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한국문화

선조 (宣祖) ..목릉(穆陵)

영국신사77 2014. 2. 8. 09:40

 非山非野 2009.07.16 14:19

 

 

 

                                              선조                        宣祖

 

 

 

 

 

 

 

 

 

 

 

조선의 14대 왕이다. 참으로 한심했던 王..... 그럼에도 그의 재위기간은 41년이나 되었다. 조선시대 왕(王) 가운데 고종(高宗)과 함께 무능(無能)한 왕으로 알려진 선조(宣祖),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정여립(鄭汝立) 사건과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였고, 이후 조선사회는 무너져 내렸다. 최근에 와서 선조(宣祖)가 무능한 왕이 아니었다는 복권(?)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기존의 부정적인 인식을 뒤집기에는 반론(反論)이 약하다. 과연 선조는 무능한 왕이었을까 ?  

 

 

 

 

 

                            

                                

 

         

조선왕조 500여 년간 왕위에 오른 사람은 모두 27명이다. 이 가운데 왕의 적장자(嫡長子) 혹은 적장손(嫡長孫) 출신으로 정통성(正統性)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사람은 겨우 10명에 불과하였다. 나머지 17명의 왕은 세자(世子)의 책봉 과정이나 왕위 계승에 있어서 원칙에 맞지 않는 비정상적(非正常的)인 계승자이었다.  

 

 

조선왕조에서 왕(王)의 직계가 아닌 왕실의 방계(傍系)에서 처음 왕위를 계승한 사람은 발 선조(宣祖)이다. 선조(宣祖)는 중종(中宗)의 서자(庶子)이었던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이었으니 아마도 태어나는 순간에는 왕이될 운명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친부(親父)인 덕흥군은 제11대 왕 중종(中宗)의 일곱 째 아들로, 중종의 후궁인 '창빈안씨(昌嬪安氏)'의 소생이었다. 

 

 

선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받았던 봉작(封爵)은 하성군(河城君)이었다. 원래 이름은 균(鈞)이었으나, 명종(明宗)의 아들인 '순회세자'의 이름이 '부'였기 때문에 항렬자를 따라 '연'으로 고쳤다. 선조는 왕실의 방계(傍系)로서 대통(大統)을 계승하였으므로 친부(親父)인 덕흥군(德興君)은 대원군으로 추존된다. 바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다.         

 

 

 

 

                                                                   

                                                                     선조(宣祖)의 컴프렉스

 

 

 

 

 

 

적장자(嫡長子)승계가 원칙이었던 조선시대, 선조(宣祖)는 조선 최초의 방게혈통(傍系血統)이었다. 선조는 적자(嫡子)도, 장자(長子)도 아니었다. 선조는 이러한 자신의 약점을 만회하기 위하여, 이미 죽은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묘(墓)를 굳이 덕릉(德陵)이라고 주장한다. 지금도 덕릉고개라고 부른다.

 

 

 

 

                                                                        조선 최초의 방계 혈통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인종(仁宗)을 독살하고, 그의 아들 명종(明宗)이 즉위한다. 명종도 후사(後嗣)가 없이 죽자, 명종의 부인 인순왕후 심씨는 덕흥대원군의 아들 하성군(河城君)을 양자(養子)로 받아들이고 즉위시켜 수렴청정을 한다. 선조(宣祖)이다.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 중종(中宗)은 모두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문정왕후(文定王后) 등 정실(正室)에게서는 인종과 명종을 낳았으며, 나머지 후궁들에게서 7명의 왕자를 얻었다. 덕흥군은 그들 서자(庶子) 중의 막내인 일곱째 아들이었다. 완전한 방계(傍系)이었다.  

 

 

방계(傍系) 혈통이라는 선조(宣祖)의 약점은 열등감이 되어 뒤늦게 얻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세자(世子)로 삼기 위하여 총명한 광해군(光海君)을 핍박하다가 갑자기 죽어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이 즉위한다. 4살에 불과하였던 영창대군(永昌大君)에 대한 선조(宣祖)의 집착은 광해군(光海君)시대 그리고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의하여 피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만다. 

 

 

그리고 이러한 열등감(劣等感)에 신하들에게도 작용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의 공신(功臣)들인 이순신(李舜臣), 유성룡(柳成龍), 김덕령(金德齡)장군 들에 대하여 시기(猜忌), 질투(嫉妬) 끝에 죽이거나 파직(罷職)시킨다. 그들의 공(功)이 결국은 자신의 공(功)이 되는 것인데...개인적인 열등감은 피바람을 불러 왔고, 나라의 충신들을 죽였으며, 조선에서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시작되는 단초를 제공하고 말았다.

 

 

 

 

 

 

        

 

 

선조(宣祖)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명종(明宗)이 34세라는 젊은 나이로 후사(後嗣)가 없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윤원형(尹元衡) 일파의 득세로 왕다운 노릇 한번 제대로 못했던 명종에게는 일찍이 '순회세자'가 있었지만, 1563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죽는 바람에 후계자가 없었다.   

 

 

 

                 

                                        명종(明宗)은 과연 선조(宣祖)를 후계자로 ?

 

 

 

 

하성군(河城君)이 선조(宣祖)가 되어가는 과정 및 배경은  선조실록, 광해군일기, 연려실기술 등에 잘 묘사되어 있다. 명종은 여러 왕손들 가운데에서 자신의 후계자를 찾고 있었다. 하루는 왕손(王孫)을 교육하다가 ' 너희들의 머리가 큰가 작은가 알아보려 하니 익선관(翼善冠)을 써보아라 '고 하였다. 다른 왕손들과 달리 하성군(河城君)은 제일 어린 나이이었는데, 두 손으로 익선관(翼善冠)을 받들고는 쓰지 않고, 어전(御前)에 도로 갔다 놓으며, ' 이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 쓸 수있는 것이겠습니까 ? '라고 말하였다. 

 

 

어린 하성군(河城君 .. 후일 선조)의 말을 들은 명종은 기특하게 생각하며 마음 속으로 왕위를 전해줄 뜻을 정했다고 한다. 남달리 선조를 총애한 명종은 한유명, 정지연을 사부(師傅)로 삼게 하고 학업에 매진하도록 배려했다. 1567년(명종 22년) 6월 28일 갑자기 쓰러진 명종은 의식을 회복ㅎ지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숨을 거두기 직전,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을 비롯한 대신들이 의식(意識)이 희미한 명종에게 후사(後嗣) 결정을 종용하였고, 말을 하지 못하는 명종은 간신히 한 손을 들어 안쪽 병풍을 가리켰다.

 

 

이준경(李浚慶)은 명종의 마지막 손짓이 내전(內殿) 즉, 중전에게 물으라는 것으로 해석하였고, 중전은 병풍 안에서 일찍이 명종이 위독했을 때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 하성군(河城君)을 후계자로 정했다고 말했다. 순회세자를 잃은 후 명종(明宗)은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후계자를 공식적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나라의 국본(國本)이 정해지지 않자 주변의 신하들은 명종을 무던히도 괴롭혔을 것이다. 명종이 후계자를 공식적으로 지명하지 않은 것은 본인이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날줄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시대에 후계자가 공식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왕이 사망하였을 경우 후계자를 지목할 권한은 대비(大妃)나 중전(中殿)에게로 넘어가는 것이 수순이었다. 당시 하성군(河城君)뿐만 아니라 여러 후보들이 있었지만, 나이 어린 '하성군'은 두 명의 친형을 비롯하여 여러 왕손(王孫)들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 표면적으로는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지만, 진정 그를 총애한 사람은 명종의 비(妃)인 '인순왕후(仁順王朽)'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림정치 (士林政治)의 확립

 

 

 

 

 

1567년 명종이 후사(後嗣)없이 죽자 선조(宣祖)가 즉위한다. 이 무렵은 성종 때부터 중앙정치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士林)이 정계를 주도할 있을만큼 성장하였던 시기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선조(宣祖)는 주자학(朱子學)을 장려하고 사림(士林)을 널리 등용하였으며 스스로 학문에 힘써 강연(講筵)에서 이퇴계, 이율곡, 성혼 등 대유학자들과 경사(經史)를 토론하였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화(禍)를 당한 조광조(趙光祖)를 신원(愼怨)하고, 유교사상의 확립을 위하여 명유(名儒)들의 저술과 경서(經書)의 간행에 힘써 주자대전(朱子大典)의 교정본을 간행하고, 현량과(賢良科)를 다시 설치하여 인재들을 발굴,등용한다. 

