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 성지순례/이스라엘[종합]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19) - (25·끝)

영국신사77 2016. 4. 13. 23:16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19)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 떠나 예루살렘 들어가실 때 나귀 새끼 타신 까닭은?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입력 2014-09-19 04:21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성전 파괴와 사람들의 비참한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눈물을 

                              흘린 자리에 세워진 ‘눈물 교회’(눅19:41-44). AD 5세기쯤에 비잔틴 교회가 처음 세워졌으며 당시의 

                              바닥 모자이크를 현재도 볼 수 있다. 1518년 교회가 파괴되고 이슬람 사원이 지어졌으며 

                             1881년 수도원과 교회를 봉헌했다.


감람산에서 바라본 예루살렘 성 안의 모습.


                                                           예수께서 타실 나귀를 제공한 벳바게 마을의 모습.


예수와 그 제자들의 일행이 여리고에서 일찍 떠났다면 저녁 늦게 베다니 마을에 도착했을 것이다.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베다니에서는 부지런히 환영 만찬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환영 만찬이라면 당연히 평소에 그들이 유숙했던 곳,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집이어야 했다. 그러나 마가는 뜻밖의 장소를 기록해 놓아서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막 14:3∼4) 어째서 나사로의 집이 아닌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환영 만찬이 열렸는지 성경은 설명하고 있지 않다.

갈릴리 출신인 예수의 열두 제자들이 아직도 나사로를 경계하고 있었던 것인지,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예수를 대접하고 싶다고 간청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더 이상한 것은 베드로가 불러 주었을 마가복음이 이 만찬 시기를 분명치 않게 기록한 것이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막 14:1∼2)

그리고 이 기사 다음에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열린 만찬의 기사가 어물쩍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성품이 치밀한 마태까지도 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마 26:2) 기사 다음에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마 26:6)가 나오고 있다. 누가는 아예 이 기사를 빼버렸다. 그러나 후일에 요한이 이것을 바로잡았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요 12:1∼3)

베드로는 마가에게 예수의 행적을 불러 줄 때 나사로의 이야기를 송두리째 빼버렸다. 그리고 베다니의 환영 잔치가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열리게 된 것에도 석연치 않은 사연이 있어 빼 놓으려 했다. 그러나 ‘향유’ 사건은 예수의 ‘장례를 준비’(막 14:8)한 것이었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그 일도 ‘기억하리라’(마 14:9)고 하셨으므로 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적당히 넣어 놓았는데, 마태 역시 베드로의 의중을 짐작하고 그에 따른 것이다. 어쨌든 잔치는 예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신 ‘유월절 엿새 전’에 열렸고, 다음 날 그분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막 11:1∼2)

마태는 스가랴서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적었다. 스가랴는 BC 520년쯤에 활동한 선지자였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아담의 아들 가인은 권위에 대한 집착과 아우에 대한 시기 때문에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다. 그 후로 사람들 사이에는 집단적 싸움이 상습화되었고, 그것은 결국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들의 탐욕 때문에 전쟁을 벌여도, 하나님은 그분의 섭리 안에서 전쟁의 승패를 정하신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전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부르기도 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사 14:24) 

그리고 때로는 나라들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기도 한다.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사 10:5) 

그러나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평강이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6)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은 칼과 창으로 제압하는 왕이 아니라 ‘평강의 왕(사 9:6)’으로 오신다. 권세와 폭력으로 위협하고 압제하는 장자가 아니라 형제들에게 섬김의 본을 보이는 맏아들로 오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군대의 장수는 말을 타지만 평강의 왕은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고, 그것도 겸손하여서 나귀의 새끼를 타고 오신다. 나사로를 살린 예수의 도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귀 주인은 나귀를 가져가는 것에 기꺼이 동의했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막 11:7∼9)

환영 인파는 점점 많아졌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눅 19:37∼38)

그 함성들이 예수께는 이미 모든 것을 다 결정하고 비장하고 결연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아들을 맞아 주시는 아버지의 음성으로 들렸을 것이다. 무리들 중에 있던 바리새인들이 민망하여 예수께 말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눅 19:39)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

예수께서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그분의 모친과 동생들은 일행 중에 없었다. 초막절 이후 갈릴리에 있던 가족들은 그분이 큰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유월절 절기도 지킬 겸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환영 인파 속에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자 성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셨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2)

그의 눈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아리엘’이 되는 ‘예루살렘’에 장차 닥칠 일들이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눅 19:43∼44)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20) 너희에게 본을 보였노라


떡과 포도주 주시고 제자들 발 씻으시고 ‘내가 한 일을 너희도…’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입력 2014-09-26 04:13


                         시온산 남동쪽 키드론 계곡에 있는 베드로 통곡교회 내부. 교회가 세워진 장소는 예수 그리스도를 

                        심문한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터로 추정되며, 교회 지하 동굴은 예수 그리스도가 잡힌 후 갇힌 감옥으로 여겨지고 있다.


