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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교수의 라이즈업 코리아 Ⅰ/부흥현장 탐방1-5

영국신사77 2016. 4. 13. 19:29
박용규교수의 라이즈업 코리아 Ⅰ/부흥현장 탐방1-5
 
총신 신대원 박용규교수의 라이즈업 코리아 Ⅰ| ……──大名 지리

조회 132 | 07.05.17 14:25 http://cafe.daum.net/dm3179/PZ0/498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1) 연재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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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Revival).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단어다. 부흥이 무엇인가? 이 땅에 푸른 그리스도의 계 절이 돌아오는 것. 모든 사람이 죄악을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얼굴을 구하며 생명의 주님께 눈을 돌리는 것.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들의 열정이 사회를 향해 분출되는 것. 그래서 이 사회와 국가,세계가 주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변화되는 것….

이 땅의 그리스도인이라면 이같은 부흥을 사모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런 관심이 내게는 특별했다. 여러 해 동안 ‘부흥’이나 ‘영적각성’이라는 주제가 온통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1907년 이 땅을 변화시켰던 평양 대부흥 운동에 대한 연구를 착수한 것도,그 뿌리가 되는 세계 부흥 운동의 역사를 추적하는 일에 관심을 집중한 것도 그같은 이유에서였다. 평양 대부흥 운동 100주년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지난 2000년 동안 발흥했던 놀라운 부흥의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고 발로 밟으며 온몸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캐나다 미국과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 등 영국은 물로 전 유럽에 흩어져 있는 부흥의 현장을 둘러보며 시대를 일깨우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너무도 많은 은혜를 경험했다. 마치 주의 영이 미리 가셔서 예비해주신 것처럼 가는 곳마다 필요한 사람을 만나게 해주셨다. 돕는 손길도 수없이 나타났다.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인 것처럼 부흥의 현장을 둘러보는 일마저 그분의 은혜였음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도 이 땅의 부흥을 꿈꾸며 기도하는 무리와의 만남,부흥의 역사를 오랫동안 연구하며 학문적 권위를 인정 받아온 석학들과의 만남은 너무도 귀한 은혜였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의 주역 하디의 고향 캐나다 홀리필드로부터 언더우드가 졸업한 미국 의 뉴브룬스위크 신학교,윌리엄 헌트가 졸업한 프린스턴신학교 등을 방문해 부흥과 관련된 자료를 찾은 것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시카고의 무디성경학교,1936년 이후 끊임없이 대학 캠퍼스 영적 각성 운동을 주도한 휘튼대,20세기 부흥 운동을 견인한 빌리 그레이엄 센터,19세기 후반 무디 부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그 영향을 듬뿍 받고 한국으로 파송된 평양 주재 선교사 윌리엄 블레어,번하이젤,그레이엄 리 등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도 큰 기쁨이었다.

영국에서 웨슬리 부흥의 현장인 올더스게이트 거리와 웨슬리 기념교회 등을 보며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말했던 웨슬리의 헌신을 느꼈다. 그가 극적으로 회심을 경험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이 땅의 성도들이 주님께 ‘드라마틱’한 회심을 할 수 있기를 기원했다. 웨슬리가 열정을 토하며 말씀을 전했던 설교단,스펄전이 첫 설교를 한 장소,로이드 존스가 사역했던 웨스트민스터 교회,영국 청교도들의 체취가 가득한 존 버니언 도시 브레드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에 이르기까지 영국의 부흥 현장은 나를 흥분케 하기에 충분했다.

존 낙스가 피를 토하며 스코틀랜드 개혁과 부흥을 이끌었던 에든버러와 세인트 앤드루스,1859년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던 아일랜드 울스터도 찾았다. 4명의 신실한 성도들이 아일랜드의 부흥을 꿈꾸며 기도했던 켈스의 한 시골학교 건물에서 1세기반의 시간을 넘어 아일랜드는 물론 세계의 부흥을 사모하는 기도소리를 들었다.

평양 대부흥 발흥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1904년 웨일스 부흥의 현장에서 존 오웬,조지 휘필드,존 웨슬리 등 영적 각성 운동의 거장들의 체취를 느꼈다. 휘필드와 웨슬리가 옥외 설교를 시작하여 수많은 영혼을 잠에서 깨웠던 부흥의 현장 브리스톨의 한함마운트에서는 구름 같은 군중이 모여 이들의 설교를 듣던 모습이 연상되었다. 독일의 비텐베르크에서는 근대 영적 각성 운동의 모체가 되었던 마르틴 루터의 열정을 확인했다.

