모임이었다. 

내가 “남자 환자가 들어가도 될까요?”하고 묻자 인도하시던 잠실주사랑교회 김만배 목사님이 “여기 비록 환자복을 입었지만 하나님의 사람이 오셨습니다”하고 말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죄 짓고 죽을 병에 걸려왔는데 하나님의 사람이라니…’ 그러나 목사님의 이 한 마디에 나는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는지 모른다.

하용조 목사님도 병문안을 오셨다. 하 목사님은 내 마음의 중심을 이미 꿰뚫어보셨던 것같다. 몸이 아니라 영혼이 갈급하다는 것을. “문 집사님, 고난은 축복의 시작입니다. 힘내세요.” 그러면서 나를 꼭 안아주셨다. 삶에 대한 용기가 다시금 살아났다. ‘맞다, 이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것이야.’ 

나는 항암치료보다도 더 고통스럽고 힘겨운,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영혼의 치료를 받고 있었다.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3주동안 입원해 있으면서 몇 가지 문제를 놓고 기도했다. 우선 공관 업무를 수행하는데 지장이 없기를 기도했다. 또 사람을 만나는 게 직업인지라 항암치료할 때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도록 간구했다. 나는 아무에게도 수술을 받는다고 알리지 않았다. 몸이 아프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공직자의 신상에 좋을 일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담당의사는 내가 워낙 건강체질이라 직장에 다니면서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중국으로 돌아가 항암치료를 받는 것도 괜찮다고 했다.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게 하는 방법도 있었다. 항암치료중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은 약의 독한 성분이 피부 밖으로 빠져나와서다. 만약 항암제의 독한 성분을 몸 안에서 배로 감수할 수 있다면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게 치료할 수도 있다고 했다. 생명을 잃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공관 업무도 계속할 수 있다는 말에 나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중국으로 돌아온 나는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수술 받기 전처럼 직장생활을 하고 성경공부 모임도 인도했다. 그러나 몸은 매우 힘들었다. 겨우 버티고 있는 형편이었다. 중국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성경공부 모임에 나갔을 때 감격했다. 청년부 식구들이 깜짝파티를 열어줬다. 

케이크에 촛불 한 개를 켜놓고 생일도 아닌 날에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는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죽지 않고 다시 살아왔으니 바로 오늘이 새로 태어난 생일이라며 축하해주는 청년들 앞에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정리=함태경기자 zhuanjia@kmib.co.kr 

 

 

 

[역경의 열매―문봉주 ⑼] ‘안찰’ 반년만에 위암증세 회복


항암치료를 받는 달은 그야말로 하루에도 몇번씩 지옥을 다녀온 듯했다. 

약기운이 퍼져나갈 때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루종일 토악질이 멈추지 않았다. 하루 1시간도 편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앉거나 눕거나 서 있거나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주님은 철저하게 나를 담금질시키셨다. 나란 존재가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외교관이라는 탄탄한 직업, 남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학벌, 단란한 가정 등 그 무엇도 해결책이 되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항암치료 시간에도 성경공부를 위한 준비를 해나갔다. 오른팔에 링거주사 바늘을 꽂고 왼손으로는 청년들에게 가르칠 내용을 메모했다. 왼손으로 썼기 때문에 나 자신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하루는 구약성경을 보고 있는데 신약성경에서 이 말씀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갑자기 관계된 신약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성경구절이 머릿속에 또렷이 프린트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몇년전 목사님의 설교 내용까지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그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외워지지 않던 성경구절이 몇번만 보면 척척 마음속에 새겨졌다. ‘말씀의 은사’였다. 신?구약을 꿰뚫어볼 수 있는 지혜, 말씀의 행간을 읽는 눈도 열렸다. 그때의 놀라움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전혀 상상하지 못한 변화였다. 

또 하나님은 항암치료에 좋은 사람들을 붙여주셨다. 베이징의과대 교수인 재중동포 최훈(현재 우석대 중의약과 교수) 박사는 한밤중이라도 내가 몸상태가 좋지 않다고 하면 언제든지 달려와 긴급 조치를 취해줬다. 병원에 갈 때도 중국어가 서투른 우리 부부와 함께 동행했다. 최 박사의 어머니도 암 회복에 좋다는 약이라면 먼곳까지 가서 구해줬다. 이들 모자는 하나님이 내게 보내주신 천사였다.