                                                                         제자의 발을 씻기는 예수의 모습


                         마지막 유월절 만찬이 있었던 마가의 집 다락방. 이스라엘 다락방은 헬라어로 '휘페리온'인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지붕 아래 자투리 공간의 작은 방이 아니라 지붕 아래 방을 뜻하며 흔히 응접실로 쓰인다. 

                         120명이 성령세례를 받은 이곳은 300명도 앉을 수 있는 널찍한 공간이다. 이곳은 이슬람 사원으로도 

                         사용된 적이 있고, 유대인들의 성지이기도 하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를 열광적으로 환영한 것은 그가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요 12:17∼18) 

그래서 그를 죽이려는 자들의 모의는 더 급해지고 있었다.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요 12:10∼11)

그때 헬라인 몇이 예수를 찾아왔다(요 12:20). 유대인들 중에는 그가 박해를 피해 헬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요 7:35). 헬라인들이 그를 찾아온 것도 현인을 존중하는 헬라로 가자고 온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사양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그날부터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은 성경에서 사라진다. 예수께서 헬라인들에게 그들의 피신을 부탁했을 수도 있다. 전승에 의하면 나사로 일가는 헬라를 거쳐 루그두눔, 즉 프랑스의 ‘리용’ 쪽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잡기 위해 ‘고발자’를 찾고 있었는데 거기 걸려든 자가 가룟 유다였다.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눅 22:4)

그는 평소에 ‘돈의 분배’로 인간의 평등을 쟁취해야 한다는 이념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에게서 그것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요 12:5)

사회학자 루소(1712∼1778)는 불평등의 기원에 대해서 특이한 견해를 피력했다.

“죽음과 그 공포에 대한 인식은 인간이 동물과 차별화되면서 얻은 최초의 지식이었다.”(인간불평등기원론) 

인간은 본래 평등하게 태어났으나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문명을 발전시켰고 그 과정에서 불평등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적으로 보면 선악과를 먹고 ‘죽게’ 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경쟁을 시작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평등’은 투쟁이 아니라 죄에 대한 ‘심판’으로 회복된다.

“보라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폐하게 하시며 지면을 뒤집어엎으시고 그 주민을 흩으시리니 백성과 제사장이 같을 것이며 종과 상전이 같을 것이며 여종과 여주인이 같을 것이며 사는 자와 파는 자가 같을 것이며 빌려 주는 자와 빌리는 자가 같을 것이며 이자를 받는 자와 이자를 내는 자가 같을 것이라.”(사 24:1∼2)

하나님은 죄에 대한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다.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2)

그 아들은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말씀’이었다(요 1:14). ‘말씀’은 곧 심판의 기준이 되기도 하지만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된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래서 아들이 온 것은 심판이 아닌 ‘구원’을 위해서였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 12:47)

그것을 위해 세상에 와서 사람의 질고를 겪고,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까지 맞으려는 ‘아들’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가 마가의 집 다락방에서 진행된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마 26:26)

그것은 이미 벳새다의 빈 들에서부터 시작된 예표의 성취였다. 

“또 잔을 가지사 감사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7∼28) 

이것 역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응답에 대한 감사였다. 자신의 피를 흘림으로 아버지로부터 심판의 권세를 받은 그의 포도주는 요나답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지시를 거부했던 레갑 사람들의 죄를 아들의 권세로 용서해 주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 땅의 진정한 나실인이었던 그가 또 말씀했다.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마 26:29)

그것은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될 것임을 다짐한 것이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사 25:6∼7)

그 연회는 사망을 멸하신 것에 대한 축하연이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매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사 25:8)

예수께서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요 13:4∼5)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그렇게 하면 내가 한 일을 너희도 할 수 있고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며 본을 보여 가르쳐 준 것이었다(요 14:12). 그러나 그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 13:21)

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막 14:21)

제자들이 모두 그가 누구냐며 수군거리고 있을 때 그분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던 요한이 그분께 물었다.

