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한국문화

황희정승

영국신사77 2014. 1. 23. 00:45

해인사 2008.11.25 18:33


황희정승의 묘

 

 

 

 고려 末, 조선 初의 대표적인 정승(政丞)이자 청백리(淸白吏)의 표본으로 알려진.....호(號)는 방촌이다.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개성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머니 용궁 김씨가 그를 잉태했던 날, 열달동안 송악산 용암폭포에서 물이 흐르지 않다가, 그가 태어나자 물이 흘렀다고 한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으나, 고려가 亡하자 두문(杜門)에 은거하였으나, 조정의 요청과 동료의 추천으로 다시 벼슬길에 오른다.

 

 

 

 

 

 

 

1418년 충녕대군 (후일 世宗)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여 서인(庶人)이 되고, 파주 교하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남원으로 이배(移配)된다.  황희는 태종의 長子인 양녕대군을 어렸을 때부터 곁에서 키웠으므로 양녕이 세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太宗은 세째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자 그에 반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세종은 후일 그를 매우 重用한다.  그리고 세종 4년(1422) 풀려 나와  좌의정까지 올랐으나, 1430년 투옥된 태석균(太石均)의 減刑을 사사로이 부탁한 일로 파직(罷職)된다. 그러나 이듬해 복직되어 영의정에 올랐다.

 

 

 

1499년 벼슬에서 물러 날 때까지 19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여러 업적을 남겨 世宗이 가장 신임하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人品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가 청백리이라고 알고 있었지만...너무 청백리의 이미지만을 강조하는 것은 그에 대한, 역사에 대한 옳은 접근은 아닌 것 같다.  24년간 재상으로 있으면서 ..19년을 영의정으로 재직했었다는 것은 (더욱이 현명한 世宗시절에....) 그가 출중한 능력의 관리이었음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여러 잡음이 있었다고 해서 그가 청백리가 절대 아니었다고는 얘기하지 못해도, 그 이미지만을 너무 강조하지 않는 것이 황희의 實體에 옳게 접근하는 방법일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 왔던 것처럼.. 황희정승은 과연 청백리이었을까?  다른 기록이 있다.

 

 

 

이런 일이 있었다. 황희의 사위인 "서달"이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 낮은 벼슬아치인 아전을 혼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항의하는 그 아전의 동료를 때려서 죽이게 된다.  죽은 이의 가족이 문제를 제기하게 되고..

 

 

사건이 시끄러워지자 황희는 大司憲으로 재직 중이던 맹사성(孟思誠)을 통해 사건의 무마를 부탁했고, 뜻대로 되는 듯하였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재조사가 이루어지고, 사건의 실체가 드러난다.  황희와 맹사성은 일주일만에 복직되기는 하지만, 일단 파직(罷職)된다.

 

 

 

황희는 제주에서 국가 소유의 말 천여마리를 죽인 태석균(太石均)이라는 자의 뇌물을 받고 옹호하다가  또 파직당한다. 그리고 토지 개간 작업을 추진한 功을 내세워 개간지의 상당부분을 차지해 눈총을 받기도 한다.

 

 

 

"세종실록" 세종 15년 6월25일자에서 사관(史官)은 황희를 이렇게 평가하였다.

"황희는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것도 별로 없고, 장인으로부터도 노비 셋을 물려 받았을 뿐이데, 집 안팎에 부리는 노비가 많은 것은 매관매직(賣官買職)하고, 형옥(刑獄)을 팔아서 마련한 것이다."

 

 

 

이어지는 기록은 더욱 충격적이다. " 황희는 박포(朴苞)의 아내와 간통을 하였는데..........."

박포는 조선의 武人으로 개국공신이다. 그러나 1등공신이 되지 못한 불만으로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수양대군에게 패배하고, 귀양가서 참형 당한 사람이다.

