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 성지순례/이스라엘[종합]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6) - (10)

영국신사77 2016. 4. 13. 23:13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6)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교회 세우고 병자 고치고 예수님, 말씀으로 성취

입력 2014-06-20 02:18



                              예수님의 제2 고향으로 불리며 이스라엘 갈릴리 호수 북쪽 끝에 있는 가버나움의 회당. 이곳에서 

                              예수께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다. 예수님 시대 당시 이곳을 중심으로 교역과 상업이 번창했다. 

                              위쪽 문이 당시 세관 입구로 추정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팔복산.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터. 근처에 베드로 장모의 집터도 남아 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에서 장모를 고쳐주셨다.


‘말씀의 능력’으로 병자를 치유하는 예수의 소문은 그가 자라난 나사렛에도 전해졌다. 필자가 여러 자료를 비교하여 추정한 대로 나사렛 사람들이 기술자 집단이라면 그들은 지난날 바벨론까지 잡혀갔다가(왕하 24:16) 돌아와 BC 536년 성전을 재건한 스룹바벨의 후예들이었을 것이다.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에 3:2) 

스룹바벨은 다윗에서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혈통의 계보와(마 1:12), 나단을 통해 계승된 충성의 계보에 모두 들어 있는(눅 3:27) 기술자 집단의 지도자였다. 나사렛 사람들은 자기들 손으로 성전을 다시 건축하려는 소원을 품고 있었을 것이고, 제자들 중 비범했던 요셉의 기술을 물려받은 예수에게 큰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나사렛에 전해진 예수의 소문들 중에는 특히 주목되는 내용이 있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헤롯이 건축한 성전을 헐고 새 성전을 건축하겠다는 것은 나사렛 사람들의 소원과 맞았다. 유대인들 앞에서 그것을 선언한 예수가 나사렛에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곧장 회당에 들어가 이사야서 61장을 펼쳐 읽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눅 4:18)

그 말씀이 응하였다고 하자 그를 지지하는 자들이 고개를 끄떡였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비난했다.

“그는 레갑의 명령을 어겨 포도주를 만들었고, 자신도 포도주를 마셨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보다 비난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더 컸다. 그들이 일어나 예수를 산의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죽이려고 했다. 예수는 그를 지지하던 자들의 도움으로 그곳에서 빠져나온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요 4:4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지금까지도 ‘나사렛 예수’로 불리우고 있다. 나사렛의 건축기술자였던 예수는 돌로 건축한 성전이 아닌 ‘교회’를 말씀과 사랑으로 건설했고, 오늘도 그분의 제자가 되어 교회 세우기에 헌신하는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칭찬을 받은 레갑의 후예이고 ‘나사렛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눅 4:31)

회당의 안과 밖에서 귀신들린 자들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눅 4:34)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눅 4:41) 

그분은 귀신들을 꾸짖어 나오게 하신 다음, 시몬의 장모를 앓게 한 열병도 꾸짖어 떠나게 하셨다.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눅 4:39)

전후 사정을 자세히 살펴본(눅 1:3) 누가는 예수께서 시몬의 장모를 먼저 낫게 하신 후 그를 찾아가 만났다고 기록해 놓았다. 요단강에서 예수를 따라갔던 세배대의 아들 요한과 그의 동료 안드레, 그리고 그들의 뒤를 밟아 요단강까지 갔던 시몬은 예수 그분을 잠시 만났다가 그냥 갈릴리로 돌아왔고, 후일 그분에 관한 놀라운 소문을 듣게 되었다. 시몬에게 관심이 있어 게바(베드로)라는 이름까지 지어 주신 예수께서는 그의 장모를 먼저 고쳐 놓고 그를 찾아가신 것이다.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눅 5:3)

그분의 진면목을 발견하지 못하고 떠나왔던 베드로와 안드레가 얼마나 당황했고 또 민망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말씀을 마치신 후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배에 고기가 없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권하셨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

갈릴리 호수의 어부들은 밤에 고기를 잡는다. 빈 배로 돌아와 그물을 씻고 있던 베드로에게는 그분의 말씀이 탐탁지 않았으나 지난날 그를 떠나온 송구스러운 일을 생각하여 그분의 ‘말씀’에 따르기로 했다.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

베드로는 마지못해 다시 깊은 곳으로 나가서 그물을 내렸다.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혀 올라왔다. 베드로가 그분 앞에 무너지듯 엎드렸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그러나 예수의 말씀은 더 뜻밖이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 1:17)

주위의 모든 사람이 몰려와 그물을 끌어올릴 때 그물을 깁는 척하고 있던 요한과 야고보는 아직도 눈치를 살피며 그들의 배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시 그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셨다. 