부흥의 여정은 감동의 여정이었다. 부흥의 현장을 밟으며 나는 하나님께서 아직도 당신의 교회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흥의 현장에서 거듭 확인했다. 부흥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겸손하게 그분의 얼굴을 구하며 은혜를 사모할 때 이 땅에 부흥의 역사가 다시 전개될 것임을 확신했다. 부흥의 현장들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내 가슴은 부흥에 대한 기대와 열망으로 더욱 벅차올랐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부흥의 놀라운 파도가 다시 한번 세계를 돌아 1907년 놀라운 부흥을 경험한 평양에까지 이르기를 소망했다.

부흥을 위해 피를 토하듯 기도하는 ‘부흥꾼’들이 이 땅에 넘치기를 바란다. 잠든 사람들의 영혼을 깨우는 놀라운 부흥의 설교가들이 나오기를 기원한다. 주체할 수 없는 부흥의 감격속에 세상에 나아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기꺼이 담당하는 성도들이 넘치기를 소원한다. 이 부흥 리포트를 통해서 한국 교회 성도들과 다시 한번 일어나 부흥을 꿈꾸고 싶다. 부흥은 어제의 역사가 아니다. 바로 오늘 우리 시대에 경험할 놀라운 사건이다. 그 부흥을 사모하자!

◇박용규 교수는… 박용규(50) 교수는 역사신학자로 현재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며 한국교회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박 교수는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M.Div) 과정을 마쳤다. 그후 미국 포틀랜드의 웨스턴복음주의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M.A.)하고 시카고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대학원에서 역사신학으로 신학석사(Th.M.)와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1994년 저서 '초대교회사'로 신학자 대상,1996년에는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으로 한국기독교 출판대상 우수상,2005년에는 '한국기독교회사1?2'로 제2회 총신 학술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한국장로교사상사' '초대교회사' '근대교회사' '평양대부흥운동' '한국기독교회사' 등이 있다.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1) 역사속의 위대한 부흥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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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자료

역사 속의 위대한 부흥의 현장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세계를 흔들었던 30대 부흥 사건


기록 항목 순서

부흥과 영적 각성 분류/발흥연도/주도적 인물/발흥 지역


1. 사도행전 오순절 성령강림, 주전 30년, 120문도와 제자들, 예루살렘 마가 다락방

2. 비텐베르크와 루터의 종교개혁, 1517, 마르틴 루터, 독일 비텐베르크

3. 장 칼뱅과 제네바 부흥, 1541-1564, 장 칼뱅, 스위스 제네바

4. 낙스와 스코틀랜드 부흥, 1559-1572, 존 낙스, 스코틀랜드

5. 청교도 부흥, 1651-1683, 존 오웬과 번연 등, 영국과 옥스포드

6. 경건주의 운동과 영적 각성, 1675, 필립 스케너/프랑케, 프랑크 프랑트 암마인 할래 대학

7.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부흥, 1730-40, 진젠도르프, 독일

8. 제1차 대각성 운동, 1734-42, 조너선 에드워즈 외, 뉴잉글랜드 노댐프턴

9. 조지휫필드 부흥운동, 1740-68, 조지 휫필드, 미국 런던 웨일스

10. 웨슬리 부흥운동, 1744-84, 존웨슬리, 옥스퍼드

11. 18세기 웨일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부흥운동, 1740-60, 하월/해리스/다니엘/롤랜드 외, 웨일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12. 드와이트와 2차 대각성 운동, 1800-30, 디모티 드와이트 외, 예일대학

13. 찰스피니 부흥운동, 1824-37, 찰스 피니, 오버린 뉴욕 번 오버 디스트릭트

14. 1857년 부흥운동-뉴욕 정오 기도회, 1857, 제레미아 램피에르 외, 뉴욕에서 확산

15. 19세기 아일랜드 부흥운동, 1859, 장로교 총회, 아일랜드

16. 19세기 스코틀랜드 부흥운동, 1859, 맥체인/번즈, 스코틀랜드

17. 스펄전과 부흥운동, 1861-87, 스펄전, 런던

18. D.L. 무디 부흥운동, 1879-84, 무디/생키, 시카고 케임브리지

19. 웨일스 부흥운동, 1857/1903, 이반 로버츠, 웨일스

20. 인도 카시아 부흥운동, 1905-6, 다양한 사람들, 인도 카시아

21. 아주사 오순절 부흥운동, 1906, 윌리암 세이모어, LA 아주사

22.  에즈베리 부흥운동, 1915- , 스탠리 존스, 에즈베리 대학

23. 원산 부흥운동, 1903, 로버츠 하디, 원산

24. 평양 대부흥운동, 1907, 길선주, 평양과 한반도

25. 만주와 중국 부흥운동, 1908, 고포스와 중국 목사, 산둥성과 만주 일대

26. 백만인 구령 운동, 1909, 스톡스/갬블/리드, 개성

27. 빌리 선데이 부흥운동, 1920, 빌리 선데이 외

28. 로이드 존스와 근대 칼뱅주의 부흥, 1950-60, 로이드 존스, 웨스트민스터 채플

29. 빌리 그레이엄과 부흥운동, 1957-84, 빌리 그레이엄, 뉴욕 집회/LA 집회/1984년 서울집회

30. 1995년 휘튼 리바이벌, 1995, 휘튼 대학생, 휘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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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2) 최초의 부흥 오순절 성령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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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부흥,오순절 성령 강림.’