 

 

 

남편인 박포는 처형당하고, 박포의 처는 홀로 살다가 그의 노비와 간통한다. 그 사실이 다른 노비에게 발각되자 그 노비를 죽여 연못에 던져버렸다. 며칠 후 그 사체가 물위로 떠오르자 박포의 처는 서울로 도망와서 황희의 집 뒷 마당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를 살았다. 그 과정에서 황희는 박포의 처를 건드렸던 것으로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10여건의 뇌물 수수사건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자식들도 더욱 가관이다. 서자(庶子) 황중생은 세자궁(世子宮)의 금띠, 금잔 등을 훔치다 발각되었다. 이 사건을 조사하다가 적자(嫡者)인 둘째 아들 황보신이 더 많은 궁궐 패물을 빼돌린 것이 들통난다. 황보신은 이 사건으로 조정으로 부터 받은 과전을 반납키로 한다. 그런데 兄인 황치신이 자신의 돌밭과  반납하려던 기름진 땅과 바꿔치기하려다 그 또한 발각된다.

  

 

 

세째 아들  황수신도 世祖의 눈에 들어 비록 영의정까지 오르지만, 그 또한 여러차례의 뇌물사건으로 파직과 탄핵을 당하게 되지만, 世祖의 묵인과 비호로 위기를 넘기다 영의정이 되고 한달 후에 병으로 죽는다.

 

 

 

 

 

 

 

 

 

무인석(武人石)같은데 칼을 잡지 않고 있다. 그리고 봉분 앞의 좌우로 둘레석을 쓰인 석축(石築)이 양쪽으로 튀어 나와 있는 특색이 있다.

 

 

 

 

  

 

 

"世宗같은 임금에, 황희같은 정승"이라는 말이 있다. 세종같은 聖君이 나기 위해서는  황희같은 명재상이 있어야 하고, 황희같은 명재상이 빛을 발하기 위하여서는 세종같은 성군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한마디에서 알 수 있듯이 세종과 황희는 조선 역사상 가장 최고의 조합(組合)이라고 할 수 있다. 孟思誠같은 인물이 늙어서도 좌의정에 머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황희가 영의정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황희는 과연 청백리의 표상일까?  그 것이 만들어진 허상(虛像)일 뿐이라면?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황희는 물론 그 아들들까지 청백리는 결코 아니었다. 그러면 세종도 그에게 속은 것일까?  太宗은 세종에게 황희를 일컬어  "그만한 인물이 없으니 반드시 重用하라"고 하였고, 세종은 황희를 일컬어 "그대가 있고 비로소 내가 있다"고 하였을 정도이다. 이만큼 황희라는 인물은 조선초기, 나라의 기틀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태종이 장자인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충녕대군(세종)을 세자에 책봉한 것에 대하여 반대하다가 잠깐 파직당한 시간을 제외하고는 황희는 태종과 세종시대를 관통한 가장 노회한 정치인이었다.

 

 

 

 

24년간의 재상, 그 기간 중 19년을 영의정에 있으면서 조정의 모든 일을 관장하였던 황희는 대부분의 일을 공평무사하게 처리하였고, 세종에게 충성을 다 함으로써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를 만들어내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도 어두운 법...권력의 중심부에 있던 황희는 그 누구보다 非理사건으로 탄핵을 많이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황희가 司諫院과 司憲府의 단골 탄핵대상으로 보일 정도로 자주 황희의 非理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 하나가 뇌물수수와 관직 알선이었다. 한 지방 수령의 아들이 중앙의 벼슬자리를 황희에게 부탁하자, 황희는 그에게 땅을 바칠 것을 요구한다. 이 비리사건을 포착한 사헌부는 탄핵을요구하지만, 세종은 모른 척하다가 사헌부의 요구가 너무 심해지자 잠시 물러나게 하는 제스쳐를 보여주다가 곧 영의정으로 복귀시키는 등..황희의 복권시나리오를 진두지휘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위에 적은 사위의 살인사건...여기에는 황희의 압력으로 요즘 직책으로 말하면, 국무총리, 법무장,차관, 부총리격인 우의정 맹사성, 감사원장이 모두 연루되어 사건을 조작,은폐,왜곡시켰다. 가만히 있을 사헌부가 아니었다. 사헌부는 "황희의 간악함이 이러하다..."하며 世宗을 흔들고, 세종은 어쩔수 없이 황희와 맹사성을 파직시킨다. 그러나 세종은 맹사성은 일주일만에, 그리고 황희는 1년후에 다시 영의정으로 복귀시킨다. 황희의 복권이 늦은 이유는 그만큼 황희의 비리가 많아 사헌부가 목숨걸고 반대한 까닭이다.   