“조금 더 가시다가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막 1:19-20) 

이후 예수의 사역은 주로 치유에 집중되었다.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막 1:34) 

문둥병자(막 1:40)와 중풍병자(막 2:3)를 고치신 것도 말씀의 성취였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예수께서 연약한 자들을 치유하면서 또 자신이 기도하고 응답받은 체험들을 제자들에게 알려주고 가르친 것도 이때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그는 또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만나는 방법도 일러주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 5:6)

가버나움과 드라고닛의 경계에 있는 세관에서 세리 마태(레위)를 부르신 것도 아마 이때쯤이었을 것이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막 2:14) 그분이 가버나움에 들어갔을 때 한 이방인 백부장이 와서 중풍병에 걸린 하인을 고쳐달라고 간청했다. 예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자 그가 대답했다.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마 8:8) 

예수께서 그 말을 듣고 놀라시며 그를 칭찬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7)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예수님은 밤 새도록 기도 후 열둘 택하여 사도라 칭해… 하나님은 뭐라고 응답했을까?

입력 2014-06-27 02:41

 


                        엣세네파가 은둔생활을 했던 쿰란의 유적. 사해 북서단 연안에 있으며 유대왕조시대에 요새가 구축된 

                        ‘소금의 마을’로 추정된다. 이곳이 유명해진 것은 근처 동굴에서 이사야서 사본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들.


디베랴의 바닷가. 신약성경에는 갈릴리 바다가 디베랴 바다라고도 기록돼 있다. 디베랴는 갈릴리 해변 서쪽에 위치한 인구 4만명의 작은 도시로 20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현재는 티베리아스(Tiberias)로 불린다.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선지자 이사야는 우리에게 보내주신 그 아들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증언했다(사 9:6). 사도 요한은 그분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시고,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증언한다(요 1:2∼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러나 이 땅에 오실 때 그 전지전능을 다 내려놓고 ‘순종하는 아들’로 오셨기 때문에 그가 순종해야 할 ‘아버지의 뜻’을 묻기 위해 계속해서 기도하신 것이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시고(막 1:35), 홀로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으며(마 14:23), 기도는 그분의 습관이었다(눅 22:39). 그는 제자들 중에서 열두 사도를 택할 때에도 산에 올라가 밤이 새도록 기도했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 6:12∼13)

그리고 그 다음에 예수께서 택한 열두 사도의 이름이 나온다. 그 열두 사도의 이름을 살피다 보면 하나님께서 밤새도록 기도한 아들에게 뭐라고 응답하셨을지가 궁금해진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열두 명의 명단을 일일이 불러주셨을까? 아무래도 그렇게 하시지는 않았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열두 명의 명단에 예수를 배반한 가룟 유다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눅 6:14∼16)

만일 하나님께서 그 열두 명의 명단을 다 불러주셨다면 아들을 팔아넘길 가룟 유다를 지명한 것은 ‘오판’ 또는 ‘실수’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판 또는 실수하는 분이 아니시다. 혹시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시려고 배반할 인물을 미리 사도 명단에 계획적으로 끼워 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가설도 납득하기 어렵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시 25:8) 

그렇다면 하나님은 밤이 새도록 기도한 아들에게 뭐라고 응답하신 것일까? 아마도 아들은 기도하면서 ‘말씀’을 생각했을 것이다. 아들이 흑암에 행하던 백성(사 9:2)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 상황이 지난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진격할 때와 흡사하다고 할 수 있었다. 당시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말씀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

그로부터 사흘 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을 건넜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강에 들어서자 강물이 멈춰 섰고, 백성들이 다 건너자 하나님은 강물이 멈춰 있는 그곳에서 열두 개의 돌을 가지고 나오게 하신다.

“백성의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택하고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곳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밤 너희가 유숙할 그곳에 두게 하라.”(수 4:2∼3)

여호수아는 요단에서 가져온 열두 돌을 길가에 세우고, 그것으로 그들이 요단을 어떻게 건넜는지 후손들에게 전할 표징으로 삼았다.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묻기를 이 돌들은 무슨 뜻이니이까 하거든 너희는 너희 자손들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수 4:21∼22)

그리고 그 표징은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전해질 것이었다.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수 4:24)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제삼일’에 요단을 건너기로 결정하고 열두 명의 증인을 택하여 열두 돌을 세우게 했던 것처럼 예수께서는 장차 ‘제삼일’에 살아나(마 16:21) 부활의 첫 열매(고전 15:20)가 되시는 그분의 증인 열두 명을 택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모든 계층에서 증인을 택하라고 하셨을 것이다.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

그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다.

