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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김시민 ... 진주대첩

영국신사77 2014. 1. 29. 10:18

2008.12.01 11:09




                                              충무공 김시민(忠武公  金時敏)

 

 

 

 

 


 

 

 

 김시민(金時敏. 1554 ~ 1592)은 조선 중기의 무신(武臣)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資)는 면오(勉吾), 시호(諡號)는 충무(忠武)이다. 고려시대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의 13대손이자, 지평(持平) 김충갑(金忠甲)의 셋째 아들이다. 


선조(宣祖) 11년인 1578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군기시(軍器寺)에 입사(入仕)하였으며, 1581년에 부평부사가 되었으나, 경기어사(京畿御史)의 서찰로 구황(救荒)에 전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83년 여진족(女眞族) 이탕개(尼蕩介)가 회령(會寧)지방에서 소란을 일으키자 정언신(鄭彦信)의 부장(副將)으로 출정하여 토벌하였다. 이때 그는 군대 개혁 및 강화에 대한 건의를 병조(兵曺)에 제출하였으나, 평화로운 시기에 군기(軍機)를 강화할 필요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질타하자 이에 젊은 혈기에 분개하여 사직하였다. 


선조(宣祖) 24년인 1591년에 진주판관(晉州判官)이 되고, 부임한 지 1년 후인 1592년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목사(牧使) 이경(李敬)과 함께 지리산(智理山)으로 피하였다가, 목사(牧使)가 병사(病死)하자 초유사(招諭使 ..  난리가 일어났을 때 백성을 초유하는 일을 맡아보던 임시 벼슬) 김성일(金誠一)의 명에 따라 그 직(職)을 대리하였다. 


김시민은 진주(晉州)로 돌아와 성민(城民)을 안심시키고 피난하였던 성민(城民)을 귀향하게 하였으며,  성곽을 보수하고 한편으로는 군사 훈련으로 군사 체계를 갖추었다. 

 

 당시 왜군(倭軍)은 사천(泗川)에 집결한 다음 진주(晉州)로 진격하였다. 이에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과 상주판관 정기룡, 의병장(義兵將) 이달(李達) 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하고 왜군을 중간에서 요격하고, 패주(敗走)하는 왜군을 추격하여 고성과 창원을 수복하였다. 이어 의병장 김면(金勉)의 요청을 받아 구원병 1천(千)을 이끌고 가서 거창의 사랑암에서 금산으로 서남진(西南進)하는 왜군을 맞아 승리하였으며, 이 공(功)으로 1592년 음력 7월 26일 진주목사(晉州牧使)로 관직을 승진 제수받았다. 


김시민(金時敏)은 취임 후 염초(焰硝) 5백여 근을 만들고 총통(銃筒) 70여 병(柄)을 만들고 따로 부대를 배정하여 숙달시키는 한편 성(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음력 9월에는 진해(鎭海)로 출동하여 왜군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내자 조정에서는 그를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임명하였다. 그 후 금산(金山)에서 왜군을 격파하여 사기가 충천하였다.     

 

                  

 

 

 

 

 

 

 

 

 

 한편 김시민(金時敏)에게  한번 대패(大敗)한  왜군(倭軍)은 진주(晉州)를 빼앗으려고 다시 계획을 세웠다. 1592년 음력 10월 5일 왜군(倭軍) 2만(萬) 대군이 진주성(晉州城)으로 공격하여 왔는데, 그들은 진주성을 둘러싸고 포위 공격을 감행하자, 김시민(金時敏)은 고을 안에 사는 백성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부 성(城)으로 들어오게 하고 여자(女子)는 모두 남장(男裝)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조직된 3,8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진주성을 철통같이 지키며 7일간의 격전 끝에 왜군을 물리쳤다. 


1592년 음력 10월 9일 마지막 날의 전투에서 김시민은 격렬한 접전(接戰) 도중 유탄(流彈)에 맞고 의식을 잃었지만, 이광악(李光岳)이 지휘를 이어받아 전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김시민(金時敏)은 음력 10월 18일 조용히 눈을 맘았다. 그의 나이 향년 39세이었다. 