오순절 성령 강림은 최초의 부흥 사건이었다.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성령께서 공동체에 초자연적으로 임하셨고 죄에 대한 깊은 각성이 나타났으며 바로 그날 3000명이 회심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널리 퍼지는 전형적인 ‘부흥’의 표지가 확연히 드러났다.

최초의 부흥,오순절 성령 강림이 임한 곳은 예루살렘이었다. 감람산 언덕에서 바라본 예루살렘 성은 성지를 둘러싼 기독교와 이슬람의 투쟁의 역사를 그대로 대변하는 듯했지만 참으로 아름다웠다. 왜 예루살렘 성 주변에 그토록 많은 무덤이 즐비한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곳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약속과 성취가 계속된 구원사의 진원지였다. 예루살렘은 살렘 왕 멜기세덱의 성이자,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렸던 곳이다. 다윗이 아라우나 타작 마당에서 단을 쌓고 용서의 은총을 받은 곳도,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지속적으로 유월절 어린 양을 하나님께 드렸던 곳도 이곳이다.

예루살렘은 마치 잠 못 이루며 마음에 그리던 푸근한 내 영혼의 고향 같았다. 예수님의 체취와 인류 구원 역사가 그대로 살아숨쉬는 이 거룩한 도성,예루살렘을 거닐면서 그가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제자들이 주님의 약속을 기다렸던 곳은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이었다. 지금도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무리가 자주 눈에 띄었다.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실 때 멀찍이서 그를 좇아갔고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에 동행한 한 청년,성령의 감동으로 마가복음을 저술한 그가 마가라고 부른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베드로가 옥에서 나와 찾아갈 만큼 제자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이 경건한 여인 밑에서 자란 마가는 자기집 다락방에 임한 놀라운 오순절 성령 강림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사신이 되었다. 당시 마가의 집은 부유층 사람들이 몰려 있던 예루살렘 윗성에 위치하고 있어 근처에 가야바를 비롯한 상류층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주님이 최후의 만찬을 가진 마가의 집 2층에는 넓은 다락방이 있었다. 120명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게다가 마가의 집은 예루살렘 성전까지 걸어서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주님이 승천하신 후 120명의 문도는 주님의 약속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이곳에서 간절히 기도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주님이 승천하신 후 10일 동안 전심으로 주의 약속을 기다리며 기도했고 AD 30년 오순절날 주님은 약속하신 대로 놀라운 성령 강림의 은혜를 부어주셨다.

이 날은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오신 그 주님이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신 초실절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다. 겨울농사를 끝내고 여름농사를 시작하는 의미 있는 맥추절이자 종교적으로는 모세가 율법을 받은 이 역사 깊은 오순절에 보혜사 성령을 약속대로 부어주신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부흥’의 모델이었다. 누가의 증언대로 이 최초의 부흥,오순절 성령 강림에서 우리는 몇 가지 참된 부흥의 표지를 읽을 수 있다.

첫째,성령 강림에 대한 간절한 사모이다. 120명의 문도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고 한곳에 모여 신분과 나이와 성을 초월해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에 힘써 응답을 받았다. 누가가 증언한 대로 성령은 ‘얼마든지 부르는 자들’과 ‘구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의 선물이었다.

둘째,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 담대하게 선포되었다. 베드로가 이날 외친 메시지의 핵심은 오순절 성령 강림이 성별 연령 계층을 초월해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약속의 성취였고 성령 강림으로 마지막날이 임했으며 이제 초림과 재림 사이에 성령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선언이었다. 오순절 사건은 단순한 약속의 성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한 구속의 성취였고 신약의 교회 태동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셋째,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영적 각성이 나타났다. 베드로가 그곳에 모인 무리를 향해 ‘회개’ ‘세례’ ‘죄사함’을 촉구하자 천하 각국에서 모인 이들은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통회했다. ‘어찌할꼬’는 이들 가운데 임한 회개가 얼마나 강도 높은 것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성령 강림의 역사가 임하는 곳마다 철저한 통회와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다.

넷째,성령의 충만이 무리와 각 개인에게 임했다. 이날 120문도는 누가의 증언을 빌린다면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온 집에 가득”한 것을 경험했고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을 목도했으며 현장에 있던 이들 모두가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비상한 경험보다도 우리가 더욱 주목하는 것은 그곳에 모인 무리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성령 충만함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교회사에 나타난 참된 부흥이 임한 곳마다 사람들이 성령 충만을 받았다.

