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만 달러 기부금의 비밀은? [조인스]
세브란스 125년 역사
"도대체 이 거액의 돈을 누가 보내는 것일까?”
2000년 어느 날 세브란스병원 기획관리실 직원들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에 빠졌다. 1955년부터 세브란스병원 기부금 통장에는 매년 ‘미국북장로교(PCUSA)’로 된 거액의 후원금이 들어왔다.
2000년 어느 날 세브란스병원 기획관리실 직원들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에 빠졌다. 1955년부터 세브란스병원 기부금 통장에는 매년 ‘미국북장로교(PCUSA)’로 된 거액의 후원금이 들어왔다.
1.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자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인 제중원을 설립한 선교사 앨런. 2. 세브란스가 파견한 의료선교사 허스트(중앙)와 국내 최초로 의사 면허를 딴 제1회 졸업생들. | |
하지만 북장로교의 후원금을 누가 보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마침 새 건물을 짓는 데 1,500억 원의 막대한 건축자금이 필요한 상황이어서 거액 후원금의 출처에 대해 더욱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분야에서 자금의 투명성을 확보해야 하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이철 기획관리실장(현 세브란스병원장)은 직원을 통해 미국 개개인의 후원자를 알아보게 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1955년부터 2000년까지 45년 동안 보내온 후원금의 출처가 ‘J. L.(존 루이스) 세브란스펀드’였기 때문이다. 1900년대 초 4만5,000달러를 기부해 조선땅에 최초의 현대식 병원을 짓도록 해준 사람은 루이스 세브란스였다. 지금의 세브란스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존 세브란스는 루이스 세브란스의 아들이다. 세브란스 측에 의해 밝혀진 ‘J.L. 세브란스펀드’가 만들어진 유래는 다음과 같다. 세계적 부호 록펠러의 동업자로서 상당한 재력가였던 루이스 세브란스는 임종 당시 아들에게 세브란스병원을 계속 도와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아들 존 세브란스는 자신이 죽기 전 1934년까지 20년 동안 12만4,500달러를 세브란스병원에 기부했다. 그는 또 죽기 전에 자신이 남긴 유산으로 ‘J.L. 세브란스펀드’를 만들어 세브란스병원에 계속 기부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미국 북장로선교회는 아들 존 세브란스의 유지를 받들어 이를 실행에 옮겼으며, 1955년 7,000달러를 시작으로 2000년까지 45년간 이 펀드를 통해 들어온 돈은 총 80만 달러에 달했다. 해마다 1만8,000달러씩 보내온 셈이다. 이 펀드 기부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1908년, 의학교육 10년 만에 의사 7명 배출
세브란스병원의 시초를 만든 것은 1884년 12월, 최초의 선교의사로 한국에 온 앨런이었다. 앨런은 갑신정변 과정에서 심하게 부상당한 당시의 실력자 민영익을 살려낸 것을 계기로 고종의 신임을 얻어 조선정부에 ‘병원 설립안’을 제출했다. 앨런은 이 설립 안에서 새 병원은 가난한 조선인을 치료하고, 조선의 젊은이에게 서양의학을 전수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고 밝혔다.
또 운영과 관련해 자신과 의료진은 미국 자선단체에서 지원받으므로 조선정부는 병원 운영에 필요한 경비만 부담하면 된다고 말했다. 1885년 4월10일,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자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인 제중원이 서울 재동(현재 헌법재판소 자리)에 문을 열었다.
이후 앨런이 제중원을 떠나고 1893년 7월 선교사 에비슨이 제중원에 부임하며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에비슨은 ‘병원 운영에 부당하게 개입하고 운영비를 유용하는 관료들이 있는 한 제중원의 운영이 어렵다’고 판단해 조선정부와 담판을 지은 결과 1894년 9월 조선정부로부터 제중원을 인수받았다.