“주여 누구니이까.”(요 13:25)

그러자 그분은 내가 떡 한 조각을 초에 적셔서 주는 자가 그라고 하시며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유다에게 주셨다. 인간의 평등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결국 돈으로 자신의 인생을 허물었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그가 그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마 26:15∼16) 

예수께서 유다를 바라보며 딱하다는 듯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요 13:27) 

유다는 그분이 준 떡 조각을 받고 자리를 떠났다. 어두운 밤이었다.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21)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 마지막 만찬 때… 감람산서 처절하게 기도 아버지의 선하심 신뢰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입력 2014-10-03 04:11




                          예루살렘에서 감람산으로 건너가는 기드론 계곡. 기드론 골짜기라고도 불리며 예루살렘시와 감람산(올리브산)을 

                          사이에 두고 있다. 우기에는 물이 북쪽지역에서 남쪽 지역으로 흐르는데, 이 물은 예루살렘성 서남쪽으로 뻗은 

                         힌놈의 골짜기와 만나 사해까지 32㎞나 이어진다.


                         ‘겟세마네’의 오래된 감람나무. 감람나무는 영어로 올리브 트리(olive tree)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사람을 

                         상징한다(슥4:14). 사사기에 감람나무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한다”고 말하고, 

                         그 영화는 왕의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고 했다(삿9:9).


                         예수님께서 피가 땀방울처럼 흘러내리도록 십자가의 괴로움으로 고뇌하시며 기도하셨던 곳에 세워진 

                         겟세마네 기념교회 전경. 교회의 좌측 바위에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순종'을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간 예수께서는 아직도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고 믿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계속하셨다.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기 위해 쏟아낸 질문들에 대한 답변도 실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마 21:23)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관심은 ‘말씀’이 아니라 ‘권위’였다. 그것은 ‘가인’이 하나님의 권위를 자신의 권위로 착각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고 대답했다.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마 21:31) 

율법의 권위자라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이 율법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분은 율법서의 말씀(신 6:5, 레 19:18)으로 대답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달란트’와 ‘므나’에 관한 것이었다. 이는 바로 사람 가운데 감추어 놓은 ‘천국의 비밀’이었다(마 13:44). 주인이 맡겨 놓은 ‘달란트(마 25:15)’ 즉 재능과 ‘므나(눅 19:13)’ 즉 기회를 버려두고 일하지 않은 자는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고(마 25:30)’ ‘죽이라(눅 19:27)’고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도 아들의 당부는 계속된다. 

“서로 사랑하라.”(요 13:34)

그것이 바로 예수의 제자라는 증표라고 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요 15:5)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을 주셨다(사 5:1). 사람의 잘못으로 황무지가 된 포도원을 되살리기 위해 아들은 아버지의 참포도나무로 오셨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그 열매가 제자의 신분증이 되고 하나님은 그 포도원을 가꾸시게 된다.

“그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지어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이를 해치지 못하게 하리로다.”(사 27:2∼3) 

그 아름다운 꿈을 간직한 채 예수께서는 일어나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향하신다. 그러나 아직도 그분은 제자들의 장래에 마음을 쓰실 수밖에 없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마 26:31)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진다(슥 13:7)는 스가랴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신 말씀이었다. 베드로가 나서며 절대로 그런 일 없을 것이라고 하자 그분은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며 그에게 당부하셨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

예수께서는 기드론 계곡을 지나 감람산의 ‘겟세마네(기름틀)’라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을 거기 남겨 두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기도할 장소를 찾아 나섰다. 그러다 갑자기 예수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신다. 

