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舊約]강해/◈구약성경 강해(舊約)[종합]

출애굽기 15장 14~15절 말씀/ 4개 종족(족속)

영국신사77 2009. 6. 3. 20:12

 출애굽기 15장 14~15절 말씀 -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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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열방(列邦) : 여러 나라

 

 

2. 4개 종족(족속)


 

1) 블레셋 족속(~族屬):Philistines(지명)

[히] yTv]liP] (pelishti), !yTiv]liP] (pelishtim) [그] Fulistieivm(phulistieim)

[영] Philistines

팔레스티나 서부 연안지대의 국토에 정착한 민족의 명칭(창 21:32,겔 16:57).

 

그들이 정착한 연안지대는 그들의 이름따라 [블레셋 tv,l,P] (pelesheth)](Philistia)으로 불리웠다. 블레셋 사람의 인용은 사사기와 삼상하에 많이 있다.

 

* 블레셋:Philistia(지명)

(Philistia)

 블레셋 사람이 사는 땅을 이름인데, `팔레스틴', 즉 `Palestine'은 이 말에서 연유한다.

 블레셋 사람에 대해서는 애굽의 람세스 Ⅲ세(Ramesses Ⅲ, B.C. 1175-1144 재위) 때에 애굽으로 침공해 온 `바다 백성'(Sea Peoples)이라 불리운 민족 중에 `Prest'라는 이름이 보이는데, 이것과 비교할 수 있다. 애굽어로 셈어의 음절을 표기한 것을 보면 이를 pa-ra-sa-ta라고 읽고 있다.여하튼 이 말은 셈어는 아닌 듯하다.

 

 70인역 헬라어 성경에는 블레셋 사람이 Fulistieivmijallovfuloi(〈이방인〉으로 한 곳도 있다)라 번역하고 있는데, 구약성경에서 그들은 원래 갑돌, 즉 그레데 섬에서 온 민족이라고 했다(창 10:14,암 9:7,렘 47:4).

 에스겔 25:16, 스바냐 2:5을 보면 블레셋 사람과 게렛 사람은 병행하여 쓰이고 있는데, 이 `게렛(Krt)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에게 해역과 관계있는 백성일 것이다.

 

 따라서 애굽의 비문에 나와 있는 `바다 백성' Prst은 블레셋 사람일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런데 BC 11세기애굽의 이야기 `웬아몬'(Wen-Amon)을 보면, Prst과 더불어 애굽을 덮친 `바다 백성' 중에 나오는 tkr라는 백성이 팔레스틴 북부의 돌(Dor) 부근에 정착하여 해적행위를 하고 있던 모양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북수리아의 우가리트 왕국도 BC 1200년 전후에는 이 `바다 백성'의 내습으로 힛타이트와 더불어 멸망된 것으로 보이는 문서를 전하고있는 것 등으로 보면, 성경에서의 블레셋 사람도 tkr 등과 더불어 그 무렵 대거 남하하여 팔레스틴의 동지중해 연안을 따라 주로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애굽의 비석에서 Prst이 쓰고 있는 깃털로 장식한 투구나, 전사가 입고 있는 스커트는 에게 주민의 것과 같은 것이며, 블레셋 사람인 골리앗의 청동 투구나 경갑(脛甲)은 호메로스(Homer)에 나오는 영웅이 즐겨 쓰는 것이고, 다윗과 싸울 때 골리앗의 조롱의 말은, 이것도 역시 호메로스의 영웅들의 싸움 방법으로서 구약성경에서의 히브리인의 것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또 이 Pelistim이라는 말은 원래 `일리아스'나 `오딧세이아'에 나오는 그레데 섬의 Pelasgoiv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 있어서 블레셋 사람의 언어에 관해서는 하등 이를 증거할 만한 문서가 없으며, 또 블레셋 사람의 이름은 거의가 다 가나안어의 이름이고, 골리앗 또는 아기스를 인도·유럽에 비교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들의 언어·문화에 대해서는 팔레스틴에 오기 이전의 것에 대해서 확실한 것은 분명치 않다.

 

 여하튼 블레셋 사람은 `바다 백성'의 내급시에 대량 이주한 자들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팔레스틴 땅에 그들이 오고서부터, 혹은 오기까지 꽤 셈화(化)한 문화 또는 동지중해 문화의 소유자였다. 이것은 삼손 이야기(삿 14장,15장)에서 결혼의법적 수속이라든가, 용어에 관하여 블레셋 사람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데서도 궁지(窮知)할 수 있다. 그들이 길리기아 혹은 수리아를 거쳐 오는 동안에 그들 자신의 것을 잊고 동화해 버렸거나, 또는 원래 에게에서 온 민족에는 틀림없지만, 거기는 헬라인이 오기 전은 셈계 문화가 지배하고 있던 곳이 아니었나 등이 생각되어질 수 있으나, 모두 분명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시기상조인 것이다.

 

 블레셋 사람은 다곤신을 아스돗과 가사에서 제사했고(삿 16:23,삼상 5:1-7), 아스글론에서는 아스다롯을 제사했고, 에그론에는 바알세붑 신당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왕하 1:1-6). 이 다곤은 블레셋 사람이 오기 전부터 팔레스틴에서는 숭배하고 있었다.