이때부터 제중원은 온전한 선교병원으로 재조직되고 발전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에비슨은 기존 시설로는 질 높은 진료나 교육이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고 1899년 안식년 휴가를 통해 모금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클리블랜드의 자선사업가 세브란스 씨로부터 1900년 당시로는 거액인 1만 달러의 병원 건축기금을 기부받았다.
에비슨은 조선으로 돌아오자마자 병원 신축에 착수했고, 1902년 남대문 밖에 신축 병원을 기공해 1904년 9월23일 봉헌식을 올렸다. 기증자의 뜻을 기념하기 위해 이름은 세브란스기념병원으로 지었다. 에비슨은 병원 설립을 추진하는 동시에 의학 교과서를 번역해 학생들이 더욱 수월하게 공부할 수 있게 하는 등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의학교육을 시도했다.
1908년 앨런이 의학교육을 시작한 지 10여 년 만에 드디어 7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졸업식 다음날 졸업생들은 내부 위생국에서 의술 개업을 허락하는 허가증을 받았는데, 번호가 1번부터 7번까지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 면허다.
1913년에는 서울에 있던 각 선교 교파가 공동으로 세브란스를 지원하게 되면서 학교 이름을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바꾸었고, 1917년 전문학교 규칙에 따라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인가됐다. 당시 일제에 의해 운영되던 관립 의료기관이나 학교와 달리 세브란스는 유일하게 조선인을 위한 병원이자 의학교육기관이었다.
일제 말기에 학교의 이름이 아사히의학학교로 바뀌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해방과 함께 세브란스의과대학으로 재탄생했다. 한국전쟁 중에는 전시교육령에 따라 전시연합대학에 편입됐으며, 전쟁 기간에는 거제도·원주·청도에 구호병원을 개설해 의료활동을 전개했다.
전쟁이 종결된 후 파괴된 건물과 시설물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캠퍼스 구상이 이루어졌고, 이를 계기로 1957년 세브란스의과대학과 연희대학의 합동이 이루어지면서 연세대학교가 탄생하게 됐다. 이후 세브란스병원과 의과대학·치과대학·간호대학을 아우르는 의료원 체제를 갖춘 연세대의료원이 탄생했다.
세브란스는 2005년 새 병원을 개원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2009년 현재 의·치·간호대학 및 전문대학원·보건대학원 등 7개의 교육기관과 세브란스병원·강남세브란스병원·치과대학병원·용인세브란스병원·세브란스정신건강병원을 비롯해 7개의 전문병원이 있다.
글 박미숙 월간중앙 기자 [splanet88@joongang.co.kr]
사진 오상민 월간중앙 사진기자 [osang@joongang.co.kr]
이철 기획관리실장(현 세브란스병원장)은 직원을 통해 미국 개개인의 후원자를 알아보게 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1955년부터 2000년까지 45년 동안 보내온 후원금의 출처가 ‘J. L.(존 루이스) 세브란스펀드’였기 때문이다. 1900년대 초 4만5,000달러를 기부해 조선땅에 최초의 현대식 병원을 짓도록 해준 사람은 루이스 세브란스였다. 지금의 세브란스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존 세브란스는 루이스 세브란스의 아들이다. 세브란스 측에 의해 밝혀진 ‘J.L. 세브란스펀드’가 만들어진 유래는 다음과 같다. 세계적 부호 록펠러의 동업자로서 상당한 재력가였던 루이스 세브란스는 임종 당시 아들에게 세브란스병원을 계속 도와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아들 존 세브란스는 자신이 죽기 전 1934년까지 20년 동안 12만4,500달러를 세브란스병원에 기부했다. 그는 또 죽기 전에 자신이 남긴 유산으로 ‘J.L. 세브란스펀드’를 만들어 세브란스병원에 계속 기부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미국 북장로선교회는 아들 존 세브란스의 유지를 받들어 이를 실행에 옮겼으며, 1955년 7,000달러를 시작으로 2000년까지 45년간 이 펀드를 통해 들어온 돈은 총 80만 달러에 달했다. 해마다 1만8,000달러씩 보내온 셈이다. 이 펀드 기부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1908년, 의학교육 10년 만에 의사 7명 배출
세브란스병원의 시초를 만든 것은 1884년 12월, 최초의 선교의사로 한국에 온 앨런이었다. 앨런은 갑신정변 과정에서 심하게 부상당한 당시의 실력자 민영익을 살려낸 것을 계기로 고종의 신임을 얻어 조선정부에 ‘병원 설립안’을 제출했다. 앨런은 이 설립 안에서 새 병원은 가난한 조선인을 치료하고, 조선의 젊은이에게 서양의학을 전수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고 밝혔다.
