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짚는 시리즈를 시작하며
이스라엘은 성경의 주 무대로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내용이 살아 움직이는 약속의 땅입니다. 국민일보는 예수께서 자라나신 나사렛을 시작으로 공생애 사역을 더듬어 가는 연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을 16일부터 25회 매주 금요일마다 연재합니다. 글은 소설가이자 성서전문작가로 잘 알려진 김성일(74) 장로가 집필합니다. 이야기 식으로 도입되는 이번 연재는 예수를 통한 구속사역의 놀라운 비밀을 현장감 있게 찾아가는 은혜로운 여정이 될 것입니다. 사진은 성지연구로 20여권의 성지 관련 서적을 출간한 이원희(58) 목사가 맡습니다.
섬기러 온 예수님 만나 ‘목숨 거는 사랑’ 회복 위해 나사렛서 순례 시작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다시 그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홍수 이후에 시날 땅을 떠나 동쪽의 땅 끝까지 옮겨 온 우리 조상들은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을 세가지 도형으로 표시했다. 즉 하늘은 봠(원·圓), 땅은 □(방·方) 그리고 사람은 △(각·角)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것을 원방각의 문화라고 말한다. 세종의 정음 팀이 한글을 창제할 때, ㄱ, ㄴ, ㄷ, ㄹ, ㅁ, ㅂ, ㅋ, ㅌ, ㅍ 등의 자음들은 □을 바탕으로 만들었고 ㅇ, ㅎ은 봠에서 비롯되었고 ㅅ, ㅈ, ㅊ은 △에서 나온 것이다.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도다.”(시 115:16)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어찌 된 셈인지 위에 있는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살아 왔다. 강화도 참성단을 보면 땅(□) 아래 하늘(봠)이 내려와 있고, 경주 첨성대의 모습도 역시 땅(□) 밑에 하늘(봠)이 있다. 구약 성경을 기록한 히브리 문자는 자음만 있었으나 세종대왕의 정음 팀은 모음도 만들었는데 그때 하늘은 ·, 땅은 ─, 사람은 │로 표시되었다.
그런데 모음에서는 하늘(봠)이 땅(─)의 아래 위를 넘나들고, 사람(│)의 좌우로 왕래하며 ㅗ, ㅜ, ㅏ, ㅓ 등을 만들고, 때로는 두 하늘이 겹쳐져서 ㅛ, ㅠ, ㅑ, ㅕ 등의 예쁜 모음이 되었다. 하늘이 땅의 상하로 넘나들고, 때로는 한 하늘이 둘이 되기도 하고, 또 사람의 좌우에서 거닌다는 이 놀라운 발상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런데 성경도 하나님도 그분 자신을 ‘우리’라는 복수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어 땅에서 사는 우리를 놀라게 하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왜 ‘우리’라고 했던 것일까? 이는 하나님과 그 아들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을 세 위격으로 나타낸 것이다. 사람이 생명의 말씀을 버리고 금단의 열매를 먹어서 죽어야 하는 존재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말씀이 육신으로 되게 하여 여자의 아들로 땅에 보내는 계획을 세우셨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 3:15)
그리고 홍수 이후에도 사람들이 다시 반역의 탑을 쌓기 시작하자 마침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그 아들이 땅으로 ‘내려오는’ 사태가 발생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창 11:7)
그리고 사람이 계속해서 죽음의 길을 가고 있을 때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아브라함과 사상 최대의 거래를 하신다. 공평하신 하나님이 사람에게만 특혜를 줄 수 없어서 아브라함의 독자와 하나님의 독생자를 맞바꾸기로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모리아 산에서 그 아들 이삭을 잡으려 할 때에 하나님은 거래가 성립되었음을 선언하시고 그를 제지하신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창 22:11)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숫양을 제물로 드렸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간 이삭은 그리스도의 예표적 인물이 된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창 22:18) 이때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여호와의 사자’는 후일 하나님께서 애굽의 노예가 된 이스라엘 자손을 구출하려고 계획하실 때에 모세에게도 나타난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출 3:2)
그리고 ‘내가 내려가서’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출 3:8)
신학자들은 이 ‘여호와의 사자’를 ‘구약의 그리스도’라고 해석한다. 천사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그분이 시키는 일을 수행할 뿐인데, 여호와의 사자는 자주 하나님과 동격으로 호칭되고, ‘내가’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사자는 사사시대의 마노아에게도 나타나 장차 그의 아들이 태어나면 포도주를 금하고, 머리를 깎지 않는 ‘평생 나실인’으로 살게 하라고 이르시는데 마노아가 그에게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가 마노아에게 대답한다.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奇妙者)라 하니라.”(삿 13:18)
이 여호와의 사자가 곧 ‘그리스도’임이 후일 이사야에 의해 밝혀졌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奇妙者)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이 ‘기묘자’는 히브리어로 ‘펠레’인데 ‘비밀’이라는 뜻이다. 이 비밀의 핵심은 그분이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분이 보낸 아들인데, 그분이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권위와 영광을 스스로 내려놓고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아무도 그분을 알아볼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
후일 사도 바울도 그 비밀에 대해서 증언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신학에서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자기비하’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
그러나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이 하는 말씀과 일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종교적 ‘권위’에만 집착하고 있던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그에게 물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마 21:23)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온 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신 그분을 다시 찾아서 만나야 ‘목숨 거는 사랑’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하심이라”(마 2:23)
그러나 선지자의 글 어디에서도 ‘나사렛’이라는 지명은 찾아볼 수 없다. 도대체 나사렛은 어떤 곳이며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 땅인가? 우리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려면 우선 그 ‘나사렛’에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