“베드로와 세배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마 26:37∼38)

갑자기 무엇을 ‘고민’하신 것일까? 이미 광야의 시험, 가나의 포도주에서 시작해 일관된 응답으로 ‘순종의 길’을 걸어오신 그였다. 또 제자들에게 세 번씩이나 자신이 당할 고난과 제삼일에 살아날 것을 예고하며 속건제물로 드려질 것을 다짐해 온 분이니 ‘죽음’이 두려워서는 아닐 것이다. 마가복음의 기록도 거의 비슷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막 14:33) 

마가는 이 대목에서 ‘심히 놀라시며’라는 표현을 썼다. 예수께서는 무엇에 놀라셨고, 왜 슬퍼하신 것일까? 이에 관해 여러 가지 신학적 연구들이 있으나 어느 것도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중 필자는 ‘레위기’를 읽다가 깜짝 놀랐다.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제물로 삼기 위하여 숫염소 두 마리와 번제물로 삼기 위하여 숫양 한 마리를 가져갈지니라.”(레 16:5)

그런데 문제는 그 숫염소 두 마리였다.

“또 그 두 염소를 가지고 회막문 여호와 앞에 두고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레 16:7∼10)

‘여호와’에 대칭되는 이름으로 나온 ‘아사셀’을 대부분의 학자들은 악령의 우두머리 또는 마귀라고 본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 대신 드리라고 준비해 주신 숫양처럼 자신을 번제물로 여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속죄제의 숫염소를 생각하고 놀란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것은 좋으나 광야로 보내진다는 것은 ‘버림’을 받는다는 뜻이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수 1:5∼6) 

그것은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기 전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말씀이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은 건넌 그리스도의 예표적 인물이었고, 예수께서도 그 말씀에 힘을 얻어 강하고 담대하게 ‘순종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그런데 그가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속죄제물이 된다면 그 일로 인해 광야에 버림을 받을 수도 있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

부르짖는 다윗의 비통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다른 아픔은 다 감내하더라도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오직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의 길을 택하고 걸어왔는데, 그런 후에 버림을 받는다면 그것은 안될 일이었다. 심히 놀라고 슬퍼하사 비통하게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 14:36)

그의 부르짖음은 기름틀에서 기름을 짜내는 듯 처절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결국 아들의 간절한 기도는 아버지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쪽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b)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22)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 끝내 십자가 짊어지고…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입력 2014-10-10 02:22




                  예수께서 사형 언도를 받고 채찍을 맞으신 곳에 세워진 채찍교회. 주님은 브라이도리온(마가 15:16)

                  이라 불리는 관정으로 끌려들어가 총독의 군병들에 의해 옷 벗김과 홍포입힘을 당하시고 가시면류관을 

                  쓰셨다. 또 군병들에게 온갖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다.


                  가야바의 집 자리에 세워진 베드로 통곡교회(the Church of St. Peter in Gallicantu). 

                 ‘갈리칸투’는 라틴어로 ‘닭이 운다’라는 뜻이다. 이곳에는 비잔틴과 십자군 시대의 교회 유적이 

                  있으며 현재 교회는 15세기께에 세워진 것이다.


                              십자가를 진 예수께서 마리아를 만난 비아 돌로로사 제4지점.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가신 거리가 800m인데 

                              이를 14개 지점으로 구분해 놓았다.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오가는 기도와 응답의 과정을 보면 매우 신중하고 치밀한 것에 놀라게 된다. 아들의 기도와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여러 번 반복 응답해 주셨고, 아들도 확인과 다짐을 반복해 가며 그 교감 사이에 지나침이나 빠뜨림이 없도록 애썼다. 특히 ‘겟세마네’에서의 기도에서 아들은 같은 내용으로 기도를 세 번 반복했다.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마 26:44)

그런 후에야 아들은 잠들어 있는 제자들에게로 가셨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 26:46)

칼과 몽치를 가진 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보낸 성전 경비대 병사들이었고, 그들을 안내한 자는 가룟 유다였다. 그는 병사들과 약속한 대로 누가 예수인지 지목해 주려고 나섰다.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이미 그에게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라 그냥 랍비일 뿐이었다. 그가 병사들과 짠 군호대로 선생에게 ‘배반의 키스’를 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병사들이 달려들어 예수를 잡을 때 베드로가 칼을 빼 한 병사의 귀를 베었다.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 26:52∼54) 

그리고 병사들을 둘러보며 말씀하셨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왔느냐.”(마 26:55)

그는 세상에 온 하나님의 ‘말씀’이고 곧 ‘진리’였다.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할 때 도마가 어디로 가시느냐고 묻자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성전 경비대는 ‘진리’를 체포하기 위해 칼과 몽치를 가지고 온 것이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종교가 칼과 몽치로 진리를 체포했고, 수많은 권력들이 진리를 침 뱉고 조롱하고 때렸으며, 군중이 진리를 죽이라고 외치면 왕들은 진리의 처형을 명령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체포되자 제자들은 다 도망쳤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마 26:56)