 

 

한편 조선 초부터 명(明)나라와의 외교문제가 되고 있던 즉, 명나라의 태조실록, 대명회전(大明會典) 등에, 이성계(李成桂)가 고려(高麗)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아들과 함께 4명의 왕을 살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수정하기 위하여 주청사(奏請使)를 거듭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1584년 황정욱(黃廷彧)이 증찬된 대명회전(大明會典)의 수정(修正)된 조선관계 기록의 등본을 가져옴으로써 종계변무 (宗系辨誣)의 목적을 달성하였다,1589년 성절사 윤근수(尹根壽)가 " 대명회전 " 전질(全帙)을 받아 옴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선조가 즉위한 이후 조정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숙청된 이른바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물러나 있던 인물들이 정계에 속속 복직하기 시작하였다. '명종'이 불러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 '톼계 이황(退溪 李滉)'은 선조(宣祖)가 즉위한 다음 다인 7월에 예조판서 겸 지경연사로 임명되었고, 조광조(趙光祖)의 제자인 백인걸(白仁傑)이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 

 

 

반면에 '명종'과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비호 아래 정권을 농락하던 윤원형(尹元衡) 등 권신(權臣)들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선조의 등극으로 신진사류인 사림(士林) 세력이 정권을 잡았지만, 선조 초반에는 명종의 고명(誥命)을 받은 이준경(李浚慶)과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아우로 외척(外戚)을 대표하는 심의겸(沈義謙)이 핵심 세력이었다. 결국 이들 간의 알력(軋轢)은 향후 정치적 파란을 몰고 올 수 밖에 없었다.   

 

 

 

 

                                          

                                                    

                                                                  붕당정치 (朋黨政治)의 시작

 

 

 

 

 

16세기까지 행하여졌던 척신정치(戚臣政治)는 선조(宣祖)의 즉위로 일단 외형적인 종식(종식)이 이루어졌다. 명종(明宗) 때에는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윤원형(尹元衡)의 세력이 집권함으로써,명종의 외척인 심의겸(沈義謙) 계열은 기대승, 윤두수 등 신진세력과 결합하고 있었는데. 명종이 세자책봉도 없이 갑자기 죽어 선조가 즉위하자, 강력한 공신집단이나, 외척집단이 형성되지 못하고 붕당(朋黨)이라는 형태로 존재하게 된다.  

 

 

사림(士林)은 이 기회에 대거 중앙정계로 진출하며 정국의 주도권을 잡지만, 척신정치( 戚臣政治) 아래서 성장한 구신료(舊臣僚)들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다.  명종때 소윤(少尹)세력이 우세한 상황에서 심의겸(沈義謙)의 도움으로 정계에 진출한 사림(士林)들인 전배(前輩)들은 '심의경'의 사림(士林)을 동조자로 받아들이고, 구체제(舊體制)를 옹호하고 있었다. 반면 선조 때에 진출한 사림은 후배(後輩)가 되어 전배(前輩)들의 구체제 지향을 반대,견제하게 된다.여기서 동인, 서인(東人,西人)으로 갈라지게 되고 이는 결국 조선의 사색당쟁(四色黨爭)으로 이어지게 된다.

 

 

 

 

 

 

 

 

 

 

선조 5년인 1572년 2월, 이조정랑(吏曺正郞) '오건(吳健)'이 자신의 후임으로 신진사림(新進士林)을 대표하는 김효원(金孝元)을 추천하였다.' 김효원'은 퇴계 이황과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문과에 장원급제한 수재이었다. 그 당시 심의겸(沈義謙)은 이조참의(吏曺參議)로 있었는데, 김효원(金孝元)이 '이조정랑" 자리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였다.  

 

 

심의겸(沈義謙)이 김효원(金孝元)을 반대한 이유는, 과거에 '김효원'이 권신(權臣)인 윤운형(尹元衡)의 집을 들락거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심의겸'은 '김효원'이 권신(權臣)에게 아첨이나 하는 소인배(小人輩), 문객(門客)이라 여기며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김효원은 그의 장인 정승계(鄭承階)가 윤원형의 첩(妾), 정난정(鄭蘭貞)의 아버지 '정윤겸'의 조카이었기 때문에, 공부를 위해 그곳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었다. 심의겸이 김효원을 반대한 속뜻은 그를 중심으로 언관권(言官權)이 강화되는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김효원'은 '이조정랑'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는 심의겸 계통의 조정기(趙廷機)가 임명되었다.   

 

 

김효원(金孝元)이 낙마(落馬)하자 그를 추천한 '오건(吳健)'이 관직을 버리고 낙향(落鄕)하면서 파문은 커지기 시작했다. 이조정랑(吏曺正郞)은 정5품의 관직으로 비록 품계는 낮은 자리이었지만, 인사(人事)행정을 담당한 요직(要職) 중의 요직이었다. 이조정랑(吏曺正郞)은 당하(堂下 ..정3품 통정대부 이하) 문신(文臣)의 통청권 (通淸權 ..추천권)과 자신의 후임을 지명할 수 있는 자대권 (自代權)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시대에 재상(宰相)이 독주하던 체제를 바로 잡기 위해 사림파(士林派)들이 쟁취한 권한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권한은 하나의 관행일 뿐, 경국대전에 법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었다.관행(慣行)이 제도보다 우선한 예(例)이다.    

 

 

말하자면, 인사권(人事權)이 이조판서(吏曺判書)에게 있지 않고 '이조정랑(吏曺正郞)'에게 있었던 것이다. 당상관(堂上官)도 이조정랑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인사를 했을 정도로 이조정랑의 자리는 막강하였다. 이조정랑은 자신이 후임자를 지명(指名)할 수 있는 특권(特權)이 있었고, 정랑직(正郞職)을 어디에서 차지하느냐에 따라 권력이 움직였다.

 

 

 

 

                                           동서분당                          東西分黨

 

  

 

 

 

 당쟁(黨爭)은 사림정치(士林政治)의 부산물(副産物)이다. 훈구파(勳舊派)와 대립할 때에는 사림파(士林派)가 뭉쳤으나, 선조(先祖) 대에 이르러 훈구파(勳舊派)가 무너지자 사림파가 자체 분열(分裂)하여 붕당(朋黨)이 생기고, 붕당(朋黨) 간에 당쟁이 생기게 된 것이다. 동서분당(東西分黨)은 그 서곡(序曲)에 불과하였다.   

 

 

 

 

 

 

 

 

 

자신을 줄기차게 반대하는 심의겸(沈義謙)에 대하여 김효원(金孝元)도 앙심이 없을 리가 없었다. 김효원의 눈에 비친 '심의겸'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야 할 척신(戚臣)이었을 뿐이다. 그러던 사이 김효원은 그토록 소망하던 '이조정랑' 자리에 올랐다. 이조정랑에 오른 '김효원'은 '심의겸'을 가리켜 ' 미련하고 거칠어서 중용할 데가 없다 '며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치 않았다. 그 두 사람의 악연(惡緣)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효원의 후임으로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沈忠謙)'이 거론되자 발끈한 '김효원'이 이중호의 아들 '이발(李潑)'을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했다.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은 결국 선배(先輩) 사림(士林)과 후배사림(後輩士林)의 분열(分裂)이라 일컬어지는 ' 동서분당(東西分黨)'으로 이어졌다. 