 

 그 까닭은 BC 15세기의 아마르나 문서에서 Dagan-Takala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부터도 알 수 있고, 우가리트 문서의 판티온에도 이 신의 이름이 연명되어 있다는것으로 보면 블레셋 사람의 신들은 오히려 셈족의 신들이며, 에게와도 무역관계가 깊었던우가리트 왕국의 신들과 과히 다를 바 없는 신들을 숭배하고 있던 것임을 알 수 있다.그들은 다윗 왕에게 패하기까지는 그들의 다섯 성읍인 가사, 가드,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에서는 `방백'(方伯, 수 13:3,삿 16:5,기타)이라고 불리우는 자가 서로 공통의 문제를 의논하여 정치를 했으나, 예레미야 25:20, 스가랴 9:5을 보면 그들은 방백 대신에 왕을 가지게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다윗 왕 이전에는 유대 산지의 각지에 그 전초 지점을 두고 있었으며, 이스라엘에게 철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등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삼상 13:19-21). 다윗은 젊은 시절에 블레셋 사람들한테 가서 보호를 받으며,그들의 용병술을 배웠고, 후에는 그것을 써서 반대로 블레셋 사람을 추격하는 입장에 설 수있었다(삼하 5:17-25).

 

그리고 다윗은 그들을 격파하고 이를 복종시켜 용병으로 썼다. 요사밧 시대에 블레셋 사람이 유대에 공납(貢納)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대하 17:11),요람 때에 그들은 유대로 쳐들어 와 왕가의 재화를 빼앗아간 것이 기록되어 있다(대하21:16,17).

 

이들 기사를 보면 이 시대에 아랍인들이 블레셋 사람의 땅 남쪽 부분을 점령하고 있는 모양을 알 수 있다. 앗수르의 아닷니라리 Ⅲ세(Adad-nirari, BC 810-783)는 Palastu에서 많은 공납 받은 것을 뽐내고 있는데, 이것은 블레셋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다. 이리하여 아하스 왕 시대에 다시 한 번 블레셋 사람은유대를 습격하여 제성읍을 빼앗았지만(대하 28:18) 오래 계속되지는 못했고,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Ⅲ세에게 쫓겨 아스글론, 가사, 아스돗 등까지도 앗수르의 세력하에 들어가 버렸다.

 

BC 701년 산헤립이 블레셋의 남쪽에 침입했고, 또 애굽 왕 느고(Neco, BC609-608)는 가사를 점령했고(렘 47:1), 블레셋 사람이 애굽과 짝이 되어 느부갓네살왕을 대항하려 하고 있는 모습이 아람어의 편지에 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블레셋 사람에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특히 요엘은 그들이 노예 매매에 대하여 손을 더럽히고 있는 것을 책망하고 있다.

 

 

2) 에돔 사람,~인(人):Edomites(인명)

[히]('edom), ymi/da} ('adomi) [영] Edomites

에서 즉 에돔의 자손(창 36:1-19). 그리고 그들과 합동한 사람들을 일컫는 명칭.

 

팔레스티나 남동부의 땅, 세일로도 말해지는 곳의 주민들이다. 에돔은 붉다는 뜻으로, 그 땅의 붉은 사암(砂岩)에서 온 것으로도 말해지는데, 창세기에서는 에돔인의 조상 에서의 전신(全身)이 붉고, 털이 많은데서로 전해진다. 에서의 아우 야곱에서 나온 것이 이스라엘인이고, 에서와 야곱이 불화(不和)했던 것같이 에돔인과 이스라엘인도 사이가 나빴다. 야곱이 에서를 피해 메소보다미아로 갔다가 돌아온 때, 에서는 원주민 호리 사람(창 14:6,36:20-30)을 몰아내고(신 2:12,22), 이미 에돔의 땅을 점령하고 있었다(창 32:3,36:6-8,신2:4,5,수 24:4).

 

에돔인은 아라비아인의 족장 제도처럼, 각각의 족장에 의해 다스려 지다가(창 36:15-19,40-43,대상 1:51-54), 히브리인에 앞서 왕을 세우고, 왕에 의해 통치 되었다(창 36:12-39,대상 1:43-51).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 가나안으로 향하고 있던 때, 모세는 에돔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에돔의 영토를 통과시켜 줄 것을 청하고, 통과가 허락되면 밭의 작물은 물론 우물 물에도 손대지 않고, 다만 왕의 대로를 통과한 것을 약속했으나, 에돔은 이것을 거부하고, 강한군세로 맞섰다.

 

이스라엘 백성은 같은 아브라함 자손인 에돔 사람과 전쟁하거나, 무리하여 그들의 영토를 통과하기를 원치 않고, 다른 길을 택하여 갔다(민20:14-21). 이러한 적대행위에 대해서도, 이스라엘인은 에돔인을 미워하지 않고 형제로 취급한 것, 그리고 그들이 낳은 3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회중)에 들어올 수 있도록 율법으로 정했다(신 23:7,8).

 

그러나 암몬사람과 모압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을 떡과 물로서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까지든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었다(신 23:3-6). 사울은 에돔과 싸웠다(삼상 14:47). 다윗은 발람에 의해 예언된 대로 (민 24:18), 에돔을 속국으로 하여 수비대를 두어 이를 다스리게 했다(대상 18:13,시60,삼하8:13-14,왕상 11:15-17). 다윗의 군장 요압이 에돔이 여섯달을 유하는 동안 에돔의 남자를 다 쳐서 죽였으므로(왕상 11:15,16), 에돔의 왕족 하닷은 신복 중 두어 에돔 사람과 함께 애굽에 도망하여, 후에 솔로몬의 적으로 되었다(왕상 11:14-22).

 

이스라엘왕 아합의 사후, 여호사밧이 유다를 다스리고 있던때, 에돔 사람은 모압 사람, 암몬 사람, 모우님 사람과 함께 유다를 쳤으나 대하(20:1, 2), 여호와께서 유다를 도왔기 때문에 실패했다. (대하 20:22-23). 그 무렵 에돔에는 왕이 없고, 섭정왕(왕하 3:9에서 에돔왕으로 알려지고 있는 사람인 듯하다)이 왕이었다(왕상 22:47). 모압왕 메사가 이스라엘에 거스린 때, 에돔은 이스라엘과 유다에 합세했는데(왕하 3:4-27), 여호사밧의 아들 요람의 치세에 반항했다. 요람은 에돔을 격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에돔은 유다의 지배를 벗어났다(왕하 8:20-22,대하 21:8-10).

