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 성지순례/이스라엘[종합]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1) - (5)

영국신사77 2016. 4. 13. 23:13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1)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 입력:2014.05.16 02:34
  • 수정:2014.05.16 14:55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짚는 시리즈를 시작하며 

이스라엘은 성경의 주 무대로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내용이 살아 움직이는 약속의 땅입니다. 국민일보는 예수께서 자라나신 나사렛을 시작으로 공생애 사역을 더듬어 가는 연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을 16일부터 25회 매주 금요일마다 연재합니다. 글은 소설가이자 성서전문작가로 잘 알려진 김성일(74) 장로가 집필합니다. 이야기 식으로 도입되는 이번 연재는 예수를 통한 구속사역의 놀라운 비밀을 현장감 있게 찾아가는 은혜로운 여정이 될 것입니다. 사진은 성지연구로 20여권의 성지 관련 서적을 출간한 이원희(58) 목사가 맡습니다.

섬기러 온 예수님 만나 ‘목숨 거는 사랑’ 회복 위해 나사렛서 순례 시작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다시 그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홍수 이후에 시날 땅을 떠나 동쪽의 땅 끝까지 옮겨 온 우리 조상들은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을 세가지 도형으로 표시했다. 즉 하늘은 봠(원·圓), 땅은 □(방·方) 그리고 사람은 △(각·角)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것을 원방각의 문화라고 말한다. 세종의 정음 팀이 한글을 창제할 때, ㄱ, ㄴ, ㄷ, ㄹ, ㅁ, ㅂ, ㅋ, ㅌ, ㅍ 등의 자음들은 □을 바탕으로 만들었고 ㅇ, ㅎ은 봠에서 비롯되었고 ㅅ, ㅈ, ㅊ은 △에서 나온 것이다.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도다.”(시 115:16)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어찌 된 셈인지 위에 있는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살아 왔다. 강화도 참성단을 보면 땅(□) 아래 하늘(봠)이 내려와 있고, 경주 첨성대의 모습도 역시 땅(□) 밑에 하늘(봠)이 있다. 구약 성경을 기록한 히브리 문자는 자음만 있었으나 세종대왕의 정음 팀은 모음도 만들었는데 그때 하늘은 ·, 땅은 ─, 사람은 │로 표시되었다. 

그런데 모음에서는 하늘(봠)이 땅(─)의 아래 위를 넘나들고, 사람(│)의 좌우로 왕래하며 ㅗ, ㅜ, ㅏ, ㅓ 등을 만들고, 때로는 두 하늘이 겹쳐져서 ㅛ, ㅠ, ㅑ, ㅕ 등의 예쁜 모음이 되었다. 하늘이 땅의 상하로 넘나들고, 때로는 한 하늘이 둘이 되기도 하고, 또 사람의 좌우에서 거닌다는 이 놀라운 발상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런데 성경도 하나님도 그분 자신을 ‘우리’라는 복수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어 땅에서 사는 우리를 놀라게 하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왜 ‘우리’라고 했던 것일까? 이는 하나님과 그 아들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을 세 위격으로 나타낸 것이다. 사람이 생명의 말씀을 버리고 금단의 열매를 먹어서 죽어야 하는 존재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말씀이 육신으로 되게 하여 여자의 아들로 땅에 보내는 계획을 세우셨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 3:15) 

그리고 홍수 이후에도 사람들이 다시 반역의 탑을 쌓기 시작하자 마침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그 아들이 땅으로 ‘내려오는’ 사태가 발생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창 11:7) 

그리고 사람이 계속해서 죽음의 길을 가고 있을 때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아브라함과 사상 최대의 거래를 하신다. 공평하신 하나님이 사람에게만 특혜를 줄 수 없어서 아브라함의 독자와 하나님의 독생자를 맞바꾸기로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모리아 산에서 그 아들 이삭을 잡으려 할 때에 하나님은 거래가 성립되었음을 선언하시고 그를 제지하신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창 22:11)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숫양을 제물로 드렸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간 이삭은 그리스도의 예표적 인물이 된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창 22:18) 이때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여호와의 사자’는 후일 하나님께서 애굽의 노예가 된 이스라엘 자손을 구출하려고 계획하실 때에 모세에게도 나타난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출 3:2) 

그리고 ‘내가 내려가서’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출 3:8) 