 

 

김효원(金孝元)은 서울의 동쪽에 있는 건천방(乾川坊)에 살았기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세력을 동인(東人)이라 불렀고, 심의겸(沈義謙)은 서쪽의 정릉동(貞陵洞)에 살았기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서인(西人)이라고 하였다. 동인(東人)들은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이산해(李山海), 이덕형(李德馨) 등 대체로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들이 많았고, 서인(西人)은 송강 정철(松江 鄭澈), 송익필, 윤두수 등 율곡 이이(栗谷 李珥)와성혼(成渾)의 제자들이 많았다. 영남세력과 기호(畿湖) 세력의 대결이었다. 혈연(血緣), 지연(地緣), 학연(學緣)이 가미된 것이다.  

 

 

동서분당 이후 '율곡 이이'가 동인과 서인의 조정에 앞장서기도 했으나 실패하고만다. 당쟁(黨爭)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던 율곡(栗谷)의 입장이 딱해졌다. 그는 당쟁을 조정하기 위해 당쟁(黨爭)이 당사자인 김효원(金孝元)을 경흥부사에, 심의겸(沈義謙)을 개성유수로 내보냈다. 동인(東人)이 우세했기 때문에 김효원에게 더 무거운 벌을 준 것이다. 

 

 

동인(東人)의 불평이 없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김효원(金孝元)'을 삼척부사(三陟府使)로, '심의겸(沈義謙)'은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재발령했다. 그러나 동인(東人)은 율곡(栗谷)조차 서인(西人)으로 몰아세웠다. 율곡은 당쟁을 조정하지 못한 채 관직에서 물러났다.  '율곡'이 죽은 뒤로는 ' 동인천하(東人天下)'의 세상이 되었다.    

 

           

 

 

                            정여립과 기축옥사                      정여립과 기축옥사

 

 

 

 

 

 

 

                                             임진왜란                        壬辰倭亂                                         

 

 

 

 

 

선조(宣祖)는 재위 8년인 1575년 김효원(金孝元)을 함경도 경흥부사(慶興府使)로 좌천시켰다. 당쟁(黨爭)을 유발해 조정을 시끄럽게 했다는 견책이었다. 그런데 '선조수정실록' 8년 10월 1일자는 이조판서 정대년(鄭大年), 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 등이 ' 경흥(慶興)은 극지(極地) 지방으로 오랑케 지역에 가까우므로 서생(書生)이 진수(鎭守)하기 마땅하지않습니다 '고 반대했다고 전한다.

 

 

인사(人事)를 담당하는 두 판서(判書)가 건의하자 선조(宣祖)는 김효원을 조금 내지(內地)인 부령(富寧)부사로 보내고, 당쟁의 다른 당사자인 심의겸(沈義謙)을 개성유수로 내보냈다. 두 판서가 ' 경흥(慶興)은오지(奧地)이므로 서생(書生)이 진수(鎭守)하기 마땅치 않다 '고 계청한 것은 조선 지배층의 인식(認識) 수준을 말해 주는 것이다. 문신(文臣)이 무신(武臣)을 지휘하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제도가 법제화된 나라에서 서생(書生) 운운하며 변방(邊方) 근무에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자체가 지배층의 의무를 망각한 것이었다. 

 

 

 

                                                           임진왜란 전야

 

 

 

 

임진왜란에 대하여는 현재까지 두 가지 오해(誤解)가 있다. 하나는 선조 25년인 1592년 4월 13일 왜군(倭軍)이 느닷없이 부산(釜山)을 공격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조선통신사 부사(副使)이었던 김성일(金誠一)의 ' 일본은 침략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보고 때문에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본이 침략하리라는 증거는 수도 없이 많았다. 세종 25년인 1443년, 변효문(卞孝文)이 조선통신사로 다녀온 이래 무려 150면 만인 선조 23년인 1590년 3월,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로 구성된 조선통신사가 파견된 것 자체가 일본이 공언(公言)하는 침략 의사가 사실인 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열도를 통일한 풍신수길(豊臣秀吉)은 대마도주(對馬島主) 종의조(宗義調 .. 소 요소시케) 부자에게 명나라를 공격할 길을 조선에 빌리라는 ' 가도입명(假道入明) '과 조선국앙을 일본으로 오게 하라는 ' 국왕입조(國王入朝) '의 명령을 내렸다. 대마도주 종의조(宗義調)는 풍신수길이 조선통신사를 직접 만나면 두 개의 요구조건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알리라는 생각에서 조선에 거듭 사신을 보내 통신사(通信使)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만큼 대마도주(對馬島主)는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파견에 사활(死活)을 건 것이었다. 조선은 종의조(宗義調)에게 1587년 2월 흥양(興陽)에 침범하여 녹도보장(鹿島堡將) 이대원(李大源)을 전사(戰死)시킨 왜구 두목과 조선 사람 사화동(沙火同)을 압송하고, 붙잡아간 조선인들을 송환시키면 통신사를 파견하겠다고 답변하였다. 사화동(沙火同)은 고된 부역과 공납(貢納)으로 바치는 전복(全鰒)의 수량이 지나치게 많다면서 일본으로 귀화(歸化)해 왜구(倭寇)를 손죽도(巽竹島)로 안내한 조선 백성이었다. 

 

 

 

 

                                                             통신사 파견

 

 

 

 

선조수정실록 22년(1589) 7월조에는 일본에서 긴시아(緊時要羅) 등 3인의 왜구(倭寇)와 사하동(沙火同) 그리고 조선 포로 김대기(金大耭) 등 116명을 돌려보냈다고 전하고 있다. 그만큼 대마도주는 조선통신사 파견에 사화(死活)을 건 것이었다. 

 

 

그래서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 등이 그 대가로 일본으로 떠났던 것이다. 정사(正史)를 서인(西人)인 황윤길, 부사(副使)를 동인(東人)인 김성일로 삼은 것은 선조(宣祖) 나름의 탕평책(湯平策)이자  다양한 시각을 접하고 싶다는 의미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당파(黨派) 차이뿐만 아니라 사물을 바로보는 시각 자체가 달랐다. 황윤길(黃允吉)은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한 반면 김성일(金誠一)은 일본을 오랑케로 여기는 유학자의 시각으로 일본을 얕보았다. 

 

 

통신사 일행은 수많은 고생 끝에 4개월만인 1590년 7월 말 경도(京都 ..교토)에 들어갔으나, 풍신수길은 즉각 만날 생각이 없었다. 풍신수길이 동쪽 정벌에 나갔다는 소식에 하염없이 한 달 반가량을 더 기다렸으나, 풍신수길은 9월 초 귀경한 후에도 궁전인 취락정(聚樂亭)을 수리한다면서 만나주지 않았다.  그러자 통신사 일해 중에 풍신수길의 측근인 법인(法印) 등에게 뇌물을 주더라도 빨리 만나고 돌아가자는고 주장하는 인물들이 나타났다.

 

 

이에 김성일(金誠一)은 ' 사신(使臣)이 왕명을 받들고 국경을 나와서는 한결같이 예법대로 해야 한다 '며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겨우 풍신수길을 만나게 되었다. 귀국한 사신(사신)에게서 상황을 자세히 들은 유성룡(柳成龍) 은 ' 징비록(懲毖錄) '에서 풍신수길이 안고 있던 어린애가 옷에 오줌을 싼이야기를 전하면서 ' 풍신수길은 모두 제멋대로이고, 매우 자만(自滿)하여, 마치 옆에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은 태도이었다 '고 적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받은 풍신수길(豊臣秀吉)의 국서(國書)도 문제투성이었다. ' 조선국왕 전하(殿下) '라고 써야 할 것을 ' 합하(閤下) '라고 쓰고, 조선의 선물을 ' 예폐(禮弊) '라고 써야 하는데, 신하가 임금에게 바치는 예물이란 뜻의 ' 방물(方物) '이라고 쓴 것 등이 그것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일본이 명(明)나라를 공격하겠다면서 조선이 군사(軍士)를 내어 도우라는 구절이었다.