 

 

 

 

 

 

 

 

이 외에도 황희의 매관매직과 刑獄에 관한 뇌물비리가 많았지만, 황희를 괴롭힌 것은 박포의 아내를 간통한 사건이었다. 박포는 태종의 즉위에 공을 세운 무인이었지만, 포상에 불만을 품고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인물로 태종에 의해 참형당했다. 그 아내가 황희의 집 토굴(土窟)에 숨어 있었는데 그 아내를 황희가 간통한 것이었다.

  

 

 

 

 

 

 

이와같이 수많은 비리사건에도 불구하고, 황희에 대한 世宗의 총애는 변하지 않았다. 황희가 파직당하여 私家에 머물러 있을 때에도, 세종은 모든 일을 황희와 상의하였다. 황희가 안된다고 하면 세종은 그에 따랐다. 사실상 세종과 황희의 共同 政權이었던 셈이었다.

 

 

 

그렇다면 세종은 왜 한결같이 황희를 총애하였을까? 세종은누구보다도 황희의 非理를 잘 알고 있는 핵심중의 핵심이었는데... 황희에게는 비리사건조차 눈 감고 넘겨버릴 수 있는 정도의 政治力이 있었다.

 

 

 

세종이 필요한 것은 황희의 청렴결백한 도덕성이 아니라, 조선을 움직일 수 있는 탁월한 정치력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종은 끝내 황희를 버리지 못 하였다.     황희의 청렴결백은 후세 사람들이 각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황희는 우리에게 알려진 것처럼 청백리가 아니었고, 흔한 정치인처럼 비리사건에 자주 연루되는 평범한 고위 공직자이었을 뿐이다. 한가지 다른 것은 황희만큼 세종의 안목과 비젼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위아래를 아우르며 정무를 처리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는 얘기이다.

세종에게 있어 영의정 황희와 좌의정 맹사성는 그 어떤 인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최고의 조합이었다. 파직과 복권을 거듭하며 혹독한 세월을 보냈지만, 보답이라도 하듯이 황희는 세종의 대업을 보필하였다.

 

 

 

세종실록에 적혀 있는 그 엄청난 스캔들조차 황희의 공적으로 인해 승화되는 것을 보면, 정치야 말로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그야말로 生物임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훗날 황희를 원수대하듯 하였던 史官들도 개과천선한 황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好評을 남겼다.   " 성품이 지나치게 과대하여 수신제가(修身濟家)에 단점이 있었으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 생각이 깊고 함부로 나서는 일이 없었다. 한번 다짐한 일은 반드시 위에 보고하여 行하였으며, 행함에 있어서도 자주 바꾸지 않아 나라 사람들을 安定시켰다. 관후하여 재상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중후한 자질이 크고 훌륭하여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집을 다스림에는 검소하고, 기쁨과 노여움을 안색에 나타내지 않으며, 일을 의논할 적에는 正大하게 대하여 원칙을 보전하기에 힘쓰고, 번거롭게 변경하는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의 유래...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고려의 왕족과 신하들은 개성 동남쪽 고개 부조현(不朝峴)에 올라가, 조복(朝服)을 벗어 나무가지에 걸어 놓고, 헌 갓으로 바꿔쓰고 광적산 서쪽기슭의 두문(杜門)으로 들어 가, 나무로 엮은 집에 모여 살았다. 모두 72名이었다.

 

 

 

 

그리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맹세한다.  이성계는 이들을 포섭하기 위하여 온갖 회유책을 썼으나, 그들의 충절이 변하지 않자, 이들을 추방시키기 위하여 이 곳 두문동(杜門洞)에 불을 질러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이성계는 하루 말미를 준다.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은  의논한 결과 "후세에 우리의 상황을 전할 수 있는 한사람은 남겨 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해서 ..

 

 

모두의 추천을 받아 가장 어렸던  황희 한사람만 내 보내고 , 나머지 71명은 모두 불에 타 분사(焚死)하였다.

 

 

 

두문동(杜門洞)에 들어 간 사람은 일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杜門不出의 유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