그러나 그분이 끌려갈 때 가야바의 집까지 뒤따라간 제자가 셋 있었다. 그 하나는 예수가 궁지에 몰려 투사로 변신하는지 보고 싶었던 가룟 유다였고, 또 하나는 혹시 그분이 왕권을 선포하려는가 기대한 요한이고, 다른 하나는 그래도 그분을 지키고 싶었던 베드로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깥 뜰 모닥불 앞에서 신분이 노출될 것을 꺼려 그를 모른다고 부인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5)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공회가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걸어 죽이기로 결의하고 빌라도 총독에게 보내자 가룟 유다도 그곳을 떠났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 27:5)

그러나 요한은 혹시나 하는 기대로 집요하게 사태의 추이를 주목하고 있었다. 공회와 군중이 예수를 끌고 와서 그가 자칭 왕이라고 하였다 하나 빌라도 총독은 죄가 없는 그를 처벌하는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눅 23:4)

그는 예수가 갈릴리 출신이라 하므로 이는 갈릴리 분봉왕의 관할이라 하여 마침 예루살렘에 와 있던 헤롯 안디바에게 보냈다. 그러나 헤롯 안디바는 그가 아무 이적도 행하지 않으므로 다시 빌라도에게 보낸다. 빌라도 총독이 다시 예수께 네가 왕이냐고 묻자 그분이 대답했다.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요 18:37) 

그러자 총독이 어렵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

빌라도 총독은 그를 처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를 놓아 주면 황제의 충신이 아니라고 위협하자 어쩔 수 없이 처형을 명령한다. 빌라도 총독은 물을 가져오라 하여 손을 씻으며 말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7:24) 

그러자 군중이 다 소리치며 대답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 27:25)

처형 판결이 내려지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관정 안으로 끌고 가서 옷을 벗기고 채찍질을 한 후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게 하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희롱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마침내 예수는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인 ‘골고다(해골의 곳)’ 언덕으로 향한다.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마 27:31) 

이때 ‘사람의 아들’로 오신 그분의 나이는 서른세 살쯤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서른세 살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라고 말한다.

영국의 프렌즈 리유나이티드 사이트가 40세 이상 성인을 대상으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언제였느냐고 물었다. 그 결과 응답자의 70%가 서른세 살 무렵이 가장 행복했다고 대답했다(타임지 2012년 3월 29일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은 이 십자가의 행렬과 언제쯤 만났을까. 로마 교회는 그분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비아 돌로로사(슬픔의 길)’에 14처의 뜻 깊은 장소를 정해 놓았는데 그 첫 번째가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던 곳, 두 번째는 채찍에 맞던 곳이며, 세 번째가 처음 넘어지신 곳, 그리고 네 번째는 십자가를 진 예수께서 그 모친 ‘마리아를 만난 곳’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모친과 동생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은 잡히신 예수께서 끌려 다니며 재판을 받으시는 도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도 동생들은 피신해야 했고, 모친만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아들을 보려고 달려 나왔을 것이다. 그분이 계속 힘들어하므로 로마 병사는 한 사람을 불러 그를 돕게 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막 15:21) 

그리고 ‘제8처’에서 예수께서는 자신 때문에 큰 무리의 여자들이 울며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23)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다 이루었다”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입력 2014-10-17 02:15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골고다는 예루살렘 성벽 밖에 있는 해골 모양의 언덕이다. 

              골고다는 사복음서 모두에 나오며 예수가 묻힌 묘지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빌라도 총독이 예수는 죄가 없다고 말한 법정은 현재 비아 돌로로사 제1지점이다. 

             ‘십자가의 길’ ‘고통의 길’ ‘슬픔의 길’이란 뜻이다. 예수가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다음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걸어가신 길로 14지점까지 있다.


              예수와 두 행악자의 십자가를 세웠던 장소에 세워진 성묘교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이한 뒤 안장된 묘지에 세워진 교회다. 

              구 예루살렘 북서쪽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사람을 나무에 매달아 놓고 채찍질하며 고문하는 방법은 고대부터 널리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고문 도구는 점차 흉악범을 공개 처형하는 형틀로 채용되기 시작했고, 가나안 지역에서도 그 방식이 적용되었다.