민간요법과 함께 항암치료를 받은 지 6개월이 지났을 무렵 얼굴에 황달기가 돌았다. 이는 내 몸속에 항암치료를 버텨낼 기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반증이었다. 그때 톈진(天津)에 있는 한 장로님으로부터 기별이 왔다. 서울에서 신유은사를 받은 권사님 한 분이 오신다는 거였다. 그때만 해도 항암치료를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했으나, 그 권사님은 나를 위해 톈진에서 베이징까지 오셨다. 

“항암치료부터 끊어요.”

항암치료와 안찰을 같이 받으면 하나님이 고쳐주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에 병원 치료를 끊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였다. 참으로 난감했다. 병원측에 더 이상 항암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하자 결사적으로 말렸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믿기로 했다. 권사님은 1주일간 베이징에서 머무르며 안찰해주셨다. 그분은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아내에게 안찰법을 알려줬다. 그 뒤 6개월간 나는 아내에게 끊임없이 안찰을 받았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점점 몸이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안찰을 받으면서 성경공부 모임을 더 많이 인도하게 됐다. 청년대학생 뿐 아니라, 장년부 대상 성경공부모임도 이끌게 됐다. 매주 청년부 2시간, 장년부 2시간씩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했다. 모임을 한번도 건너뛰지 않을 만큼 건강이 회복됐다. 또 매주 대사관 직원들과 등산도 다닐 수 있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낮고 천한 곳에 이르지 않고는 벗어던질 수 없는 인간의 교만이라는 병과 싸워 이기게 하신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이끌 새 정부에서 국장급 이상 간부를 물색하고 있었다. 문봉주는 암환자라서 중책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의견이 나돌았던 것같다. 그러나 내가 매주 등산을 하고 성경공부를 이끌고 있다는 소문이 나자, 건강상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본부에 보고됐다. 얼마뒤 나는 새 정부에서 외교통상부 아태국장이라는 중직을 맡게 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분명 기쁜 소식이었다.

 

그러나 성경공부 모임이 걱정됐다. 대구백화점 주재원이었던 정 집사가 내 뒤를 이어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예수 믿기 전에는 하룻밤이라도 춤을 추지 않으면 몸이 근질근질했던 사람이었다. 완전히 변화된 그는 성경공부에 목숨을 바치다시피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내가 떠난 뒤에도 정 집사가 2년이나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했다고 한다. 
 

                                                     정리=함태경기자 zhuanjia@kmib.co.kr 

 

 

 

 

  [역경의 열매―문봉주⑽] 서울서 가진 성경공부 폭발적 호응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남서울은혜교회에서 ‘성경의 맥을 잡아라’라는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하게 됐다. 홍정길 목사님이 중국에 오셨을 때 내가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것을 보시고 서울에서도 꼭 한번 하자고 제안했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반응이 좋았다. 400명 정도가 등록해 은혜의 시간을 가졌다. 이어 모교회인 온누리교회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이끌었다. 500명으로 시작된 성경공부는 끝날 즈음 1000명을 넘어설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사실 성경을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가르치는 것이다. 만일 말씀을 배우는 데 머물렀다면 지금의 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공부 모임을 쫓아다니면서 배운 것보다 

가르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성경을 더 깊이, 더 넓게 알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말씀의 은사’라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가 있었다. 

 많은 분이 어떻게 하면 말씀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어보곤 한다.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일단 말씀을 배웠다면 무조건 가르쳐 보세요.

 

 일단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니까 정말로 잘 배워지더라고요.

 

 그러니 가르치든지, 배우든지 하십시오.” 

나는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단 한명이라도 좋으니 

말씀을 가르쳐보기를 권하고 싶다. 

항암치료의 고통 가운데서도 

가르치기 위해 말씀을 붙잡았을 때 하나님은 함께 하셨다.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이다. 

은사는 결코 어느 한 사람의 독점물이 아니다.

