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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왜? 약속보다 출애굽이 30년이 더 걸렸나?

영국신사77 2009. 6. 30. 09:39

왜? 약속보다 출애굽이 30년이 더 걸렸나?

 

출애굽기12:40절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사백년을 종살이 한 후에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네 자손을 인도하여 내시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사백년이라는 기간은 짧은 것 같지만 참으로 긴 시간입니다. 우리가 고향에서 태어나 서울로 올라와 불과 몇 십 년만을 살아도 서울이 고향 같아집니다. 더구나 고향에 친척이나 아는 사람들이 없다면 서울은 더욱 더 고향과 같이 됩니다.

 

또한 서울로 올라와 자녀를 낳고 살다보면 그 자녀의 고향은 서울이 됩니다. 고향에서 직접 살아보지 않은 자녀들에게 부모의 고향은 사실 그렇게 가슴에 와 닫지가 않습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사는 이민 1세대는 우리나라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지만 그것에서 태어나서 자란 이민 2세대는 사실 우리나라가 그렇게 소중하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꼭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거의 없습니다.

 

 더구나 그곳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는 이민 2세대는 미국이 자기 나라이며 그곳이 고향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아마 거의 모든 사람들이 거절을 할 것입니다. 부모가 아무리 간곡하게 부탁을 해도 한국이라는 나라는 이미 낮선 이방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민 2세대도 그런데 4백년이라는 기간은 사실 고향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미국이라는 신대륙이 발견 된 것이 불과 4-5백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거대한 나라가 되어 모든 사람들이 동경하는 그런 나라가 되어 있습니다. 사백 년 전에 미국에 첫 발을 내딛은 사람들은 그들의 나라는 미국이 조국입니다.

 

그들의 조상이 영국에서 건너 왔건 아니면 프랑스에서 건너왔건 이미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 조상들의 땅은 이미 미국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자기 조상들이 살던 나라를 전혀 마음에 두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너무도 살기에 편한 미국이라는 나라는 자기 조상들의 조국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은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은 목축을 하는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와서 거하는 고센 땅은 목축을 하기에는 너무도 풍요로운 땅이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농사를 주로 하고 목축은 거의 애굽에 거하는 이방인들이 하던 일이었는데 야곱의 가솔들이 애굽에 와서 그 고센 땅에 거하면서 목축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살던 가나안은 이미 칠년 가뭄으로 풀 한포기 구할 수 없는 척박한 땅으로 변해 있었고 목축을 하기에는 너무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고센 땅은 마치 천국과도 같이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 땅이 얼마나 좋은 땅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47:27절을 보면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하며 거기서 산업을 얻고 생육하며 번성하였더라”

 

 물론 그들이 번성할 수 있게 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살기에 가장 좋은 땅을 애굽에 두시고 그 땅에서 이스라엘이 족속이 번성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 와서 가나안에 거했을 때 보다 더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려서 미국에 이민을 가서 출세를 한 것입니다. 한국에서 살 때 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들에게 미국은 조국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에서 고생하던 사람들이 미국에 가서 풍요로움을 누린다면 그 땅은 고향과도 같고 조국과도 같이 느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고센 땅은 그런 땅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가나안은 그저 자기 조상들이 잠시 머물며 살던 곳이고 풍요로움을 누리는 이 고센 땅은 고향과도 같은 땅이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곳에서 그들이 사백년을 살았습니다. 고센을 떠난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목축을 하며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는 고센 땅 생육이 번성하여 거대한 민족으로 태어나게 한 이 고센 땅은 그들의 고향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자기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미국에서 출세를 하고 이미 그곳이 고향이 되어 버린 이민 10세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의 조상이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해도 풍요로운 그 땅을 버리고 한국으로 온다는 것은 다시 낮선 이국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을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아마 지금 한국에서도 지방에 있다가 서울에 올라와 10대를 살아가는 그 자손이 10대 조상의 말을 듣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라고 한다면 아마 모두가 포기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조상의 말이라 해도 서울에서 터를 잡고 서울이 고향이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조상의 말이 아무리 간곡해도 마음에 와 닫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이와 같은 상황입니다.