오순절 이후 복음이 놀랍게 전파되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그날 제자의 수가 3000명이나 더하였다. 주께서 구원 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 평소에도 주의 백성들이 교회에 영입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부흥의 날에는 헤아릴 수 없는 백성들이 교회로 영입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오순절은 존 스타트의 말대로 신약의 교회가 태어난 ‘교회의 탄일’이었다.

‘천하’에서 모인 백성들이 성령을 체험하고 열방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현대적인 의미를 빌린다면 선교 사역에 착수한 것이다. 오순절 성령의 능력을 충만히 받은 자들을 통해 복음은 예루살렘을 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놀랍게 확산되었다.

무엇보다 개인의 각성이 공동체의 각성으로 이어져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다. 믿음의 공동체 가운데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줬다. 또 마음을 같이 하여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떡을 떼고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만약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양적 성장만 있고 삶의 변화가 따르지 않았다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사람을 의지하던 이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바뀌었으며 제자들은 비로소 복음의 빚진 자의 심장을 갖고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곧 인류 전체에 구원을 선포한 사건으로 부흥의 이유와 근거를 구체적으로 예시했다. 초대교회 오순절 사건이 보여주듯 부흥은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이다. 성령의 임재 없는 부흥은 존재할 수 없다. 이 땅의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잠자는 영혼을 깨워 담대히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 만드시는 놀라운 능력을 경험했다.

부흥은 결코 특정 시대,특정인들에게만 주어진 약속이 아니다.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동일한 약속이다. 그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곳마다 어둠과 죄악의 도성,소돔과 고모라가 ‘예루살렘’으로 바뀌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이여! 어서 속히 이 땅에 임하소서.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3) 무디 부흥운동의 시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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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디 부흥 운동만큼 20세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신앙운동도 드물 것이다. 1875년부터 4반세기 동안 미국과 영국을 영적으로 뒤흔들어 놓았던 무디 부흥 운동의 중심무대는 미국 시카고다. 이곳은 필자에게는 매우 낮익은 곳이다. 5년간 이곳에서 유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시카고는 마치 제2의 고향과도 같다. 무디 부흥 운동의 발자취를 찾아 다시 시카고를 찾은 것은 2005년 여름이었다.


우리 일행을 태운 차가 무디성경학교를 찾아 시카고 다운타운을 향해 달리는 동안 하이웨이 위에서 바라본 시카고의 전경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한 폭의 예술작품으로 눈앞에 다가왔다. 미국에서 가장 높다는 시얼스 타워를 중심으로 크고작은 마천루들이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을 그리고 있는 시카고 다운타운의 모습은 도시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왜 건축가들이 시카고를 예찬하는지 알 수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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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100년전 무디가 활동하던 시대의 시카고 모습을 상상하며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무디의 체취가 가득 남아 있는 무디성경학교로 향했다. 무디성경학교 안에는 무디박물관이 있어 19세기 하반기에 영적 각성과 해외 선교 운동을 이끈 무디의 생애와 업적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무디는 참으로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무디는 1837년 매사추세츠 노스필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10세도 채 되기 전 하루에 1센트를 벌기 위해 이웃집 소를 데리고 들에 나가 풀을 뜯겨야 했다. 초등학교를 간신히 마친 무디는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홀어머니 밑에서 8명의 가족과 함께 힘겹도록 가난과 싸웠다.

정상적인 교육을 포기한 무디는 1854년 17세 때 보스턴에 있는 자신의 삼촌 홀톤스의 구두가게에 취직했다. 여기서 일하던 1855년 4월21일,그에게 일생 일대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이날 그가 다니던 교회의 교회학교 교사 에드워드 킴볼이 구두가게를 찾아와 일에 지친 그에게 따듯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전한 것이다. 주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이후 무디의 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내가 회심한 그날 오전 밖으로 나갔을 때 나는 태양과 새들,그리고 모든 것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