“빌립과 바돌로매(나다나엘)와.”

두 사람의 직업은 명기되어 있지 않으나 농업이었을 것이다.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마태 즉 레위는 유대인들에게 증오와 멸시를 당하며 살던 세리였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신분을 알 수 없으나 마태의 부친도 알패오였던 것으로 보아 마태의 아우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모두 ‘소외된 자’를 대표하고 있었다. 교회의 전승대로 ‘도마’가 배를 건조하는 기술자였다면 건축기술자였던 예수와는 직업적인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로마의 지배를 받는 유대에는 다섯 당파가 있었다. 제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두개당’과 율법주의로 민심을 이끄는 ‘바리새당’이 있고, 과격한 무력 항쟁으로 이스라엘을 회복하자는 셀롯 즉 ‘열심당’과 쿰란의 동굴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엣세네당’ 그리고 헤롯을 추종하는 ‘헤롯당’도 있었다. 셀롯인 시몬은 공개적으로 열심당원임을 밝힌 자였고, 야고보의 아들 유다(다대오)는 그의 단짝 친구였으며 가룟 유다는 선동적인 이념에 집착하던 자였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요 12:6)

집권층인 사두개당과 헤롯당을 제외한 모든 백성 즉 유대인, 갈릴리인을 막론하고 그들이 바라는 것은 하나님이 보낸 구원자 즉 메시아가 와서 로마 제국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자존심을 회복시켜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리새당과 열심당뿐 아니라 엣세네당도, 나사렛 사람들도, 그리고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능력을 지닌 예수께서 말씀과 치유와 귀신 쫓는 데만 전념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 모친과 동생들이 찾으러 왔다고 하자 그분이 말씀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3∼35)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8)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

죽음의 도성이 된 예루살렘 예수님도 아버지와 같이 원하는 자 살리겠노라 선언

김성일 소설가
입력 2014-07-04 03:11


                         예루살렘의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못 내부. 이곳에서 예수는 38년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하셔서 고침을 받게 하셨다.


다윗이 접수한 시온 산성(다윗성)이다. 다윗성은 예루살렘이 시작된 곳으로 BC 1004년쯤에 다윗이 여부스 족의 성을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다.


페르시아에 의해 죽을 위기에 처해 있던 유대인들이 목숨을 구한 사건을 기념하는 부림절 의식은 회당에서 ‘에스겔서’를 낭독하는 것이 포함된다. 유대인들은 부림절에 선물을 교환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푼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자기를 비워 사람의 모습으로 오시고(빌 2:6∼7), 사람들과 같은 인생을 시작한 것은 그들의 질고를 친히 겪으시고(사 53:3) 범죄한 사람을 대신하여 징계 받아 고치기 위해서였다(사 53:5). 그리고 또 사람에게 본을 보여(요 13:15)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영생의 길로 인도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예수께서 본을 보인 ‘순종’의 시작은 우선 두루마리에 적힌 말씀을 읽고 그 의미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열두 살 때에 성전의 랍비들과 문답을 할 정도로(눅 2:46) ‘말씀’의 핵심을 알고 있었으며, 집을 나선 서른 살쯤에는 율법서와 역사서, 선지서와 지혜서 등을 종횡으로 인용하고 설명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묻기 위해 늘 ‘기도’했다.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변을 얻어내는 방법은 ‘두드림’이었다. 요한의 세례를 받는 ‘두드림’으로 ‘내 사랑하는 아들’을 확인했고(마 3:17), 나다나엘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임금’ 사이의 문제에서도 광야의 ‘두드림’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마귀의 도전을 ‘말씀’으로 물리치고 승리하게 되었다. 