 

                                                모쿠소(木曾判官)

제 1차 진주서전투에서 김시민(金時敏) 주도의 조선 관민(官民)이 보여준 필사의 항전(抗戰)은 적(敵)인 왜군(倭軍)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 전투는일본의 정예(精銳) 병력이 패배하였기 때문에 김시민(金時閔)은 조선군의 맹장(猛將)으로서 그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왜군은 김시민(金時敏)을 ' 모쿠소 ' 또는 ' 모쿠소  판관 (木曾判官) '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김시민(金時敏)의 직책인 목사(牧使)를 일본발음으로 읽은 뒤, 다시 비슷한 음(音)의 일본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조선군의 맹장(猛將) ' 모쿠소 '에 관한 소식은 풍신수길(豊臣秀吉)에게도 알려져, 이듬해 무슨 일이 있어도 진주성(晉州城)은 반드시 함락시키라는 제 2차 진주성 전투의 원인이 되었다. 김시민(金時敏)은 이미 사망(死亡)한 상태이었으나, 왜군은 진주목사(晉州牧使)의 교체(交替)와 사망 사실을 몰랐었다. 후에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이 일본에서 발간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晉州牧使) 서예원(徐禮元)의 목은 모두 ' 모쿠소 판관 '의 것으로 알려져 풍신수길(豊臣秀吉)에게 보내졌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 모쿠소 '란 캐릭터는 조선군의 맹장이자 충신이면서, 원한을 품고 일본을 정복(征服)하려는 원귀(怨鬼)로 ' 가부키 '의 소재가 되었으며, 후에는 다른 가부키와 섞어 들어가는 등 원래 김시민과는 상관없는 캐릭터가 되었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는 조선 정조(正祖) 때, 조선 건국(建國)에서부터 숙종(肅宗)때까지의 주요 인물을 항목별로 나누어 편집한 책으로, 74권 필사본이다. 제 4권과 7권이 결본(缺本)으로 되어 있다. 수록 인물의 수(數)는 결본(缺本)으로 빠진 수(數)를 제외하고도 모두 ' 2,065 명 '으로 정조(正祖) 때 편찬된 인물고(人物考)의 1,817명보다 248명이나  많다. 


이 책은 각 인물의 묘지명, 묘갈명, 묘표, 비명(碑銘), 행장, 시장(諡壯), 문집, 정려비 중에서 가장 잘 된 것을 하나씩 골라 그대로 실었다.  


다음은 '국조인물고"에 수록된 김시민(金時敏)에 대한 시장(諡壯... 시호를 내리는 글)이다.

 

 

“공(公)의 이름은 시민(時敏)이고 자(字)는 면오(勉吾)이고 성(姓)은 김(金)이며, 고려 때의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12세손이다. 임진왜란 때에 공(公)이 진주판관(晉州判官)으로 그 도(道)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기용되어 일부의 군사를 이끌고 외로운 성(城)을 지켜 큰 적(敵)을 물리쳐 경상우도(慶尙右道)를 보전하였으므로 그 공적이 참으로 특이하고 위대하여 매우 뛰어났거니와, 이제까지 1백 수 십 년 동안에 어리석은 아녀자일지라도 모두 임진년(壬辰年) 진주(晉州)의 승첩을 칭송하니, 그 군기(軍機)를 규획(規劃)하고 사중(士衆)을 격려한 일에는 반드시 전할 만한 것이 많을 것인데, 공(公)이 전진(戰陣)에서 작고(作故)하고 6년의 전쟁을 겪고 나서 이것을 기술(記述)한 사람이 없고 그곳이 또한 행조(行朝)에서 멀어서 그때 아뢰어서 드러내어 칭송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상세한 것은 옛일에 박식한 자일지라도 알아서 말할 수 없으니, 아까워 견딜 수 있겠는가 ?  다만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등 명공(名公)들이 기술한 것과 진주(晉州) 유민(遺民)이 지은 비문(碑文)에 힘입어 그 고적 중에서 현저한 것은 오히려 알아서 밝힐 수 있다.