무디는 1년 후 시카고로 이주하여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사업에 성공해 연 1000파운드의 수입을 올릴 수 있었지만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는 일에 온전히 헌신하기로 다짐했다. 거리에 방황하는 수백 명의 도시 젊은이들이 무디의 설교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현숙한 아내 유그노 에마 레벨은 그의 사역에 동력을 제공했고 아름다운 음성을 지닌 젊은 공무원 생키와의 만남은 무디의 사역을 완전히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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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디가 시카고 빈민가에 설립한 교회는 생키가 합류하면서 영적 품격을 달리 했다. 영혼을 살리는 생키의 찬양이 동반된 무디의 부흥집회는 무디를 일약 대표적인 부흥 운동의 지도자로 만들었다. 생키의 찬양을 통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연 회중은 3R,곧 죄로 인한 타락(Ruin by Sin),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Redemption by Christ),성령에 의한 중생(Regeneration by the Holy Spirit)으로 대변되는 무디의 선명한 메시지를 듣고 회개와 구원의 은총으로 눈물을 흘리며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복음의 열정에 불타던 무디는 두 차례 영국에 전도 여행을 떠났다. 조직도,자금도 준비되지 않은 채 영국 리버풀에 도착한 무디와 생키는 은혜로운 찬양과 서민적이면서도 강력한 복음 메시지를 통해 리버풀 요크 뉴캐슬 런던에 이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까지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무디의 집회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임했고 그의 설교는 청중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한 영국인이 고백처럼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알겠다는 매우 뜨거운 열정을 느끼지 않고는 결코 무디의 설교를 들을 수 없었다” 무디와 생키로 인해 버밍엄에서도 부흥의 불길이 그 도시에 있는 거의 모든 회중에게 옮아붙는 듯했다. 평이하면서도 결단을 촉구하는 무디의 메시지는 수많은 영혼을 깊은 잠에서 깨웠다.

무엇보다 수많은 젊은이가 무디의 선명한 메시지를 듣고 해외선교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1882년 11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열린 무디의 집회는 학생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수많은 학생이 눈물을 흘리며 세계 선교에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7명의 케임브리지 대학 졸업생이 화려한 장래를 뒤로 하고 중국 선교를 자원한 것도 이때였다. 그 현장을 방문했을 때 열정을 토하는 무디의 설교와 기도의 함성이 12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내 귓전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다.

무디 부흥의 영향은 참으로 놀라웠다. 무디는 무디성경학교와 마운트 헐몬 학교를 통해 수많은 그리스도의 일꾼을 양성하고 존 모트와 로버트 윌더를 비롯한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의 가슴에 해외 선교의 불을 지폈다.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역시 무디 부흥의 산물이었다. 수많은 젊은이가 무디의 설교를 듣고 해외 선교를 자원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미국은 영국을 앞지르고 해외 선교 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1900년 4000명에 불과했던 미국 선교사 수는 4반세기가 지난 1925년에는 1만4000명으로 급증,영국을 훨씬 앞질렀다.

무디의 부흥은 세계 근대 선교를 앞당겼다. 무디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복음에 불타 5대양 6대주로 달려갔다. 그중에 아시아는 선망의 선교지였고 조선은 가장 선호하는 나라였다. 돌이켜볼 때 무디 부흥의 가장 큰 수혜자는 조선이었다.

제임스 게일을 비롯해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무디 부흥 운동의 영향을 받고 은둔의 나라 조선으로 달려왔던가! 1888년 게일이 한국을 향해 북미를 떠나기 바로 전날 51세의 무디는 게일의 어깨를 두드리며 미지의 나라로 향하는 한 젊은이를 이렇게 격려했다. “자네 조선으로 간다지. 내 자네를 위해 기도할 걸세,”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의 주역 마포삼열,윌리엄 블레어,그레이엄 리,스왈른,찰스 번하이젤,윌리엄 헌트 역시 무디 부흥을 경험하고 복음의 열정에 불타 조선으로 달려왔다. 이들은 이 땅에도 거룩한 부흥이 임하기를 사모하며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부흥을 꿈꾸는 무리가 구름처럼 생겨났고 마침내 평양과 한반도 전역의 교회가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다.

비록 무디는 한번도 이 땅을 밟은 적이 없지만 그의 흔적은 1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에도 한반도 구석구석에 깊게 배어 있다. 하나님은 비천한 자를 들어 위대한 역사를 이루신 것이다. 지금 이 땅의 교회는 제2의 무디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다. 오 주님,그같은 인물을 어서 속히 보내주소서!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4) 휘튼대학 1995년의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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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튼대학(Wheaton College)은 20세기 캠퍼스 부흥을 이끈 주역이었다. 1936년부터 여러 차례 부흥을 경험한 휘튼대학은 1995년 또다시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였다. 이 부흥의 불길은 미 전역의 대학으로 확산되어 잠자고 있던 수많은 학생들을 깨웠다.

시카고에서 자동차로 서쪽을 향해 1시간 가량 달리다보면 아담하면서도 깨끗한 도시 휘튼을 만난다. 이곳은 세계적인 기독교 대학 가운데 하나인 휘튼대학이 위치하고 있어 도시명보다 대학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이곳은 유학시절부터 필자에게 매우 낮익은 곳이다. 자료수집차 여러 차례 방문했고 같은 신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상당수의 휘튼대학 졸업생들을 통해 이 대학의 영적 분위기가 어떤지 알고 있었다. 게다가 필자의 지도교수 우드브리지 박사를 비롯하여 상당수의 신학교 교수들이 이 학교 출신이었다.