가나안이라는 나라는 더구나 이미 그곳에 토착민들이 자기 조상들 보다 더 먼저 뿌리는 내리고 있습니다. 사실 가나안이라는 땅은 자기 조상들의 땅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하란에서 부르시고 이삭과 함께 잠시 거했던 곳이지만 야곱 때부터는 이미 애굽으로 내려와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인구가 몇 백 몇 천이라면 쉽게 가나안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만 더구나 지금 이스라엘의 인구는 약 200만 명 가까이 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 200만 명이라는 숫자는 거대한 한 나라와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인구가 지금은 많지만 불과 몇 백 년 전만 해도 2-3백 만 명에 불과 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어느 지도자라고 해도 그 백성을 이끌고 나갈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이미 애굽에서 하나님과 다른 신을 겸하여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자기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또 애굽이라는 나라의 눈치도 봐야 했습니다. 자기들은 어떤 무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군대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애굽은 그 당시 세상을 지배했던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런 나라에서 자기 조상의 언약만을 믿고 나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출애굽기1:7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애굽 사람들을 위협할 정도로 강성해져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걱정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이제는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이 창성해 지니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에 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모험과도 같은 일입니다. 이제는 나갈 수도 없는 환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로서는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사실 허망한 꿈과 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으로 하신 언약입니다. 사백년이 되었는데도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어기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기다리셨습니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이스라엘이 스스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렸지만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언약을 주셨지만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1:12-14절을 보면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를 엄하게 하여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역사가 다 엄하였더라”

 

이스라엘은 영적인 천국 가나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하신 은혜의 언약입니다. 그러나 사백년이 다 되었는데 그들이 애굽에서 나가려 하지 않자 하나님께서 애곱 왕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아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도 이스라엘이 더욱 창성해 지자 바로는 그들에게 더욱 더 힘든 노역을 시키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이루시게 하기 위한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고난을 당하면서도 애굽에서 나가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괴로운 일을 당하면 세상을 원망합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기 보다는 그 괴로운 문제를 해결하는데 급급하기만 합니다. 우리에게 육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그것은 모두 영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이 점점 더 괴로워집니다. 그럼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제에 집착하면서 기도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들에게 점점 더 혹독한 노역이 시작되자 그것에 대한 문제만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119:75절을 보면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

 

나를 괴롭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까닭 없이 괴롭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괴롭게 할 때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처지가 괴로워지면 하나님께서 나를 괴롭게 하시는 이유를 알려 하기 보다는 그 문제에 집착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면 그것으로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마치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된 것으로 오해를 하고 문제 해결이 되었다고 오히려 자랑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괴롭게 하시는 이유는 나를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시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 괴롭게 하신 것 같이 나 또한 내 삶에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통해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회를 보면 그 문제에 집착을 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내 영혼의 문제가 해결이 되었는가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만 해결이 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심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신 그 약속을 성실하게 행하기 위해서 괴롭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그 문제에서 벗어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데 내가 가나안으로 들어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괴롭게 하십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고 자꾸 내 삶을 통해서 역사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가 구원을 받게 하셔야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 예정의 모든 경륜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모를 수 있습니다. 아니 잊어 버렸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시고 있고 나를 반드시 구원하시기 원하십니다. 내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괴롭게 만들어 버립니다.

 

