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 - 왜곡된 사실
미국에서 이스라엘에 도착한지 2개월 쯤 되었을 때의 일이다. 이스라엘에 선교사로 거주하고 계시던 교단 목사님 한 분을 우연히 현지에서 만났는데, 하루는 그 분을 따라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를 방문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베다니에서 나사로의 무덤을 방문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동네 꼬마들이 손에 무엇인가 들고서 나를 상대로 열심히 호객행위를 하는 것이다. 난처해하는 나에게 선교사님은 꼬마들이 손에 든 것은 겨자씨인데 한국에서 오시는 분들이 너무 찾아 이제는 가게에서 상품으로 판매한다는 것이다. 그때 내가 처음 보았던 겨자씨는 검정색이었는데 손에 잡이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그리고 얼마 후, 한국에서는 그 작은 겨자씨를 코팅해서 만든 책갈피가 최고 인기 있는 성지순례 기념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학기가 시작된 후 그 작은 씨는 겨자씨가 아니라 담배씨(학명: Nicotiana glauca, 원산지 남미, 현재 지중해 지역에 널리 분포)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책을 통해 확인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에서 2-3월쯤,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꽃이 겨자꽃이다. 갈릴리 지역이나, 평지의 들녘 같이 비가 많이 내리고 기온이 온화한 곳은 온통 겨자꽃이 뒤덮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모습은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는 활짝 피어난 유채꽃 밭과 같다.
고대 팔레스타인에서 겨자는 들녘에 자생하거나 밭에서 재배되었는데, 그 씨는 주로 약용이나 식용기름을 만드는 원료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겨자씨는 그 크기가 좁쌀만 한데, 종류는 크게 검정과 흰색 계통으로 구분되며, 노란색 꽃을 피우며 1미터가 채 되지 않는 크기로 자란다. 하지만 토양이 좋고 햇볕이 잘 들며 기온이 따듯한 곳에서 검정 겨자씨는 3m까지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겨자씨와 겨자나무를 한국 순례객들은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다. 주변이 온통 노란 꽃이 핀 겨자나무로 뒤덮여 있는 현장을 목격하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왜곡된 선입관 때문이다.
성경에서 겨자씨에 대한 언급은 다음과 같은 두 경우에 나타난다. 마가복음 4:30-32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비유로 사용하셨고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참조 마13:31-32, 눅:13:18-19)
다음은 누가복음 13:31-32절에서 ‘믿음’에 대하여 교훈하실 때 겨자씨를 예로 사용하셨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참조 마17:20)
주후 1세기, 말씀이 처음 선포된 이스라엘의 문화적 배경을 무시한 채 우리의 시각으로 성경을 바라본 결과 우리는 겨자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오해하게 되었다.
첫째, 겨자씨는 씨 중에 가장 작다. 둘째, 겨자씨는 자라면 커다란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게 된다. 이 같은 선입견이 한국의 순례객들에게 깊게 각인된 결과, 이스라엘에서 씨 가운데 가장 작은 씨를 찾았고 그래서 찾아낸 것이 담배씨였으며, 겨자나무 한 복판에 앉아 사진을 찍으면서도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는 겨자나무와 현장에서 만나 겨자나무 사이에 너무나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갭(gap)을 줄이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처음 말씀이 선포되었던 당시의 언어, 문화적 배경으로 성경을 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첫째, 우리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씨 중에 가장 작은 씨’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 사용된 ‘씨’는 헬라어로 스페르마(sperma)인데, 이 단어는 보리, 밀과 같은 곡식 알갱이를 지칭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좁쌀만 한 겨자씨는 밭에 심는 곡식 알갱이들 가운데 작은 씨로 말해도 1세기 청중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은 겨자씨가 자라서 ‘나무’가 된다는 것이 우리에게 커다란 문제가 된다. 하지만 식물학적으로 소나무처럼 크게 자라는 겨자나무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성경을 주의 깊게 관찰하거나 상식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비유 가운데 나타나는 이 같은 표현이 과장법 있거나 유머스러운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겨자와 비교되는 대상이 밭에 있는 나물이기 때문이다. 만일 겨자가 소나무처럼 크게 자라는 것이라면 나물을 그 비교 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다음은 겨자씨가 자라면 가지를 내고 새들이 깃들게 된다는 표현이 겨자에 대한 왜곡된 선입견을 갖는데 일조를 한다. 이스라엘의 겨자는 더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5월이 되면 마르기 시작하는데, 누렇게 말라버린 겨자나무는 마치 고추대와 같이 단단해 지고, 그 곳에 새들이 떼를 지어 깃드는 모습은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다.
마지막으로 겨자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서는 1세기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용적 표현에 있다. 당시 사람들에게 겨자씨는 ‘작은 것’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용례가 있는데 ‘작은 꼬마 아이’를 ‘주먹 만 한 놈’ 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주먹보다 작은 것들은 얼마든지 있지만, 이것은 우리 문화에서만 통용되는 관용적 표현인 것이다. 이처럼 씨 가운데 겨자씨보다 작은 씨가 있지만, 말씀이 선포된 문화권에서 겨자씨는 작은 것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왜곡된 사실을 진실로 알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문화의 차이에서 발생되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적 갭을 최소화 하려는 끝임 없는 노력만이, 사실이 왜곡되는 것을 최소화 하고,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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