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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 선교사

영국신사77 2009. 9. 15. 23:20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 선교사

 

 

중국에서 활동하던 미국 북장로회의 의료선교사 알렌(H.N. Allen)이 내한한 것은 1884년의 일이었다. 명성왕후와 인연을 맺게 된 알렌은 고종의 후원으로 1885년 4월 10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제중원으로 곧 개명)을 설립하였다.

 

의학교육은 1893년 내한한 에비슨에 의해 크게 성장하였고, 1900년 미국의 세브란스가 기부한 기금으로 서울역 앞에 새 병원을 지으면서 이름을 '세브란스병원'으로 하였다. 이후 일제 지배의 어려운 상황 하에서도 한국인이 중심이 된 의학 분야의 연구와 교육을 선도하는 한편 간호학 및 치과학 분야에서도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알렌 선교사는 중국 해안가에서 정착하여 의료선교사역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 해안가에는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와 정착하여 사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곳도 정착하기에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 알렌 선교사는 8개월간 상해와 남경일대를 헤매고 다니다가 , 조선이 문을 열렸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조선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바로 미국 선교부에 편지를 썼다. 조선에 가기를 원한다는 편지 였다.
그가 1884년 6월에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나의 조선 입국을 허락해 주세요. 그렇지 않다면 단신이라도 들어가겠습니다."

그해 7월 22일 선교본부는 해저전신을 통해 입국을 허락했고 그는 1884년 9월 20일 드디어 제물포 항구에 도착하였다. 알렌은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 주한
미국 공사관의 공의라는 직분을 가지고 조선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공의보다는 왕실의 시의가 되면 더 좋은 선교의 기회가 올 것을 알고, 고관들과 친분을 쌓아 가며 기도하며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조선 땅에 온지 2개월이 넘은 12월 어느날, 조선에 큰 어지러운 사건을 만나게 된다.
김옥균을 비롯해서 개화파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수구파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것이 3일 천하 사건이라고도 불리워지는 갑신정변이다. 이 사건으로 민영익은 자객의 칼에 맞아, 목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스물 두 살의 나이로 청나라 외교사절이 되었었고, 23살의 나이로 전권대사가 되어
미국을 거쳐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인도 싱가폴, 홍콩을 둘러보고 온 야망에 찬 고관 민영익, 그가 칼에 맞아 중상을 입고 과도한 출혈 끝에 무력하게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14명이나 되는 한의사들은 전전긍긍 손을 쓰고 있었으나, 출혈을 멈추게 할 방법이 없어, 우왕좌왕 하기만 하였다.
알렌이 보기에도 가망이 없어 보였다. 출혈이 너무 심했고, 시간이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알렌은 의료기기를 다루면서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치료하였다. 그 결과
민영익은 소생하게 되었고, 민영익을 살해 모함한 개화파는 진압되었다 .

이 사건으로 알렌 선교사는 조정에 신임을 받게 되었고, 알렌은 왕실의 시의가 되었고 조선 선교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민영익은 생명의 은인인 알렌 선교사에게 감사하여 십만냥을 주었고, 알렌은 이 돈을 기초로 병원을 마련하였는데 이 병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병원인 광혜원이 되었다. 그 후 이병원은 제중원이라고 개명하였고 지금의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다.

 


          < 알렌이 세운 최초의 병원 광혜원 >

 

 

 

서울 온 알렌 박사의 두 증손녀 할아버지와 '1세기 만의 대화'
  후손으론 103년 만에 첫 한국 방문… "기쁘고 자랑스러워"
          사회 봉사 활동 대물림… 할아버지가 썼던 금테 안경 기증
 
                                                  2008.05.10 (토) 조선일보 최수현 기자 

 

 

"Amazing! Now, finally I believe it(놀라워요! 이제서야 믿어지네요)." 9일 오전 9시, 연세대학교에 들어서던 두 미국 여성은 넓은 캠퍼스를 본 순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전날 저녁 한국에 온 리디아 알렌(63)씨와 마사 알렌(48)씨였다. 두 사람은 오전 내내 학교 곳곳을 둘러보며 "Amazing(놀랍다)!"을 연발했다. "이렇게 큰 학교인 줄 몰랐어요. 사진으로 본 옛 학교는 작고 허름한 모습이었는데…." 이들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이자 연세대 의대의 전신인 제중원(광혜원)을 설립한 호러스 알렌의 증손녀들. 알렌의 후손이 한국을 찾은 것은 그가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간 지 103년 만에 처음이다. 두 사람은 10일 연세대 창립 123주년을 맞아 연세대 의과대학의 초청으로 한국땅을 밟았다.


                  ◆'알렌' 성을 가진 200여 명에게 편지


알렌 박사는 개화기 한국에 개신교를 전파하러 온 선교사이자,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을 세우고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의학 교육을 시킨 인물이다. 1884년 조선에 발을 들인 뒤 21년간 머물렀다. 갑신정변 당시 명성왕후의 조카 민영익이 자객의 습격으로 생명이 위태로울 때, 서양 의술을 동원해 석 달 만에 생명을 구해낸 것이 계기가 돼 고종의 어의(御醫)로 임명됐다.