“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 21:22∼23)

페르샤에서도 반역자는 나무에 달아 처형했다.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에 7:10)

이 처형목은 점차 십자가 형태로 되었고 알렉산더 대왕이 도입한 십자가 처형은 카르타고의 페니키아인들을 통해 로마에도 들어갔다. 로마인들은 주로 속주 출신의 반역자, 도적들을 십자가에 달았다. BC 71년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반란’을 진압한 로마는 6,000명의 노예를 십자가에 달아 아피아 가도에 세웠고, AD 6년 갈릴리의 세포리스에서도 그것이 재현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처형자의 수는 2,000명에 달했다.”(‘유대고대사’ 17-10-10)

세포리스 성 밖의 가도에서 십자가에 달린 자들은 ‘갈릴리의 유다’ 반란에 가담한 열심당원들이었다. 그리고 AD 30년 한 사람이 십자가에 달렸다.

“예수라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었다. 빌라도 총독이 유대 유력 인사들의 요구에 따라 그를 십자가에 달아서 죽게 했으나 그를 따르던 자들은 후에도 그를 버리지 않았다.”(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8-3-3)

그러나 그는 죄가 없는 사람이었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빌라도 총독도 그것을 인정했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눅 23:4)

그 예수를 로마군은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요 19:17∼18)

그것은 오전 아홉시였다.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막 15:25)

그의 시선은 계속 ‘아버지’를 향하고 있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군인들은 그에게서 벗겨낸 옷을 나누고 있었다.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통으로 짠 것이라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제비뽑아 나누자 하니.”(요 19:23-24)

그렇게 해서 다윗의 절규는 예언이 된 것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시 22:17∼18)

구경하고 있던 자들이 예수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들도 그를 조롱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마 27:42)

그와 함께 달린 행악자 중 하나도 역시 그를 비방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 23:39)

그러나 다른 하나는 비방하는 자를 꾸짖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 23:40∼41)

그리고 고개를 돌려 예수를 향해 간구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여인들이 멀리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막 15:40)

그리고 그 고난의 현장에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요한이 나타난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

그리고 또 요한에게 말씀하셨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7)

아들이 못 박히는 장면을 차마 보게 할 수 없어서 요한은 그 모친을 모시고 나중에 도착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모친을 부탁한 후 아버지의 음성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외면하고 계셨다.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마 27:45)

제구시 즉 오후 세시에 갑자기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라고 부르짖었던 다윗의 절규였다. 아들의 고통을 더 볼 수 없어 얼굴을 돌리신 아버지는 사람의 고통과 절망을 홀로 감당하기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보낸 아들에게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주실 수도 없었다.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하심으로 행하셨음이라.”(사 25:1)

아버지의 성실함과 진실함 때문에 아들은 절망으로 헐떡거렸다.

“내가 목마르다.”(요 19:28)

사람들이 신포도주에 적신 해면을 대주자 아들은 이제 끝이 온 것을 알았다.

“다 이루었다.”(요 19:30) 

그리고 큰 소리로 다시 ‘아버지’를 향해 외쳤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아들은 그 한마디까지도 다윗의 기도를 인용했다.(시 31:5) 끝까지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만을 말하는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룬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 23:46)

그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로마군의 백부장이 그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 23:47)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24)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부활하신 예수님 베드로 치유해 주시고 “너는 나를 따르라”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입력 2014-10-24 02:34

예수의 시체를 안치했던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자신의 부모 형제같이 주님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했다.

두 제자가 부활한 예수를 만났던 ‘엠마오 가는 길’에 있는 당시 집터. 제자들은 황망하여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고향 집에 도착해서야 따라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디베랴 바닷가에 세워진 베드로수위권교회.


                           예수의 시체를 안치했던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자신의 

                           부모 형제같이 주님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했다.


                         두 제자가 부활한 예수를 만났던 ‘엠마오 가는 길’에 있는 당시 집터. 제자들은 황망하여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고향 집에 도착해서야 따라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디베랴 바닷가에 세워진 베드로수위권교회.