 

 

국조보감(國朝寶鑑)은 김성일(金誠一)이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몇 구절을 고쳤다고 전하면서 ' 황윤길 등은 일본이 그 뜻을 달리 해석하는데 굳이 서로 버티면서 오래 지체할 것이 없다. 빨리 돌아가자 '고 말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두 사람은 사행(使行) 기간 내내 서로 다투었다. 황윤길이 무기(武氣)가 충만한 일본의 숭무(崇武) 분위기에 업을 먹었다면, 김성일은 오랑케의 허풍에 지나지 낳는다고 얕보았다. 두 사람은 1591년 정월 귀국하는대로, 황윤길이 풍신수길에 대해 '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 합니다 '고 보고한 반면, 김성일는 ' 그의 눈은 쥐와 같았는데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됩니다 '고 달리 보고하였다. 

 

 

보고 내용이 상반(相反)될 경우 정사(正使)의 말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지만 집권 동인(東人)은 반대 당파의 말이라고 무시(無是)하였다. 풍신수길의 국서(국서)에도 명나라를 공격하겠다고 적혀 있었다. 게다가 통신사가 귀국할 때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 .. 소 요시토시) 등이 회례사(回禮使)로 따라왔는데, 이들도 ' 내년(來年 ...임진년)에 침략하겠다 '고 공언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4년 3월조는 일본 회례사를 만난 선위사(宣慰使) 오억령(吳億齡)이 ' 내년에 조선의 길을 빌려 상국(上國)을 침범할 것이다 는 회례사의 발언을 보고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러자 조선 조정은 ' 인심을 소란시킨다 '면서 오억령(吳億齡)을 심희수(沈喜壽)로갈아치웠다. 자신이 들은 정보를 사실대로 보고했다고 선위사(宣慰使)를 갈아치운 것이었다. 조선 지배층은 일본이 공격해 올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의 상상과 다른 현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선조(宣祖)는 침략 경고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유성룡은 징비록(懲憊錄)에서 ' 이때 왜(倭)가 침범하리라는 소리가 날로 급해졌으므로 임금이 비변사(備邊司)에 명령해 각기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천거하라고 하셨다 '고 적고 있다. 

 

 

선조(宣祖)은 전쟁의 대비에 나선 것이다. 이때이순신(李舜臣)을 천거한 유성룡(柳成龍)은 ' 이순신이 드디어 정읍현감(井邑縣監)에서 전라좌수사로 발탁되었다 '고 적고 있다. 이때가 선조 24년인 1591년 2월인데, 이순신(李舜臣)의 발탁에 대하여 사간원(사諫院)은 ' 관작(官爵)의  남용(濫用)이 이보다 더 심할 수는 없다 ' 며 강하게 반대하였다. 선조는 ' 이러한 때에 상규(常規)에 얽매일 수 없다. 더 이상 그의 마음을 흔들지 말라 '고 막아 주었다. 

 

 

1592년 2월 1ㅣ일에는 ' 대장 신립(申砬)이 이일(李逸)과 여러 도(道)에 보내 병비(兵備)를 순시하도록 하였다 '고 전하는데, 이 여기 선조가 전쟁 대비책을 지시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류성룡은 징비록(懲憊錄)에서 신립(申砬)이 4월 초하루에 사제(私第 .. 집)으로 찾아왔기에 ' 머지않아 변고가 있으면 공(公)이 마ㄸ짱히 이 일을 맡아야 할 터인데, 공(公)의 생각에는 오늘날 적의 형세로 보아 그 방비의 어렵고 쉬움이 어떠하겠는가 '라고 묻자 신립(申砬)이 ' 그것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고 대답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때가 임진왜란 발발 12일 전이었다. 

 

 

류성룡이 ' 지금은 왜적이 조총(鳥銃)과 같은 장기(長技)까지 있으니 가벼이 볼 수는 없을 것이요 '라고 거듭 말하자, 신립은 ' 그들이 비록 조총이 있다 해도 어찌 쏠 때마다 다 맞힐 수가 있겠습니까 '라고 일축하였다. 서생(書生)은 변방에 근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문신(文臣), 쳐들어와도 아무런 걱정 없다고 호언하는 무시(武臣), 쳐들어오지 않으리라는 머릿속의 상상을 현실로 여기는 사대부가 지배하는 나라에 풍신수길은 자신의 공언(公言)대로 400여 척의 배를 띄워보냈다.     

 

                                                             

                                                                   

 

 

 

 

 

 

 

 

 

 

 

 

 

                                                                              도망가는  宣祖

 

 

 

 

 

 

1592년 4월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倭軍)이 계속 북상(北上)하자 조정에서는 그 대책을 논의한다. 여러 대책이 오가지만, 선조(宣祖)는 스스로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자는 파천론(播遷論)과 만주의 요동(遼東) 지역으로 망명(亡命)하자는 요동내부책(遙東內附策)을 제시한다.  이에 따라 선조는 신하들의 극렬한 반대를 무릎쓰고 행선지도 정하지 않은 채 4월30일 밤, 비가 억수같이 퍼붇는 가운데 궁궐을 빠져나가는데, 이에 분노한 백성들이 왕의 어가(御駕)에 돌을 던지면서, 욕설을 퍼부었고, 궁궐에 난입하여 불을 질렀다. 이때 선조(宣祖)는 돌에 맞지는 않았지만, 유성룡(柳成龍) 등은 돌에 맞았다.  

 

 

 

백성들의 분노(憤怒)와 봉기(蜂起)에 놀란 선조(宣祖)는 파천(播遷)의 결정자가 바로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희생양을 만든다. 영의정 이산해(李山海)가 파천의 주청자(奏請者)로 둔갑되었고, 유성룡(柳成龍)은 파천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는 죄로 파면당해야 했다.

 

   

이윽고 평산까지 도망간 선조(宣祖)는 요동내부(遙東內附)의 의사를 비치며, 중국으로 사신을 몇 차례나 파견한다. 요동내부(遼東內附)란 왕이 국가와 백성을 버리고 전란을 피하여 소수의 비빈(妃嬪)만을 데리고 요동으로 들어가 명(明)나라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망명론(亡命論)이었다. 그리고 사전 준비로 분조(分朝)를 만들어 광해군에게 그 책임을 맡긴다.

 

 

 

 

                                                   도망가는 선조  .. 상세 기록

 

 

 

 

다음의 기록은 1592년 5월 평양에 머물던 선조(宣曺)에게 한음도정(漢陰都正) 이현(李俔)이 아뢰었던 간언(諫言)의 내용이다. 왜군의 침략이 시작된 직후 서울을 버리고 파천(播遷)해야만 했던 까닭을 선조(宣祖)의 실책(失策)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통렬한 반성(反省)을 촉구하고 있다. 당장 목을쳐야 할 대상으로 지목된 김공량(金公諒)은 당시 선조(宣祖)가 총애하던 후궁 ' 인빈 김씨 '의 오라비이었다. 총애하는 측근의 비리(非理)를 단속하지 못하고, 비판에 귀를 막은 채  가혹한 부역(賦役)으로 백성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 전쟁이 초래되었다 '는 것이 이현(李俔)의 분석이다. 그가 제시한 구구(救國)의 방책 또한 명료하다. 실정(失政)을 자인(自認)하고 백성들에게 사과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민심을 얻을 것이고, 백성들은 즐거이 왜군(倭軍)과 싸울 것이니 나라가 망할 걱정이 사라질 것이라는 진단이었다.

 

 

 

전하께서는 사직(社稷)이 폐허가 된 것을 통감하시어 즉시 스스로를 탓하는 전교(典敎)를 내리시고 통렬하게 자책(自策)하셔야 합니다. 사치스러운 토목공사, 여러 궁가(宮家)의 침탈행위, 일본에 대한 실책, 상(賞)과 벌(罰)의 시행이 적합하지 못했던 일, 이단(異端)을 숭상하여 믿은 것, 언로(言路)가 두절된 것, 아첨하는 궁인(宮人)과 신하들이 많았던 것, 내탕(內帑 .. 왕의 개인 금고)이 가득 찼던 것, 부역(賦役)이 번거롭고 가혹했던 것 등 갖가지 죄과를 열거하여 문장을 강개하게 써서 중외에 선포하시고, 김공량(金公諒)의 머리를 베어 내건다면 백성들은 즐거워 하고, 또한 그들은 상처를 싸매고 전쟁터로 나갈 것이고, 병사들은 진겨만 하고 후퇴하지않을 것이요, 백번을 패(敗)한다 해도 오히려 백번 싸울 것을 생각할 것이니 어찌 나라가 무너질 염려가 있겠습니까 ? 