은사는 반드시 나눠야 하고,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은사를 주신 이유다.

 

요즘 새벽마다 이런 기도를 드린다. 

“주여, 추수할 것이 많은 때에 일꾼은 심히 적으니 

열성적인 일꾼들을 보내 주십시오.”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대사’가 되고 싶었다. 

성경공부를 인도하러 다닐 때 이런 기도를 드리곤 했다. 

“하나님,제가 처음으로 대사로 나갈 때는 주신 

말씀의 은사를 사용할 수 있는 곳으로 보내주십시오.”

 

그러자 하나님은 나의 사역지를 뉴질랜드로 정해주셨다. 

뉴질랜드는 내게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우선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기에 아주 그만이었다. 

또 이민 초기라 한인교회가 40여개에 불과했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러 다니기 좋았다. 

대사로 부임하자마자 뉴질랜드 최고 도시이자 

교민 밀집지역인 오클랜드의 한인목회자협의회로부터 

말씀을 전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한국대사관이 있는 수도 웰링턴과 

동포가 많이 살고 있는 오클랜드는 자동차로 움직이면 

10시간은 훨씬 넘게 걸릴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주말마다 비행기를 타고 

웰링턴과 오클랜드를 오가며 말씀을 전했다. 

아침 8시에 나가서 밤 12시가 되어 돌아오는 강행군이었다.

 

매주 수요일 저녁에는 웰링턴 한인교회에서 말씀을 전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최대한 활용했기 때문에 피곤할 줄 몰랐다. 

평일 업무를 제외하곤,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는 일에 모든 시간과 열정을 쏟았다. 

8개월쯤 지났을 때의 일이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들을 생각해보았다. 

아내는 암의 재발을 염려했다. 

몸을 일으킬 수 없을 만큼 피곤했다. 

아내와 함께 병원에 가보았다. 

의사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다. 

병이 도진 것도 몸에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중국과 한국에서 말씀을 전할 때는 언제나 마음에 성령이 충만했다.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뉴질랜드에서는 왠지 달랐다. 

말씀을 전할 때는 충만한 감동이 있었으나, 

웰링턴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는 전과 다르게 허전함이 감돌았다. 

영혼과 몸이 완전히 다운되고 있다는 느낌뿐이었다. 

“하나님, 도대체 왜 이렇습니까?”

하나님께 물어보았다. 

뭔가 희미하게 짚이는 것이 있었다. 

교만덩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침에 눈에 뜨자마자 말씀 묵상을 시작하고 

업무시간 외에는 오직 말씀을 상고하는 등 

모든 개인 시간을 주님께 드리자,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는 깨달음이 왔다. 

그동안 평신도로서 

이보다 더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겠느냐는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왔던 것이다.

 

아무리 말씀으로 충만한들 

기도가 없다면 결국 영혼이 병든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정리=함태경기자 
zhuanjia@kmib.co.kr
 

 

 

 

 

[역경의 열매―문봉주⑾] 눈물의 기도끝에 ‘방언’이 술술


나는 영적 상태가 ‘다운’되고 나서야 중보기도의 위력을 깨닫게 됐다. 

중국에서 바쁜 공무로 주일도 지키기 어려웠는데, 

한번도 거르지 않고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도, 

암을 이길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성도의 중보기도 덕분이었다. 

내가 기도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늘 충만하게 전할 수 있었던 비결이 거기에 있었다.

뉴질랜드에 와서 기도할 생각은커녕, 

목회자도 아닌데 이보다 더 어떻게 하느냐는 자만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예전처럼 중보기도 후원도 받지 못했다. 

교민들의 이민 역사가 짧아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쁘던 때라, 

멀리 웰링턴에 있는 나를 위해 중보기도해줄 만한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기도를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자 겁부터 났다. 

두란노해외선교회(TIM) 중보기도 모임 리더를 할 때의 

악몽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기도가 그렇게 힘든데 어떻게 다시 하지.’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제 영혼에 메마른 단비같은 기도를 주세요. 