휘튼대학은 지난 반세기가 넘게 미국 캠퍼스 부흥의 진원지였다. 휘튼대학이 처음으로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것은 1936년이다. 회개를 동반한 강력한 성령의 불이 학생과 교수는 물론 온 캠퍼스를 휩쓸었다. 그 강권적인 역사 앞에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수년 후 1943년과 1948년 휘튼대학에 다시 놀라운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났다. 그 영적 각성은 수업을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캠퍼스에는 말씀과 기도와 회개와 간증이 2주간 계속됐다.

이 부흥으로 졸업생 3분의 1 이상이 자신의 생을 주께 바치기로 다짐했다. 에콰도르 순교자로 널리 알려진 짐 엘리어트를 비롯한 수많은 졸업생들이 복음을 들고 전 세계로 흩어진 것은 이때였다. 휘튼대학은 1950년과 1970년에도 부흥을 경험했다.

1995년 봄 놀라운 부흥이 또다시 휘튼 캠퍼스에 임했다. 최근 다시 놀라운 부흥을 경험한 휘튼을 향하는 나의 마음은 기대감으로 벅차올랐다. 실제로 휘튼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영적 분위기는 특별했다. 그 강도는 영적으로 둔감한 사람도 인식될 만큼 강력했다. 우리 일행이 도시에 들어섰을 때 성령이 온 거리를 압도하고 계시는 느낌을 받았다. 거리를 지나면서 유난히 교회가 자주 눈에 띄었고 계속된 부흥의 영향으로 도시에서 술집을 찾아볼 수 없었다.

휘튼대학 캠퍼스 구석구석까지 영적 냄새가 깊숙히 배어 있었다. 휘튼대학 캠퍼스 한가운데는 이 학교의 교훈인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위하여’(for Christ and His Kingdom)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나는 한동안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 순간 주님의 말씀이 내 귀에 들리는 듯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얼마나 많은 20대 젊은이들이 이 꿈을 먹으며 거룩한 비전을 가슴에 품고 세계를 향해 달려갔던가! 지난 20세기 휘튼대학은 수많은 신학자 목회자 선교사 교계지도자,그리고 사회 각층의 평신도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도 이 대학 출신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휘튼대학은 현대 각성 운동의 보루였다.

우리 일행은 캠퍼스 구석구석을 누비며 부흥의 흔적과 역사를 추적해 나갔다. 빌리 그레이엄 센터와 휘튼대학 도서관에서 휘튼대학 공동체가 경험한 놀라운 부흥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빌리 그레이엄 센터에 걸려 있는 수많은 부흥 관련 사진들이 휘튼의 역사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대학 채플에 들어서자 10년 전 그곳을 가득 메운 1000여명의 휘튼대학생들이 부르짖은 기도의 함성이 쟁쟁하게 귓전에 들리는 듯했다.

1995년 부흥집회 녹화 테이프를 보면서 휘튼에 임한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생생하게 접할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 발견한 당시 휘튼대학 학보(學報)는 온통 휘튼에 임한 부흥의 소식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주님은 가는 곳마다 필요한 자료를 만나게 하셨고 증언자들을 예비해두셨다. 전혀 예기치 않게 도서관에서 당시 휘튼대학 4학년 학생으로 1995년 부흥을 직접 경험한 한 미국 젊은이를 만났다. 지금은 이 대학 박사과정에 재학중이었다.

그는 10년이 지났는 데도 너무도 생생하게 그 순간을 전해주었다. 마치 불과 며칠 전에 경험한 일처럼…. 그는 상기되어 있었다. 그의 모습에서 부흥의 역사적 현장에 서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그를 감격스럽고 자랑스럽게 만들고 있는지 잘 읽을 수 있었다.

강력한 회개,성령의 비상한 임재,부흥에 대한 목마름,공개적인 죄의 고백에 이르기까지 그가 전하는 휘튼부흥은 100년전 우리가 경험한 평양 대부흥과 너무도 유사했다.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그가 들려주는 증언을 들으면서 얼마나 강력하고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휘튼에 임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1995년 3월19일부터 23일까지 열린 저녁집회에 임한 성령의 역사는 5월7일까지 6주 동안 휘튼대학 캠퍼스를 휩쓸었다. 그 불을 가지고 온 사람은 텍사스주 브라운우드의 하워드 페인 대학교에서 온 브랜디 맥과이어와 제임스 한이었다. 이 두 학생의 간증은 수백 명의 휘튼 대학생들을 깊은 감동으로 몰아넣었다.

