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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춘추 2007년 2월호 인터뷰 / 작곡가 오숙자

영국신사77 2016. 12. 24. 00:42



              
커버스토리- 작곡가 오숙자
창작의 의지로 승화한 예술 혼
     <2007년 2월호>

진정한 예인의 길을 살다 간 황진이.
그를 다룬 작품이 얼마전 공중파에 방영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지난 2005년 발표된 오페라「동방의 가인 황진이」는 발표 당시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었다. 약 5년여의 작업 끝에 완성된 오페라「동방의 가인 황진이」를 탄생시킨 주인공은 바로 작곡가 오숙자 선생.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한 양수리에 옹기종기 모인 그림 같은 전원주택 중 유독 야트막한 대문이 눈에 띄었던 선생의 자택은 취재진을 맞는 그의 미소만큼이나 따스해 보였다.  

하얀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있는 거실 한켠에는 오숙자 선생의 작업의 흔적들이 즐비했다. 수북히 쌓인 악보와 가곡을 짓기 위해 준비된 시들, 미디와 전자음향 작업이 가능한 컴퓨터 기기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기자를 놀라게 하였다.

지금 시대가 만남의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미술과 음악이, 음악과 문학이, 또 음악 안에서 서로의 장르가 만나는 것을 의미하지요. 전통과 현대, 서로 다른 나라의 악기들이 어우러진 음악이 만남의 음악입니다. 현재 제가 추구하는 성향하고도 비슷해요. 주로 크로스오버적인 작품을 다루고 있는데, 이 작업은 1975년 창악회에서 발표한 「소유성 B612」에서 색소폰을 사용한 것을 시작으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물방울」이란 작품에서도 성악가의 웃음소리, 신음소리, 중얼거림 등을 사용하였고요. 어떤 분들은 이런 제 작품을 보고 대담하다라고 표현을 하시는데, 저는 단지 시대의 흐름을 따라 느낀대로 표현했을 뿐입니다.(웃음)

또한 지난 달까지 서울 지하철 7호선 역사 곳곳에 걸려 있었던 「독도, 너는 동해에 서 있구나」라는 가곡의 작곡가도 오숙자 선생이다.

KBS 신작 가곡 위촉곡으로 작곡한 작품인 「독도, 너는 동해에 서 있구나」는 제목 그대로 우리의 역사이자 산실인 독도를 담담하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섬진강」의 시인인 박원자 님께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독도의 정기를 느낄 수 있도록 의뢰를 했더니 이렇게 훌륭한 시를 써 주었습니다.

작품을 지을 때의 선생은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순수의 음악이야말로 이 시대 작곡가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바가 아닐까.

경희대 음대 작곡과 교수를 역임, 전업작곡가로 작곡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오숙자 선생은 경희대 기악과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동대학원 작곡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일본 가루이자와 국제 하기학교에서 작곡, 현대음악, 하프과를 수료한 것을 비롯해 미국 피바디 콘서바토리 전자음악과와 오스트리아 모차르테움 음악원 지휘과를 수료하였다. 동아 콩쿠르, 서울음악제 등 국내 유수 콩쿠르에 입선하며 학창시절부터 신인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다졌으며, 일본, 태국, 필리핀의 아세아작곡제전과 이탈리아 세계여성작곡제전, 뉴질랜드 태평양음악제전 등에 입선하며 세계 속의 한국 작곡가로 우뚝 섰다.

촉망받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작곡계의 대들보로
어려서부터 저에게 음악은 일종의 놀이였습니다. 명동성당에 다니면서 긴 층계를 하나씩 밟아 올라가며 계이름을 흥얼거리기도 했고, 높낮이가 다른 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음을 익혔습니다. 이런 영향은 우리 가족의 음악적인 분위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아요. 아버지가 음악 매니아셨고, 때문에 저도 구노의 「아베마리아」부터 서도민요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들었지요.

열 살이 되던 무렵, 학교에서 친구가 그린 백합화를 보고 계이름이 떠올라 흥얼거리다가 오선을긎고 악보를 그린 것이 작곡의 시작이었다고 말하는 선생은, 그 때까지도 자신이 음악에 재능이 있는지는 몰랐다고 이야기한다.