 

 

삼가 살피건데, 공(公)이 진주판관(晉州判官)이 된 이듬해가 임진년(壬辰年)이다. 이때 목사(牧使)가 마침 죽고 왜적(倭賊)의 소식이 갑자기 이르렀는데, 인심이 크게 놀라서 도산(逃散)할 마음을 일으키므로, 공(公)이 고을의 일을 대행(代行)하여 명령하기를 ' 감히 달아나는 자는 참(참)하라 '하고, 드디어 청야(淸野)하고 성(城) 안에 들어가 기계를 보수하고 성지(城池)를 수선하여 사수(死守)할 계책을 세웠다. 이때 임금은 서방으로 피하고 적(敵)은 한성(漢城)과 개성(개성)을 잇달아 함락하여 팔도(八道)를 유린하는데 고을들이 풍문만 듣고 달아나 흩어지고 감히 그 예봉을 건드리는 자가 없었으나, 진주(晉州)만이 요새를 끼고 우뚝히 전라도(全羅道)의 보장이 된 것을 조정에서 듣고 목사(牧使)를 제수하였다. 


공(公)이 사졸(士卒)과 함께 고락(苦樂)을 같이하고 생사(生死)를 같이 할 것을 맹세하고 드디어 출병하여 사천(泗川), 고성(固城)의 왜군을 공격하여 이긴 바가 많았고, 또 진해(鎭海)에서 적진을 격파하여 그 장수 평소태(平小泰) 등을 사로잡아 행재(行在)에 헌부(獻赴)하니, 임금이 아름답게 여기어 가선대부(嘉善大夫),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초수(超授)하였다. 공(公)이 곧 군사를 일으켜 북(北)으로 나가 금산(금산)에서 왜군을 격파하여 군세를 크게 떨치니, 개령(開寧) 금산(金山)의 왜군이 풍문만 듣고 거두어 물러갔다.  

 

이해 겨울 공(公)이 출전(出戰)하여 돌아오기 전에 적(적)의 대추(大酋)가 한산(漢山)으로부터 바닷가 고을들을 둘러 나와 여러 둔(屯)의 군사 10만(萬)여를 아울러서 장구(長驅)하여 곧바로 진주(晉州)를 범한다는 말을 공(公)이 듣고, 길을 곱잡아 달려 들어와 사민(士民)의 남녀(男女)를 모아 수첩(守堞)에 대오를 배치하여 부분이 겨우 정해졌는데, 왜군이 이미 모여 에워싸고 육박하여 왔다. 많고 적은 형세가 마치 산(山)이 알을 누르는 것과 같았으나, 공(公)은 다만 충의(忠義)로 격려하고 부인과 함께 친히 술과 음식을 가지고 성(城)을 돌며 군사를 먹이니 사람들이 다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왜군이 운제(雲梯), 지도(地圖) 등 오낮 계책을 써서 번갈아 공격하였으나, 공(公)이 기회를 타서 계략을 쓰는 것이 민첩하고 신기하여 여러 번 와도 여러 번 물리치니, 왜군의 형세가 크게 꺾였다.

 

싸움이 한창인 때에 뭇삶의 마음은 두렵고 장사(將士)는 생기가 없었으나 공(公)이 바야흐로 지휘하고 호령할 때에는 의기가 안정되고 때로는 거문고를 울리고 피리를 불러 마치 무사한 때와 같이 하였으므로 성(성) 안 사람들이 다 믿고 편안히 여겨, 성가퀴에 올라 14일 동안 밤낮으로 싸워서 적(敵)의 주검이 들에 가득한데 갑자기 크게 천둥치고 비가 내려 어두워지니, 적(敵)이 놀라 당황하다가 밤에 달아나서 성(城)이 드디어 완전하였다. 