한 여학생이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자 마치 뇌관이 폭발하듯 죄의 고백과 회개를 동반한 무서운 영적 폭풍우가 휘튼대학에 몰아쳤다. 그곳에는 일부러 감정을 자극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없었다. 그런데도 수십 명의 학생들이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간증 순서를 기다리며 서있었다. 이튿날 아침 6시가 되어도 집회가 끝날 줄 몰랐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휘튼에 임한 것이다. 이같은 성령의 역사는 집회 기간 내내 이어졌다. 그 현장에 참여했던 한 학생의 고백대로 그들은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 줄도 알지 못했으며 이전에 전혀 경험하지 못한 신비한 영적 체험을 했다. 죄에 대한 철저한 고백과 회개,그리스도 안에서의 용서,하나님과의 화목,삶의 변화가 휘튼대학 공동체에 임했다. 휘튼대학 공동체는 “의심할 바 없이 영적 각성의 한 시대 가운데 서있었다.”

성령께서 휘튼대학에 임하면서 공동체에는 뚜렷한 변화가 찾아들었다. 이웃에 대한 사랑,불신 영혼을 향한 간절한 중보기도,인종간의 화해가 캠퍼스를 지배했다. 또한 캠퍼스에 지속적인 기도 모임,말씀 읽기와 연구에 대한 사모함,해외 선교에 대한 관심,기도 열기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학생들은 캠퍼스 밖과 벤치,잔디,복도와 수업 전후 빈 강의실에서 삼삼오오 모여 기도회를 가졌다. 무엇보다 놀라운 일은 부흥을 경험한 휘튼대학생 가운데 200∼300명이 강단으로 나와 자신의 생애를 해외 선교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부흥을 경험한 휘튼대학생들이 미국내 대학 캠퍼스로 흩어지면서 부흥은 요원의 불길처럼 미 전역으로 놀랍게 확산되었다. 1995년 3월19일에서 23일까지 티오른 휘튼대학 부흥의 불길은 얼마 후 애즈베리와 무디,예일을 비롯한 수많은 대학으로 옮겨 붙었다.

부흥은 이들 미국 대학만의 전유물이나 특권일 수 없다. 부흥은 결코 지나간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지금 지구 한쪽에서 임재하고 있고 현재 이 땅의 교회가 경험하고 있으며 또 경험할 수 있는 축복이다.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지만 아무 곳에나 임하지 않고 사모하는 곳에 임했다.

이제 머지않아 한국의 수많은 대학도 휘튼대학에서 일어난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공유하는 날이 올 것을 소망한다. 2005년 11월15일 대전 카이스트 캠퍼스에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임하여 전에 없는 변화가 캠퍼스에 일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영적 각성에 가장 민감한 젊은 세대들이 일어날 때 한국 교회와 민족의 미래에 소망이 있다. 오 주님,이 땅의 젊은이들이 잠에서 깨어나 캠퍼스마다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게 하소서!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5) 루터의 회심‘95개조 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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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경건은 율법적 중세 가톨릭 경건으로부터 복음적 프로테스탄트 경건으로 전환됐다.

진리에 눈을 뜨기 시작하자 그의 눈에 진리의 서광이 비치더니 그의 가슴이 성령으로 불타올랐다. 성경 연구를 통해 진정한 회개,죄와 은총,문자와 영,율법과 복음을 선명하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가슴과 양심에 호소하는 그의 신학은 앙상한 뼈만 남은 스콜라주의 신학과 달랐다.
강한 확신과 인격적 회심이 그의 신학을 생명력 있게 만들었다.

루터의 모든 영성의 원천은 성경과의 만남을 통해 재발견한 성경의 진리였다.
칭의론의 재발견은 루터의 사상을 완전히 바꾸어놓았고 그를 개혁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은총론을 파괴하는 면죄부 판매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긴 고민과 숙고 끝에 어느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저항할 수 없는 신앙 양심에 따라 자신의 결심을 실천에 옮겼다.

1517년 10월31일 낮 12시,루터는 면죄부 판매 오용에 대한 부당성을 포함한 ‘95개조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당문에 라틴어로 게재했다.

루터가 95조를 내걸 때 누구도 그것이 인류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종교개혁의 시발점이되리라고 예견하지 못했다. 95개조는 불과 14일만에 독일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다시 몇주만에 유럽 전역을 접수했다. 제임스 번즈가 말한 “복음주의 기독교의 부흥”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 거룩한 빛을 향해 달려갔다.
유럽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종교개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루터는 원하던 원치 않던 개혁의 선봉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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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은 인류 역사의 위대한 진보이면서 동시에 강력한 영적 부흥이었다. 기독교 역사상 이처럼 중요한 사건은 없었다. 이 중요한 사건의 역사적 무대는 독일이었고 그 중심 무대는 비텐베르크였다.