 

 

 

신립(申砬)의 패전(敗戰) 소식이 전해진 직후 선조(宣助)는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대신(大臣)들은 위급한 상황을 넘기려면 평양(평양)으로 나아가 명(明)나라에 군사를 청해 회복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발이 없을 리 없다. 일부 신료들은 서울을 고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서울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선조는 파천(播遷)하기로 결정했다.

 

 

선조(宣祖)는 이어 광해군(光海君)을 왕세자로 임명하였다. 그는 후궁 ' 공빈김씨 '의 몸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었다. 선조는 ' 광해군(光海君)이 총명하고 효성스러우며 열심히 학문을 닦는다 '고 책립(冊立) 이유를 설명하였지만, 분명 파격적(破格的)인 결정이었다. 첩자(妾子)이자 차자(次子)인 광해군을 왕세자(王世子)로 삼은 것은 훗날의 논란과 파란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파천(播遷)을 앞두고 종사(宗社)의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위기 상항에서 이것저것 세세히 따질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선조는 또한 맏아들 임해군(臨海君)은 함경도로, 여섯 째 아들 순화군(順和君)은 강원도로 가라고 지시하였다. 왕자들을 각 도(道)로 내려보내 근왕병(勤王兵)을 모아야 한다는 신료들의 건의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 조처 또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방책이었지만, 결국에는 실책이 되고 말았다. 함께 함경도로 들어갔던 우 왕자는 이런저런 민폐(民弊)를 자행하였고, 회령 지역 주민들에게 붙잡혀 왜군(倭軍)에게 넘겨지는 수모를 겪게 된다.

 

 

4월 30일 새벽, 선조(宣祖)는 인정전(仁政殿)을 나와 피난길에 올랐다. 파천(파천)이 결정되자 민심(민심)도 곧바로 흩어졌다. 대궐 안의 이서배(吏胥輩)와 나인(內人)들이 사라지더니 왕을 경호해야 하는 위사(衛士)들도 달아났다. 선조(宣祖)를 수행하는 종친과 문무관(文武官)의 수(數)는 100명도 되지 않았다. 평양에서 선조에게 쓴소리를 쏟아냈던 이현(李俔)의 회고에 따르면, 선조가 궁궐을 나설 무렵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이현(李俔)의 회고는 ' 궁궐 주변에 모여 있던 장수들은 눈을 흘기고 달아나면서, 이 전쟁은 하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빚어낸 일이다 '라고 했고, 병사들도 병기(兵器)를 질질 끌고 도망가면서 임금(여기서는 왜군을 말함)이 왔으니 이제는 살았구나. 기꺼이 적군을 맞이해야지 '라고 했다는 것이다.

 

 

선조가 도성(都城)을 나온 직후 궁궐에 불이 붙었다. 난민들의 소행이었다. 그들은 면저 장예원(장예원)과 형조(刑曺)를 불태웠다. 두 곳 모두 노비문서(奴婢文書)가 보관되어 있었다. 내탕(內宕)에도 약탈과 방화(放火)가 이어졌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탔다. 역대 왕들의 실록(實錄)은 물론 승정원일기가 타버렸고,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고 남겨두었던 초고(草稿)까지 다 사라졌다. 허망한 순간이었다. 난민들은 임해군(臨海君)의 집과 병조판서 홍여순(洪汝詢)의 집도 그냥 두지 않았다. 평소 재물을 잔뜩긁어모았다고 소문이 난 집들이었다. 서울 사수(死守)를 명 받은 유도대장(留都大將) 이양원(李陽元)이 군사를 동원하여 난민(亂民) 몇몇의 목을 쳤지만 역부족이었다. 난민들이 너무 많아 도무지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파천(播遷)을 시작했던 당일 많은 비가 내렸다. 벽제역(碧蹄驛)에 이르렀을 때 비는 더욱 심해졌다. 선조(宣祖)는 경기감사가 바친 비옷을 겨우 입었지만, 나머지 일행은 전부 비에 젖었다. 종사(宗社)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다는 비관(悲觀)이 퍼지면서 수행원들은 동요했다. 선조를 따르던 관원들 가운데 다수가 도성 쪽으로 사라졌다. 가족들을 데리고 피난하려는 깜냥이었다. 혜음령(惠陰嶺)을 지나면서부터 궁인(宮人)들이 탄 말이 진흙에 빠져 낙오하고, 통곡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선조(宣祖) 일행은 초경 무렵에야 임진강(臨津江)을 건너 동파역(東坡驛)에 도착했다. 도성을 나선 이후 일행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줄곧 걸었다. 동파역에서 파주목사 허진(許晉)과 장단부사 구효연(具孝淵(具孝淵)이 선조(宣祖)를 위해 음식을 준비해 놓았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선조(宣祖)를 수행하던 하인(下人)들이 부엌으로 난입(亂入)하여 수라로 바칠 음식을 모두 먹어버렸던 것이다. 왕에게 바칠 음식이 없어지자 허진(許晉)과 구효연(具孝淵)은 처벌이 두려워 달아났다. 피난길의 피곤함과 배고픔은 선조(宣祖)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었던 것이다.

 

 

5월 1일, 동파역(東坡驛)을 떠나기에 앞서 선조(宣祖)는 대신들을 불러모았다. 선조(宣祖)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면서 대신들에게 행선지를 물었다. 국왕이 괴로운 표정으로 절박하게 대책을 호소하자 대신들은 엎드려 눈물만 흘릴 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였다. 누군들 뾰족한 대책을 내놓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선조(宣祖)의 지명을 받자 이항복(李恒福)이 나섰다. 그는 ' 의주(義州)로 갔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명(明)나라로 들어가 호소하자 '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윤두수(尹斗壽) 등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지세(地勢)가 험하여 적(敵)이 들어오기 힘든데다 병마(兵馬)가 굳세고 날래다는 것을 들어 함경도(咸鏡道)로 가자고 촉구하였다. 선택의 갈림길이었다. 서쪽 평안도(平安道)로 가서 궁극에는 명(明)에 의탁할 것인가, 북쪽 함경도(咸鏡道)로 가서 천험의 요새를 이용하여 저항을 시도할 것인가 ?

 

 

류성룡(柳成龍)은  명(명)으로 들어가는 것에 반대하였다. ' 대가(大駕)가 압록강 너머로 한걸음만 나가도 조선은 우리 땅이 아니라 '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자 선조는 명(明)에 귀순(歸順)하여 의탁하는 것이 자신의 뜻이라고 말했다. 류성룡(柳成龍)은 평안도와 함경도가 아직 건재하고 호남(湖南)에서 의병(義兵)들이 이어나고 있음에도 명(明)에 의탁하려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명(明)으로 의탁한다는 이야기가 백성들에게 알려지면 곧바로 민심이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갈수로 초라해지던 행렬은 개성(開城) 부근에 이르러 조금 모양이 갖추어졌다. 황해감사 '조인득'과 서흥부사 '남억'이 군사 수백 명을 이끌고 와서 호위에 가담했던 것이다. 선조(宣祖)는 개성(開城)에 도착한 뒤에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선조는 개성의 부노(父老)들을 불러모아  시급히 해결해야 할 지역의 민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부로(父老)들은 ' 왕자(王子)들 집안에서 산림(山林)과 갈대밭을 독차지하고 백성들이 이용하는 것을 막고 있다 '고 호소하였다. 왕자 집안을 비롯한 궁가(宮家)들의 작폐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백성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현장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개성의 부로(父老)들은 더 이상 북쪽으로 가지 말라고 호소했지만,선조 일행은 계속 북상(北上)했다. 왜군(倭軍)이 자신들을 추격해 오고 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선조(宣祖)를 더욱 곤혹스럽게 했던 것은 심상치 않은 민심(民心)의 동향(動向)이었다. 황해도 평산에 머물때 ' 적병(敵兵) 가운데 절반은 조선 사람 '이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신료(臣僚)들이 느끼는 위기의식도 절박하였다. 