그는 ‘가나’에서도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두드림’에서 시작하여 말씀으로 생명을 구하는 일에 나섰다. 이사야서의 예언대로 광야에서 강 같이 말씀이 흘러 소경이 보고, 귀머거리가 듣고, 벙어리의 혀가 노래하게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또 사마리아 길 수가의 우물에서 ‘두드림’을 통해 ‘이스라엘의 임금’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일하라는 지시를 얻어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갈릴리로 돌아가 다시 말씀의 능력으로 문둥병자와 중풍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시던 예수께서는 한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깜짝 놀라신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마 8:8)

놀라신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말씀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8:10∼12) 여기서부터 다시 ‘하나님의 아들’은 이스라엘의 문제를 생각한다. ‘이스라엘’은 내 ‘장자(출 4:22)’라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진입하여 세운 나라 이스라엘의 중심은 ‘예루살렘’이었다.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에 성을 쌓으소서.”(시 51:18)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을 영원히 예루살렘에 붙잡아 두려는 다윗의 소원을 그분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명하여 성전을 짓게 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왕상 9:3)

그러나 그 약속에는 한 가지 조건이 붙어 있었다.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왕상 9:6∼7) 

이스라엘이 그것을 지키지 못하자 선지자 이사야는 탄식했다.

“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이 진 친 성읍이여 해마다 절기가 돌아오려니와 내가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그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사 29:1∼2) 

‘아리엘’이란 예루살렘의 별칭이고 번제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사야는 그의 시선을 갈릴리 쪽으로 돌렸다.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사 9:1) 

그 예언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에서 자라났고, 갈릴리 호반의 여러 마을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고치셨다. 그가 택한 열두 제자도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예수는 명절 때마다 ‘아버지의 뜻’을 ‘두드려’ 열어보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요 5:1)

여기서는 무슨 절기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고 ‘유대인의 명절’로만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의 3대 절기는 아닌 것 같고, 유월절이 지난 후 얼마 안 되었을 시기이니 ‘부림절’쯤으로 추정된다. 바사 왕 아하수에로가 인도에서 구스까지 127도를 다스리던 BC473년에 총리 하만이 각 도의 유대인을 몰살하려고 계책을 꾸미자 이를 알게 된 유대인 왕비 에스더가 기도하며 금식하고 ‘제삼일’에 왕께 나아가 호소하여 하만의 음모를 폭로했다. 그 결과 오히려 하만이 처형당하고, 유대인들은 왕의 허락을 받아 하만의 일족과 그 무리를 도륙했다. 그리고 이 대역전의 날을 ‘부림절’이라 하여 지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의 특징은 ‘예루살렘’만이 아니라 127도의 모든 유대인과 관계된 것이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요 5:2∼4, 한글개역판) 

예수께서는 거기 누워 있는 38년 된 병자에게 물으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는 도와줄 사람이 없어 다른 사람들이 먼저 내려간다고 변명했으나 그는 오래된 병자 노릇에 익숙해져서 편함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병에 익숙해진 예루살렘은 이미 죽음의 도성이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

병자는 곧 일어서서 자리를 들고 그곳을 떠났다. 이것으로 예수께서는 말로만 구원을 원하는 예루살렘,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한 예수를 오히려 율법 위반으로 걸어 박해하는 예루살렘에 더 이상 소망이 없음을 확인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하나님이 아들에게 생명을 주셨으므로,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겠노라고 그는 죽음의 도성 예루살렘에서 선언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9) 오셔서 손을 얹어 주소서

말씀으로 천지창조 말씀은 곧 하나님의 생명 예수님은 아버지 뜻대로 말씀으로 죽은 자 일으키셔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입력 2014-07-11 03:38


              예수께서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신 나인성에 세워진 기념교회.               나인성은 나사렛에서 동남방 8㎞ 지점, 다볼산에서 남쪽으로 
3㎞ 지점의 작은 동리로 언덕에 위치해 있다.


주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혈루병에서 나음을 입은 여인을 표현한 성화(‘그리스도와 혈우병 앓는 여자’ 파울로 베로네제 작)




BC 1406년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진입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 여호수아는 아직 전쟁이 진행 중일 때 그 땅을 열두 지파에 미리 분배한다. 여호수아의 나이가 많아졌으므로 하나님이 그렇게 지시하신 것이다.