저도 엘비스프레슬리, 비치보이스, 비틀즈, 클리프리차드 같은 가수들을 좋아한 평범한 소녀였어요. 악보를 능숙하게 그리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무렵인데, 악보가 귀했기에 제가 팝송을 듣고 직접 악보에 옮겨 적었습니다. 그 땐 그게 편곡인지조차도 몰랐지요. 중학교 시절에 시작한 바이올린으로 대학에서 전공을 했지만, 음악이론과 화성학 등에 재미를 느끼고 그쪽에 더 재능이 있는 것 같아서 작곡전공으로 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편곡인지도 모르고 시작한 놀이로 인해서 제가 작곡까지 하게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을 거예요.

음악을 어렵게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이 좌절만 할 것이라 생각한 그는, 결국 음악을 자신의 친구로 만들기로 했단다. 어려운 음악형식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쉽게 이해하고, 음악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게 된 순간부터 작곡가 오숙자만의 작품이 나오게 되었다고.

서울음악제에서 입선이 되어 위촉을 받았고, 동아음악 콩쿠르에서 관현악곡이 입선을 하면서 옛날 명동 국립극장에서 신인 작곡가로 데뷔를 했습니다. 국제활동도 많이 하였는데 아시아 작곡가 페스티벌에서 작품이 입선하며 이름이 알려진 계기가 되었지요.

실제로 오숙자 선생의 작품을 접한 독일언론은 유니크하고 감성적이며, 젊은 동양인의 힘을 보여준 성공적인 작품이라고 칭송했단다.

창작의 고통을 창작의 행복으로

때로는 루머도 많았고 자신의 겉모습만 보고 수군대는 사람들이 밉기도 했지만, 오히려 고독하니 창작이 더 잘 되더라며 웃어넘기는 선생에게서는 진정한 예술인의 모습이 내비쳐졌다.  

힘들 때마다 그것을 작품으로 만드니까 더 에너지가 솟는 것 같습니다. 만 18년을 경희대 작곡과의 교수로 있으면서 이제는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어요. 창작을 위한 공간을 찾으려고 지금의 양수리까지 들어왔지요. 자연과 어우러진 조용한 이 공간이 너무나도 좋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음악적인 달란트를 주셨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 같고, 음악을 통해 진정한 나를 찾는 것 같아 행복합니다.

1973년에 가곡「바람」이 서울음악제에 위촉된 것을 시작으로 일본, 브라질, 독일, 이스라엘, 홍콩 등을 비롯하여 작년 한국 현대시조 100주년 기념 가곡제의 위촉 곡 「편지」까지 수없이 많은 작품을 위촉․ 발표한 오숙자 선생은 참으로 다양한 음악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작곡을 일정한 시간에 맞추어 하는 것은 아니고요, 잠을 잘 때까지도 온통 곡에 대한 생각만 합니다. 오페라 「원술랑」을 작곡할 때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몇 시간 동안 작곡을 하다가 식사를 하려고 입을 벌렸는데 턱에서 딱-하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그만큼 정신 없이 작곡에 몰두했던 것이죠. 또 한 번은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모티브가 떠올라 길가에 임시주차를 하고 티슈 곽에 곡을 쓰기도 했어요.

운전을 하면 곡에 대한 생각이 자주 떠올라 운전하기를 싫어한다며 유쾌하게 웃는 오숙자 선생은, 책상에 앉아 오래도록 있는 버릇 때문에 어깨에 병이 생기기도 했지만, 작곡을 할 때면 마냥 행복해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며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창작의 고통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저는 작곡을 하는 순간이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그 때만큼은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 같아요. 하지만 전 이러한 제 모습을 음악적인 노력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음악적인 생활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한국음악협회, 창악회, 아세아작곡가회 회원, 한국예술가곡진흥회 위원, 한국여성작곡가회 부회장 및 심의위원장, 동아․중앙음악 콩쿠르 심사위원을 역임한 그는 현재 사단법인 한국작곡가협회 부회장, 가곡학회 총무이사, 100인창작연합회 수석부회장, 한국찬불가협회 회장, 한국가곡연합회 부회장 및 전업작곡가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합창, 오페라, 실내악, 관현악, 협주곡 등의 많은 작곡집을 출판함은 물론 「오숙자 예술가곡집」,「오숙자 오페라 하이라이트」,「우리 시, 우리 노래」등 많은 음반도 출반한 것을 비롯해 「종합예술 오페라」,「번스타인의 음악론」,「음악에세이 고독과 이성」 등도 저술하였다. 