신학자들은 이 ‘여호와의 사자’를 ‘구약의 그리스도’라고 해석한다. 천사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그분이 시키는 일을 수행할 뿐인데, 여호와의 사자는 자주 하나님과 동격으로 호칭되고, ‘내가’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사자는 사사시대의 마노아에게도 나타나 장차 그의 아들이 태어나면 포도주를 금하고, 머리를 깎지 않는 ‘평생 나실인’으로 살게 하라고 이르시는데 마노아가 그에게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가 마노아에게 대답한다.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奇妙者)라 하니라.”(삿 13:18) 

이 여호와의 사자가 곧 ‘그리스도’임이 후일 이사야에 의해 밝혀졌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奇妙者)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이 ‘기묘자’는 히브리어로 ‘펠레’인데 ‘비밀’이라는 뜻이다. 이 비밀의 핵심은 그분이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분이 보낸 아들인데, 그분이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권위와 영광을 스스로 내려놓고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아무도 그분을 알아볼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 

후일 사도 바울도 그 비밀에 대해서 증언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신학에서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자기비하’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 

그러나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이 하는 말씀과 일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종교적 ‘권위’에만 집착하고 있던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그에게 물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마 21:23)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온 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신 그분을 다시 찾아서 만나야 ‘목숨 거는 사랑’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하심이라”(마 2:23) 

그러나 선지자의 글 어디에서도 ‘나사렛’이라는 지명은 찾아볼 수 없다. 도대체 나사렛은 어떤 곳이며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 땅인가? 우리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려면 우선 그 ‘나사렛’에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글=김성일 장로, 사진=이원희 목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2)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 입력:2014.05.23 03:08





‘소년가장 예수’ 어머니·여섯 동생 부양하며 말씀과 순종 의미에 관심

바이블(Bible)이란 말은 헬라어 ‘비블리온(책)’에서 온 것이며, 이는 파피루스 나무껍질을 뜻하는 ‘비블로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전에 모세와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한 책들은 천지 창조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과 역사에 대한 기록 속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땅에 보내신다는 약속으로 가득 차 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사 14:24)

그 약속을 기록한 선지자들의 ‘책’과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음을 증언한 제자들의 ‘기록’은 ‘성경’이 되었다. 또 이삭이 그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나무를 지고 올라간 모리아산, 마노아의 아들 나실인 삼손이 태어나고 묻힌 소라 땅, 새 왕이 태어날 곳으로 지정된 베들레헴, 장차 큰 빛을 보리라고 한 갈릴리 등 그 예표와 성취를 증거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작은 땅은 ‘성지’가 된 것이다.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마 2:22∼23)

로마 황제의 명령대로 호적 정리를 하려고 가는 나사렛의 목수 요셉과 함께 남편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갔던 마리아는 거기서 예수를 낳게 된다. 헤롯의 박해를 피해 아내와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했던 요셉은 헤롯이 죽은 후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왔고, 어린 예수는 그 나사렛에서 자라나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를 비우고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인생의 출발선에 선 것이다.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마 2:23)

선지자들의 글 어디에도 그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나사렛이란 곳은 신구약의 중간 시대쯤에 새로 생긴 마을로 보인다. ‘나사렛’의 어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그 하나는 민수기에 나오는 ‘나실’이고 또 하나는 이사야 11장에 나오는 ‘네첼(가지)’이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사 11:1)

이새의 뿌리에서 난 ‘가지’는 널리 알려진 그리스도의 상징이므로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전후 상황을 살펴 볼 때 칼뱅의 의견처럼 나사렛이라는 마을 이름은 ‘나실인’과 더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고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 하며.”(민 6:2∼3)

또 삼손의 사례처럼 머리털을 자르지 말라고 되어 있다.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 즉 그의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민 6:5)

이 나실인의 서원은 30일 또는 그 이상의 기한이 있었다. 그러나 삼손은 평생 나실인이 되었고, 또 성경에는 평생 나실인으로 살았던 집단도 있었다.

“우리가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모든 말을 순종하여 우리와 우리 아내와 자녀가 평생 동안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살 집도 짓지 아니하며 포도원이나 밭이나 종자도 가지지 아니하고 장막에 살면서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대로 다 지켜 행하였노라.”(렘 35:8∼10)

‘레갑’은 유다 지파의 기술자 집단으로 갈렙(글루배, 대상 2:9)이 그의 후처 에브랏에게서 낳은 ‘훌’의 제자들이었다. 훌의 손자 브살렐은 광야에서 성막의 제조를 지휘한 사람이다(출 31:2). 레갑 가문의 후예인 겐 족속의 기술자들도 훌의 문하가 되어 이들 모두가 ‘레갑 사람’으로 불렸다. 가나안 땅에 진입한 후 이들 집단은 베들레헴 근처 ‘에브라다’에 정착했는데 그 이름은 ‘에브랏’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이 기술 집단의 자존심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때 큰 상처를 입었다.

