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聖地 · 선교사/1.國內 성지순례歷史교회文化탐방

철원감리교회 유적지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102번지)

영국신사77 2009. 8. 11. 22:26

철원감리교회(구명, 철원읍교회) 역사    


 철원감리교회는 1905년 장로교인 웰번(E.A.Welbon) 선교사에 의해 장로교회로 설립되었다. 당시 장로교와 감리교회가 선교 구역을 분할할 때 이 교회는 남 감리교회로 분리 이관케 되었으며, 초기에 Rer.C.T.Coller 선교사가 관리하여 강원도 북부지역인 남 감리교회 선교의 중심지로 삼았다.

 

 구한말인 1909년 김철회가 이 교회부지에 사립 배영학교와 교회를 건립하고 주민들에게 신문화 교육, 육영사업, 군사훈련, 민족정신 함양에 주력해 왔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 강점이후 보호정치, 통감정치를 거치는 동안 조선 정치의 가장 큰 장애물이 기독교라 공언하고 항일집단이라고 매도하였다.

 

 1914년도 배영학교 자리에 철원감리교회를 재신축하면서 배영학교는 교회시설인 정의학교로 개칭 이관되었고, 또한 영동야간학교도 이 교회에서 운영하였다.

 

 1919년 3.1운동시 서문거리의 전도회와 더불어 시위운동의 저력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교회의 학생, 교사, 전도사들이 시국에 대한 정보 등을 적시에 제공하여 철원읍 만세운동을 추진, 연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 감리교회의 수사와 신도들이었다.

 

 철원지역에서의 선교활동이 본 궤도에 오른 것은 1920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해 5월에 철원지방에서는 최초로 붉은 벽돌 건물로 철원읍교회가 낙성되었으며, 7월에 선교사 주재소가 신설되고 의료선교사 앤더슨(E.W. Anderson, 安烈) 부부와 여선교사 어윈(Cordelia Erwin, 魚源)이 상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은 철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3월 10‧11‧18일에 일어난 철원읍 만세운동이다. 1919년 3월 10일 철원읍교회 박연서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 청년들이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그 해 8월에는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김상덕과 박연서 목사가 주축이 되어 항일단체인 ‘철원애국단’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국내 독립운동 상황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고했고, 임시정부에서 전달된 문서를 반포하는 활동을 하다가 1920년에 23명이 일경에게 체포됨으로써 해산되고 말았다. 

 

 1930년대 들어 철원읍교회는 부흥 일로에 있었다. 철원동구역(장흥교회)에서 사경회를 할 때 서기훈, 문우형 목사 등이 교수했는데 새신자가 36명에 달하였다.

 

 1933년 들어서 철원읍교회에는 새신자가 50명이 늘었고 주일학교는 매주일 300여 명이 모이게 되었다. 이렇게 교세가 더욱 신장되고 철원지방에는 지방 중심지에 감리교회를 대표할 이렇다 할 교회가 없어 철원에 예배당 세우는 일이 시급해졌다.

 

 1936년에 드디어 지방회원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철원읍교회 예배당 기공식이 있었다. 철원읍교회의 설계는 당시 유명한 설계사인 보리스(W.M. Voris)가 맡았다. 총공사비는 27,200원으로 선교부에서 15,850원을 보조하였고 나머지는 교인들이 헌금하였다. 대지면적은 1,200평, 건평은 198평으로 갤러리가 있는 준 3층 석조건물이었다. 공사기간은 만 1년이 걸려 1937년 9월 30일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철원감리교회 터

 

철원제일교회 교세 (사진은 당시 주일학교 학생들)

 

철원제일교회 교세 (사진은 당시 주일학교 학생들)

 

 


 건축당시 교회의 담임목사는 이기연 목사였고, 교인은 337명, 주일학교 학생은 275명, 직원은 27명이었고, 엡윗청년회가 50명, 여선교회가 66명으로 각각 2개 지회가 있을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6.25당시 폭격으로 인해 이 신앙의 요람은 잔해만 남게 되었다. 공산 치하에서 철원제일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 청년학생들의 반공투쟁이 전개되기도 했지만 전쟁으로 대부분 건물이 파괴돼 현재 전면 출입구 등 일부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6.25 당시 인민군 병영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기도처이던 지하실은 양민학살의 만행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해 민족의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장소이다.

 

 한편 이 지역 장흥교회 이금성 장로는 일본 오사카예술대학 박물관에서 철원제일감리교회를 설계한 보리스씨의 설계도면을 찾게 되었고 철원제일교회를 실물 그대로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철원 노동당사가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는 철원제일교회는 근대문화유산 23호로 지정되어 있다.