또 운영과 관련해 자신과 의료진은 미국 자선단체에서 지원받으므로 조선정부는 병원 운영에 필요한 경비만 부담하면 된다고 말했다. 1885년 4월10일,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자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인 제중원이 서울 재동(현재 헌법재판소 자리)에 문을 열었다.
이후 앨런이 제중원을 떠나고 1893년 7월 선교사 에비슨이 제중원에 부임하며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에비슨은 ‘병원 운영에 부당하게 개입하고 운영비를 유용하는 관료들이 있는 한 제중원의 운영이 어렵다’고 판단해 조선정부와 담판을 지은 결과 1894년 9월 조선정부로부터 제중원을 인수받았다.
이때부터 제중원은 온전한 선교병원으로 재조직되고 발전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에비슨은 기존 시설로는 질 높은 진료나 교육이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고 1899년 안식년 휴가를 통해 모금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클리블랜드의 자선사업가 세브란스 씨로부터 1900년 당시로는 거액인 1만 달러의 병원 건축기금을 기부받았다.
에비슨은 조선으로 돌아오자마자 병원 신축에 착수했고, 1902년 남대문 밖에 신축 병원을 기공해 1904년 9월23일 봉헌식을 올렸다. 기증자의 뜻을 기념하기 위해 이름은 세브란스기념병원으로 지었다. 에비슨은 병원 설립을 추진하는 동시에 의학 교과서를 번역해 학생들이 더욱 수월하게 공부할 수 있게 하는 등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의학교육을 시도했다.
1908년 앨런이 의학교육을 시작한 지 10여 년 만에 드디어 7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졸업식 다음날 졸업생들은 내부 위생국에서 의술 개업을 허락하는 허가증을 받았는데, 번호가 1번부터 7번까지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 면허다.
1913년에는 서울에 있던 각 선교 교파가 공동으로 세브란스를 지원하게 되면서 학교 이름을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바꾸었고, 1917년 전문학교 규칙에 따라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인가됐다. 당시 일제에 의해 운영되던 관립 의료기관이나 학교와 달리 세브란스는 유일하게 조선인을 위한 병원이자 의학교육기관이었다.
일제 말기에 학교의 이름이 아사히의학학교로 바뀌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해방과 함께 세브란스의과대학으로 재탄생했다. 한국전쟁 중에는 전시교육령에 따라 전시연합대학에 편입됐으며, 전쟁 기간에는 거제도·원주·청도에 구호병원을 개설해 의료활동을 전개했다.
전쟁이 종결된 후 파괴된 건물과 시설물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캠퍼스 구상이 이루어졌고, 이를 계기로 1957년 세브란스의과대학과 연희대학의 합동이 이루어지면서 연세대학교가 탄생하게 됐다. 이후 세브란스병원과 의과대학·치과대학·간호대학을 아우르는 의료원 체제를 갖춘 연세대의료원이 탄생했다.
세브란스는 2005년 새 병원을 개원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2009년 현재 의·치·간호대학 및 전문대학원·보건대학원 등 7개의 교육기관과 세브란스병원·강남세브란스병원·치과대학병원·용인세브란스병원·세브란스정신건강병원을 비롯해 7개의 전문병원이 있다.
글 박미숙 월간중앙 기자 [splanet88@joongang.co.kr]
사진 오상민 월간중앙 사진기자 [os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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