 

 

5월 7일 평양(平壤)에 도착한 신료(臣僚)들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방책들을 쏟아냈다. 특히 권세를 부려 민심을 잃게 만든 김공량(金公諒)을 처벌하라고 촉구했다. 평안도에서 미처 거두지 못한 세금과 공물(貢物)을 면제해 줄 것, 즉시 과거(科擧)를 시행하여 지역민심을 다독일 것, 전란 중이지만 경연(經筵)을 수시로 열어 여론을 청취할 것 등등의 대책이 제시되었다.

 

 

선조(宣祖)는 6월 2일 대동관(大同館)에 거동하여 평양의 부로(父老)들에게 유시(諭示)하였다. ' 더 이상 북쪽으로 옮겨가지 않고 죽음으로써 평양성(平壤城)을 지키겠다 '고 공약했다. 하지만 6월 10일, 선조(宣祖)의 다짐은 공약(空約)이 되고 말았다. 왜군(倭軍)이 대동강(大同江)까지 북상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이날 선조(宣祖)보다 앞서 왕비(王妃)가 평양성을 나가 북(北)으로 가려 하자 평양 주민들이 난(亂)을 일으켰다. 그들은 왕비(王妃)의 시녀(侍女)를 몽둥이로 쳐서 말에서 떨어트리고, 수행하던 호조판서 홍여순(洪汝詢)을 난타하였다. 선조(宣祖)는 병력을 동원하여 주민들의 소요(騷搖)를 진압하고 다시 파천(播泉)길에 올랐다. 

 

 

선조가 평양을 떠나면서 지역의 민심은 싸늘해졌다.선조 일행이 향하는 고을의 아전(衙前)과 백성들은 소식을 듣고 전부 흩어졌다.국왕 일행을 접대하는 과정의 괴로움, 궁료배들이 자행할지도 모르는 민폐를 우려하여 산골짜기로 도망했던 것이다. 숙천에서는 믿기지 않는 일까지 벌어졌다. 누군가 관아의 담벼락에 ' 국왕 일행이 강계로 가지 않고 의주(義州)로 간다 '고 낙서를 해놓았던 것이다. 선조의 해방을 왜군에게 알려주기 위해 고의로 그런 것이었다. 선조는 6월 22일 압록강변의 국경도시 의주(義州)까지 내몰린다. 강(江)을 건너 명나라로 귀순(歸順)할 지의 여부를 놓고 다시 격렬한 논란이 빚어졌다. 섡 일행은 두 개의 적(敵)에게 쫓기고 있었다. 하나는 왜군(倭軍)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미 떠나버린 민심(민심)이라는 적(敵)이었다.     

 

               

 

                                                                               亡命 시도 실패

 

 

 

 

 

그러나 선조(宣祖)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는 주저하다가 드디어 거절한다. 처음에 명나라는 왜군(倭軍)의 신속한 파죽지세(破竹之勢)에 놀라, 왜군과 조선을 한편으로 생각하고,  선조(宣祖)의 망명(亡命) 신청을 왜군의 앞잡이 역할로 판단한 것이었다. 후에는 상황이 조금 바뀌어 명나라는 선조의 망명을 허락하되 빈 관아(官衙)에 유폐시키려 한다는 소식을 듣게되고  선조(宣祖)는 망명(亡命)을 포기하는 것이다. 

 

 

선조실록 25년 6월26일의 기록에 의하면 ... " 명(明)나라에 내부(內附)를 청한 자문(咨文)을 보니, 선조(宣祖)를 관전보(寬奠堡)의 빈 관아에 두려한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이 비로소 의주(義州)에 오래 머물 계획을 세웠다 "  즉, 유폐(유폐)시킨다는 뜻에 다름아닌 명(明)나라의 계획이었다.

 

                  

 

    

 

                                                      宣祖의 쑈 ! 쑈 ! 쑈 !

 

 

 

 

 

명나라에의 망명(亡命)이 실패로 돌아가자 선조(宣祖)는 희한한 '쑈'를 벌인다, 이 와중에 왕 노릇을 그만 두겠다는 선위론(禪位論)이다. 그 것도 20여 회나... 자신이 전쟁터를 벗어나기 위한  망명에 장애(障碍)가 되었던 왕(왕)으로서의 직무를 벗어나려고 분조(分朝)를 만들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전황(戰況)이 조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이 선위론(禪位論)은 이제 실추(失墜)된 왕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의도적인 비열한 정치행위로 변질(變質)되어 간다.  

 

 

명(明)나라의 원군(援軍)이 도착한 이후에는 이 것이 명(明)나라의 문책(問責)을 피하기 위한 방도로도 이용되기도 하였지만, 주로 신하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한 완전한 쑈일 뿐이었다. 실제로 선조(宣祖)가 선위론(禪位論)을 밝힐 때마다 광해군(光海君)과 여러 신하들은 며칠씩 엎드린채 눈물을 흘리면서 명(命)을 거두어 달라고 목청을 높혀 외쳐대야 했다.

 

 

 

 

 

 

 

 

 

 

 

 

 

                                      수능곽리충                    誰能郭李忠 

 

 

 

 

국사창황일   (國事蒼皇日)   나라 일이 다급할 때   /   수효곽리충   (誰效郭利忠)   누가 곽자의와 이광필의 충성을 바치리오   /   거빈존대계   (去빈存大計)   한양을 떠난 것은 큰 계획 이루려 함인데   /   회복장제공   (恢復仗諸公)   회복하는 일은 그대들에게 달려있네   /    통곡관산월   (痛哭關山月)   관산의 달 아래에서 통곡하고    /   상심압수풍   (傷心鴨水風)   압록강 바람에 마음이 슬퍼지네   /   조신금일후   (朝臣今日後)   신하들이여 ! 오늘 이후에   /   상가경서동   (尙可更西東)   그래도 다시 동(東)과 서(西)로 다투겠는가.

 

 

 

 

 

 

 

 

 

 

임진왜란 초기의 일방적인 열세가 어느 정도 만회되면서, '선조'는 이성계(李成桂)를 생각한다. 결국 이성계는 각종 전쟁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이루어 낸 것 아닌가...선조는 제2의 이성계가 출현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선조 .. 전쟁 영웅을 제거하다  

 

 

 

 

 

임진왜란은 큰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기회(機會)이기도 하였다.  백서을은 ' 특권만 있고 의무는 없는 ' 사대부(士大夫) 지배체제에  파산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선조 26년인 1593년, 영의정으로 복귀한 류성룡(柳成龍)이 노비(奴卑)들도 군공(軍功)을 세우면 벼슬을 주는 면천법(免賤法), 토지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세금을 납부하는 작미법(作米法), 양반들도 노비(奴卑)와 함께 군역(軍役)에 편입시킨 속오군(束伍軍) 제도 같은 개혁입법을 강행하면서 회생(回生)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신분제의 완화 내지 철폐는 궁궐을 불태웠던 백성들이 희구하는 것이었다. 이런 방향성이 견지된다면 임진왜란은 조선에 되레 기회가 될 수있었다. 선조(宣祖)도 국망(國亡)이 목전에 다가왔던 임진왜란 초기에는 개혁입법(改革立法)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생각이달라졌다. 먼저 ' 전쟁영웅(戰爭英雄) '의 제거(除去)가 시작되었다. 그 희생양이 육전(육戰)의 영웅 김덕령이었다.

  

 

 

 

                                                      김덕령(金德齡)의 제거

 

 

 

 

 

명나라에의 귀순을 재촉하던 선조 ..그도 임진왜란 초기에는 유성룡 등이 주도하던 개혁입법 (免賤法, 束伍法, 作米法 등)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는 개혁이나 국난 극복을 위한 적극적인 의지(意志)는 아니었다. 본심은 따로 있고, 그저 반대만 안 했을 뿐...  망명(亡命)도 여의치 않게 되고, 明의 지원군도 도착하고, 전국의 의병(義兵)활동이나 이순신(李舜臣)에 의한 승리 등으로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선조(宣祖)의 생각은 달라지고, 엉뚱하게도 전쟁 영웅들의 제거 작업에 착수한다. 결국 자신의 비겁한 행동에 대한 컴플렉스가 반대로 작용한 것이었다.  