적이 물러간 날에 공(公)이 성(城)을 순찰하는데, 한 왜병(倭兵)이 쌓인 주검 안에 엎드려 있다가 총(銃)을 쏘아 공(公)을 맞혔으므로 메어 관사로 돌아왔으나, 이해 12월 26일에 상처를 앓다가 졸서(卒逝)하였는데 공(公)은 이때 39세이었다. 


성(城) 안에 사녀(士女)의 울음소리가 천둥같았고, 호남과 영남의 인사가 모두 서로 조상(弔喪)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 ' 우리는 어찌하는가 ? '하였다. 이듬해에 괴산(槐山)에 있는 선대(선대) 묘역에 반장(返葬)하느라 호남(湖南)길로 나오는데, 지나는 곳의 백성들이 앞다퉈 수레를 끌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 우리 공(公)이시여, 우리 공(公)이 없었으면 우리가 죽은 지 오랠 것입니다 '고 하였다. 

 

 공(公)은 가정(嘉靖) 갑인년(甲寅年, 1554년 명종 9년)에 목천(木川) 백전촌(柏田村)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도 아주 뛰어난 자질이 있었다. 사는 마을에서 가까운 큰 냇물 가의 바우가 웅덩이를 만들고 큰 뱀이 그 가운데에 굴(窟)을 지어 살면서 백성의 가축이 물에 가까이 가면 으레 잡아먹었는데, 공(公)이 없애려고 뽕나무와 쑥대로 손수 활과 살을 만들어 가동(家童)을 데리고 냇가에 가서 가동(家童)을 시켜 먼저 바위에 올라가 도발하게 하였으나 아이가 두려워서 감히 나아가지 못하므로 공(公)이 활을 당겨 쏘려 하니 아이가 겁이 나서 달려 올라갔다. 이윽고 회오리바람이 갑자기 일고 물결이 용솟음치며 과연 큰 뱀이 나와 바위를 둘러 턱을 딱 벌리고 사람을 향하는 기세가 매우 사나웠는데, 공(公)이 문득 나아가 어지러이 쏘아서 당당에 죽였다. 이때 공(公)의 나이가 8세이었으므로 장로(長老)들이 다 크게 놀라고 듣는 자는 모두 매우 씩씩하게 여겼는데, 지금까지도 주민들이 김공(金公)이 뱀을 쏜 곳이라고 가리켜 말했다. 장성하여서는 몸이 건장하고 크며 도량이 비범하나 기력을 믿고 학문을 즐기지 않고 큰소리하기를 좋아하므로 남들이 웃고 허황하게 여겼다.”   

 

                                          사사처(射蛇處):천안시 병천면

 

 김시민(金時敏)의 생가지(生家址)와 사사처(射射處)가 있는 유허지(遺墟址)이다.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460 - 1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주요 시설물로는 구암(龜巖 .. 거북바위) 1기, 유적비 1기 등이 있다. 

구암(龜巖)은 김시민의 부친인 구암(龜巖) 김충갑(金忠甲)의 호(號)에서 유래된 바위이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 유적비 '사사처'


 

 

 

 

 

 

 

 

 

 

다음은 김시민(金時敏)이 태어난 곳,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 백전마을 '에 전해 내려오는 일화 한 토막이다. 


김시민(金時敏)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기골(氣骨)이 장대하였으며 병정놀이를 좋아하고 언제나 대장이 되어 지휘하였다. 그가 8살 때 길가에서 병정몰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마침 원님행차가 있어 수행원이 길을 비키라고 하자 ' 한 고을 사또가 감히 진중을 통과할 수 있느냐 '고 호령하면서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원님이 말에서 내려 김시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 큰 재목이구나 '하면서 길을 비켜 지나갔다고 한다. 9살 때의 일이다. 