“솔로몬 왕이 사람을 보내어 히람을 두로에서 데려오니 그는 납달리 지파 과부의 아들이요 그의 아버지는 두로 사람이니 놋쇠 대장장이라.”(왕상 7:14)

가나안의 자손인 히람이 성전 공사의 총감독이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부 15만명과 감독 3600명도 모두 이방인들로 채워졌다(대하 2:17∼18). 광야에서 성막을 제조한 레갑 기술자들이 성전 공사에서 완전히 소외된 것이다.

이때부터 레갑 사람들은 포도주를 끊고, 집도 짓지 않으며 방랑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후 레갑의 지도자 요나답은 분열된 왕국의 통일을 위해 북의 예후를 도와 혁명에 성공하지만 예후의 변심으로 다시 좌절에 빠진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직전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시켜 레갑 사람들을 성전에모아 포도주를 마시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그들이 조상의 명령을 지키겠다며 포도주 마시기를 거절하자 하나님은 그분의 명령을 거부한 레갑 사람들을 오히려 칭찬하신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렘 35:19)

그러나 이후로 레갑 사람들은 성경에서 사라진다. 이 ‘평생 나실인’의 집단이 모여 살았던 곳을 ‘나사렛’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면 마리아의 남편 요셉도 기술자인 목수(τεκτον·건축기술자)였고, 그가 길러낸 예수도 목수였다. 미가가 그의 예언에 특별히 ‘에브라다’를 넣어 놓은 것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미 5:2)

나사렛에 모인 그 기술자 집단은 언젠가 하나님의 성전을 자신들의 손으로 짓는 데 헌신하리라고 서원한 나실인들이었을 수도 있다. 그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자라난 예수의 최대 관심사는 무엇이었을까?

목수 요셉에게는 예수 아래로도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의 네 아들이 더 있었고, 딸들도 있었다. 그러나 요셉이 일찍 죽은 것으로 보아 평소에 건강이 좋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예수가 10세 되던 AD 6년, 열심당의 반란을 진압한 로마군은 반란군 2000여명을 나사렛의 8㎞ 북방 세포리스로 가는 가도에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 처형 장면을 어린 예수도 보았을 것이고, 목수 요셉은 십자가 제작에 동원되어 무리한 작업을 하다가 건강을 더 해쳤을 것이다. 아버지의 건강 문제를 크게 걱정하던 어린 예수는 나사렛 회당에 비치된 선지자들의 두루마리에서 뜻밖의 말씀을 발견한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사 64:8)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렘 3:19)

그래서 열두 살 때의 예수는 그를 찾고 있던 요셉과 마리아에게 말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요셉은 결국 일찍 죽었고, 소년 가장 예수는 목수 일로 어머니와 여섯 동생을 부양하며 다시 ‘죽음’의 문제가 시작된 ‘말씀’과 ‘순종’의 의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의 나이 30세가 되자 유대 광야에서 들려온 세례 요한의 소문을 듣고 그는 집을 나선다. 그가 요한에게로 가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올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았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3) 말씀으로 살 것이라

  • 입력:2014.05.30 02:07







“네가 하나님 아들이거든” 마귀의 시험에 든 예수님 신명기 말씀으로 물리쳐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열두 살까지밖에 없다. 그리고 그가 집을 떠나 요한을 만나러 가신 것은 30세쯤이었다.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눅 3:23)

이를 두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18년 동안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황당한 추측들이 있기도 했다. 그가 후일 가르치신 내용으로 보아 애굽에 가서 공부를 했다느니, 인도에 다녀왔다느니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직 그가 두루마리에서 읽은 것만을 가르쳤다.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요 8:26)

이미 예수께서 오시기 970년 전에 솔로몬의 뛰어난 지혜에 관한 소문을 온 천하의 왕들이 다 듣고 있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왕상 4:29-30) 

그래서 천하의 모든 왕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려고 사람을 파견했다.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으니 
  이는 그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들이 보낸 자들이더라.”(왕상 4:34)

솔로몬에게서 배워 간 것이 애굽과 인도 등으로 들어갔고, 그곳 박사들의 학문이나 술사들의 경전에 인용되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구약의 두루마리에 기록된 말씀을 가르쳤으므로, 솔로몬에게서 배워 간 다른 나라의 지혜들과 일부는 공통점이 있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예수는 30세가 될 때까지 나사렛을 떠난 적이 없었다. 적어도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한 장자라면 홀어머니와 여섯 명의 동생들을 버려두고 집을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꾸준히 나사렛 회당에 드나들며 율법서와 시편과 선지자들의 글을 읽었다. 