이처럼 오숙자 선생은 종합예술분야에서 활동을 하는, 실로 선택받은 예술인(!)이 아닐까. 하지만 그에게도 고충은 있었다. 바로 아주 단순하지만 현재까지도 약간의 잔재가 남은, 여성 작곡가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은 시대가 좋아져서 여성작곡가에 대한 편견이 별로 없지요. 하지만 제가 공부할 당시엔 작곡가뿐 아니라 여성이 학업을 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에 대한 고충이나 속앓이는 저뿐만 아니라 같은 세대의 여성 지식인이라면 공감하실 거예요.

여성이라서 아기자기하고 서정적인 음악만을 할 것이라는 편견이 팽배했었다고 말하는 선생은, 보란 듯이 오페라 「원술랑」을 세상에 내 놓아 스펙타클한 대서사시의 진수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원술랑」은 참 애착이 많이 가는 작품입니다. 1986년 아시안게임, 1993 대전엑스포 때 기념공연을 가졌고 거제도, 서울 순회공연, 2002년 월드컵 기념공연도 가졌던 작품입니다. 긴 시간 동안 다수의 공연을 거치며 〈사랑하는 아들아〉라는 부제도 붙였고, 마지막 장도 새로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제목처럼 김유신 장군과 아들 원술의 이야기인데요, 부자간의 사랑과 정을 포커스로 다루었습니다. 또한 최근 발표한 오페라 「동방의 가인 황진이」도 제주도에서 많은 전문가 분들을 모시고 연주하였는데, 호평을 받아 기뻤습니다.

이 외에 그는 무속신앙을 현대 음악으로 재해석한 「무악」은 이탈리아 세계여성음악제에서 입선을, 관현악곡 「덧뵈기」는 호주 현대음악제에 위촉이 되었다고 전한다.

영원히 음악과 함께인 삶
제자 중에 재즈 작곡가, 순수음악 작곡가 등이 있는데요, 모두들 전통을 성실히 지켜 나갔으면 합니다. 전통과 역사를 거스르는 음악은 음악으로서의 가치가 없지요. 현대음악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무시하지 않고 미술이나 문학 등 다른 예술과의 관계성을 잘 생각했으면 합니다.

음악만으로 모든 이에게 완벽한 감동을 줄 수는 없지만, 작곡가 자신의 노력과 의지에 따라 최대한의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선생은 제자들에게 해주는 말이 곧 스스로의 의지를 다지는 것이라며 더욱 정진할 것을 다짐한다.

앞으로도 장르를 불문하고 학구적이고 아카데믹한 작품을 많이 쓸 예정입니다. 가곡도 들으면 들을수록 맛이 나는 작품을 쓰려고 해요. 금년에는 KBS 드라마 〈황진이〉의 영향인지 저의 오페라 「동방의 가인 황진이」가 재공연 요청을 받았습니다. 계속 위촉의뢰가 들어오는데요, 그에 맞추어 더욱 좋은 작품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작곡을 해 왔던 제 스스로의 역사가 부끄럽지 않도록 해야지요.

예술의 혼을 담아 음악을 친구로 삼고, 유유히 작업하는 그의 모습은 그 옛날 무릉도원에서의 신선이 따로 없어 보였다. 일상을 음악으로 하는 오숙자 선생의 다음 일상을 조심스레 기대해 보는 바이다. ■  

글․최은아 / 사진․김석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