 

아마시야가 유다왕으로 된 때, 그는 염곡(鹽谷)에서 에돔 사람, 1만을 죽이고 수도 셀라를 쳐서 취했다(왕하 14:7,대하 25:11,12). 아하스왕의 치세에 이스라엘왕 베가와 다메섹왕 르신이 유다를 친 때(왕하 16:5), 에돔 사람도 유다에 침입하여 많은 백성을 포로해 갔다(대하 28:17).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된 때, 에돔 사람은 크게 기뻐했다(시 137:7).

 

선지자들은 이 뿌리 깊은 적의(敵意)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예언했는데(겔 35:5,6), 이들 예언은 하나님 나라에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렘 49:7-22,애 4:21,22,겔 25:12-14,35:15,욜 3:19,암 9:12,옵 1:21). 유다의 포로후 에돔인은 유다남부에 칩입하여, 뒤의 이두매 사람이 되었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이름은 [이두매](막 3:8). 마카비 시대에 요한 히르카누스(John Hyrcanus 전 135-105제위)는,전이두매를 점령하여, 그들에게 할례를 강제하고, 유대교에 개종시켜, 유대인과의 합류를 꾀했다(Jos:Antiq. XIII. ix. 1, XV. vii. 9).

 

그러나 로마인들이 팔레스티나를 정복했을때, 이두매의 안티파테르(Antipater)는 로마에 의해 행정관으로 임명되고(전47년)그아들헤롯대왕(전 40-4유다왕)시대에 이르러는, 사마리아, 갈릴리까지도 그 영토에 넣어졌다. 그러나 기원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에 멸망됨과 함께 왕가도 멸망되어, 이두매인과 에돔인의 역사도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모압:Moab(인명)

(Moab) 「아비의 소생」

[1] 아비 롯과 그의 맏딸과의 근친 상간에 의해 출생된 아들이다(창 19:37).

 소돔 성이 멸망될 때 구원받은 롯과 두 딸이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가 굴에서 살 때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아버지는 이미 늙었고, 또 우리의 배필될 사람이 없으니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워 우리가 동침하여 자손을 얻자고 의논하고, 하루는 큰 딸이, 다음은 작은딸이 들어가 동침했다. 모압은 이렇게 해서 얻은 맏딸 소생으로 모압 족속의 조상이다(창 19:37,38,신 2:9,18).이스라엘과 관계가 깊은 종족이다.

 

 고로 모압은 각기 밀접하게 관계한 히브리 여러 종족(이스라엘 에돔 모압˙암몬)의 하나이며, 모두 같은 조상에서 나와 광야에서, 가나안 사람이 점거하고 있는 경작지를 쳐서 패권을 장악했다. 더구나 각 민족은 그 거주지에서 피정복민의 언어와 문명을 섭취한 것도 공통적인 사실이었다.

 

 모압 족속의 영토의 어떤 부분의 선주민(先住民)은 `엠 족속' `수스 족속'(창 14:5,신 2:10)이라고 불리우고 있는데, 이들 종족의 인종적 관계는 분명치 않다. 민수기 21장, 신명기2:8 이하, 사사기 11:12 28 등의 기사는 모압인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이전, 아마 약 1세기동안 사해동부의 지방에서 상당히 번영하고 있던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스라엘인이 호렙에서 가나안으로 진행하는 도중 모압의 남서경(南西境)에 이르기 조금 전에 모압인은 아마 요단 강 서쪽에서 와서 모압의 북쪽 땅 절반(아르논의 북쪽 부분)을 정복하고 그 주요 성읍(헤스본˙메드바˙기타)에서 모압 사람을 추방하고, 헤스본을 그 서울로 하고, 아모리 왕국을 건설한(민 21:21-30) 아모리인의 왕 시혼에 의해 몹시 고통을 당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 사람은 모압 사람이 남쪽 영토에 봉쇄되어 아르논 강이 그 북부 경계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민 21:13). 그리고 모압 사람으로부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오히려 환영을 받고 그 동부 경계를 통과했다. 아마 모압 사람은 아모리 사람보다 자기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이스라엘 사람과의 동맹을 바라고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은 효과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은 시혼을 정복한 다음 그들의 영토에도 손을 뻗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압 사람과의 사이에 틈을 만든 원인이 되었다.

 

 모압 왕 발락은 선지자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사람을 저주시키려고 했고(민 22장-23장), 또 바알브올의 퇴폐적 예배로 유혹하여 여호와에로 향하는 충심으로부터 이스라엘 사람을 격리시키려한 것(민 25:1-5) 따위의 기사는 모압 사람의 이 적의(敵意)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양 민족이 싸웠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약자의 입장에 있는 모압 사람은 강력한 이스라엘 여러 부족의 연합군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어 가장 좋은 목축지, 많은 성읍은 르우벤˙갓에점령되었다(민 32:1-5,34,수 13:15-28). 이 점령의 기사는 이사야 5:15 이하와 모압의 비석 제 10행 등으로 확실하다. 모압의 구 영토를 점령한 것은 주로 르우벤 사람이며, 갓 사람은 원래 더 이북 땅을 점유하고 있던 것 같다.

 

그 후 약 1세기내외에 갓사람은 르우벤 사람으로 대신되고, 르우벤 사람도 후에는 부족적으로는 소멸되어 버렸다. 이스라엘인의 본대(本隊)가 요단을 건너 각 지파가 요단 강 서쪽 영토를 점령하려고 광분하고 있을 때, 모압 사람은 아르논 이북의 구 영토를 회복했거나, 마침내 그 왕 에글론 시대에 이르러 요단 강 이서(以西)의 이스라엘인을 공격했다.

