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전 3:1∼7).
전도서의 기록이다.
전도서의 기록이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극동방송에서 ‘하나되게 하소서’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을 무렵
국민일보로부터 ‘역경의 열매’를 집필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나와 함께 일하던 기독여성 문인들이 역경의 열매를 썼으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나이 쉰도 안 된 마흔 중반에 간증을 한다는 것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뿐이라 일흔이 넘으면 쓰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대로 일흔이 넘어 이제 말할 때가 된 것이라 생각하고
조심스런 마음으로 이 글을 집필하게 됐다.
나는 세상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교회와 함께했고
하나님과 함께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모태신앙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태어날 무렵은 일제 말기 일본제국주의의 압박이 심했던 때였다.
내가 살고 있던 충남 논산 양촌면 석서리 산골에는 30여호가 오순도순 살고 있었지만
집집마다 가난에 찌들어 보릿고개를 넘기기가 아주 힘들었다.
게다가 대전중학교 장학생으로 다니던 오빠가
방학 때 집에 왔다가 뽕나무에서 떨어져 척추를 다치는 사고를 당했다.
이후 오빠는 5년여를 고생하다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으니
어머니는 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페니실린만 있었어도 살 수 있었는데, 오빠가 떠난 뒤 페니실린이 나왔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유교사상이 강하게 젖어 있던 시기여서
아들을 잃어버린 것은 어머니에게는 온 우주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거다.
이렇게 참담했던 시기에 복음은 어머니에게 새로운 천국 소망이 됐고
이는 절대 신앙으로 자리할 수밖에 없었다.
1907년 양촌에 세워진 감리교회 신원희 전도사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어머니께서
하나님을 만나고부터는 한탄이 찬양이 되고 눈물이 감사로 변했다.
단아한 모습으로 안경을 끼고 성경을 상 위에 올려놓고 읽으시는 어머니 모습이
내 뇌리에 각인돼 있고 주일이면 어른은 어른끼리 처녀는 처녀들끼리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일열 종대로 서서 논둑길을 따라가다 강을 건너고
그리고 소래개재를 넘어 찬송가를 부르며 양촌감리교회를 갔던 모습이
지금도 아련히 천국행렬처럼 머리에 남아 있다.
그때 주로 불렀던 찬송가는 ‘예수 사랑하심은’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등이었다.
그러나 교회에 가면 어린이들에게는 주일학교 찬송을 따로 가르쳐 주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는 찬송이 있다.
“조그마한 주먹이라/ 너희들이 흉보지만/ 이래봬도 어림없다/ 단단하다 튼튼하다/
나는 나는 이 주먹을/ 기운차게 휘둘러서/ 삼천만민 위하여서/ 줄기차게 싸우련다.”
지금도 잊을 수 없었던 또 하나의 기억은 풍금이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었던 또 하나의 기억은 풍금이었다.
어떻게 그런 나무상자 속에서 그렇게도 은혜로운 소리가 울려퍼질 수 있는지,
너무나도 황홀해서 풍금 주위를 떠나지 못하고 맴돌았던 기억이 새롭다.
풍금소리와 찬송가로 나의 유년은 은혜로 덮였고
하나님의 축복이 어머님의 기도처럼 내 머리위에 넘쳤다.
<약력> 1944년 충남 논산 양촌 출생,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연세대연합신학대학원 기독교교육학과 졸업,
미국 미드웨스트대 명예문학박사, 호서대 교수 역임, 현 대전대 석좌교수,
한국문화예술총연합회장, 신촌성결교회 권사.
저서로는 시집
‘그대는 별로 뜨고’
‘지난날 그리움을 황혼처럼 풀어놓고’
‘마음속에 뜬 별’
‘하나님의 편지’
‘그대는 나의 가장 소중한 별’ 등
10여권과
수필집 ‘사랑 하나 별이 되어’
‘초록빛 생명’등이 있다.
극동방송 ‘하나되게 하소서’, CBS ‘새롭게 하소서’를 진행했고
현재 CTS에서 ‘영상시’를 낭송하고 있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