 

 

 

그 첫번째 희생양은 육전(陸戰)의 영웅 김덕령(金德齡)이었다. 호남지방을 지켜낸 김덕령에 대한 백성들의 신망은 대단하였다. 이 때 충청도 지방에서 조선왕조 타도의 기치를 내걸고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몽학 반란의 동기는 여하간에 그는 반란군을 모으면서 김덕령의 신망을 이용한다. 백성들도로 이에 호응, 이몽학은 기세를 얻어 서울로 쳐들어 오고 있었다.그러나 이몽학은 김덕령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세를 얻으려 했을 뿐 전연 관련이 없었다.   여론도 김덕령의 무혐의를 믿고 있었고, 증거도 없었지만 선조(宣祖)는 김덕령을 " 김덕령은 죽인 사람이 많은데. 그 죄로라도 죽어야 한다 "며 그를 친국(親鞫)하였고, 김덕령은 6차에 걸친 혹독한 형장(刑杖)을 당하고 죽었다.

 

 

 

 

 

 

 

                                   묘를 이장할 때 나온 김덕령장군의 수의(壽衣)

 

 

 

 

 

 

"선조수정실록"은 ... "소문을 들은 남도(南道)의 군민(軍民)들이 원통하게 여겼다. 이때부터 남쪽 사민(士民)들은 김덕령의 일을 경계하여 용력(勇力)있는 자는 모두 숨어버리고, 다시는 의병(義兵)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 (선조 29년 8월1일) 고 기록하고 있다.  5,000명의 의병(義兵)을 거느렸던 김덕령(金德齡)의 죽음이 물의를 일으키자, 선조(宣祖)는 " 들으니 그의 군사는 원래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라고 폄하하였을 뿐이다.

 

 

 

 

 

 

                          

                                       

 

 

 

 

 

 

 

 

 

 

 

 

 

                                                        이순신(李舜臣)의 제거 

 

 

 

 

 

이순신(李舜臣)에 대한 선조(宣祖)의 시기(猜忌)와 제거(除去) 의도는 이미 김덕령의 체포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선조실록. 29년 6월 26일 "에서 선조(宣祖)는 "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그 뒤에는 작은 적(敵)일지라도 잡는데 성실하지 않았고, 또 군사를 일으켜 적(敵)을 토벌하는 일이 없으므로 내가 늘 의심하였다 "고  이순신을 비판하며, 남인(南人) 유성룡(柳成龍)의 추천으로 이순신이 천거된 것을 부정적으로 보던 서인(西人)세력들은 이러한 선조의 태도에 적극적으로 동조한다. 

 

 

이순신에 대한 제거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한반도의 남부 일대를 점령하고 있던 왜군(倭軍)은 명(明)과 강화협상(講和協商)을 진행한다. 이 때 일본의 풍신수길(풍신수길)은 강화조건으로 조선 남부 4도(南部 4道)를 떼어 달라는 것과 명나라 공주를 후비(后妃)로 달라는 납녀(納女) 등을 요구하여 회담은 결렬되었다.  

 

 

1597년 일본은 다시 대군을 보내어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일으킨다. 정유재란의 승패가 이순신의 제거에 달려 있음을 파악한 왜군은 간자(間者 ..간첩) 요시라(要時羅)를 동원하여 조선 조정에 역정보(逆情報)를 흘린다. 그러나 유인책(誘引策)으로 판단한 이순신은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고, 이를 선조는 이순신 제거의 기회로 삼았다.

 

 

 

 

 

 

 

 

 

 

 

 

선조(宣祖)는 " 이순신을 조금도 용서할 수가 없다. 무신(武臣)이 조정을 가볍게 여기는 습성을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면서 이순신을 압송하여 형문(刑問)하고 원균(元均)으로 하여금 삼도수군통제사를 대신하게 하였다. 동시에 선조(宣祖)는 승지 김홍미(金弘微)에게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이순신이 무군지죄 (無君之罪 ..역적죄) .. 부국지죄(負國之罪 ..국가 반역죄) ..함인지죄 (陷人之罪 ..원균을 모함한 죄)를 저질렀다면서  " 이렇게 많은 죄가 있으면 용서할 수 없는 법이니 마땅히 율(律)에 따라 죽여야 할 것이다 " (선조실록 30년 3월 13일) 

 

 

27일동안 혹독한 고문(拷問)을 받던 이순신은 유성룡 등의 구원으로 겨우 목숨을 건지고 백의종군(白衣從軍)에 처해졌다. 원균(元均)은 대패(大敗)하고 그도 전사(戰死)하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등용하지만 수군(水軍)을 해체하고 이순신을 육군(陸軍)으로 발령하는 것이다.이에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장계를 올린다. " 금신전선상유십이, 출사력거전, 칙가위야 (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 "  즉 신(臣)에게는 아직 배 12척이 있으니 사력(死力)을 다하여 싸우면 적(敵)의 진격을 막을 수 있다... 

 

 

드디어 이순신은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전사(戰死)한다. 이 날은 바로 그를 천거하고 도와준 유성룡(柳成龍)이 파직(罷職)된 날이기도 하다.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은 " 난중잡록(亂中雜錄) "에서  노량해전(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친히 북채를 들고 함대의 선두에서 적을 추격하였고, 적(敵)은 선미(船尾)에 엎드려 일제히 공(公)을 향하여 총을 쏘았다 "고 적어 이순신이 스스로 죽음으로 나아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순신(李舜臣)은 유성룡(柳成龍)의 파직(罷職)이 의미하는 바를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 틀림없다. 이덕형(李德馨)이  " 왜적이 대패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를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고 선조(宣祖)에 보고하자 선조는 " 수병(水兵)이 대첩(大牒)을 거두었다는 설(說)은 과장(誇張)인 듯하다 "고 대꾸한다.

 

  

 

 

 

 

 

 

 정유재란(丁酉再亂)도 임진왜란 초기처럼 일본군의 우세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충청도 직산에서 명(明)나라 군대가 일본군의 북상(北上)을 저지하고 이순신(李舜臣)이 명량해전(鳴粱海戰)에서 제해권(制海權)을 되찾으면서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선조 31년인 1598년 8월 18일, 풍신수길(豊臣秀吉)이 병사(病死)하자 '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덕천가강) '는 8월 28일과 9월 5일 조선출병군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이렇게 종전(종전)이 기정사실화되자 다신 전쟁영웅의 제거 작전이 개시되었다. 이번 대상은 류성룡(柳成룡)이었다. 선조 31년인 1598년 9월 말께부터 류성룡에 대한 공격이 개시되는데, 남이공(南以供)은 ' 류성룡이 속오(束伍), 작미법(作米法)을 만들고 .. 서얼(庶얼)의 천한 신분을 발탁하였습니다 '고 비난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의 제거

 

 

 

 

 

선조 31년 (1598),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고,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이 들어서면서 조선(朝鮮)의 출병군(出兵軍)을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이제 종전(終戰)이 기정사실화 되자, 선조(宣祖)는 다시 유성룡(柳成龍)을 제거하기로 마음 먹는다. 서인(西人)들의 유성룡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는데 ...

 

 

 

 

 

 

 

 

서인(西人)의 남이공(南以恭)은 " 유성룡(柳成龍)이 속오군(束伍軍), 작미법(作米法) 을 만들어...천민(賤民)들을 발탁하였다 "고 비난하였다. 양반의 특권을 크게 제한하였던 유성룡의 ' 전시개혁입법(戰時 改革立法) ' 을 폐지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선조(宣祖)는 몇번의 형식적인 반대를 표하다가 드디어 유성룡을 파직(罷職)한다. 이 날은 바로 이순신(李舜臣)이 노량해전(露梁海戰)을 승리하며 전사(戰死)한 날이다. 이로써 조선은 그나마 위기(危氣)를 기회(機會)로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버리고 다시 전쟁 전(前)의 상태로 회귀하게 되는것이다.