 

그러므로 이 지방의 이스라엘인은 얼마동안 그들에게 예속되어 있었으나, 그 후 에글론 왕은 베냐민 사람 에홋에게 암살되고 그 군사는 전부 구령(舊領)으로 구축되어 드디어 모압인은 요단강 이서의 땅에서는 아무런 시도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후 몇년 지나 `사사 시대'에 이르러 길르앗 사람 입다는 모압 사람이 그들의 영토를 그 지배하에 두려고 했기 때문에 그들을 정복했다고 기록되어 있는(삿 11:12-28) 이 기사는 다른 자료에 의한 별개의 기사를 포함하고 있는 듯하다.

 

사울의 전쟁의 간단한 기사에서(삼상 14:47) 그는 모압인에 대해 성공적인 싸움을 했다고 되어 있으나, 하나의 싸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없다. 창세기 36:35에 막연히 인용되어 있는 모압과 에돔의 전쟁도 이 기간에 속할 것이다.

 

룻기에 의하면, 엘리멜렉이라고 하는 베들레헴사람은 사사 시대에 모압으로 이주했다. 그의 두 아들은 모압 여자를 아내로 취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인 룻은 이 책의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되고 다윗의 조상이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다윗은 모압과 어느 정도의 관계를 갖고 있었으며, 또 사울과의 분쟁하는 동안 그 양친을 모압 왕의 보호에 맡겼을 정도였으나(삼상 22:3), 그가 전 이스라엘 왕으로 된 후 모압과 그와의 사이에는 싸움이 일어났다.

 

다윗은 이 전쟁에서 철저한 승리를 했고, 피정복민을 무참하게 유린했다(삼하 8:2). 갓 사람이 모압으로 이주하여 가장 좋은 성읍과 목축지를 점령한 것도 이 시대일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모압의 비석 기사의 설명으로 된다(다윗 시대보다 150년 후. 즉, 그 제 10행 "그리고 갓 사람들은 옛부터 아다롯에서 살았다" 또 17행 하반절부터 18행 상반절의 "그리고 나는 거기서 여호와의 번제단을 취하여 그것을 그모스의 앞으로 끌고 갔다"는 것은 아마 다윗이나 혹은갓 사람의 여호와 예배자가 만든 여호와의 성소 번제단일 것이다.

 

이 견해에 따라 민수기 32:1 , 33 , 여호수아 13:8 의 인용, 즉 르우벤 사람의 초기 점령에 대한 기억에 관한 인용, 다윗 시대의 갓 사람 후기의 이주에 관련된 갓 사람의 인용의 혼란된점의 설명으로도 될 것이다. 모압 사람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으나 아직 절망하지는 않고 르호보암의 즉위(BC 933년)와 더불어 그들은 아르논 강 이북의 구령(舊領)을 회복하여 이스라엘의 기반을 벗어나 오므리의 치세까지 독립을 유지한 것 같다.

 

오므리는 모압을 다시 이스라엘에 복종시켜(모압의 비문 제 4 8행.) 그 아들 아합의 치세 끝까지 이르렀다. 구약성경에는 오므리의 모압을 정복한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메사가 매년 새끼 양 10만과 수양 10만의 털을 바쳤다는 것이 기록되고(왕하 3:4), 그와 동시에 이 지방의 모압 땅이 얼마나 축복을 받았는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메사는 재능있는 애국적 왕이며, 구약성경에 의하면 아합의 말년에 이스라엘에 반기를 들었다(왕하 1:1,3:5). 모압의 비문은 이모반이 아합 시대에 행해졌던 것을 의미하는 것 같으나, `그(오므리)의 아들'이라고만할 뿐 아합을 가리키는지 혹은 그의 아들 요람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여하튼 요람이 유대와 에돔의 원조를 얻어 메사를 다시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두려고 한 것을 보아(왕하 3:4-27), 충돌의 위기는 요람의 치세까지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메사의 이야기는 이 모반의 첫 부분인데, 그 모압의 비문의 제 1- 20행에 그 자신의 말에서 읽을 수 있다. 또 그가 그 왕국을 발달 조직시킨 건설적 사업은 그 비문의 뒷 부분에서 얼마간 엿볼 수 있다.

 

요람과의 싸움은 이 비문이 기록된 후에 속할 것이다. 이 싸움은 메사에게 그의 맏아들을 희생 제물로 죽였을 정도로 큰 타격을 주었으나, 요람의 승리로는 되지 않았다. 이스라엘 사람이 이 싸움을 포기한 것은, 메사의 그 전율할 행위에 의해 느낀 미신적 공포에서였을 것이다. 이 시대의 모압 역사에 대해 이 이상 알려져 있는 것은 없다. 역대하 20:1- 30의 기사는 역사성이 의심되고, 열왕기하 13:20은 이 시대의 양 민족의 적의를 일반적으로 반영하고 있는데 불과하다.열왕기하 10:32 에는 수리아(하사엘)에게 복종한 것을 암시하는 기사가 있다.

 

다음에 모압에 대해 보는 것은 아모스 2:1- 3에 타국민과 더불어 불의한 행위_이 경우에는 에돔 왕에 대한 비인도적 행위_를 한 모압의 죄와 그 받을 벌을 여호와께서 선언하신 기사이다. 이 사건은 언제 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아마 열왕기하 3:4- 27의 사건에 관련된 듯하다. 아모스서의 이 인용에서 보건대, 당시 모압은 기룟을 수도로 하는 독립 왕국을 이루었던 것 같다.

 

이사야 15:1- 16:12에는 모압에 관한 가장 흥미 있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모압 사람이 목전에 닥친 북쪽 또는 동쪽으로부터의침략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여실히 묘사되어 있다. 이 위협적 또는 실제의 침략이 무엇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모압은 수리아에서의 다른 약소국들과 같이 불가항력적인 앗수르의 침략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모압 왕 살만은 유대 왕 아하스와 마찬가지로BC 734년에 디글랏 빌레셀 4세가 북이스라엘과 다메섹을 정복했을 때 그에게 공납(貢納)했다. 사르곤(BC 722- 705)은 모압이 모반을 품고 있는 것을 보았으나, 그 후계자산헤립(BC 705- 681)은 그모스나답을 충신으로 보았다.