 

                                                 철원제일교회의 목회자들


 교회가 세워질 당시는 일제강점기로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펼쳐지고 있던 시기였다. 강원도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강원도에서는 철원이 가장 먼저 일어났고, 그 중심에 철원제일교회(당시 철원읍교회) 박연서 목사가 있었고, 박연서 목사를 중심으로 청년들이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되었고, 이후 항일단체인 ‘철원애국단’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또한 강종근 목사는 1939년 철원제일교회에 부임하여 열심히 사역을 감당하면서 교인들은 물론 지역주민들로부터 존경과 신임을 받자 일본경찰의 요주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다가 1940년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문을 받았고, 모진 고문으로 1942년 세브란스 병원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순교자 강종근 목사(1904.9.26-1942.6.3)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에서 태어났다. 1910년 부모의 신앙을 따라 어렸을 때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으며 1925년 배재학교를 졸업하였다. 1928년 감리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윤희성과 결혼하였다. 1933년 4월 중부연회에 허입한 후 첫 목회지로 경성지방의 창동교회에 파송 받아 목회하였고, 1935년에 창동교회가 동부연회로 편입됨에 따라 그의 소속도 동부연회로 옮겨지게 되었다.

 

 1937년에는 철원지방 연천교회를, 이듬해인 1938년에는 창도교회를, 그리고 1939년부터 목사 안수를 받고 정회원에 허입한 후 철원지방 철원제일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철원제일교회를 담임한 그는 열심히 봉직하였고 그로 인하여 교회가 크게 부흥하매, 교인은 물론 일반 불신자들에게도 존경과 신임을 받았다. 따라서 일본 경찰은 교회 행사에 일일이 간섭하고 방해하며 강종근 목사를 호출하여 방해하곤 하였다.

 

 1940년 철원제일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조선총독부의 “사상범 예비검속령”에 의해 구속되어 1년형을 선고받은 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받은 고문으로 신병이 약해지자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으나 회생하지 못하고 아내 윤희성 사모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주를 따라간다. 마음이 기쁘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때가 1942년 6월 3일 이었다.

 

방문 현수막

 

철원감리교회 유적지

 

철원감리교회 유적지

 

철원감리교회 유적지 입구

 

철원감리교회 재건 투시도

 

철원감리교회 재건 투시도

 

철원감리교회의 규모 (사진은 조감도)

 


 철원제일교회의 크기는 가로 24m, 세로 12.2m의 현무암과 화강암을 쌓아 만든 석조건물이었다. 1층은 소예배실(교육관)과 10개의 분반공부방, 2층은 대예배실로 이루어진 웅장한 교회였다.

 

 철원제일교회는 이화여대 캠퍼스를 설계 건축한 보리스에 의해 건립되었다. 1880년 미국에서 태어난 보리스는 대학 졸업 후 해외선교를 위해 1905년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는 일본서 영어교사를 거쳐 오미 미션을 조직해 일본과 한국에서 왕성한 미션건축 활동을 했다.

 

 보리스가 어떤 경로로 한국내 미션건축에 참여하게 됐는지 명확하게 밝혀주는 자료는 없다. 단지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감신대 석사과정 중인 이정선은 논문 <건축선교사 보리스의 한국내 건축활동>에서 ‘보리스가 주로 방문했던 지역이 서울과 평양, 부산, 개성 등 한국내 기독교 선교의 중심지라는 점에서 그의 한국 방문이 미션건축사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실제로 보리스는 1905년부터 1964년까지 60년 가까이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한국내 건축사업과 관련 1908년부터 1938년까지 총 17회에 걸쳐 한국을 방문했다. 보리스의 초기 한국내 건축물은 서울에 건립된 협성여자신학교와 피어슨기념성경학원의 기숙사를 들 수 있다. 협성여자신학교는 1917년 설계돼 1918년 완공됐으며, 이 해에 피어슨기념성경학원의 기숙사도 완공됐다. 이듬해인 1919년 5월과 1920년 1월 한국을 방문한 보리스는 미국감리교 해외선교 1백주년을 기념하는 ‘백주년 기념운동’건축사업 관련해 감리교의 많은 미션건축물을 설계ㆍ건축했다. 감리교 계통의 공주영명학교, 해주남학교, 평양여학교, 송도(개성)학교 등이 이때 건립됐다.

 

 이후 보리스는 1932년부터 1941년에 이르기까지 이화여대 캠퍼스 건립사업에 참여해 본관, 체육관, 음악관 등 총 10여 개의 건물을 설계 및 건축했다. 또한 그는 이 기간 중에 원산중앙교회(1935~37), 철원제일교회(1936~37), 태화사회복지관(1937~1939), 평양요한학교(1939~40) 등을 건립했다.