 

 

 

 

 

 

 

 

 

 

선조(宣祖)는 이순신(李舜臣)의 전사(戰死)를 애석해 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鷺粱海戰)이 끝난 후,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이 ' 왜적(倭敵)이 대패(大敗)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고 노량해전의 전과(戰果)를 보고하자, 선조(宣祖)는 ' 수병(水兵)이 대첩을 거두었다는 설(說)을 과장(誇張)인듯 하다고 제동을 걸었다.

 

 

 

이순신의 전사(戰死)와 함께 7년 전쟁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당연히 전공자(戰功者) 포상이 뒤따라야 했다. 그러나 선조(宣祖)는 명(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에게 ' 우리나라가 보전된것은 순전히 모두 대인(大人 .. 유정을 지칭)의 공덕입니다  .. 선조실록 32년 2월 2일 '라고 말하면서 임진왜란 극복이 명(明)나라 덕분이라는 궤변을 만들어냈다. 선조는 재위 36년인 1603년 4월에는 ' 이제는 마땅히 군공청(軍功廳)을 혁파하여 쓸데없는 관원을 한 명이라도 덜어야 할 것이다 '고 말해 논공행상(論功行償) 자체에 불만을 토로하였다.   

 

 

 

 

 

 

 

 

 

 

 

                                             임진왜란의 승리가 明나라 덕분이라고 

 

 

 

 

 

이순신의 전사와 함께 7년전쟁은 끝났다. 당연히 전공자 포상이 뒤따라야 했다. 그러나 선조는 명나라 유정(劉艇)에게 " 우리나라가 보전된 것은 순전히 모두 대인(大人 .. 유정)의 공덕입니다...선조실록32년) "라고 하면서 임진왜란의 극복이 明나라 덕분이라고 주장하면서, 논공행상 자체에 불만을 토로하였다.

 

 

 

 

 

                          재조지은 (再造之恩)..거의 망한 것을 구원하여 준 은혜

 

 

 

 

 

 종전(終戰) 후 2년이 지난 뒤에야 우여곡절 끝에 겨우 공신(功臣)이 책봉되었는데.. 문신(文臣)들인 호성(扈聖)공신이 86명인데 비하여, 왜군과 직접 싸운 무신(武臣)들인 선무(宣武)공신은 18명에 불과하였다. 호성공신(扈聖功臣) 중에서는 내시(內侍)가 24명이었고, 선조(宣祖)의 말을 관리하던 이마(理馬)가 6명이나 되었다. 호성공신은 즉 선조(宣祖)를 따라 피난 간 신하들이다.

  

 

선무 1등인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栗),원균(元均) 등은 모두 사망한 장군들이었는데, 당초 2등으로 책정되었던 원균(元均)은 선조(宣祖)의 명(明)으로 1등으로 올라갔다. 선조(宣祖)는 유성룡의 정적(政敵)이었던 서인, 북인(西人, 北人)과 손을 잡고 유성룡의 전시(戰時) 개혁입법(改革立法)을 모두 무력화(無力化)시켰다.

 

 

 

 

 

 

 

이렇게 조선은 다시 전란(戰亂) 이전으로 회귀하였다. 임진왜란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조선은 멸망해야 했지만 성리학(性理學)을 대체할 새로운 사상(思想)이 없었고, 새나라르 개창(開創)할 주도세력도 없었다. 양명학(陽明學)은 이단으로 몰렸고, 사대부에 맞설 유일한 지식인 집단인 승려들을 호국(護國)의 틀에 안주(安住)하였다. 그렇게 조선은 만신창이가 된 채로 형해(形骸)를 유지하였다.

 

 

 

 

 

 

 

 

                                         

        

 

 

 

 

                                                임진왜란의 의미와 사회적 변화

 

 

 

 

 

임진왜란은 큰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였다. 백성들은 " 특권만 있고 의무(義務)는 없었던 사대부 지배체제에 파산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선조 26년(1593) 영의정으로 복귀한 유성룡이 노비(奴卑)들도 군공(軍功)을 세우면 벼슬을 주는 면천법(免賤法)과 토지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세금을 납부하는 작미법(作米法) 그리고 양반도 노비들과 함께 군역에 편입시킨 속오법(束伍法)제도 같은 개혁입법들을 강행하면서 회생(回生)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는 조선의 기회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나가고 있는 시점에 선조(宣祖)는 모든 개혁입법(改革立法)을 무력화(無力化)시키고, 구체제(舊體制)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후는 광해군(光海君) 이후의 시대이었다. 이리하여 임진왜란은 그저 조선에 피해만 준, 권력층과 백성들과의 갈등만 부추긴채 정조(正祖)의 개혁을 기다린다.

 

 

 

 

 

 

 

 

 

 

 

후궁 출신의 서자(庶子)로 왕위에 오른 선조(宣祖), 명민하면서도 학문에도 조예가 있었던 선조는 1608년에 파란만장한 치세(治世)를 마감하였다. 선조의 치세기는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위기 상황이 있었던 시기이었고, 정치적으로는 훈구(勳舊) 세력이 몰락하고, 사림(士林)이라는 신진세력이 등장하던 시기이었다.  

 

 

국가를 제대로 재건하여다면, 선조는 위기(危機)를 기회(機會)로 극복한 위대한 군주(君主)로 남았을 지도 모른다. 고려시대에도 거란(契丹)의 침입으로 풍전등화의 시기가 있었지만, 고려 현종(顯宗)은 위기를 잘 극복한 왕으로 기억되고 이다. 반면 선조는 일본의 침략을 내다보지도 못했고, 전란(戰亂) 뒤에도 제대로 난국(難局)을 수습하지 못한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선조국문교서 (宣祖國文敎書)  ..보물 제951호

 

 

 

 

 

 

 

 

 

 

이 문서는 선조(宣祖) 26년 (1593년), 임진왜란으로 선조(宣祖)가 의주(義州)로 피신하였을 때에 백성들에게 내리는 한글로 쓰여진 교서(敎書)이다.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왜군(倭軍)의 포로가 되어 그들에게 협조하는 자가 많았다. 그 때문에 '선조'는 일반 백성들이 알기 쉽게 한글로 쓴 교서를 내려 백성들을 회유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그 내용은 어쩔 수 없이 왜군에게 붙들려 간 백성은 죄(罪)를 묻지 않겠다는 것과 왜군을 잡아 오거나,왜군의 정보를 알아오는 사람, 또는 포로로 잡힌 백성을 많이 데리고 나오는 사람에게는 천민(賤民), 양민(良民)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내릴 것을 약속한 내용들이 실려있다.

 

 

이 교서는 선조(宣祖)가 한양으로 다시 돌아오기 한달 전에 내려진 것인데, 당시 김해성(金海城)을 지키고 있던 장수 권탁 (權晫. 1544~1593)은 이 문서를 가지고 적진(敵陣)에 몰래 들어가 왜군 수 십명을 죽이고, 우리 백성 100여명을 구출하였다. 이 문서는 '권탁'의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선조 독살설(毒殺說)

 

 

 

 

 

선조(宣祖)는 41년의 재위기간을 마치고 1608년 죽는다. 이 때만 하여도 '선조'가 독살(毒殺) 당하였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끝까지 세자(世子)로 만들려는 선조(宣祖)와 인목대비(仁穆大妃) ... 

 

 

건강하던 선조(宣祖)가 갑자기 죽었다. 그리고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는데..광해군은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의하여 축출되며 인조(仁祖)가 즉위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는 아들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원수를 갚는다고, 광해군(光海君)이 아버지인 선조(宣祖)를 죽였다고 말한다. 모두 반정(反正)을 정당화하기 위한 서인(西人)들의 일방적인 얘기이다.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기록에 의하면 ... 식탐(食貪)이 심한 선조(宣祖)는 동궁(東宮)에서 가져온 찰밥을 게걸스럽게 먹다가 목이 막혀 죽었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