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토요일에 동작문인협회 주최로 전북 고창에 있는 미당 서정주 문학관을 다녀왔다.
미당 서정주 선생이 세상을 뜬지 벌써 햇수로 8년이나 된다. 세월은 그냥 있지 않고 흘러가기만 한다. 분명히 8년전에는 미당 선생이 생존하셔서 그 특유의 웃음과 허허로움을 이야기 해주곤 했는데, 이제는 육신은 세상에 있지 않고 생전에 가졌던 많은 시와 그 정신만이 문학관에 남아서 그를 찾는 사람을 맞이 하고 있는 것이다. 생전에 이름이 나있던 분의 생가를 찾든가 아니면 기념관같은 곳을 찾게 되면 우선 그 사람이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다가 한 삶을 마쳤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명제를 갖는 것은 찾는 사람의 당연한 과제가 아닌가.
나는 미당의 생전에 몇번 그분과 만났고 대화를 나눈적이 있었다. 70년대 중반이니까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당시 여원이라는 여성 잡지가 있었는데 거기에 함께 기자로있던 이수화 시인을 통해서 미당 서정주 선생을 접했다.이수화 시인은 미당 선생의 제자로서 미당의 추천을 받고 문단에 등단한 것을 일생의 큰 자랑으로 알고 있다. 당시 미당 선생은 서울 사당동의 예술인 마을의 2층 양옥에서 살고 계셨다. 식구는 그분의 부인인 방옥례 여사와 단 둘뿐이었다. 미당 선생을 만나러 갈때는 요즘에는 나오지 않는 이젠백이라는 맥주를 사갖고 갔다.
그 술을 마시면서 미당은 동서인 김관식의 이야기를 가끔 꺼냈다. 김관식은 시인으로 기행을 일삼은 분이었다. 그분은 선운사 연산홍을 좋아하셔서 그 연산홍을 집에다 많이 가꾸셨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세상사는 이야기와 함께 지난날 고생했던 이야기, 또는 여자 이야기 등을 하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했는데 나는 그분의 인간성이 무척 허심탄회하고 좋았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후 80년대 들어와서 임종덕 선생이 친일문학전집을 내었고 서정주 선생의 이야기가 그 책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면서 기록이 된것을 알고 마음이 무척 아팠다. 일제시대 때 남들은 고생을 하는데 일제를 합리화하고 그 정부를 찬양하면서 군대에 나가라고 종용한 시들이 발표된 것을 알고나서 정말 속이 상했다. 그것들이 모두 허위로 밝혀졌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자료로 남겨져 있는 사실이었다. 만일 그분이 이름없는 시인이었다면 그 부분이 그렇게 돋보이면서 드러날 수가 있었을까, 그러나 그분이 갖고 있는 우리 국민들의 좋은 인식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그분은 나름대로 책임을 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분이 지은 한국적이고도 한국적인 시들, 가히 천재적인 그 아름다운 언어들이 희석이 된다는 것은 가슴 아픈일이다. 나는 지금도 국화옆에서를 단 한자도 빠지지 않고 외우고 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국화 옆에서...
1915년 전북 고창에서 대지주 김성수 집안의 마름의 아들로 태어난 미당은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부안군 보통학교를 거쳐 서울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광주학생운동 주모자로 퇴학과 편입, 다시 권고 자퇴 끝에 만해 한용운의 지인이면서 육당이나 춘원등에게도 큰 영향을 준 석전 박한영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가, 그의 권유로 동국대의 전신인 중앙불전에 입학한다. 그후 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시인이 되고, 그해 11월 김동리, 오장환 등을 동인으로 한 ’시인부락’ 의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된다.
미당은 학생시절을 회상하면서 한때 사회주의에 빠져 학생운동을 했으나, 미당은 그것은 자신이 사회주의에 어설프게 물든 결과였다며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후 미당은 사회주의 그리고 사회주의와 관련된 예술활동을 비판하게 된다.
언젠가 한번은 가보고 싶었다. 미당의 여러가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미당 문학관으로 향했다.