 

 이 중 이화여대 캠퍼스는 보리스 자신이 각별한 애착을 갖는 작품이었으며, 당시 한강 이북지역에 있는 교회들 중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손꼽혔던 철원제일교회는 보리스를 대표하는 한국내 건축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야외 예배실

 

옛 철원제일감리교회 유적지 비

 

옛 철원제일감리교회 유적지 비

 

야외 예배실

 

야외 예배실, 유적비

 

야외 예배실

 

야외 예배실

 

철원감리교회 유적지 전경

 

철원감리교회 유적지

 

철원감리교회 유적지 정문 측면

 

철원감리교회 유적지 정문

 

철원감리교회 유적지 전면

 

철원감리교회 유적지 전면

 

철원감리교회 유적지 전면

 

철원감리교회 유적지 전면

 

철원감리교회 유적지 전면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제 23호

 

입구 계단

 

입구 바닥

 

정문 좌측 벽

 

정문에서 안쪽을

 

안쪽에서 바라본 정문쪽

 

허물어진 벽

 

허물어진 벽

 

입구 쪽

 

유적지 잔해

 

유적지 벽

 

강단 쪽 유적

 

강단 쪽 유적

 

강단 쪽 유적

 

강단 쪽 유적

 

강단 쪽 유적 측면

 

유적지

 

어느 교회에서 만들어 놓은 십자가 모래무덤

 

어느 교회에서 만들어 놓은 십자가 모래무덤

 

교회학교 아이들의 이름이 쓰여있다

 

철원제일교회 터에서 기도하는 미연합감리교회 북일리노이주연회 정희수 감독과 대표들 (2006.5.)

 

 미선교부의 지원으로 건축됐다가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구 철원제일교회(본지 419호 소개) 현장에 미연합감리교회 북일리노이주연회(정희수 감독)의 대표들이 방문했다. 모두 9명으로 구성된 방문단은 서울남연회(김충식 감독)와 자매결연을 맺기 위해 내한했다가 교회의 소식을 듣고 이곳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이들은 지난 21일 본부 비서실과 철원서지방(방 현 감리사)의 안내로 한국전쟁과 선교의 역사를 간직한 이곳에 대한 전반적 설명을 듣고 기도회를 진행했다. 특히 이 자리에선 3년간의 법정투쟁을 통해 망실된 철원제일교회의 토지를 본부 유지재단에 편입시켰던 이금성 장로(장흥교회)가 전반적 설명을 진행했다.

 

 이 장로는 “초기 미군 폭격이 시작돼 철원지역이 초토화돼도 이곳은 무사했는데, 인민군 병영으로 쓰이는 바람에 파괴되고 말았다”며 교회와 지역의 전반적 역사를 설명했다. 그는 또 “미 선교사들에 의해 종교 부지로 쓰이다 망실된 재산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면서 “이를 통해 선교사들로부터 시작된 신앙의 역사를 회복하는 것이 희망”이라고 덧붙였다.

 

 북일리노이주연회의 자매결연위원회대표로 이 자리에 참석했던 로버트(Rev. Robert B. Campbell) 목사는 교회를 복원하고자 하는 감리교회의 노력을 전해 듣고, “파괴된 이 곳의 회복은 부활의 상징과 같다”며 “복원을 위해 일정의 역할을 하고 싶다”고 전했다.                                    (출처- 기독교타임즈 이준협 기자, 200605) 

 

폭격의 흔적인 외벽을 붙잡고 기도하는 UMC 및 철원제일교회 복원추진 관계자들

  

 2006.3.26 철원제일교회 복원을 준비하기위해 기도하고있다.

 

철원제일교회 복원기공예배 (2008.10.24)


 철원제일교회 복원 기공 예배가 2008.10.24 오후 2시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102번지 철원제일교회 유적지에서 열렸다. 김남철 감독(동부연회)의 사회로 진행된 기공예배에서 신경하 감독회장은 ‘눈물로 다시 세워야 할 교회’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신 감독회장은 “역사적인 꿈은 모든 간절한 기도와 소망 속에서 이루어짐을 감사하며, 이 일을 통해 역사의 회복, 평화의 기원과 초석을 새롭게 놓는 일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철원제일교회 복원건축위원장인 이규학 감독은 복원공사계획을 설명하면서, “철원제일교회의 복원을 통해 북한 선교의 문이 열리고 평화통일의 교육장으로 활용되길 바라며, 이 일에 한국 감리교회가 함께 힘써 달라”고 당부했다.

 

 

                                          복원시설 규모와 예산확보방법


 총규모1322㎡로 예배당 495.8㎡(300석 기준), 역사자료실 및 세미나실 식당 및 부대시설, 목사관을 갖출 예정이다. 총공사비 30억 원을 총회와 각 연회, 문화재 복원에 대한 문화재청, 강원도청, 철원군청 지원 및 기타지원 등으로 재원을 확보해 나갈 계획이다.


 

                                                  철원제일교회 복원의 의의


 일제 치하의 수난, 공산치하의 고난, 6.25의 아픔을 간직한 철원제일교회를 복원함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와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철원제일교회는 감리교회와 장로교회의 협력의 아름다운 전통을 간직한 교회이다.

 

 둘째, 독립운동을 통한 애국애족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으며, 일제치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한 강종근 목사의 순교의 피와 신앙전통을 간직한 교회이다.

 

 셋째, 철원제일교회가 강원도 영서지역의 선교중심지였던 것처럼 통일시대에 한국선교와 북한선교의 중심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 또한 단순히 국내 성지코스의 하나에서 이제는 한발 더 나아가 남과 북의 화해의 장으로,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화해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008.10.24. 복원기공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