우리 일행이 비텐베르크에 도착하자 그곳은 온통 루터의 발자취로 가득차 있었다. 루터박물관 비텐베르크성교회 비텐베르크시교회 루터하우스 멜랑히톤하우스 비텐베르크광장들과 심지어 비텐베르크 표지판에도 ‘루터의 도시’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500년이 거의 지난 지금까지 비텐베르크 거리는 물론 골목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당시 종교개혁의 본산지 비텐베르크는 작센의 엘베 강둑의 메마르고 척박한 지역에 위치했던,인구 3000명의 가난하고 초라한 마을이었다. 이곳은 문화의 변두리에 위치해 있어서 예절도 잘 모르는 야만적인 곳이었다. 루터는 그 마을을 떠나고 싶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비텐베르크에 대학을 세운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실소를 터뜨렸다. 5세기가 지난 지금도 비텐베르크는 여전히 낙후된 지역이다. 도시는 참으로 작고 초라했다. 도시를 조금 벗어나자 전형적인 독일 농촌이 나타났고 도로는 좁고 구불구불한 옛 모습 그대로였다. 지금도 초라한 데 루터 시대에는 얼마나 심했겠는가.

하지만 작고 초라한 시골 마을 베들레헴에서 구주가 탄생한 것처럼 이 보잘것 없는 마을에서 인류 역사의 분기점,종교개혁이 태동되었다. 이 부흥의 불길을 댕긴 사람은 작센의 한 농부의 아들 마르틴 루터(1483∼1546)였다. 그는 1483년 독일 작센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나 63세 되던 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우리 일행이 아이슬레벤을 찾았을 때 루터의 체취가 아직도 도시 구석구석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가 태어난 집이 놀랍게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고 집 입구에 루터 흉상이 세워져 있어 생가인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그가 세례를 받았던 교회,그가 마지막 설교를 했던 교회,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났던 집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루터의 체취가 가득 남아 있는 고향 아이슬레벤 거리를 걷자니 500년의 시공을 훌쩍 뛰어넘어 내 자신이 루터와 같은 시대에 거리를 걷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루터의 부모는 무척 가난했지만 정직하고 부지런하며 경건했다. 루터는 어린 시절부터 경건한 훈련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18세에 독일의 명문 에어푸르트 대학에 입학하는 영광을 얻었다. 언덕 위에 우뚝 세워진 에어푸르트 대학의 웅장한 모습이 찬란했던 그 옛날의 명성을 보여주는 듯했다. 20세 때 루터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라틴어 성경을 접했다. 그후 그의 손에는 항상 성경이 들려 있었다.

1502년 문학사를 마치고 1505년에 에어푸르트 대학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한 루터는 부친의 소원에 따라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법학을 중단하고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가 머물렀던 수도원에는 지금도 루터의 흔적이 수도원 곳곳에 배어 있었다.

기도와 금식,밤샘, 그리고 스스로를 자학하면서 구원의 길을 찾던 루터는 요하네스 폰 스타우피츠를 만나면서 새로운 진리의 빛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성경연구와 고전연구는 루터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눈을 열어주었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루터는 기사의 복장을 한 채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루터가 머물렀던 기사방과 성경을 번역했던 장소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우리 일행은 바르트부르크 성을 둘러보고 루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가톨릭 사제들의 전유물이었던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민중의 손에 들려주자 사람들은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 각성하기 시작했다. 성경이 출간된지 불과 수년만에 라틴 벌게이트(Vulgate) 성경을 읽었던 사제들보다 더 많은 평신도 독자들을 갖게 되었다. 1년만에 종교개혁 이전 15세기 동안 필사되었던 것보다 더 많은 성경이 독일과 유럽 전역에 유포되었다.

성경적 기독교의 재발견으로 마르틴 루터는 사도 바울 이후 누구도 갖지 못했던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루터의 가르침은 비텐베르크 대학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진리가 그들의 가슴에 심어지자 그 영향력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동료 교수들도 루터의 개혁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리하여 비텐베르크 부흥의 불길은 작은 시골 마을 비텐베르크에서 독일어권 전역으로,다시 전 유럽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었다.

루터는 자신의 성경적 교리의 재발견을 통해 근대 부흥의 길을 닦아놓았다. 루터 개인의 성경적 기독교의 재발견과 영적 각성이 종교개혁의 위대한 원리를 창출했고 교리적 재발견은 영적 각성의 위대한 힘으로 작용했다. 루터의 개혁정신이 살아움직이고 그가 외친 칭의론이 선포되는 곳마다 놀라운 부흥이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확실히 루터는 근대 영적 각성의 선구자였고 종교개혁은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려는 깊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박용규 교수 [2006.04.16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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