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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교회] (23·끝) 대구 범어교회

영국신사77 2009. 7. 31. 22:57

[한국의 역사교회] (23·끝) 대구 범어교회

                                                                                                      2009.07.22 18:13:08


103년전 변두리 초가에서 영남 영성의 중심으로

대구 수성구 범어 4동 범어교회(장영일 목사)가 새 예배당을 짓고 새로운 100년을 향해 웅비한다. 오는 9월9일로 103주년을 맞는 범어교회는 지난달 28일 입당식을 가졌으며 25일 오후 2시 입당봉헌 감사예배를 드린다. 여성도 3명의 기도로 시작된 예배당은 현재 3600여명의 대형 교회로 성장했다. 범어동은 30여년 전까지만 해도 변두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대구에서 가장 학교가 많고 학군이 좋은 지역이다. 대구고등·지방법원, 대구고등·지방검찰청, 수성구청 등의 공공기관이 들어섰다. 100년 복음의 고동소리가 달구벌을 서울의 강남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장영일 목사는 예배당 이전을 계기로 자폐아를 위한 복지재단 설립 등 희망의 공동체로 거듭날 청사진을 마련하고 있다.

◇붕어가 입을 벌리고 떠있는 모습=입을 벌린 붕어의 모양으로 만든 교회의 로고가 이채롭다. '범어'라는 지명은 15세기 중엽에 생겼다. 당시 철원부사를 지낸 구수종(具壽宗)이 명당을 찾아 내려오다 달구벌에서 걸음을 멈추고 주변 경관에 푹 빠졌다. 눈앞에 물고기 모양을 닮은 큰 산이 앞을 가로막았다. 붕어의 등은 무려 400m나 됐다. 월척 중의 월척이었다. 구수종은 산의 형세가 마치 붕어가 입을 벌리고 산 아래 흐르는 냇물(泛魚川)에 떠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마을의 이름을 '뜰 범'(泛)자와 '고기 어'(魚)자를 합해 '범어(泛魚)'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교회가 터를 잡은 때는 1903년. '배양이·박순이·조달숙' 여성도 3인방이 복음의 씨를 받았다. 이들은 당시 경산 사월교회에서 열린 부흥회에서 예수를 영접했다. 성령을 받은 이들은 대구제일교회(구 남성정교회)에 출석했다.

그러나 교회까지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이들은 범어동 정일수의 집에서 만나서 교회를 세워달라고 기도했다. 1905년, 마침내 이웃의 초가집 6칸을 사들여 예배를 드렸다. 이듬해 9월9일 초대 담임 안의와(애덤스) 선교사와 유병기 영수(領袖·한국 초대 장로교회의 평신도 직분 중의 하나)를 중심으로 정식 교회가 설립됐다.

다른 역사교회와는 달리 범어교회는 신앙의 유업을 잇는 가문이 수두룩하다. 설립자 중 한 사람인 조달숙의 삶은 성도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그의 후손들은 80여년간 교회의 버팀목으로 중심을 잡고 있다. 조달숙의 남편은 정기현이며, 그의 아들인 범어교회 1세대 정운한은 1930년에 제3대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손자로는 천덕, 재덕, 희덕, 근덕, 근식 등 5형제가 있다. 이들도 모두 장로장립을 받았다. 정씨 가문이 양계장을 운영해서 닭장교회라는 별명도 얻었다.

◇여성도 3명의 기도로 3600여명 축복=교회 설립 100년을 앞두고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다. 허허롭던 벌판에 개발의 바람이 불었다. 교회는 창립 이래 최대의 부흥을 이뤘다. 80년대에 제4대 위임목사였던 설명도 목사가 심방 중심으로 목회를 하면서 교인이 300명에서 600여명으로 늘어났다. 제5대 위임목사였던 김성무 목사가 7년 동안 목회하면서 1000여명으로 성장했다. 현재 범어교회는 출석성도수는 성인 2400여명에 교회학교 1200명의 큰 교회가 됐다. 95년에 부임한 장 목사는 예배와 기도에 중점을 두고 목회했다.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가 되고자 사회 봉사를 시작했다.

범어교회를 이끌었던 목회자 중에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서남동 목사가 유명하다. 서 목사는 1944년 부임해 1년 정도 범어교회를 섬겼다. 서 목사는 유신 정권 하에서 학원사태로 해직된 후 1976년 함석헌, 김대중, 문익환 등과 '3·1 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하여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됐다. 이 과정에서 서 목사는 안병무, 서광선, 주재용 등과 '민중신학'을 태동시켰다.

