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루살렘/♣예루살렘(종합)

솔로몬의 부인 파라오의 딸

영국신사77 2011. 3. 26. 01:06

역대하8:11"솔로몬이 바로의 딸을 데리고 다윗성으로 부터 그를 위하여 건축한 왕궁에 이르러 이르되 내 아내가 이스라엘 왕 다윗의 왕궁에 살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궤가 이른 곳은 다 거룩함이니라 하였더라" 아멘

 

역대하에 나오는 파라오의 딸의 이름도 알지 못합니다. 더욱이 파라오의 이름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파라오의 딸이 살았던 흔적이 예루살렘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가 예루살렘을 수십번 갔어도 이 파라오의 딸에 대하여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그런데 역대하에 의하면 솔로몬은 이 파라오의 딸 즉 자신의 왕비를 위하여 궁전을 지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 흔적을 따라 가보겠습니다.1980년대 텔아비브 대학의 가브리엘 바르카이 교수는 19세기의 발굴 기록에서 흥미로운 단서를 찾아서 발표하였는데. 예루살렘 성벽 바깥쪽 즉 다마스커스 문 북쪽에 일찍이 이집트인의 고립 영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브리엘 교수는 비블리크[성서학교]의 진열장에서 1882~83년에 발굴된 작은 인공 유물 컬렉션을 찾아냈고, 현재의 스테반 수도원의 지하에 묻혀 있는 원래의 발굴 장소에서 더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기록도 찾아냈습니다.그 유물중에는 상형문자가 새겨진 이집트 스텔라 파편 한개, 돌로 만든 거대한 호테프식 제단 하나, 이집트 설화 석고 항아리 두개, 전형적인 이집트 양식의 여인 좌상,야자 나무 모양을 본떠 만든 석회암 기둥머리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가브리엘 교수는 일부 사람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골고다로 믿고 있는 정원 무덤 구내에 이 기둥머리를 다시 배치 해놓았다고 합니다.

 

가브리엘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1880년대 에콜 비블리크 구내에서 이루어 졌고, 세켐으로 통하는 옛 도로와 인접한 이곳에 이집트 양식의 건물이나 복합 건물이 있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 설화석고는 이집트 18왕조의 양식이라는 사실을 주의 깊게 관찰을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발굴된 유물만으로는 어떤 유형의 건물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 건물은 이집트 태생의 치체 높은 사람의 저택안에 있던 작은 사당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집트인의 무덤일 가능성이 더 높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석조 건축물과 장례용 스텔라및 공물을 바치는데 사용한 제잔의 존재 때문입니다.

 

이 발굴에 의하여 밝혀진 이집트식 건물이라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솔로몬의 아내인 이집트 왕녀을 위한 지은 궁전일 수 밖에 없습니다.그런데 문제가 발생되는 것이 있습니다. 년대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발굴된 유물 대부분이 후기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연대는 철기시대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맞지가 않는 것입니다.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왕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하여  파라오의 딸들을 타국에서 시집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아멘호테프2세는 동맹 관계를 담보하기 위하여 딸을 왕비로 달라는 미탄니 왕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지금까지 외국 통치자에게 시집가는 수모를 당한 이집트 공주는 아무도 없었다고 하면서 거절을 하였습니다.그러면 솔로몬왕에게 이집트 파라오의 딸을 시집 보냈다는 것은 이집트의 국력이 굉장히 약하여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집트의 왕조에서 그 세력이 너무 약한 왕조가 언제일까 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중 하렘헤브가 있습니다. 그는 정통 왕족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18왕조의 혈통을 이어받는 왕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렘헤브는 투탕카멘 시대에 이집트 총사령관으로서 장군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원정하는 그림이 남아 있습니다. 사카라의 하렘헤브 장군묘에는 그가 가나안 포로들을 소년왕 앞으로 끌고 가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렘헤브는 투탕카멘 밑에서 총사령관을 지낼때 팔레스타인 해안평야를 잠깐 원정한 뒤, 왕위에 올라 이집트 내정을 개편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외교를 주요 무기로 사용하여 아켄나텐의 무관심으로 잃어버린 북부 지역의 손실을 보충할려고 하였을지도 모릅니다.1952년 시리아 북부 해안 도시 우가리트에서 니크맛두 왕의 궁전을 발굴 했을 때 출토된 설화석고 항아리의 혼례 장면과 상형문자로 미루어 보아 하렘헤브 시대의 이집트는 왕실의 공주를 외교적 무기로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레반트 남부에서 가장 유력한 통치자와 결혼 동맹을 맺는 것은 파라오에는 현명한 조치였을 것입니다. 그런 동맹을 통해 서로 이익이 되는 교역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을지도 모릅니다.이러한 상황은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 성공적인 교역 관계가 이루어졌다는 성경의 기록을 증명하는 사실이 되는 것입니다.

 

 령천 교회

중동 선교사 데이비드 김 목사 제공

 

 

출처 : 성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  글쓴이 : 데비드 김 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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