폐교된 질마재학교를 고창군에서 매입하여 문학관을 세웠다고 하는데, 정성이 넘쳐나는 건물이다. 제자들이 모여서 만들었다고 한다. 현대건축의 시멘트가 다 드러나는 네모상자 모형과 선운사 맞배지방의 고건축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다.
마당에 잔디가 깔려있다. 건물에 들어서니 따뜻하고 소박하고 정겹다. 주민등록등본부터, 책, 안경, 시...등이 갖가지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마음을 우리는 선운사 동백꽃...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에는.....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그런 시들이 걸려있다. 아무렇게나 쓴것 같은 필체가 오히려 돋보인다.
전망대
전망대에 오르니 저만치 바다가 보인다. 스물세해동안 맞은 바람에 대한 시가 재미있게 옥상에 새겨져 있다. 바다바람이 차다. 편안하고 소박한 동네가 펼쳐져 있다. 아름답다. 시인이 생겨날만한 동네다.
바로 옆에는 미당의 초가 생가가 소박하게 노란칠을 하고 서있다. 인형의 집 같다. 동네 아이들 놀이터가 되었는지 애들이 신나게 숨바꼭질을 한다.
문학관에는 시민단체가 친일 작품으로 지목한 <인보의 정신> <항공일에> <송정오장송가> <스무살된 벗에게> <보도행> <경성사단 대연습 종군기> <최체부의 군속지원> <징병적령기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 등 시 6편, 수필 3편, 소설 2편
미당시문학관은 2001년 11월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의 폐교되는 초등학교에 문을 열었다. 10억원을 들인 이 시문학관에는 미당의 육필 원고와 각종 사진,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미당 초상화 등 자료 1만여점이 있다.
여기 들어있는 시 가운데 친일 시라는 것을 적어본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귀국대원
귀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 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서정주의 <오장(伍長) 마쓰이 송가(頌歌)> 부분
이 시는 미당이 1944년 12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발표한 그의 대표적인 친일시다. 이른바 ’자살 특공대’로 알려진-일제는 그것에다가 옥쇄(玉碎:공명, 충절을 위해 깨끗이 죽음)라는 이름을 붙여 미화했다.
『신동아』 1992년 4월호에서 「일정 말기와 나의 친일시」라는 글에서, 당시에 시비가 일고 있던 그의 친일경력을 또 한 번 시인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친일행위를 변명하기 위해 기뵤한 상황론에다가 죄 없는 조선 사람 전부를 공범(?)으로 옭아넣어 얼토당토않은 합리화를 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논리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 자전적 담시집 《팔 할이 바람》속에 있는 〈종천순일파〉라는 시에서다.
그러나 이 무렵의 나를’친일파’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의가 있다. ’친하다’는 것은 사타구니와 사타구니가 서로 친하듯 하는 뭐 그런 것도 있어야만 할 것인데 내게는 그런 것은 전혀 없었으니 말씀이다. ’부일파(附日派)’란 말도 있긴 하지만 거기에도 나는 해당되지 않는 걸로 안다. 일본에 바짝 다붙어 사는 걸로 이익을 노리자며 끈적끈적 잘 다붙는 무얼 가졌어야 했을 것인데, 나는 내가 해준 일이 싼 월급을 받은 외에 그런 끈끈한 걸로 다붙어 보려고 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때 그저 다만, 좀 구식의 표현을 하자면-- ’이것은 하늘이 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익히며 살아가려 했던 것이니 여기 적당한 말이려면 ’종천친일파(從天順日派)’ 같은 것이 괜찮을 듯하다. 이때에 일본식으로 창씨개명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 다수 동포 속의 또 다수는 아마도 나와 의견이 같으실 듯하다.
나는 그분의 좋은 시와 일제 때 쓴 친일시, 그리고 그분의 변명 비슷한 것을 적은 글 이외에는 뭐라 이야기할 자신이 없다. 그것은 훗날 역사가 또 다른 형태로 적어놓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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