십자가에서 죄수를 더욱 잔인하게 죽이는 방법은 세로대에 발디딤대를 설치하는 것이다. 디딤대가 없으면 쇄골이 죄수의 목을 조여 질식사하게 되나 디딤대가 있으면 죄수가 다리에 힘을 주어 버티므로 죽기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다. 처형을 속히 끝내려면 죄수의 정강이를 쳐서 부러뜨리면 된다. 

“이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달라 하니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요 19:31∼32) 그러나 예수는 이미 숨져 있었다.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3∼34)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날은 유월절(逾越節)이었다. BC 1446년의 첫 유월절에 하나님은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명령했다(출 12:7). 하나님이 애굽의 장자들을 칠 때 피를 바른 집은 넘어가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 양의 고기를 구워 먹으라고 한다.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 주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민 9:12)

또 선지자 ‘스가랴’는 외아들, 맏아들이 찔림 당할 것을 예언했다.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슥 12:10)

날이 저물자 산헤드린의 의원 하나가 빌라도 총독을 찾아갔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막 15:43) 

그는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예수의 시체를 새 무덤에 넣었다.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마 27:59∼60)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사람의 무덤 속에 들어가 있는 동안 ‘안식일’이 지났다. 그분의 시체가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들어가는 과정을 끝까지 지켜본 막달라 마리아 등 여인들이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무덤을 찾아간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마 28:2∼3) 

그 천사가 여인들에게 말했다.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마 28:7) 

여자들은 제자들이 숨어 있던 곳으로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베드로와 요한이 벌떡 일어나 무덤을 향해 달렸고, 무덤의 위치를 아는 요한이 앞서 달렸으나 막상 무덤에 이르러서는 베드로가 먼저 뛰어 들어가서(요 20:4∼6)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수건을 발견했다. 그들이 돌아간 후 무덤 밖에서 혼자 울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그분을 맨 처음 만난다.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요 20:14) 

부활한 후에는 어떤 모습일까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것으로 보아 부활 후의 모습은 세상에 있을 때와 다른 것이 분명하다. 그분이 알려 주시고, 영적인 눈이 밝아져야 비로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도 그러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 하니(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요 20:16)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순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처음이고 다음은 무덤에 갔던 그 밖의 여인들이었다.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마 28:9∼10)

그리고 그 다음이 베드로였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눅 24:34)

그러나 마가의 기록에는 이 기사가 빠져 있다. 무슨 까닭인지 베드로는 마가에게 이것을 말해주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세 번이나 그분을 부인한 베드로가 당황하며 두려워하여 제대로 대화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날, 엠마오로 간다고 내려갔던 두 명이 돌아와서 그들도 예수를 만났다고 전한다.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 24:15∼16)

그들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하다가 예수께서 모세와 선지자들이 적어 놓는 예표들에 대해 설명해 주고 함께 식사할 때 떡을 떼어 주시자 그제야 눈이 밝아져 그분을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 즉 안식 후 첫날 저녁,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숨어 있던 장소에 다시 나타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그리고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가 그 손의 못 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만져 보아야 믿겠다고 하므로 다시 여드레 후에 그분이 오셔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돼라.”(요 20:27) 

그 후 베드로, 안드레 형제와 요한, 야고보 형제 그리고 빌립과 나다나엘, 도마 등 일곱 제자가 ‘갈릴리로 가라’는 그분의 말씀대로 갈릴리로 갔으나 그분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베드로를 따라 고기를 잡으러 밤새 호수에 나갔다가 새벽에 돌아올 때에 호숫가에서 그분의 음성이 들려온 것이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요 21: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했던 그 장면이 재현된 것이다. 

“주님이시라.”(요 21:7)

요한이 먼저 그렇게 말했으나 먼저 물로 뛰어든 것은 베드로였다. 예수께서는 호숫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계셨다.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새벽의 모닥불’을 준비해 놓고 그분이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와의 대화가 시작된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베드로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그분은 같은 질문을 세 번 하시고, 베드로는 세 번 대답한다. 그렇게 해서 그분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고 괴로워하던 베드로의 아픔을 이번에는 ‘사랑한다’고 세 번 대답하게 하심으로 치유해준 것이다. 그리고 다시 처음처럼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따르라.”(요 21:19)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25·끝)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구원을 베푸사 전 세계 모든 땅이 ‘성취의 땅’으로

입력 2014-10-31 02:51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다시 만난 갈릴리의 산(마 28:16).