 

산헤립의 후계자 에살핫돈(BC681- 668, 669?)은 그의 건축 사업을 위해 모압의 무추리(Mutsuri)로부터의 헌납을 받고, 또 아랍인에 대한 자위심(自慰心)은 모압인으로 하여금 아슈르바니발(BC 668-626)에게도 같은 충성을 다하게 했다. 이리하여 모압은 앗수르의 주권을 승인함으로써거의 1세기 반 동안 독립적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 번영했고, 앗수르 제국(BC 606)의멸망에 따르는 제사건에는 그렇게 관련된 것 같지 않다.

 

어떤 때는 수리아에서 느부갓네살의 권세에 반항하는 모반에 가담하려고도 했던 것 같으나(렘 27:3), 유대에 대한일반적 태도는 적의를 품고 있었기 때문에, 바벨론에 대해서는 우정적이었을 것이다(왕하 24:2,렘 9:26,48:1-47,겔 25:8,습 2:8).모압은 에돔과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 대적 유대가 멸망된 것을 기뻐했으나, 이 바벨론과의 전쟁시에 유대인 중에는 모압에 피난한 자도 있었다(렘 40:11).

 

이 적의는 결코 잊혀지지 않으며, 또 유대에 있어서의 반감은 율법˙예언˙시편 등에도 나타나 있다(신 23:3,느 13:1,23,시 60:8,83:6,108:9,렘 48장).유대의 멸망 후 모압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차츰 아랍 제부족에 정복되어 드디어 그 땅은 나밧아랍의 영토가 되고, 고대 모압 사람의 잔존자도 정복자에게 흡수되어 버렸다.

 

* 모압:Moab(지명)

(Moab) 「물」

(1) 기원:

모압은 구약성경에서 출애굽 때부터 예루살렘 함락 때까지종종 이스라엘과 관계가 깊었던 나라이다. 창세기 19:30-38의 기사를 보면 롯의 큰딸이 낳은 아들이 모압인데, 그가 모압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고 썼다. 그리고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이기 때문에(창 11:27), 성경은 모압이 이스라엘 민족과는 친척 관계에 있음을 말해주는 셈이다.

 

(2) 지역:

모압은 사해의 동쪽에 있으며, 세겜 골짜기를 그 남경(南境)으로 에돔에 접하고(민21:12), 동쪽은 건조한 지대로서 명확한 경계를 결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북쪽 경계에 대해서는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으나, 아르논 강 또는 그 북쪽 40-50㎞까지인 듯하다.모압 땅은 상당한 고지인데, 좋은 곡물을 생산하며, 또 목축이 성하다. 디본의 북쪽에서1868년에 모압의 메사 왕 비석이 발견되었는데(→메사), 이 비문에 이스라엘의오므리 왕에 대한 기록이 있다. 열왕기하 3:4의 기사와 비교해 보아 이 비문은 B.C. 849년 이후의 것, 아마 B.C. 830년 경의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성경 기사에 의하면, 모압 왕 메사는양의 사육자였는데, 이스라엘 왕에게 해마다 양과 그 털을 많이 바쳤다. 이와 같이 모압은목양이 성했다는 것이 적어도 이 메사 왕 시대까지는 확실하다. 그들 목양자의 생활은 봄에는 양의 떼를 좇아 동쪽으로 가고, 여름에는 서쪽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사해에서 북쪽으로 수 ㎞ 떨어진 요단 강 유역은 또한 비옥하며, 여기는 벧니므라, 싯딤, 벧하란 등 애굽을나와 가나안으로 가기까지의 이스라엘의 노정(路程)에 있는 여러 성읍들이 있다(민 32:36,33:49).

 

(3)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본 모압의 역사:

모압에는 B.C. 6000-4500년의 것으로추정되는 기념비 또는 석주(石柱)가 종종 발견된다. B.C. 2300-2000년 사이에는 상당히 발달한 문화의 소유주가 이 곳에 살고 있었던 듯하나, 정치적인 통일을 가진 나라는 못되었다. 창세기 14:5-7을 보면 엘람 왕 그돌라오멜은 에돔에 있어서 엘바란까지,소위 `왕의 길'이라고 하는 트란스 요단을 곧바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어 있는 길을 군대를 거느리고 통과한 듯하다. 이 길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상로로서 알려져 있는 길이다.

 

이 모압에는 르바임 사람, 즉 엠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돌라오멜 왕에 의해 그들은 이 땅에서 쫓겨나고 말았다(창 14:5,신 2:10,11). 애굽의 투트모세 Ⅲ세(ThutmesⅢ, BC 1490-1436)의 아시아 정복의 리스트에도 이 모압의 이름이 네게브, 므깃도,미단니(Mitanni) 등과 같이 나와 있다.BC 1200년 이후의 모압 왕국은 많은 성채를 그 국경에 배치하고 방비를 견고히 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 유적에 의해 알 수 있다.

