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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언더우드가 있다면 부산엔 데이비스·엥겔이 있었다

영국신사77 2009. 8. 9. 15:31

서울에 언더우드가 있다면 부산엔 데이비스·엥겔이 있었다
                                                                                 2009.07.17 18:37:43

조지프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

"나의 기독교 신앙이 대부분 야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염려스럽다. 오, 하나님께 합당한 마음을 가져야 할 텐데…."(1890년 3월30일·데이비스 선교사)

겔슨 엥겔 선교사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따라야 하리라. 서로의 기호가 다르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1900년 12월9일)

"아침에 부산 최고 집안의 일곱살 난 어린 소녀가 왔는데 성공적으로 이 하나를 뽑았다. 무료 치과시술은 선교의 새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하게 될지 모른다."(1901년 3월8일·이상 엥겔 선교사)

100여년전 한국서 맹활약 호주 선교사 육필일기 출간

선교 사명과 야망 사이의 갈등, 현지인 중심의 선교 강조, 의료 선교의 중요성 등이 절절히 묻어나는 100여년 전 선교사들의 고백이 세월을 뚫고 다시 살아났다. 호주 최초의 한국 선교사였던 조지프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와 겔슨 엥겔 선교사의 육필일기, '쥬야 나를 불샹이 넉여 도아 주쇼셔'(크리스찬리뷰)가 출간됐다. 호주의 한국 선교가 시작된 지 정확히 120년 만이다.

서울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있었다면 부산 경남에는 호주 장로교 선교사 데이비스와 엥겔이 있었다. 1889년 10월2일 부산에 첫발을 내딛었던 데이비스(1856∼1890·한국명 덕배시) 선교사는 쪽복음을 들고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였다. 인도 선교사로 활동하다 건강 악화로 귀환했던 그는 한국에 선교사가 더 필요하다는 선교 편지를 접하고 한국행을 택했다.

부산 도착 후 배를 타고 제물포로 간 그는 부산으로 내려오는 선교 여행을 떠났고 한문 성경과 전도지, 판매용 마가복음과 요리 문답서를 둘러메고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하지만 부산을 코앞에 두고 천연두와 급성폐렴에 걸려 한국 도착 6개월 만에 별세하고 만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희생은 호주 교회에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호주 선교사들은 속속 도착해 교회와 학교, 병원과 고아원을 세웠다. 엥겔(1864∼1939·한국명 왕길지) 선교사는 1900년 10월29일 10번째로 도착해 부산 경남 지역 선교의 꽃을 피웠다. 1919년까지 선교에 힘써 동래 울산 울릉도 양산 김해 밀양 창녕까지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일신여학교 교장(1902∼1913), 총회장(1913), 경남노회장(1917) 등을 역임했고 평양신학교에서 교회사와 히브리어를 강의했다. 20년부터는 평양에 상주하면서 37년 귀국할 때까지 신학 교육에 전념했다. 일기에는 복음을 전하며 전도했던 내용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초기에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애쓰던 장면,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대한 감탄과 한국인들의 친절함 등도 묘사했다. 또 한국인들의 성경 사랑도 기록했는데 데이비스 선교사는 "이 사람들의 책에 대한 열심은 지금껏 본 적이 없는 것"(1890년 3월22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호주 시드니 미첼 도서관 고문서보관소에 원본이 소장된 것을 처음 발굴, 책을 엮은 호주 '크리스찬리뷰' 권순형 대표는 "이들의 일기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한국인 사랑의 열정, 선교의 눈물과 기쁨을 읽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 대표회장 박종순(충신교회) 목사는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개최된 출판기념 감사예배 설교에서 "한국 교회는 선교사들의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며 "주님의 선교 명령에 순종해 달려가자"고 말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