백전마을 입구는 백전천(지금의 병천천)이 굽이 돌아 흐르고 있었는데, 이 백전천가에 물에 잠긴 바위가 있고, 그 속에 큰 굴(窟)이 하나 있었으며, 이 굴(窟) 속에는 큰 이무기 뱀이 살면서 수시로 출몰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고 가축(家蓄)에 해(해)를 끼치기도 하였다. 이때 장난꾸러기 김시민은 이무기 퇴치를 궁리하였다. 뱀은 뽕나무 활에 쑥대화살로 쏘아 잡는다는 고사(古事)를 읽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개울가로 가서 이무기 뱀을 나타나게 한 후 활로 쏘아 죽여버렸다고 한다.  현재 백전마을 어귀에는 700 ~ 800년된 느티나무와 거북바위가 있는데 이곳이 활로 뱀을 쏘아 맞춘 ' 사사처(射蛇處) '라고 전해오고 있다.   

 

 

 

                                         진주대첩(晉州大捷)       

 

진주대첩(晉州大捷)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조선군과 왜군(倭軍)이 벌인 두 차례의 전투로,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3대 대첩(大捷)으로 불린다. 특히 제1차 진주싸움은 임진왜란의 3대첩(三大捷) 중의 하나로 꼽혀 진주성 대첩(晉州城大捷)이라고도 하며, 제2차의 진주싸움은 의기(義妓) 논개(論介)의 죽음으로 널리 알려진 전투이다.  

 

 

1592년 음력 6월 이후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義兵)들의 맹활약으로 기세가 꺾인 왜군(倭軍)은 병력을 집중하여 어떻게든지 하삼도(下三道)의 관문(關門)인 경상도를 손아귀에 넣으려고 했지만, 전란(戰亂) 이래 진주성(晉州城)만은 공략하지못하였다. 진주성(晉州城)은 앞으로 남강(南江)이 흐르고 후방 삼면(三面)은 험준한 형세로 석벽(石壁)을 높이 쌓아 올린 매우 견고한 성(城)이었다. 일본의 풍신수길(豊臣秀吉)은 남도(南道)를 장악할 수 있는 본거지이자 전라도(全羅道) 공격의 교두보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요충지가 바로 진주성이라고 여기고 공략을 명령하였다. 


1592년 음력 10월 4일, 왜군(倭軍)은 2만(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주성(晉州城)을 포위하였다. 성(城) 안에는 진주목사(晉州牧使) 김시민(金時敏)을 위시한 3,800여 명의 병력과 백성들이 합세하여 결전(決戰) 준비를 갖추었고, 성(城) 밖에서는 경상도 의병(義兵)이 왜군을 배후(背後)에서 견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왜군은 섣불리 공격하지못하다가, 마침내 주위의 민가(民家)를 모조리 불지르고 총탄과 화살을 쏘아대며 공격을 시작하였다. 

 

                                                           제1차 진주 싸움

1592년 음력 6월 이후,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義兵)들의 맹활약으로 기세가 꺾인 왜군(倭軍)은 병력을 집중하여 어떻게하든지 하삼도(下三道)의 관문인 경상도를 손아귀에 넣으려 했지만 전란(戰亂)이래 진주성만은 공략하지 못하였다.  풍신수길(豊臣秀吉)로서는 남도(南道)를 장악할 수 있는 본거지이자 전라도(全羅道) 공격의 교두보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요충지가 바로 진주성(晉州城)이라 여기고 공격을 명령하였다. 1592년 11월 7일 왜군(倭軍)은 3만(萬)의 군사를 이끌고 진주성(晉州城)을 포위하였다.  