1885년 제중원을 세운 뒤론 개원 1년 만에 1만 명 이상의 환자들을 치료했고, 조선인들의 질병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의학 보고서를 최초로 펴내기도 했다. 이후 고종의 외교 자문 역할을 하며 박정양 공사 일행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에 조선공사관을 설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년 만에 조선으로 다시 돌아와서는 주(駐)조선 미국 공사관 서기관으로 출발해 공사 자리까지 올랐다.

 

▲ 9일 오후 신촌 세브란스병원 본관 앞에서 연세대 의대의 전신인 제중원을 세운 알렌 박사의 흉상을, 증손녀 마사 알렌(왼쪽)과 리디아 알렌씨가 바라보고 있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알렌은 끝까지 조선을 배반하지 않고 신의를 지킨 사람이었다. 1905년 미국과 일본 사이 가쓰라태프트협정(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 통치를, 미국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 통치를 인정한다는 밀약)이 맺어지자, 미국으로 달려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격론을 벌이며 항의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를 해임 소환했고, 알렌은 "나는 한국과 함께 쓰러졌다(I fell with Korea)"는 말을 남긴 채 그 해 한국을 떠났다.


알렌은 고향인 미국 오하이오주 톨리도로 돌아간 뒤 'Things Korean'(한국적인 것들)이란 책을 썼다. 그는 책의 서문에 "불행하게도 미국은 한국의 신의를 저버렸다. 양국은 1882년 '한 나라가 외세 침략을 받을 경우 다른 나라가 도와준다'는 내용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지만, 미국은 이 신성한 맹약을 지키지 않아 조선인들의 분노와 반감을 샀다. 필자의 진심 어린 동정과 애정을 조선인에게 표하며…"라고 썼다.


그가 귀국한 뒤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손들은 한국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1985년 연세대 창립 100주년을 맞아 학교를 세운 주역들의 후손을 초청했지만, 알렌의 후손들은 개인 사정으로 한국에 오지 못했다. 이후 가족들이 곳곳으로 흩어지면서 연락이 끊겼다.


소식이 닿지 않는 이들을 찾아낸 것은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에 살고 있는 허정(70)씨였다. 허씨는 정형외과를 운영하다 5년 전 은퇴한 뒤, 재미(在美) 동문들을 위해 학교 앨범을 만들다가, 알렌의 생애를 접하고 감동해 후손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톨리도 근방의 모든 신문사와 방송국, 도서관에 문의를 하고 샅샅이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전화번호부에서 '알렌'이란 성을 가진 사람 200여 명에게 일일이 편지를 보냈으나 답장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샘 알렌'이란 이름의 남자가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당신이 찾는 사람이 아니지만, 톨리도 지역의 역사 잡지에 기고하는 방법은 어떻겠소?"


허씨는 당장 "알렌이 세운 학교가 문을 연 지 123주년, 알렌 탄생 150주년을 후손들과 함께 축하하고 싶다"는 글을 잡지에 실었다. 며칠 뒤, 알렌 둘째 손부(孫婦)의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 알렌의 가족들이 소장하고 있는 고종의 사진.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상복을 입은 차림이며, 사진 아래‘대조선국 대군주 사진-개국 오백오년’이라고 써 있다.(왼쪽) 고종이 알렌의 부인에게 하사한 은 그릇. 알렌 박사 가족들이 소장하고 있다. /허정씨 제공

◆알렌이 생전에 썼던 금테 안경


가족들은 톨리도 지역 근방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알렌은 슬하에 두 아들이 있었고, 중소기업 부회장을 역임한 장남은 아들이 셋, 변호사였던 차남은 후손이 없었다. 세 손자 아래엔 증손녀만 5명. 생존해 있는 이는 큰손부(93)와 증손녀들이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후손들에겐 '알렌의 피'가 흘렀다. 큰손자는 심장을 전공한 내과 의사였고, 나머지 두 손자도 2차 대전 때 전장에서 위생병으로 부상병들을 돌봤다.


증손녀 마사씨와 그 여동생은 소방서 응급구조대원이고, 리디아씨는 식물을 심고 가꾸는 과정을 통해 자폐아들을 치료하는 원예치료사로 병원에서 일한다. 마사씨의 언니도 정신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리디아씨는 "의사였던 아버지는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해줬고, 새로운 의료기기를 만드는 연구에 골몰해 있는 날이 많았다"며 "우연인지 아니면 알렌 할아버지의 영향이었는지 몰라도 가족들 대부분이 남을 치료하고 돌보는 일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고 했다.


가족들은 고종이 선물한 은 그릇과, 명성황후가 시해 된 뒤 상복을 입은 고종의 사진을 갖고 있었다. 알렌이 입었던 관복의 흉배, 향로, 꽹과리 등도 소장하고 있다. 두 증손녀는 이 중 알렌이 생전에 썼던 금테 안경을 연세대에 기증했다.


이들은 10일 연세대 창립 123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뒤 11일 미국으로 돌아간다. 마사씨는 "증조할아버지가 한국에 심은 작은 씨앗이 이렇게 풍성한 열매를 맺은 것을 보니 기쁘고 자랑스럽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