"너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수 13:1)

당시 납달리 지파가 제비 뽑은 북쪽 지역을 '갈릴리'라고 했는데(수 20:7) 이것이 후에 스불론, 아셀, 잇사갈 지파의 땅까지 포함하는 호칭으로 확대되었다. 두로 지역 외의 가나안 땅을 다 점령한 다윗의 왕국은 BC 931년 분열되었고, BC 722년 북왕국이 먼저 앗수르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본국 자손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남쪽을 ‘사마리아’라 했고, 이방인이 많이 섞여 사는 북쪽은 ‘이방의 갈릴리’로 불리었다. BC 168년 수리아 왕 안티오쿠스 Ⅳ세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설치하고 제사장들과 유아들을 학살할 때 많은 유대인과 레위인들이 갈릴리로 피신하여 그때부터 갈릴리는 울분과 저항의 땅이 되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사 9:1)

예루살렘에는 유대인의 성전, 그리심 산에는 사마리아인의 성전이 있었다. 그러나 수가의 우물에서 아버지의 뜻을 확인한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르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가신 예수께서는 그곳이 이미 ‘평화의 성읍’이 아니라 죽은 자들로 가득 찬 번제단 ‘아리엘’이 된 것을 확인하셨다. 그는 38년간 자리를 펴고 누워 변명과 불평만 늘어놓고 있던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르신 후 ‘아리엘’의 죽은 자들에게 외치셨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그 말씀은 ‘이방의 갈릴리’로 돌아가는 길에 실현되었다. 제자들과 함께 ‘나인’ 성에 이르렀을 때 한 장례 행렬을 만났다. 외아들을 잃고 슬피 우는 과부를 보시자, 그 관에 손을 대어 행렬을 멈추게 하고 말씀하셨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 7:14)

그러자 죽었던 자가 일어났고,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다. 그 후 다시 거라사에서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후 가버나움으로 건너갔을 때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달려나와 그의 발아래 엎드렸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막 5:23)

예수께서는 잠시 놀라며 그를 바라보셨다.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전에 한 ‘이방인 백부장’이 ‘내 집에 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말하여 그의 믿음을 칭찬해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회당장’이라는 자가 그와는 반대로 ‘오셔서 손을 얹으사’라고 말한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의 능력’으로 낫게 하시는 것을 회당장 야이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막 5:24)

그는 왜 ‘손’을 얹어달라고 했을까? 예수께서 더 따져 묻지 않고 따라간 것은 ‘나인’ 성의 장례 행렬을 멈출 때 관에 손을 댔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께서 혹시 회당장의 말을 통해 뭔가 지시하실 수도 있었다. 즉 아무 말 없이 그와 함께 가신 것도 아버지의 뜻을 묻는 ‘두드림’이었을 것이다. 예수께 와서 호소한 사람이 회당장이었으므로 많은 사람이 뒤를 따랐고 그들을 에워싸며 밀기도 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예수께서 무리를 돌아보시며 물으셨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막 5:30) 

예수께서는 관에 손을 댔던 기억, 그리고 회당장이 손을 얹어달라고 했던 말을 곱씹으시며 ‘손’에 관한 생각을 하고 계셨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자신에게 손을 댄 것 같아서 그렇게 물으신 것인데 놀랍게도 한 여인이 떨며 엎드렸다. 

“저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온 여자입니다.”

많은 의사를 찾아다니며 가진 것을 다 허비했는데 효험은 없었고, 병이 더 중해지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여인이었다. 인파 속에서 접근을 못 하다가 비집고 들어가 그분의 옷만 손으로 만져도 구원을 받을 것 같았다는 것이었다. 여인은 이미 고침받은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분이 다 듣고서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막 5:34)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이어지는 사건들 속에서 ‘손’을 통해 전달된 아버지의 메시지를 이미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곧 천지를 지은 그분의 ‘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손’의 메시지를 받으며 예수께서는 세상에 보낼 아들에 관한 예표로 주신 이사야서의 말씀을 다시 떠올리셨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 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그 말씀 속에 ‘여호와의 뜻’이 나왔고 ‘손’도 나왔다. 하나님의 아들이 해야 할 일은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의 능력’으로 병든 자를 고치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손으로 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혈루증으로 열두 해를 앓다가 고침을 받은 여인과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달려나온 사람들이 고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막 5:35)

딸이 죽었으니 이제 선생께서 오실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회당장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막 5:36)

이제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는 일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 등 세 제자만을 데리고 회당장의 집에 들어가서 큰 소리로 통곡하고 있는 사람들을 제지하며 말씀하셨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막 5:39)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살아 있어도 죽은 자도 있으나, 하나님의 아들이 일으키실 자는 죽은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잠든 자’였던 것이다. 아이의 부모와 세 제자만을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에 들어간 예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달리다굼.”(막 5:41)

아람어로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이었다.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었다. 오는 도중에 만난 여인이 혈루증을 앓은 것은 열두 해였고, 회당장의 딸도 열두 살이었다(막 5:42). 하나님은 이미 열두 해 전부터 그날의 메시지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10) 천국의 비밀을 안다는 것

씨가 좋은 땅에 뿌려져 백 배, 육십 배 결실하니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이원희 목사
입력 2014-07-18 02:55


                              갈릴리 지역의 밭에서 씨를 뿌리는 농부의 모습. '씨 뿌리는 비유'는 성경에서 다양하게 등장한다. 