주님, 제 마음에 열매를 맺는 그런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그때 뉴질랜드에서 텔레비전 복음전도자로 활동하던 

하버드대 출신의 찰스 스탠리 목사님의 성령충만한 설교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사모하기 시작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기도하는 게 힘들지 않을텐데….’ 

그의 설교가 끝난 뒤 그의 저서가 소개됐다. 

얼른 메모지에 옮겨적었다. 

‘성령충만 그 아름다운 삶’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라는 책이었다. 


얼마나 마음이 다급했던지 

나는 그 책들을 산 뒤 여름휴가를 떠났다. 

깊은 산속 조용한 곳에서 오직 책만 읽었다. 

그 책은 성령충만한 삶에 대해 

스탠리 목사가 30년동안 혼자서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깨달아간 것들을 기록해놓은 것이었다. 

그런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에 

그 책의 내용을 성령의 단비처럼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왜 영적 침체기에 빠졌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다.

 

나는 예수님을 태운 나귀처럼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내 입에서 나오는 성령의 말씀에 감화받는 것이지, 

나 때문에 은혜를 받았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스탠리 목사님처럼 간구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방법을 알려주세요. 

하나님, 제게도 증거를 보여주세요.”

하루는 아내가 예언의 은사를 받은 분이 있는데 

같이 기도해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원래 방언기도나 예언의 은사를 굉장히 싫어했던 사람이었다. 

지식인이 점잖지 못하게 ‘따따부따’한다는 것이 맘에 안 들었다. 

예언 자체를 하나님의 은사라기보다는 점술처럼 여겼다. 

“얼른 모셔 와요.” 

기도에 대한 간절함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며칠 뒤 예언은사를 받은 여집사님이 관저로 찾아오셨다. 

그분은 자리에 앉으시마자 대뜸 내게 물으셨다.

“방언 기도하세요?”

“아니오.”

“방언은사를 받고도 사용하지 않으면 잊어버려요. 

찬찬히 생각해보세요. 

혹시 방언은사를 받은 적이 없는지….”

과거를 회상하니 군복무중 방언기도 비슷한 것을 했던 기억이 났다. 

당시 부흥회에 갔다가 엉겁결에 안수기도를 받았다. 

그때 내 입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상한 소리가 났었다.

“그런데 그 뒤로는 한번도 해보지 않았는데요. 어쪄죠?”

“그러면 됐어요. 

성령님은 한번 찾아오시면 절대 떠나지 않으시니까요.”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혀가 나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어떤 힘에 이끌려 혓바닥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모르는 말들이 튀어나왔다. 

방언이 터진 것이다. 

‘오 주님, 제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기도입니까?’

눈물 콧물을 쏟으며 기도를 드리는데, 

그 집사님은 나의 방언기도를 통역해주었다. 

내가 이제까지 살아왔던 날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동안 내 짤막한 기도가 

하나도 땅에 떨어지 않았다는 놀라운 사실도 알게 됐다.

 

방언은사를 받은 뒤 

이천수 목사님의 ‘예수 공학’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내 삶은 진짜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정리=함태경기자 zhuanjia@kmib.co.kr
 

 

 

 

[역경의 열매―문봉주⑿] 추방위기 유학생위한 기도에 응답


 모든 의지를 내려놓고 주님께 모두 맡기는 영성신학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성령충만한 삶을 살게 됐다.

 

성령의 역사란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임재’다.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서 말을 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오지만, 

음담패설을 하면 사탄의 영이 우리 안에 자리잡게 된다. 

방언기도를 한 뒤부터 말씀의 행간이 훤히 보이기 시작했다. 

지식의 말씀이 지혜의 말씀으로 바뀐 것이다. 

이때부터 내가 인도하던 성경공부는 ‘

성경의 맥을 잡아라’에서 ‘체험하는 성경의 맥’으로 바뀌었다. 

뉴질랜드를 떠나기 직전의 일이다. 

하루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예배당을 나오고 있었다. 

한 여인이 애처롭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모습이 나의 시선을 끌었다. 

그때 하나님은 저 여인을 도우라는 음성을 들려주셨다. 

하지만 어떻게 도와야 할 것인지 감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그런네 그날 한 집사님이 나를 찾아와 그녀의 속사정을 일러주었다. 