 

BC 830년 경 모압 왕 메사는 가르호(Qarh oh, 디본) 성읍에는 성읍의 저수 설비가 없기 때문에 각자 각 가정은 저수 탱크를 만들라고 명하였다. 이것은 저수통을 만들 수 있는 기술, 즉 소석회(消石灰)로 만들고 칠(漆)을 한 저수장을 만드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며, 이 기술이 없었던 B.C. 1200년 이전 시대와는 다른주민의 정착과 그 문화가 탄생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1930년 아르논 강과 세렛 강 사이에 끼인, 그러니까 모압의 한 중간에 위치하는 길헤레스 부근의 발루아(Balu'ah)에서 석비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B.C. 12-11세기의 것이라고 한다. 이것에는 세 사람의 인물이 새겨져 있으며, 상·하 애굽의 관(冠)을 쓴 신이 왼쪽에 있고, 오른쪽에는 여신이 있고, 중앙에 있는 자는 두 팔을 들고 그 신 앞에서 탄원을 하고 있다. 이것은 애굽의 영향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들과 출토한 도기(陶器) 등을 보면 B.C.1200년 이후의 모압 문화에는 상당히 발전된 것이 있었다.구약성경에 이 모압 사람에 대해 맨 처음에 나오는 것은 출애굽기이다. 즉, 아모리 사람의 왕 시혼은 이때 모압의 이전 왕과 싸워 모압 땅을 아르논까지 전부 빼앗았으며, 얍복 강에서 아르논에 이르기까지를 점령해 버렸다. 이스라엘은 이 때문에 이 시혼과 사해의 동쪽 땅에서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민 21:21-26).

 

사사기 11:17에도 에돔과 모압 왕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땅을 통과하려 하였을 때 이를 거부했다고 기록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에돔과 모압 왕 시혼, 옥과 싸워 승리하여 가나안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이 아모리 사람의 모압 사람에 대한 전승기가 민수기 21:27-30에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봇에서 숙영하고, 거기서 모압 앞에 있는 광야의 이예아바림에서 숙영하고, 여기서 진행하여세렛 강의 골짜기에서 숙영하고, 아르논 강을 건너 다시 몇번인가 숙영을 거듭하여 모압 광야를 내려다 보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이른 것이다(민 21:20).

 

신명기 2:9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모압을 적대시해서는 안된다고 여호와는 명하고 있는데,그것은 롯의 자손에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또한편으로는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자는 십대 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신 23:3)라고도 되어 있다.

 

그 까닭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였을 때 그들은 떡과 물로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 모압 왕 발락이 발람이라는 선지자에게 뇌물을 주어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였기 때문이다(신 23:4,수 24:9). 모압은 이스라엘이 아모리 사람을 격파했다는 것을 들었으므로 전전긍긍하여 유브라데 강 연안의 브돌에서 발람을 불러다가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려 했으나, 이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는 커녕 그들을 축복해 주었다(민 22장-24장).

 

이 일견모순된 모압에 대한 이스라엘의 두 태도를 나타내는 기술을 보면, 처음에 기술한바와 같이, 이스라엘과 모압이 한 조상의 자손이라는 관계 때문에 서로 밀접한 백성이라는것을 나타내고 있으니, 여기에 연유한 태도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모압의 광야에서 숙영하고 여리고에서 요단을 건넜다고 하는 것이 민수기 22:1에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모압 광야에 있는 싯딤에서 숙영하고 있을 동안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압 처녀들을 더럽혔다. 즉, 성경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들의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초청하니 이스라엘 백성이 먹고 마시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민 25:1,2).

 

이스라엘 백성중에서 르우벤과 갓 자손들은 가축이 매우 많았다. 그래서 아모리 사람의 왕 시혼이 모압에서 취한 모압의 북쪽 부분을 이스라엘은 사혼에서 탈취하여 이를 르우벤과 갓 자손들에게주었다. 그리고 갓과 르우벤 지파는 모압의 성읍들을 자기 식으로 재건했다고 민수기32:34-38은 기록하고 있다.

 

모세는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벧브올의 맞은 쪽 모압의 땅에 장사되었다.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는 정탐군을 보내어 여리고를 탐색시키고 싯딤에서 요단으로진행, 여기서 가나안 침입을 시작했다(수 3:1-). 사사 시대에 들어가서 모압은 영토를 수복하고 이스라엘에게 대항하게 되었다.

 

즉 모압 왕 에글론은 암몬 사람, 아말렉 사람과연합하여 종려나무 성읍(여리고)을 탈취하니 이스라엘은 18년간 그 멍에를 메고 고생하였다(삿 3:12-14). 그때 에훗이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일어나 모압 왕 에글론을 자살(刺殺)하였다. 이 에훗을 추격해온 모압 군대는 요단 강의 건널목에서 전멸되었다(삿3:26-). 그 덕분에 모압의 이스라엘에 대한 지배는 끝났다.

 

이 사사 시대의 어떤 시기에-그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기근이 있었으므로 이스라엘의 한부부가 모압 지방에 가서 살았다. 그리고 남편이 먼저 죽었다. 나오미라는 아내는 과부가 되고 그녀의 소생 두 아들은 모압의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 그러나 이 두 아들도 불행하게 모압에서 죽었다. 그 며느리의 하나인 룻은, 혼인법에 따라 남편의 사후에는 자유인데도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같이 남편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와 나오미의 친척 보아스와 재혼했다.그리고 이 룻은 아들을 낳아 다윗 왕의 조모가 된다.

 

이상의 이야기로 보면 이 시대에는 모압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아무런 편견도 없이 내왕이 자유로웠던 듯하며, 서로 결혼도 가능했고, 우호관계가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이스라엘에게는 더욱 종교적인 혼효(混淆)에 대한 경계가 있었을 것이다.사사기 10:6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신들을 섬기고 미혹되어 있는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시돈·암돈·아람·블레셋 등의 신들과 섞어 모압의 신들을 이스라엘이 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B.C. 11세기 말에 통일 왕국이 형성되었다. 사울 왕이 이스라엘왕이 되어 먼저 행한 것은 모압·암몬·에돔 등 국가와 싸워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삼상 14:47). 다음 다윗은, 그가 아직 사울에게 쫓기고 있는 몸으로서, 재야(在野)의 사병(私兵) 소유자로서, 방랑하고 있을 때에 모압의 미스베에 가서 모압 왕에게 자기 부모의 보호를 부탁하고 맡겼다(삼상 22:3-5).