 

 

왜군(倭軍)에 맞서 성(城) 안의 군사들은 ' 현자총통 (玄字銃筒) '을 비롯한 총포(銃砲)와 화살로, 백성들은 돌과 뜨거운 물로 대항하였다. 게다가 임계명, 최경회(崔慶會)가 이끄는 전라도(全羅道) 의병(義兵) 2천(千)여명이 성(城) 밖에서 왜군의 후방(後方)을 기습 공격하였다. 그러나 음력 10월 9일,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전투 후반부 왜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戰死)하고 말았다. 진주성을 공격한 지 7일 만인 음력 10월 10일 왜군은 퇴각하였고, 마침내 조선이 민관군(民官軍)은 단결하여 항전(항전), 마침내 진주성(晉州城)을 방어하였다. 이것이 제1차 진주성 전투로, 임진왜란의 3대 대첩(삼대대첩)의 하나로, 왜군이 호남(湖南)으로 진출하려던 계획을 좌절시킨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승리이었다. 

 

조선군은 성문(城門)을 굳게 닫고 화약을 장치한 대기전(大岐箭)을 쏘아 죽제(竹梯 .. 대나무로 만든 사다리)를 파괴하고, 마른 갈대에 화약을 싸서 던지거나 끓는 물과 큰 돌을 던지는 등 필사적으로 싸운 끝에 10배(배)에 이르는 왜군(倭軍)의 공세를 분쇄하였다. 왜군(倭軍)은 10월 10일에 6일 간의 대접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주(敗走)하였는데, 이 전투에서는의병대장(義兵大裝) 곽재우(郭再祐)의 응원이 적(敵)과 아군(我軍)에게 심리적(心理的)으로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다른 경상도(慶尙道) 지역을 보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왜군(倭軍)으로 하여금 호남(湖南)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제 2차 진주성 전투

제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참패로 위신이 손상된 풍신수길(豊臣秀吉)은 1593년 6월, 가등청정(加藤淸正), 소서행장(小西行長) 등에게 복수전(復讐戰)을 하도록 특별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왜군(倭軍)은 6월 15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18일까지 함안(咸安), 반성(班城), 의령(宜寧)을 점령하고 19일에는 3만(萬) 7천(千) 명의 병력이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진주성(晉州城)에는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사천현감 장윤(張潤), 의병장 고종후(高從厚) 등이 이끄는 3,400명의 병력과 6 ~ 7만 명의 일반민이 있어, 피아의 전투력은 처음부터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전투는 6월 22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왜군은 귀갑차(龜甲車) 등 특수한 병기로써 파상공격을 거듭하고,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끝에 거의 모든 장병이 죽고, 29일에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성(城)이 함락되자 왜군은 성에 남은 군관민(軍官民) 6만 명을 사창(司倉)의 창고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학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축도 모두 도살하였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가운데 최대의 격전으로 꼽히는데, 비록 싸움에는 패하였으나 왜군도 막대한 손상을 입었다.   

 

                                             진주성                          晉州城

 

진주성(晉州城)은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제 1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주성의 둘레는 약 4,000m의 규모이며, 진주성은 ' 촉석성(矗石城) '이라고도 한다. 내성(內城)괴 외성(外城)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 수문(水門), 암문(暗門), 장대(將臺), 포루(砲樓)와 촉석루(矗石樓) 등의 건물이 남아 있는 이 성(성)은 원래 백제시대의 거열성지(居烈城址)이었다고 전하며, 고려(高麗) 공민왕 때에도 7차의 중수(重修)가 있었다. 

 

 

 

 

 

선조(宣祖) 26년인 1593년,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장계(壯啓)를 올리고 7월 14일 진주성(晉州城)에 도착하니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 충청병사 황진(黃進),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의병장 고종후(高從厚) 등이 모여 들었다. 그러나 전라순찰사 권율(權栗)의 전령으로 그들이 일시에 흩어지니 성안에는 불과 3,000며명만이 남게 되었다. 당시 진주(晉州)는 유일하게 보존된 전라도(全羅道)로 가는 길목이므로 이곳을 잃으면 군량(軍糧)을 보급하는 전라도지방을 방어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倭軍)은 이 성(城)을 포위하여 7차례에 걸친 공방전(攻防戰)이 계속되었다. 