                         감람산 정상에 있는 예수 승천교회. 교회 안에는 예수님이 마지막 남기셨다고 전해지는 발자국이 남아 있다. 

                         처음 건립했을 때는 교회 지붕이 없었지만 무슬림들이 승천을 부인하기 위해 다시 지붕을 씌웠다고 전해진다.


                         마지막 전쟁 ‘아마겟돈’의 어원이 된 ‘므깃도’. 이스라엘의 가장 비옥한 이즈르엘 평야에 있는 므깃도는 

                         교통요지로 가나안 땅 중에서 전투가 가장 많이 벌어졌던 장소다. 솔로몬왕은 이곳을 행정 중심지로 

                         만들었으나 923년경 애굽의 시삭(Sisak)은 므깃도를 파괴했고 아합왕 때 재건됐다. 므깃도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당시의 발전된 공업 기술을 볼 수 있는 우수한 수로 장치다.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사람을 창조하셨다.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떠나 죽어야 하는 존재가 되었으나 하나님의 생각은 멈추심이 없다.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사 14:24)

하나님은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그 뜻을 이루어 가신다.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 25:1)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사 25:8)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한 그분의 '말씀'을 사람의 아들로 세상에 보내셨다.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 아들도 아버지처럼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그 뜻을 이루셨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해서 버린 아들은 다시 살아났다. 바울은 부활하신 그분과 만난 사람들에 대해서 순서대로 기록해 놓았다.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고전 15:4∼6)

‘열두 제자’는 가룟 유다 대신 새로 뽑은 맛디아(행 1:26)를 포함한 수다.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고전 15:7)

예수께서 동생 야고보를 만나기 전에 오백여 형제가 일시에 만났다는 장소에 대해서는 두 가지 추정이 있다. 그 하나는 제자들이 ‘갈릴리’에 모였을 때이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마 28:16∼17) 

그러나 여기서는 ‘열한 제자’로 수가 한정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사십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신 후(행 1:3) 감람산에서 승천하셨는데 그때에 오백여 형제가 모였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행 1:6)

수를 밝히지 않고 ‘그들’이라 한 것은 모인 자가 많았다는 뜻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8∼20)

그리고 성령이 임하실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하셨다.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

‘그들’이 다시 예수께 질문을 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6∼8)

그 말씀도 역시 이사야가 미리 준비해 둔 것이었다.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을 떠나 승천하실 때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말했다.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

그분의 승천을 목격한 ‘그들’이 오백여 형제였다면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다고 바울이 기록한 것은 승천하신 날과 오순절 사이였을 것이다. ‘오순절’은 이스라엘 절기 중의 ‘칠칠절’ 즉 첫 열매를 드린 날로부터 일곱 안식일을 채우고 그 이튿날인 제 오십일, 새 소제를 드리는 날(레 23:15∼16)이었다. 예수께서는 부활의 ‘첫 열매’(고전 15:20)가 되신 후 사십일간 땅에 계셨고, 승천 후 ‘오순절’까지 열흘 동안 120명이 마가의 집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힘썼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행 1:12∼13)

그리고 거기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도 함께 있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 1:14)

그렇다면 예수께서 동생 야고보를 만나신 것은 승천 이후가 된다. 승천 이후에도 예수께서는 땅에 있는 야보고를 만나시고, 사도들도 만나시고, 또 바울도 만나신 것이다. 특히 ‘열심당’적 기질이 강했던 야고보는 부활하신 그분을 만나 비로소 믿게 되고, 제자들과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에 힘쓰다가 성령를 받았다. 

“오순절날이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어부 또는 농부였던 자, 세리였던 자와 조선 기술자, 열심당원이었던 자와 그의 친구, 남자와 여자, 예수를 따르던 모든 사람과 그의 모친, 동생들에게도 성령이 임했다. 그들이 나아가 전한 것은 오직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이었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 3:15)

예표의 땅 이스라엘은 예수께서 오심으로 성취의 땅이 되었다. 그분이 약속한 대로 다시 오실 때까지 이제 전 세계의 모든 땅은 ‘성취의 땅’이 될 것이다.

“땅 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도다.”(사 24:16)

그러나 ‘말씀’을 대적한 행악자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계 19:13∼16) 

그리고 마침내 전쟁도 사망도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된다.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사 25:7∼8)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