 

모압 왕은 사울을 파하여 온 다윗에게 호의적이었으며, 이 다윗은 앞서 룻에 대해 쓴 바와 같이 모압 사람과 친척 관계이다. 그런데 사무엘하 8:2에서 다윗은 모압을 격파하고 그들을 속국으로 하고 공물을 바치게 했다. 이 시대에 다윗의 용사 중 한 사람인 브나야는 모압의 용사 두 사람을 친 것이 기록되어 있다(삼하23:20). 다윗은 그들에게서 취한 금은 청동기 등을 여호와에게 바쳤다(대상 18:11).

 

이렇게하여 모압은 다윗 왕 때는 암몬·아랍 등과 더불어 다윗의 무릎 앞에 제압되어 버렸던 것이다.솔로몬 시대에도 역시 모압은 이스라엘의 세력하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즉, 솔로몬은 모압·암몬·에돔·시돈·헷·애굽 등 왕실의 딸들을 아내로 삼았는데(왕상 11:1-8),그들은 모두 정략 결혼의 결과이며, 특히 애굽 왕의 딸은 역사상 그때까지 타국 왕의 아내가 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으로 애굽의 쇠퇴를 봄과 동시에 솔로몬 왕의위세(威勢)를 볼 수 있다.

 

따라서 모압은 솔로몬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 같다. B.C. 922년에 이스라엘이 남과 북의 왕국으로 분열되고서부터도 모압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 같다. BC 9세기 초에 모압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독립을 주장하려 하였으나, 이스라엘에 오므리가 서게 되자 이 소원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앗수르의 살만에셀 Ⅲ세(Shalmaneser Ⅲ)이 아람, 이스라엘, 암몬 연합군과 싸웠을 때, 모압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은 것을 보면 그는 독립국으로서 인정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아합이 죽기 전에 모압에서는 메사가 왕이었으나, 그는 전술한 바와 같이 대가축의 소유자로서 새끼양 10만과 수양 10만의 털을 매년 이스라엘 왕에게 바쳤던 것이다(왕하 3:4). 우가리트(Ugrit) 문서를 보면 rb khnm(제사장)과 rb nqdm(목양장)이 나란히 표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물론 왕국의 관료 조직 중 고급 관직을 나타내는 말이며, 메사가 구약에서 목양자(dqEno no-qed)라고 불리운 것은 아마 메사에게 이스라엘 왕 아합의 rb nqdm 위치를 준 것이라 생각된다. 한즉 모압은 분명히 이스라엘 왕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 아합의 사후 메사는 이스라엘에게 배반하였다(왕하 3:5-). 이스라엘 왕 요람과 유대 왕 요사밧, 그리고 에돔 왕은 모압에 진격했으므로 그들 모압 사람은 도주하였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성읍들을 치고 샘물을 메우고, 나무를 베어버렸으므로 마침내 모압 왕 메사는 태자를 성벽 위에서 번제로 바쳤다(왕하 3:21-27).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스라엘 사람은 모압 사람을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 메사 왕 자신의 말을 빌리면,오므리의 집은 패하고 이스라엘은 영원히 망했다고 했다. 이 메사는 다시 이스라엘에게 빼앗겼던 메드바를 탈환하고 아다롯을 빼앗았다고 비문에 기록하고 있다. 이리하여 모압은 다시 이스라엘에게서 그 독립을 쟁취하였다. 그 후 그는 많은 성읍을 방비하고 이스라엘의 포로를 써서 공공사업을 하였다. 에돔도 유대에서 독립하고(왕하 8:20-22) 암몬도 독립을 회복하였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요람 왕이 B.C. 842년에 죽기까지 요단 강 동쪽의 세왕국은 이스라엘에서 다시 독립을 얻게 되었다.

 

그 후, 아람 사람의 세력이 강해져 아람 사람의 왕 하사엘은 아르논까지도 침입했다. 당연히 모압은 아람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고 생각된다. 앗수르의 아닷 니라리 Ⅲ세(Adad-nirari Ⅲ)가 서진(西進)하여 아람을 굴복시켰는데, 그에 대한 공납자에는 두로, 시돈, 블레셋, 이스라엘, 에돔 등의 연명되어 있다. 아모스 2:1-3은타국 백성과 같이 한 불의한 행위-이 경우에는 에돔 왕에 대한 비인도적 행위-때문에 여호와의 예언자로부터 벌을 선언받은 기사이다.

 

아모스서의 이 인용으로부터 보건대, 당시 모압은 그리욧을 도성으로 하는 독립 왕국을 이루고 있던 것 같다. 열왕기하 14:25에는 당시의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Ⅱ세는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라고 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다시 모압을 지배한 것을 의미할 것이다.이사야 15:1-16:12에는 모압에 관한 가장 흥미있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모압 사람이 눈 앞에 닥쳐온 북쪽, 또는 동쪽으로부터의 침략에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을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위협적, 또는 실제적 침략이 무엇이었는가는 분명치 않으나, 이두 장을 만족하게 주해하기 위해 일어나는 여러 가지 곤란때문에 이것들로부터 역사적인 추측을 추출(抽出)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여로보암 Ⅱ세에 의한 요단 강 동쪽의 정복(BC 785-745)은 모압을 공포에 몰아넣었음이 틀림없으나, 실제는 정복하지는 않았다.모압은 수리아에 있어서 다른 소국과 마찬가지로 불가항적인 앗수르의 침략을 받지 않으면안되었다. 모압 왕 살라마누(Salamanu)는 유대 왕 아하스와 마찬가지로 BC 734년 디글랏빌레셀 Ⅳ세가 북이스라엘과 다메섹을 정복했을 때 그에게 공납했다. 사르곤(B.C.722 - 705)은 모압이 모반을 품고 있는 것을 보았으나, 그 후계자인 산헤립(BC705-681)은 게모시나답을 충성스러운 충신으로 보았다.