 

진주성(晉州城)의 군관민(軍官民)들은 장렬한 항쟁(抗爭)을 하여승리하였으니 이는 남강(南江)에 쌓은 성벽(城壁)에 크게 힘입은 것이었다. 이때의 성(城)은촉석성(矗石城) ' 이었으며 지금의 내성(內城)에 해당된다.하륜(河崙)의 성문기(城門記)에 의하면, 촉석성(矗石城)은 석축(石築)한 성(城)의 둘레가 4,359척(尺), 높이는 15척(尺)이며, 문(門)은 세 곳으로 의정(義正 .. 서쪽 단층), 지제(智濟 .. 북쪽 2층), 예화(禮化 .. 남쪽 단층)이며, 남강(南江)에 욘하고 있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험준한 곳이다. 하륜(河崙)의 소년시절에 이 성벽은 무너진 터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진주(晉州)는 일찍부터 왜구(倭寇)의 노략질이 빈번하여 성벽을 다시 쌓는 일이 시급하였다. 이에 향인(鄕人)들이 옛터에 성벽을 축조하였으나 곧 무너지니 세종(世宗) 19년인 1437년 관민(官民)이 합세하여 완성시켰는데 그 모습이 웅장하였다고 한다. 성(城)의 북쪽으로 3곳의 연못을 파서 연결하여 성(城)에 접근하려면 어디서나 물을 건너야만 되도록 하였다.   

 

 

 

 

 

 

 

 

 

 

 

                                              전공비(戰功碑)

 

김시민(金時敏)의 전공(戰功)을 기리는 비(碑)이다. 이 전공비(戰功碑)는 광해군(光海君) 11년인 1619년에 진주(晉州)지역 백성들의 열망에 의하여 세워졌다.  이전공비는 ' 진주전성각적비 (晉州全城却敵碑) '이라고도 불린다. 현재 경상남도 유형문화제 제 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진주성(晉州城) 안에 단층 맞배지붕의 비각(碑閣)을 마련하여 보존하고 있다.

 

 

 

비(碑)의 정식 이름은 ' 고목사김후시민전성각성각적비명 (故牧使金候時敏全城却敵碑銘) '이며 성균관 진사(進士) 성여신(成汝信)이 글을 짓고, 성균관 생원(生員) 한몽인(韓夢寅)이 글씨를 썼다. 비명(碑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嗚呼   急病攘夷   忠所激也   死守不去   義所決也   出奇却敵   勇所奮也   能是三者   而疊疊烈烈   至今輝人耳目者   故牧使金候是也  ...  아 ! 위급한 병중(病中)에도 오랑케를 물리치신 것은 충성심이 솟구쳤던 때문이요, 죽음으로써 지키며 떠나지 않았던 것은 의로움에 이하여 결단을 내렸기 때문이, 기묘한 계책을 내어 적(敵)을 물리친 것은 용맹을 드날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를 능히 하시니 소리 드높고 성대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귀와 눈을 번쩍 뜨이게 한 이는 돌아가신 목사(牧使) 김후(金候)이시다.

 

                                               충민사(忠愍祠)

 

충민사(忠愍祠)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 1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57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 왜군(倭軍)과 맞서 싸우다가 순절(殉絶)한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과 그의 숙부 문숙공(文肅公) 김제갑(金梯甲)의 위패를 봉안하고 배향하는 사당(祠堂)이다.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충민사에 배향된 그의 숙부 문숙공(文肅公) 김제갑(金悌甲)은 1581년에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원주목사(원주목사)로, 그는 관군(官軍)과 의병(義兵)을 이끌고 영원산성에서 왜군과 교전을 벌이다가 부인 이씨, 아들 시백(時伯)과 함께 전사(戰死)하였다. 그리고 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효충문(孝忠門)이라 불리는 외삼문(外三門)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을 올린 평삼문이고, 선무문(宣武門)이라 불리는 내삼문(內三門)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솟을삼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