                              갈릴리는 날씨가 좋아 이곳에서 바나나 목화 오렌지 올리브 등 

                              갖가지 농산물이 풍부하게 재배되고 있다.


                                      천국의 비유에 나오는 겨자나무의 겨자씨는 눈에 잘 안 보일 정도로 아주 작다.


                              가버나움의 갈릴리 바닷가. 한적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이곳에 서 있으면 

                                          천국의 비밀을 설교하셨던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회당장 야이로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전해주신 그분의 '뜻'은 강력하고도 또 충격적이었다. 예수께서는 나인성으로부터 가버나움으로 이어지는 '손'의 메시지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상기시켜 준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사 53:10) 

그것은 그 앞의 기사에서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하나님의 아들이 그 ‘말씀’으로 병든 자를 낫게 하고, 귀신들린 자를 온전하게 할 것이나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채찍에 맞고 징계를 받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이것은 선지자들의 글에 계속해서 나오는 ‘공평’의 원칙 때문이었다. 

“나는 공평으로 줄을 삼고 의로 추를 삼으니.”(사 28:17·한글개역판)

이 공평과 의는 하나님의 권위를 지키는 절대적 기반이었다.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시 97:2)

하나님은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죄인에게 벌을 내리신다. 즉 권선징악, 신상필벌의 원칙이다. 이것이 깨지면 ‘하나님의 나라’는 성립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을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그분의 말씀을 거부하고, 그분을 떠나 죽음과 타락의 길로 간 사람을 그냥 살려주거나 복권시키면 그것은 공평치 못한 처사가 되고, 사탄의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욥 2: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공평’의 원칙을 지키시려면, 하나님 자신이 ‘아픔’을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아픔을 당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이 사람을 창조하고, 사람에게 생명을 주었고,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죄악을 담당한다는 것은 곧 속건제물(贖愆祭物)이 됨을 의미했다.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씨’를 보게 된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이삭을 드리려고 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맹세하며 주신 약속에 그 ‘씨’에 관한 말씀이 나온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 22:16∼17)

여기서 네 ‘씨’는 대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이어지는 다음 말씀을 보면 그것이 단순한 혈통적 ‘자손’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 22:18)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서 천하 만민이 구원받을 기회를 다시 한번 주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 ‘씨’가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을 의미한다면 복음서에서 그것은 나사렛의 목수 ‘요셉’이다. 그러나 요셉은 예수의 출생과 관계가 없다. 여기에 기록된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한 아브라함이 그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바치려 했던 그의 ‘믿음’이었다. ‘그가 씨를 보리라’는 이사야서의 메시지를 받고 예수께서는 곧 바닷가에 나가 ‘씨’에 관해 말씀하신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마 13:3) 

이 큰 비밀은 비유로 전해졌다.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마 13:4∼8)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묻자 그분이 일러 주셨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 13:11)

그리고 다시 이사야서의 말씀을 들려주신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사 6:9∼10)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비유’를 설명해 주셨다.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 13:19∼22)

역시 ‘씨’란 말씀을 준행하는 ‘믿음’과 ‘순종’을 뜻하는 것이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마 13:23)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마 6:10)

그래서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천국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감추인 보화’와 ‘좋은 진주’에 관한 비유, ‘바다에 친 그물’의 비유 등이었다. 그 모든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며,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어 그분과 함께 있게 되면 곧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모든 비유들의 초점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 그분을 향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누룩처럼 속건제로 드려지는 ‘말씀’의 아픔 위에 세워진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일으킨 그분의 손뿐만 아니라 혈루증 여인이 손댔던 그분의 몸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아픔을 당해야 할 속건제물이었다.

아들의 순종으로 드려질 그 아픔은 겨자씨와 누룩처럼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것이고.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추수의 날에는 그 아들의 말씀이 곡식과 가라지를 가려내고 그물에 들어온 물고기를 가려낼 것이다.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