요셉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죽음’의 문제였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6-17)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 먼저 빛이 있으라고 말씀한 것은 생명을 창조했다는 뜻이고, 그 말씀은 곧 생명의 근원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다면 그것은 생명을 포기하는 것, 곧 죽음을 의미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죽음’이 시작된 것이다. 그가 이 ‘순종’의 원리를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순종하는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눅 2:51) 

그리고 또 그는 착한 사춘기를 보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그가 목수 일을 하면서 세상일에 그냥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늘 기도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나 명령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당장은 홀로 되신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살피는 것이 그분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나이 30이 되자 아우들이 생계를 이어받을 만한 나이도 되었고, 
마침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었기 때문에 집을 떠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리고 마침내 요단 강에서 놀라운 음성을 듣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그러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말씀은 그것뿐이었다. 
이제부터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라는 지시는 없었다. 
여리고로 가는 길에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어 있던 요한과 안드레, 그리고 안드레의 믿음직한 형 시몬을 만나 그를 게바라고 불러 주었으나 그들은 물러가 버렸다. 
그리고 이튿날 갈릴리로 돌아가는 길에 
벳새다 사람 빌립의 친구인 가나 사람 나다나엘을 만나 놀라운 고백을 듣는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 1:49)

예수는 갑자기 그냥 갈릴리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임금’은 서로 유사할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는 두 가지의 명제였다. 
예수는 이 두 개의 명제 사이에서 정답을 얻어야 했다. 
그는 빌립과 나다나엘을 다시 만나기로 하고 그들과 헤어졌다.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마 4:1-2)

흔히 광야에서 만난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을 
배고픔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시험으로 간단하게 해석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을 무너뜨리려는 마귀의 시험에는 
좀 더 무서운 음모가 숨겨져 있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것이 바로 마귀가 펼친 작전의 핵심적 과제였던 것이다.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아버지가 돌을 창조했는데 
만약 아들이 그것을 떡덩이로 만들면 그것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충돌하게 되고, 
‘순종’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다. 
마귀는 바로 그것을 노린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신명기의 ‘말씀’으로 이 무서운 시험을 물리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마귀의 두 번째 시험도 역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공격이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마 4:6)

아들의 구원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유월절의 고난과 칠칠절의 성령 강림을 거쳐 
초막절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신 16:16). 
그런데 성전에서 뛰어내리고 천사들이 떠받들어 영광으로 직행한다면 
이 역시 아버지와 아들의 작전 개념이 충돌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이 시험도 신명기의 ‘말씀’으로 격퇴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신 6:16)

세 번째 시험은 더 어려운 미혹이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9)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했으므로 천하 만국이 다 그분의 것인데 
마귀는 그것을 제 것인 듯 네게 주겠다고 했다. 
이때 만일 예수께서 누가 네게 천하 만국을 주었으냐고 반박하면 
그로 하여금 온 천하를 꾀도록(계 12:9) 허용하고, 
하나님을 떠나면 알지 못하던 세상의 우상을 섬기게(신 28:64) 하신 아버지의 조치를 
아들이 반박하는 결과가 된다. 

예수께서는 이것 역시 신명기의 말씀으로 물리쳤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 6:13)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마귀와의 첫 번 전쟁을 
‘말씀’으로 승리하신 것이다.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4)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어

서른에 나사렛 떠난 예수님 말씀 구하는 ‘두드림’ 시작 ‘생명 살리라’ 하나님 응답

입력 2014-06-06 10:42 수정 2014-06-06 19:48


                        초막절에 생명의 물을 긷던 실로암 못은 예루살렘 시내 서쪽에 있으며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장소로도 유명하다. 

                        5세기 이곳에 교회가 세워졌으나, 614년 페르시아 침공으로 파괴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을 행한 가나의 기적교회.


                    나다나엘 기념교회는 나다나엘이 가나 출신이기 때문에 이곳에 세워졌다. 

                     빌립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은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다(요1:47).