그녀의 남편은 국비장학생이었다. 

6개월 후면 박사학위를 받을 앞날이 창창한 청년이었다. 

한인교회에서 집사이자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했다. 

이들 부부는 조기유학온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을 돌봐주는 것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했다. 

남편은 하루는 논문을 써야 한다며 대표기도는 물론 주일도 지키지 않았다. 

그 시간에 그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성추행을 하게 됐다. 

그는 4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그런 남편을 용서하고 2년째 수감중인 그를 위해 기도했다. 

남편도 완전히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변화됐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문제가 생겼다. 

뉴질랜드의 새로운 이민법에 따라 시민권자가 아니면 

2년 이상 실형을 산 외국인은 모국으로 추방하도록 돼 있었다. 

수감중인 그녀의 남편은 영락없이 추방명령을 받게 됐다. 

그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던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이다.


딱한 사정을 전해 들은 뒤 이민담당 장관을 만나러 갔다. 

기도로 준비했다. 

“유능한 젊은이가 한번의 잘못으로 망가져서는 안됩니다. 

저는 이곳에 오기 전 3주동안 하나님께 기도하고 왔어요.”

“저는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문 대사님의 기도가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기적이 일어났다. 

그 청년은 뉴질랜드 사회에 헌신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추방되지 않았다. 

게다가 가족품으로 돌아갔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깊숙히 개입하신다. 

크리스천이 자신은 물론 이웃을 위해 무엇인가 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사람을 문제해결사로 사회 곳곳에 파송, 

하나님 나라의 확장자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뉴질랜드 대사에 이어 주미공사로 일할 때의 일이다. 

나는 주로 여름휴가를 이용, 미 전역을 누비면서 말씀을 전했다. 

하루는 워싱턴 근교의 어느 한인교회 목사님이 내게 메일을 주셨다. 

“우리 교회가 문제가 많아서 갈라질 지경입니다. 

한번만 오셔서 특별집회를 해주세요.”

망설였다. 

‘교회가 갈라지는 마당에 내가 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목사님께 죄송하다는 메모를 남겼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기도 중 놀라운 환상을 봤다. 

송아지 한 마리가 외양간에 누워 있는데 아주 평안해 보였다. 

갑자기 상황이 줌렌즈처럼 가까이 당겨지면서 

송아지의 표정이 아주 불편해 보였다. 

유심히 살펴보니 송아지가 깔고 있는 지푸라기가 젖어 있었다. 

하나님께 여쭤봤다. 

“주님, 이거 생명수 아닙니까?”

“주변을 잘 보아라.” 

주님이 말씀하셨다. 

주변을 잘 살펴보니 외양간 바로 옆에 재래식 화장실이 있는데 

거기서 흘러나온 오물이 외양간에 스며들고 있었다. 

외양간이 다 젖어서 무녀져내릴 지경이었다. 

환상에서 깨어났을 때 이런 깨달음이 왔다. 

‘무너져가는 성전을 고쳐 지으라는 말씀이구나.’

나는 전화를 걸어 집회를 가겠다고 말했다. 

집회를 하는 동안 성령님이 얼마나 뜨겁게 역사하시는지 

교회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 앞에 낱낱이 드러나고 

회개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목사님이 무릎 꿇고 통회자복하는 것을 보면서 

성도들이 많은 은혜를 체험했다.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우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 것이다. 
 

                                                     정리=함태경기자 zhuanjia@kmib.co.kr 

 

 

 

[역경의 열매―문봉주 (13·끝)] 이웃위해 간구하니 내게 더 큰복
                                                               2004.02.05 15:11:35


아시아지역 전문가로 불리던 내가 

워싱턴에 부임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더군다나 뉴질랜드 대사 신분에서 

공사로 나간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맞지 않았다. 

그런데 위싱턴으로 가기에 앞서 

하나님은 3개월전 이미 내게 분명하게 이같은 음성을 들려주셨다. 

“네가 뉴질랜드에서 눈물로 전했던 것처럼 

워싱턴에서도 전해야 하리라.” 