설립 100주년을 맞아 새성전 건축사업도 추진했다. 많은 성도들이 어렵다고 했다. 역사와 전통이 어린 예배당을 옮길 수 없다는 주장이 강했다. 하지만 장 목사는 조용한 기도로 시작했다. 다행히 당회에서 통과됐지만 범어 4동 주민들의 반대가 문제였다. 교회 주변이 뉴타운으로 지정되면서 예배당 신축은 더 꼬였다. 교인들 중에도 차라리 성전을 이전하지 말고 기존에 있는 위치에 두는 것이 더 낫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도 있었다. 그 즈음 교회 건축 허가가 떨어졌다. 2007년 5월11일 새 성전 착공식을 가졌다. 암반이 너무 많아 공사에 난항을 겪었지만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를 막지 못했다. 드디어 2년2개월의 공사 끝에 대역사가 마무리됐다.

교회의 모습이 100년이나 젊어졌다. 지하 3층, 지상 4층(연건평 4500평) 규모의 새 예배당은 초현대식 건물과 문화공간으로도 손색이 없다. 교회 뒤편 1만9800㎡(6000여평)엔 다용도 테마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새 예배당 1층 카페에 사랑의교회의 사랑플러스 체인몰 서점이 들어선다. 구 예배당의 교육관에서 펼쳤던 방과후 공부방도 운영한다. 영어, 수학 중심으로 전직 교사들을 비롯한 전문교사가 가르친다. 8월부터는 영어카페도 운영한다.

대구=글·사진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한국의 역사교회]

            범어교회 장영일 목사가 말하는 부흥 원동력


“평신도 섬기니 청년들 교회로 몰려와”

"샬롬(Shalom)." 100년을 지나 새 역사를 쓰는 장영일(53·사진) 범어교회 목사의 인사말이다. 39세에 부임한 장 목사는 14년째 복음의 쟁기로 자갈밭 같은 달구벌을 일구고 있다.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곳이어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품과 같은 평안이 있는 교회를 만들고자 합니다."

장 목사에겐 6가지 꿈이 있다. 예루살렘의 꿈(신령한 예배공동체), 나사렛의 꿈(교회학교 양육공동체), 갈릴리의 꿈(평신도 제자훈련공동체)이다. 사마리아의 꿈(벽을 허무는 평화공동체), 안디옥의 꿈(세계를 향한 선교공동체), 로마의 꿈(세상을 변화시키는 희망공동체)을 실현하기 위해 기도의 끈을 놓지 않는다.

장 목사는 교회가 부흥하려면 먼저 목회자가 성도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환경을 탓하지 말고 먼저 목회자부터 마음을 다잡았다. 프로그램과 시스템을 바꾸기 전에 성도들의 영성도 변화시켰다. 교회 현수막을 '나를 새롭게, 교회를 새롭게'로 내걸었다. 95년 9월부터 매년 봄, 가을로 20일 동안 특별새벽기도회를 열었다.

강단 중심의 설교와 특별새벽기도회로 돌파구를 마련했다. 부임한 지 3년 이후부터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신앙 강좌와 신학교실을 열었다. 사회봉사위원회를 조직해 이웃들을 섬겼다. 2005년부터는 목회자 중심의 교회에서 평신도 위주의 사역으로 패러다임을 바꿨다. 서울 사랑의교회의 제자훈련 시스템을 도입해 평신도 리더를 세웠다.

장 목사는 장로 리더십을 강화했다. "교회성장의 원동력 중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장로의 리더십이라고 생각합니다. 당회 안에 위원회를 구성해 장로들이 위원장으로 섬기게 했어요." 지금은 장로들도 긍지가 생겨 교회 변화에 책임감을 지고 목회에 동역하고 있다. 부임 당시엔 성도들의 평균 연령이 높았지만 부임한 지 3∼4년이 지나자 청년들의 모습이 눈에 띄게 늘었다. 이들이 교회 부흥의 원동력이 됐다.

장 목사는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3명의 영적 스승에게 지혜를 구한다. 대구동부교회 김덕신 원로목사로 대학부 시절 신학의 길로 인도한 분이다. 고인이 되신 대구제일교회에서 이상근 목사의 설교집은 든든한 교과서다. 은성수도원장을 지낸 엄두섭 목사도 빼놓을 수 없는 멘토이다. 그가 쓴 '수도생활의 향기'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책이다.

대구=윤중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