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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 전북 장수- 붉게,푸르게 피어나는 장수/ 논개의 고향

영국신사77 2016. 1. 1. 01:06

[국내여행 | 전북 장수- 붉게,푸르게 피어나는 장수

입력 : 2015-10-08 14:09 | 수정 : 2015-10-08 14:37



    10년 전 장수군을 처음 찾았을 때는 스치듯 지나갔다. 

    논개사당에서 논개 영정을 잠시 알현했을 뿐인데, 

    당시 그 그림은 친일 화가가 그렸다 해서 철거 요구에 시달렸다. 

    강산이 한 번 변하고 다시 만난 사당의 영정은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름다운 논개의 얼굴을 바라보며 푸른 기상과 붉은 마음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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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개사당에서 바라본 시원한 풍경. 의암호가 내려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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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개사당에 모셔진 논개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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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개 생가지 경내에는 정자 단아정이 있다. 연못에 수놓은 연꽃이 아름답다



    ●성은 주씨, 기생이 아니다 

    장수에 온 이상 논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논개라고 하면 왜장을 껴안고 진주 남강으로 뛰어든 사실만을 즉각적으로 떠올리기 때문에 

    그가 장수 태생임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직 많은 듯하다. 

    논개의 성姓이 주씨이며, 기생이 아니라는 것은 더더욱 모르는 듯하다. 


    논개가 적장을 끌고 강물에 빠져 죽은 것은 

    지아비와 조국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였다. 

    논개의 남편 최경회는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병사였는데, 

    2차 진주성 싸움에서 패퇴한 뒤 남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논개는 진주 관기로 ‘위장’한 채 승전을 기념하는 왜군의 연회에 참가했고, 

    그 이후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논개 스스로가 의거 당시 신분을 거짓으로 꾸민데다 

    진주 사람들도 타향 사람인 논개의 정체를 자세히 알 리 없었을 것이다. 

    성리학을 나라의 근간으로 삼았던 조선의 공기 속에서 

    여자이자 기생으로 오해받은 논개는 오랜 세월 잊힌 인물이었다.

    논개를 추억하는 장소로는 논개사당 의암사와 생가가 있다. 

    사당은 장수읍 두산리에, 

    생가는 장계면 대곡리에 있다. 

    두 곳 모두 깔끔하게 조성돼 있다. 


    논개사당에 들면 비석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1846년 현감 정주석이 세운 논개생향비다. 

    무람한 일제가 파괴하려던 것을 마을 사람들이 땅속에 묻어 지켜냈다고 한다. 

    그만큼 논개를 향한 주민들의 존경과 애정이 컸던 것이다. 

    새롭게 바뀐 논개 영정을 알현하고 뒤를 돌아다보면 

    의암호와 배후의 산이 이뤄낸 장쾌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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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개는 주씨 집성촌인 주촌마을에서 태어나 13살까지 성장했다. 

    논개의 생애와 업적을 짚어주는 논개기념관이 있고, 

    단정하면서도 어딘가 결기가 느껴지는 동상이 건립돼 있으며, 

    그 뒤로는 생가가 복원돼 있다. 

    마을의 인상은 수굿하다. 

    지붕에 얇은 돌 조각을 올린 너와집에서는 

    한여름인데도 연기가 서리서리 피어오른다. 

    물레방아와 디딜방아는 정겹고, 여름 꽃들은 해사하다. 

    논개의 단심을 기억하는 마을의 녹음이 유난히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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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원된 논개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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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담에 피어 있는 능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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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개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