어려서부터 서른 살까지 홀어머니와 동생들을 보살피며 ‘나사렛 사람’으로 살아온 예수는 순종하는 아들이었고, 회당의 두루마리를 읽고 기도하며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기다림의 달인이었다. 그러나 서른 살이 되어 나사렛을 떠나면서 뚜렷한 변화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곧 ‘두드림의 지혜’라는 것이었다.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8)

서른 살이 되자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요단강으로 가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내려는 ‘두드림’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두드림에 하늘을 열고 응답하셨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나다나엘이 ‘하나님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임금’ 즉 유사하면서도 선택을 필요로 하는 두 가지 명제를 꺼냈을 때에도 그는 이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해 두드릴 것을 이미 결심하고 그에게 단언했던 것이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요 1:51)

빌립과 나다나엘을 먼저 보내 놓고 유대 광야로 들어간 것은 그 두 가지 명제에 대한 아버지의 답변을 구하는 ‘두드림’이었다. 그 광야 전쟁에서 마귀의 공격 대상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고, 그것을 ‘말씀’으로 물리쳤다. 그리고 나에게 경배하면 천하만국을 주겠다는 마귀의 미혹에서 ‘이스라엘의 임금’에는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예수는 다시 아버지께서 그에게 어떤 일을 시키시려는지에 관해 분명한 응답을 구하려고 나다나엘이 살고 있는 가나로 향했다. 그리고 나다나엘이 초청을 받은 혼인 잔치에 빌립과 함께 참석했다. 그때 이 잔칫집에 와서 주방 일을 돕고 있던 모친 마리아가 그를 발견하고 다가온 것이다. 모처럼 집을 떠났다가 돌아온 아들에게 던진 모친의 말은 좀 뜻밖이었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마리아는 31년 전 천사 가브리엘이 전해 준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1∼33)

마리아는 그 말을 마음에 담아 둔 채 서른 살이 되도록 묵묵히 목수 일만 하고 있는 아들을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그가 어머니에게 ‘여자여’라고 한 것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들이 사랑하는 어머니를 부를 때 쓰는 최대의 존칭 ‘My Lady’와 같은 의미였다. 그러나 오래간만에 돌아온 아들의 대답은 그녀의 기대와 달랐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 2:4)

아직 자신의 거취에 대해서 받은 말씀이 없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이제 마리아는 더 이상 기다리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며 처녀로서 잉태하는 일에 목숨을 걸 정도로 담대한 성품을 지녔고, 그만큼 적극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아들의 신중한 대답을 개의치 않고 하인들에게 말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 2:5) 

예수는 눈을 크게 뜨며 모친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는 어휘 때문이었다. 그는 요단강에서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고, 마귀와의 전쟁을 ‘말씀’으로 이긴 후 계속해서 줄곧 ‘말씀’에 관해 생각하며 자신의 장래 일을 지시하실 아버지의 다음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눈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에 사용되는 돌항아리 여섯 개가 보였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요 2:7) 

선지자들은 물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유하고 있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물은 그들의 생명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초막절에는 실로암 못의 물을 길어다가 성전 뜰에 붓는 행사도 있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3)

예수께서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신 것은 정결의 예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라는 뜻이었다. 아버지의 응답을 기대한 ‘두드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 포도주는 본래 생명의 상징이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또 포도주는 인간의 기쁨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그러므로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는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었다.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전 1:19)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처음 주신 선물도 포도원이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사 5:1)

그러나 생명과 기쁨의 상징인 포도주는 인간이 절제를 잃어가면서 차츰 실패와 타락의 상징으로 변해갔다. 노아는 그의 장막에서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잠들었다가 다시 갈등의 원인을 제공했고, 그의 자손들은 결국 포도주에 취하여 쾌락에 빠지고 다시 하나님과 멀어지게 된 것이다.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잠 20:1)

뿐만 아니라 불의와 범죄의 도구로도 사용되었다.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곤고한 자들의 송사를 굽게 할까 두려우니라.”(잠 31:5)

그리고 마침내 생명의 상징인 포도주는 피가 되었다. 

“너를 억압하는 자들에게 자기의 살을 먹게 하며 새 술에 취함 같이 자기의 피에 취하게 하리니.”(사 49:26)

그러므로 물 즉 ‘말씀’이 포도주가 된 것은 그 본래의 의미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라는 아버지의 응답이었다. 이때로부터 예수께서는 모친 마리아와 빌립과 나다나엘, 그리고 기적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형제들과 함께(요 2:12) 가버나움 등 갈릴리 여러 지역에서 아버지의 ‘말씀’을 증거했다.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눅 4:14∼15)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5)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수가의 우물가에서 하나님 응답 받은 예수님 “소경의 눈이…” 말씀으로 치유

입력 2014-06-13 03:35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 있는 수가의 우물이 있는 곳에 세워진 그리스정교회.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던 이 우물가(요4:5)의 이야기는 많은 목회자들의 설교 예화로 자주 등장한다.


