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聖地 · 선교사/◆國內 선교사들&부흥회

문둥이가 되고 싶었던 사람 '쉐핑'선교사

영국신사77 2008. 11. 25. 12:16
           문둥이가 되고 싶었던 사람 '쉐핑'선교사
[48호] 2008년 11월 23일 (일) 양국주 @

[양국주가 만난 사람들]

 쉐핑의 장례는 불신자들이 주동이 되어 광주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전무후무하게 12일장으로 치러진 쉐핑의 장례는 하얀 소복을 입은 이일학교 제자들이 운구를 맡았고, 그 뒤로 13명의 양딸과 수백 명의 거지와 한센 환자들이 뒤따랐다.

 시인 김소운은 자신이 흠모한 폴 발레르처럼 매일 십여 리 길을 소아마비 흉내를 내며 걸었다. 소아마비였던 시인의 가슴을 닮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김소운이 발레르일 수는 없었다. 하물며 한하운의 ‘전라도 길’이야 말할 나위 없다. 가도가도 붉은 황톳길에 숨막히는 더위뿐이던 그 문둥이의 삶을 김소운이 어찌 흉내조차 낼 수 있었을까?

  가도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길거리 홈리스로 살던 90년전의 나환자들,  그리스도인들의 몫이었던 이들의 삶에 예수는 희망이요, 기독교가 이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 매김하는 크나큰 이유였다.

   (사진제공 :  광주 제중병원을 세운

         로벗 윌슨의 손자인 잭 윌슨)

 한하운 시인의 시비 ‘보리피리’가 있는 소록도는 한센 환자들이 정착하여 살아가는 곳이다. 일제시대에는 격리 수용되었던 나환자들을 노역에 동원시키거나, 정관 제거와 난관결찰 등 강제로 불임 시술을 시키고 임산부를 낙태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1960년대 부모들은 자녀들이 나병환자들과 마주치는 일조차 겁을 먹기도 하였다. 어린이 생간을 먹으면 나병을 고칠 수 있다는 속설로 ‘문둥병자들이 어린이들을 유괴한다’는 악소문이 떠돌았던 탓이다. 사람들은 이 병을 두려워할 뿐 무지하였다. 육영수 여사가 나병환자의 손을 덥석 잡아준 장면이 신문에 대서특필되면서 나환자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점차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두 아들과 함께한 윌슨 선교사

 한때 2만 명이 넘던 나환자를 나라가 구제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때, 이들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돌보던 이들은 다름 아닌 광주와 순천지역에서 선교하던 남장로교 파송 평신도선교사들이었다.

 

 1909년, 포사잇과 윌슨은 광주 봉선리에 갈 곳 없는 나환자들을 위한 움막을 지었고 이들을 돌보는 일에 앞장섰다. 나병환자 수용시설을 1926년부터 여수로 옮기면서 남녀 32병동에 무려 730명의 나환자를 수용하였다.

 

 뉴욕을 중심으로 많은 교회들이 조선의 나병과 결핵 환자들을 돕기 위해 적지 않은 헌금을 보내왔다. 당시 나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벽돌로 짓는 비용이 방 네 칸짜리 한 동에 500달러가 들었다. 선교사들이 보낸 1930년대 선교 보고에는 50여 명에 가까운 의사와 간호사가 일했고, 이들의 사역에 감동받은 일본 천황부부도 성금을 보내왔다고 한다. 애양원에 병원이 들어섰고, 교회도 세워졌다.

   
      생전의 쉐핑 선교사 모습

 이 땅에 나병환자 치료시설을 열었던 윌슨을 도와 이들에게 희망과 사랑을 가르쳐 준 사람은 쉐핑(Ms. Elizabeth Shepping) 선교사였다.

 

 애양원은 1932년 쉐핑 선교사의 조선 성역 20주년을 기리며 나환자촌에 그녀의 헌신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 그녀는 이 땅에 간호학계를 창립했고, 무려 11년이 넘도록 간호학계를 이끌며 후진을 양성했다.

 

 그녀는 조선에 머물던 22년 동안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었다. 선교사 쉐핑과 유화례, 구보라는 처녀였음에도 나환자의 자녀들을 입양하였다. 어쩌면 나환자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고통스러운 나환자의 삶에서 그들은 살아 계신 주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쉐핑은 갈 곳 없는 고아 13명을 자신의 딸로 입양하고 문둥이 자녀를 아들로 삼아 요셉이라 이름 지었다. 이들에게서 영향을 받아 나환자의 아버지로 추앙받던 최흥종 목사도 나오고, 오늘 한국교회가 추앙하는 손양원 목사도 나왔다.

 쉐핑이 이 땅에 주고 간 사랑의 크기는 그녀의 장례에서 드러났다. 장례는 지역인사들 가운데 불신자들이 주동이 되어 광주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전무후무하게 12일장으로 치러진 쉐핑의 장례는 하얀 소복을 입은 이일학교 제자들이 운구를 맡았고, 그 뒤로 13명의 양딸과 수백 명의 거지와 한센 환자들이 뒤따랐다. “어머니, 어머니”를 목놓아 부르며 우는 그들의 통곡소리에 양림천이 눈물바다가 되었다. 동아일보는 “자선과 교육사업에 일생을 바친 빈민의 어머니 서서평 양 서거”라는 제목과 “재생한 예수”를 부제로 그녀의 죽음을 대서특필했다.

 누구를 닮을 수는 있어도 정녕 하나가 되기는 어렵다. 하지만 쉐핑, 그녀는 정녕 문둥이가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리스도인이 그리운 세상이다.

 

 

양국주

ⓒ 아름다운동행(http://www.iwithjesu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by;http://www.iwithjesus.com/news/articleView.html?idxno=16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