에베소서1:4-5절을 보면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나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이미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그 예정대로 나는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깨닫지 못하고 가나안에 들어가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누가 답답하시겠습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안 들어가려는 것이나 내가 천국에 소망을 갖지 않는 것이나 하나님께서 답답하신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그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언약을 받은 것이나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애굽이라는 곳이 너무 좋은 것입니다. 너무도 풍요로운 현재의 삶이 너무도 좋기 때문에 굳이 가나안에 들어갈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현재의 삶이 너무 좋기 때문에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에 책하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나를 괴롭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괴롭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실하심이라는 말씀입니다.  당하는 나는 괴롭지만 사실은 더 좋은 천국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이라는 것을 우리는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구원이 없으면 우리는 헛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아직 구원에 대한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대한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비록 세상에서 어렵고 힘들어도 천국을 소망하면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은 설령 그 문제가 해결 되었다 해도 또 다른 문제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문제 해결이 아닙니다. 정말 천국에 대한 비밀을 깨닫고 나면 이 세상에서 사는 문제는 아무 거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한번 언약을 하셨으면 그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또 예정을 하셨으면 반드시 이루시고 마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진행되어 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 예정하심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는 성실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반드시 이루시기 위해 구원에 대해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고 있습니다. 질병으로 또는 사업의 실패로 또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하게 만들기도 하고 또는 이 세상에 대해 좌절을 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성실하심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자기 문제에 대해 원망을 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나를 괴롭게 하고 있는데 구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마치 구원 문제는 해결된 것으로 오해를 하면서 문제만을 해결하고자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영혼의 문제를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내 병을 고치면 무엇 할 것입니까? 내 사업이 다시 번창을 하면 무엇 할 것입니까? 그 모든 문제가 다 해결이 되었다 해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사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조금 더 잘 먹고 조금 더 잘 입고 조금 더 잘 살고 하는 문제는 모두다 정욕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 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왜 괴롭게 하는 가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실 고난은 축복입니다. 내가 지금 괴로움을 당하고 있지 않다면 천국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괴로움을 당하지 않으면 절대로 애굽 땅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고향이 되어 버린 그 땅에서 번성하고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는데 과연 누가 가나안으로 들어가려 하겠습니까?

 

이스라엘은 약속을 잊어 버렸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그 약속을 잊고 풍요로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지금도 신앙생활을 한다 하면서도 너무 풍요로움에 빠져 있다 보면 가나안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게 다가오는 모든 문제는 구원과 관계가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고난을 주고 있지만 그들은 구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빌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종교가 현세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있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그런 육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 문제를 통해서 괴로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성실하시게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신가를 깨닫는 종교입니다.

 

욥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욥기1:1절을 보면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이런 신앙인들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욥기를 읽어 보면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를 인정할 정도로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고난을 당했습니다. 사람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정말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자기가 볼 때 그리고 사람들이 볼 때 흠이 없는 자 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괴롭게 하신 것은 그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 욥과 같이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괴로움을 당하고 있지 않으니까 마치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욥과 같이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도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깨닫지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난을 주셨습니다. 그 후에 그가 하나님을 보고 회개를 하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육적으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욥이었지만 영적인 눈으로 보니까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닫고 티끌과 재 가운데 회개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과 같이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도 괴로움을 주셔서 그 성실하심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괴로움의 문제를 육적으로 해결하려 하고 있습니다. 육적으로 해결을 하려 하다가는 더욱 더 고난만 커진다는 것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지 않으니까 고난은 더욱 더 가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백년이 되었으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하는데 너무도 풍요로운 애굽의 고센 땅을 자기들의 고향으로 삼아 버렸습니다. 그들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애굽 왕을 감동하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는데 천국을 들어가려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성실하심을 이루시기 위해 나에게 고난을 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가기 싫다고 안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안 들어가겠다고 해서 안 들어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나에게 육적인 고통이 찾아오고 있습니까? 가면 갈수록 고난의 연속입니까? 그렇다면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성실하심을 이루시기 위해 고난을 주시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게 고난을 찾아왔을 때 그 문제에 집착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무엇인가를 깨닫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잊어 버렸습니다. 그 덕분에 30년이라는 혹독한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간구를 했다면 그들은 고난을 당하지 않고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보다는 애굽의 풍요로움을 더 좋아 했습니다. 30년간 고난을 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여러분이 버틴다고 그것에서 천국에 안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셨으면 또 택하셨으면 반드시 그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천국으로 인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는 깨닫지 못하고 문제만을 해결하려 하다가는 그 고난의 시간은 더 길어 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늘의 보화와 그 비밀을 아는 성도는 고난이, 고난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꾸 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는 성도는 비록 육신은 어려울지라도 하늘로부터 오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것을 누리면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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