                                  헤롯이 BC 20년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건설한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 복원 모형 모습.


                                                          사마리아 사람들의 성전이 있던 그리심 산.

갈릴리에서 아버지의 ‘말씀’을 가르치던 예수께는 아직도 아버지의 응답을 받아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는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가나에서의 기적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장차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리라는 기대를 걸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모친 마리아와 동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시 ‘두드림’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요 2:13) 

그가 예루살렘에 간 것은 이사야서의 ‘말씀’ 때문이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장터가 되어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두드림의 기도’를 위해 성전에 올라갔던 예수는 그들이 파는 양과 소를 내쫓고 돈 받는 상을 엎으며 외쳤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 2:16)

유대인들이 그의 권위를 증명할 만한 표적을 보이라고 하자 그가 대답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은 BC 586년 바벨론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바벨론에서 귀환한 건축기술자 스룹바벨이 BC 536년 재건을 시작하여 BC 516년 초라한 규모로 성전이 준공되었다. 그 후 이두매 출신으로 유대 왕이 된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BC 20년 성전 복원을 시작하여 46년 만에 완공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요 2:20) 

그러나 예수께서는 선지자의 말씀을 생각하고 계셨던 것이다.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호 6:2) 

그리고 밤에 그를 찾아온 산헤드린 의원 니고데모에게 대답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여기서 ‘물’은 바로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던 이사야서의 ‘내 집’이 오직 성전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예수께서는 새로운 ‘두드림’의 장소를 찾아 사마리아 길로 들어섰다. 유대인들은 갈릴리로 갈 때 천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사는 곳을 피해 요단 길로 다니고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아무도 다니지 않은 그 길을 택했던 것이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래도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요 4:5∼6)

실로에서 세겜으로 가는 그 길의 오른쪽에는 저주의 산 ‘에벨’이, 왼쪽에는 축복의 산 ‘그리심’이 있었다. 그 가운데 야곱의 우물이 있고, 여섯 시는 유대 시간으로 정오, 해가 바로 머리 위에 있었다. 아버지와 독대하기 좋은 시간과 장소였다. 빌립과 나다나엘을 먼저 동네로 들여보내고 우물가에서 혼자 아버지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을 때 사마리아 여자가 나타났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요 4:7)

그것이 예수의 ‘두드림’이었다. 사마리아 여자의 반응이 특이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시나이까.”(요 4:9)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을 더럽다고 상종하지 않는 것은 BC 722년 앗수르 왕이 북왕국 이스라엘을 정복할 때 이방 군대들을 끌어와 사마리아 여자들을 모두 겁탈하게 한 인종청소 정책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부하던 사마리아의 이스라엘인들은 모두 잡종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바람난 이스라엘의 남편이라고 했다.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렘 3:14)

북왕국 이스라엘은 먼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다가 앗수르에 멸망당했다. 그러나 남왕국 유다도 BC 586년 바벨론에 멸망당했다. 먼저 앗수르에 멸망당한 북왕국은 그 후 남왕국과 함께 바벨론 시대를 거쳐 페르샤, 헬라, 애굽 등 다섯 남편을 섬겼고, 이제 또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사마리아 여자와 생명의 물에 대하여 대화하던 예수께서 말씀했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

그러나 여자가 대답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여자가 그렇게 말할 때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의 역사를 떠올리셨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라.”(요 4:17∼18)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요 4:19) 

실제로 그 여자에게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 또 다른 남자와 동거 중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응답’이었다. 이 여자에게 ‘이스라엘의 임금’이라는 또 다른 남편을 소개해 준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리고 다섯 남편이 있었던 사마리아를 유대인들이 네 명의 남편이 있었다고 잘난 척할 일도 아니었다. 그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진정한 ‘남편’이 누구인가를 알려 주는 일이었다. 사마리아 여자는 하나를 더 확인하려 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

이미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수가의 우물가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라고 응답을 받은 예수께서 감격하여 말씀하셨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이 정오의 독대로 응답을 받은 예수께서는 이후로 오직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대로 행하는 일에 전념하셨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 35:5∼6·한글개역판) 

그가 말씀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치유하고 있을 때 헤롯 안디바에게 체포된 세례 요한이 그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 물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3)

예수께서 그들에게 명확한 답변을 주어 보내셨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5·한글개역판)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