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聖地 · 선교사/◆國內 선교사들&부흥회

★여성과 서민에게 '빛'을 주고 떠나다/ [만물상]스크랜턴100주기

영국신사77 2009. 10. 2. 18:55

여성과 서민에게 '빛'을 주고 떠나다

  • 2009.09.24 22:59
이화학당과 동대문교회·상동교회·아현교회 등을 설립한 스크랜턴 여사/스크랜턴기념사업회 제공

이화학당 설립자 스크랜턴100주기 맞아 재조명 활발

"우리의 목표는 한국 소녀들로 하여금 외국 사람들의 생활·의복·환경에 맞도록 변화시키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그들이 한국적인 것에 긍지를 갖는 한국인이 되기를 희망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교훈을 통하여 완전 무결한 한국인을 만들고자 희망한다."

이화학당 설립자인 메리 스크랜턴(1832~1909) 여사의 100주기를 맞아 재조명이 활발하다. 스크랜턴 여사가 설립한 이화여대·이화여고와 상동교회, 동대문교회, 아현교회 등은 스크랜턴기념사업회(총재 신경하 감독)를 구성하고 그의 기일(10월 8일)을 전후해서 다양한 기념행사를 마련한다.

미국 코네티컷주에서 평범한 주부로 살다 남편과 사별한 메리 스크랜턴은 53세 때인 1885년 의사인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과 며느리, 첫 손녀를 데리고 선교를 위해 조선을 찾았다. 미국 개신교에서 파견한 첫 여성 선교사였던 그는 조선에서 '대부인(大夫人)'으로 불렸다.

스크랜턴 모자(母子)의 선교활동은 당시 서민들이 살던 '사대문(四大門) 밖'에서 펼쳐졌다. 어머니는 소외된 여성을 위해 교육기관(이화학당)과 의료기관(보구여관)을 설립했고, 아들은 병원을 운영하면서 가난한 사람에게 약을 나눠주는 '시약소(施藥所)'를 세웠다. 이들이 설립한 교회들은 약을 나눠주던 곳에 세워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스크랜턴 여사가 이화학당 학생들과 함께 촬영한 모습(오른쪽 사진 뒷줄 검은 옷 입은 사람이 스크랜턴 여사)./스크랜턴기념사업회 제공

스크랜턴 여사는 며느리가 교육을 위해 네 손녀를 데리고 스위스로 이주했을 때도 아들과 함께 조선에 머물렀다. 1890년에는 이화학당을 후배 여성 선교사에게 맡기고 1894년 당시 선교사들이 모여 살던 서울 정동을 떠나 상동교회 인근으로 거주지를 옮겼으며, 세상을 떠난 뒤에는 양화진외국인묘원에 잠들었다.

이렇게 활발한 활동을 했음에도 스크랜턴 모자(母子)가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것은 1907년 아들 스크랜턴 목사가 당시 일본·조선 지역을 관할하던 해리슨 감독의 친일(親日) 행태에 분노해 감리사·선교사·목사직을 모두 사임한 것이 원인이 됐다. 1909년 어머니가 별세하고 1916년 아들도 조선을 떠나 1922년 일본에서 별세하고 후손들과의 연락도 끊기면서 이들 모자는 한국에서 점점 잊혀진 존재가 되어 갔다.

올해 스크랜턴 여사의 100주기를 맞아 이들 모자의 신앙 후손인 상동교회(서철 담임목사) 동대문교회(서기종 담임목사) 아현교회(조경열 담임목사)는 이화여대·이화여고와 함께 기념사업을 준비해 왔다. 기념사업회는 스크랜턴 여사의 고손자·고손녀 등을 유럽과 캐나다에서 찾아 초청했고 기념행사를 함께한다. 10월 5~6일 후손들이 이화여대를 방문하는 것을 시작으로 연합추모예배(7일), 양화진외국인묘원 방문·학술심포지엄·공개 만찬(8일)이 예정돼 있다. 또 일요일인 10월 11일에는 후손들이 동대문교회, 상동교회, 아현교회를 방문하는 일정도 잡혀 있다. 세 교회 담임목사들은 23일 간담회를 갖고 "우리들은 모두 스크랜턴 모자가 민중을 위해 설립한 교회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며 "그들의 신앙정신을 유지·발전시키고 스크랜턴 여사의 업적이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힘을 모을 것"이라고 말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만물상] 스크랜턴 100주기

  •                                                              김동섭 논설위원 dskim@chosun.com

                                                                      2009.09.25 22:34 / 수정 : 2009.09.28 11:57

 

 1886년 6월 가난한 한 여인이 딸을 이화학당에 맡기자 주변에서 "처음엔 좋은 음식과 옷을 주지만 나중엔 미국으로 데려갈 것"이라며 말렸다. 그래서 이 여인이 아이를 도로 데려가겠다고 하자 학당장(교장)은 서약서를 써 가까스로 아이를 두 번째 입학생으로 삼을 수 있었다. '당신의 딸 복순이를 맡아 기르며 공부시키되 당신의 허락 없이는 서방(西方)은 물론 조선 안에서도 단 열흘도 데리고 나가지 않기를 서약함.'

▶그 교장이 한 해 전 우리나라 첫 여성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들어온 메리 스크랜턴이었다. 그는 서울 정동에 초가집 19채를 사서 여학교를 세웠지만 1년이 가도록 오는 학생이 없었다. "여자는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던 세상이었다. 이듬해 5월에야 "영어를 배워 황후의 통역관이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가진 관료의 소실을 첫 학생으로 받아 비로소 학교 문을 열게 됐다. 1887년 명성황후로부터 '이화'라는 교명을 하사받았고 10년 뒤엔 8~17세 학생 50명이 다니는 학교로 키웠다.

▶목사의 맏딸 스크랜턴은 남편을 사별하고 외아들을 의대로 보냈다. 아들이 조선으로 가는 의료선교사로 지명되자 그도 선교사 신청을 해 며느리 손녀까지 3대가 함께 조선에 왔다. 그는 "배우고 깨우치는 것만이 잘사는 길"이라며 가난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조했다. 청결한 음식과 청소 등 위생 개선에도 앞장섰다. 그는 아들과 함께 시(施)병원을 차려 가난한 사람들에겐 치료비를 싸게 받거나 무료진료 했다.

▶스크랜턴 모자는 "서울 사대문 바깥으로 나가면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에게 음식과 의료혜택을 주고 싶다"며 남대문 밖과 애오개, 동대문에 진료소인 시약소(施藥所)를 세웠다. 이곳들은 각기 나중에 항일 운동 본산지인 상동교회, 아현감리교회, 동대문교회가 됐다. 아현감리교회는 지금도 시약소 전통을 이어받아 의료선교회를 운영하고, '사랑의 쌀'을 나누고 있다.

▶메리 스크랜턴은 이 땅에 온 지 24년 만인 1909년 10월 8일 77세로 양화진에 묻혔다.

이화여대와 상동·아현·동대문 교회는 스크랜턴 100주기를 맞아 고손자를 비롯한 후손들을 초대하고 10월 5일부터 일주일 동안 학술대회와 추모예배 등 기념행사를 갖는다. '대부인(大夫人)'으로 불리며 소외된 여성과 서민에게 빛을 준 스크랜턴은 그간 우리 근대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100주기를 계기 삼아 그가 우리 민족에게 바친 사랑의 삶이 널리 알려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