아시아통이 그 자리에 갔으니 

내 워싱턴행에 대해 외교통상부 내에서도 모두 놀랐다. 

야심있는 사람들이 무척 탐을 내던 자리였다. 

워싱턴에 부임한 뒤 

하나님이 내게 사역할 수 있도록 오래 전부터 준비하셨음을 알았다. 

전에 공관장회의 참석차 서울에 잠깐 들어왔을 때 

오랜 친구인 김승환 명지대 교수의 소개로 

워싱턴중앙장로교회 이원상 목사님을 뵌 적이 있었다. 

이 목사님은 그때 내게 

“혹시 위싱턴에 부임하실 전망은 없느냐”고 물어보셨다. 

김 교수가 이 목사님께 

‘성경의 맥을 잡아라’에 대해 자주 말씀을 드린 모양이었다. 

“그럴 가능성은 없을 겁니다.”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렇게 가능성이 없던 위싱턴에 부임하고, 

나는 바로 한달 뒤 위싱턴중앙장로교회에서 

‘성경의 맥을 잡아라’를 인도하게 됐다.

그 교회는 매우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평신도가 말씀을 전한다는 것을 처음에는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8개월에 걸쳐 주일 오후마다 성경공부를 진행하면서 

하나님은 여러 장로들을 비롯, 많은 성도의 삶을 변화시켜 주셨다. 

성도들은 방언 은사를 받았다. 

병고침의 은사도 나타났다. 

나는 말씀과 함께 늘 새벽기도를 강조했다.

 

김원기 목사님이 담임하시는 펠로십교회에서도 

성경공부를 이끌며 성도들과 하나님 안에서의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가졌다. 

지금까지도 계속 이메일로 서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있을 정도다. 

주미공사로 있을 때 

뉴욕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9·11 테러 사건이 발생하는 등 

어려운 상황이 적지 않았지만, 

워싱턴에서의 2년을 떠올리면 주님의 손길에 감격할 따름이다. 

우리집의 가정예배는 굉장하다. 

아이 셋과 우리 부부 모두 손을 잡고 방언으로 통성기도를 한다. 

아이들과 자주 떨어져 있어야 하고 

생활리듬도 달라서 자주 함께 못하지만 

가정예배를 드릴 때면 우리 가족은 하나가 된다.

“나는 아빠가 기도하는 사람이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나를 위해 기도해줘서 늘 고마워요.”  

 

어느날 아침 딸이 일어나서 매달리며 이렇게 말했다.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다. 

가정의 소중함을 느끼며 힘찬 매일을 열어갈 수 있어 기뻤다. 

이제 나의 간증을 마쳐야 할 것같다. 

우리는 보통 기도할 때 하나님이 빨리 응답해 주시기를 바란다. 

내 기도가 주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인지, 아닌지에는 관심이 없다.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대부분의 성도가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단순히 내 것을 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는 기도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이뤄질 것을 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주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기복신앙과는 명백히 구별된다. 

나보다 못한 이웃에게 하나님의 복이 흘러갈 수 있도록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이다. 

나의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이웃을 도와줄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다. 

진심으로 이웃을 위해 간구할 때 

하나님은 이웃을 도울 수 있도록 먼저 내 집안을 채워주신다.

나는 다시 한번 새벽기도를 강조하고 싶다. 

새벽기도를 1∼2년이나 했는데도 

은혜를 별로 받지 못했다고 하소연하는 분들이 많다. 

새벽기도를 하면 큰 은혜가 샘솟는 줄 알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되기란 쉽지 않다. 

단계가 필요하다. 

새벽에 하나님을 만날 때 

말할 수 없는 평강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날마다 천국을 맛볼 수 있다. 

진심으로 새벽예배를 드리면 

주님의 임재 속에 푹 빠져드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아무리 피곤해도 새벽예배 시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매일 새벽 성전에서 나를 만나주실 그 주님의 품을 그리며, 

일상의 모든 것을 뿌리친다. 

한국의 모든 크리스천들이 새벽기도의 비밀을 깨달아 

진정으로 ‘살아있는 성전’이 될 수 있으시기를 기원한다. 

                                                                                                       

 

                                                  정리=함태경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