 

산헤립의 후계자 에살핫돈은 그의 건축사업 때문에 모압의 무쯔리(Mutsuri)로부터 헌납을 받았고, 또 아라비아인에대한 자위심(自衛心)은 모압 사람으로 하여금 아슐바니발(BC 668-626)에게도 같은충성을 다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모압은 앗수르의 주권을 승인한 것으로부터 거의 1세기 반동안 독립적 상태를 보전할 수 있어 번영했고, 앗수르 제국(BC 606)의 멸망에 따르는 제사건에는 그리 관계되지 않은 듯하다.

 

때로는 수리아에 있어서의 느부갓네살의 권세에 반항하는 모반에 가담하려고도 한 듯하지만(렘 27:3), 유대에 대한 일반적 태도는 적의를 품고 있었기 때문에 바벨론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었을 것이다(왕하 24:2,렘 9:26,48:1-47,겔 25:8-,습 2:8-).모압은 에돔과 마찬가지로 다년간의 대적 유대가 망한 것을 기뻐했으나, 바벨론과의 전쟁중 유대인 중에는 모압으로 피난 간 자도 있었다(렘 40:11).

 

이 적의는 결코 잊을 수 없고,또 유대에 있어서의 반감은 율법예언,시가서에도 나타나 있다(신 23:3,시 60:8,83:6,108:9,느 13:1,23,렘 48장).유대멸망후의모압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점차아라비아 제부족에 정복되어 마침내 그 땅은 나바사 아랍 영으로 되어 고대 모압인의 잔존자도 정복자 중에 흡수되어 버렸을 것이다.

 

(4) 모압의 종교:

메사 왕의 비문은 모압 사람의 신 그모스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잘 묘사하고 있다. 메사는 신 그모스의 아들이며, 그의 아버지가 가르호(Qarh oh, 디본)에 그모스산당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오므리가 모압을 멸시해서 그모스가 모압을 노엽게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그모스는 메사 때는 메드바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이스라엘의 갓 지파의 성읍 아다롯의 주민은 모두 그모스의 희생으로서 죽음을 당하여 메사에 의해 그모스에게 바쳐졌다.

 

또 느보는 그모스의 명령으로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으며, 그곳 남녀 노소 7만 명은 또 아시다르 그모스(Ashtar-Chemosh)를 위해 죽임을 당하였다. 이 복합 신명(複合神名)은 우가리트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 형인데, 이 `아시다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역시 우가리트 문서에는 'ttr로 나와 있으며, 신 에르와아세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서 신화에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왕이 모압에서 구출된 것은 이 그모스의 힘에 의해서이며, 그모스가 메사를 사용하여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이 그모스는 지하 세계의 군주인 네르갈(Nergal)의 이름으로서, BC 2000년대의 바벨론 문헌에 Kammus로 나와 있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즉, 이 그모스도, 아시다르 그모스도, 셈족의 신이며, 모압에만 있는 신의 이름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스라엘에서는 솔로몬이 모압의 신인 가증한 그모스를 위해 신전을 만들었다고 하여 책망받고 있다. 모압의 종교는 이스라엘의 여호와 종교에 대해서는 가나안 종교와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진노를 일으킬 부정한 것이었다(왕상 11:1-8).

 

 

가나안 사람:Canaanite

[히] ynI['n"K](kena'ani), !ynI[}n"K](kena'anim) [그] Kananivth"(Kananites) [영] Canaanite[상인]과 동의어(창 12:6-〉겔 16:29).

이스라엘 백성이 팔레스티나 지방에 정착하기 시작할무렵, 이미 거주하고 있던 몇 민족(족속)을 총칭한다(창12:6,24:3,37).

 

그 중에는 불레셋 사람이라든가, 베니게(페니키아) 사람도 포함되는 경우와(수 13:2) 직접으로 이스라엘 사람에게 정복된 6내지 7족속을 가리키는 경우, 또는 그 중의 하나를 가리키는 경우(출 3:8) 등이있어서, 퍽 막연한 호명이기도 하다.

 

가나안이라는 말은 [저지](평지) 또는 유명한 자색염료의 산지였기 때문에 [자주의 땅]이라는 뜻으로 말해지다가 팔레스티나 전역을 가리키게도되었다. 그들의 선조는 전 25세기경아라비아에서이주한 섬계민족인데, 같은 셈계의 이스라엘 사람이 가나안에 이주했을 무렵은 이미 상당히 고도의 문화수준에 달해 있었고, 반유목생활이었던 이스라엘 사람에 대하여 농경생활, 도시생활, 상업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 때문에 큰 곤란에 직면했는데 군사적으로는 어느정도 성공하여, 가나안에 정주하는기초를 얻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가나안 사람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고, 특히 농경생활의 섭취와 함께, 가나안의 바알예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이교화하여, 선지자들의심판(비판)의 대상으로 되었다.

 

창세기 9-10장에 의하면, 셈계어야 할 가나안의 선조는, 함의 아들로서 저주되어 있어,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에 대한 감정을 반영(反映)하고 있다.

 

* 가나안:Canaan(지명)

(Canaan) 「낮은 지방」

(1) 명칭과 지역:

가나안 사람의 조상의 이름으로서 창세기 9:18, 10:6에 이 @['n'K] (Kna`an) `가나안'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있다. 이 이름은 아마르나 문서(TheAmarna Lettess)와 봐스교이(Boghzky) 문서에 Ki-na-ah-ni, Ki-na-ah-na,Ki-na-ah-hi, Ki-na--a-an-hi, Ki-na-hi로 나와 있는 것과 비교할 수 있으나, 애굽, 알랄락(Alalakh) 문서에는 각각 Kjnnw, kn`n로 나와 있다. 누시(Nuzi) 점토판(粘土板)문서에서 Kinahhu는 자주 물감을 나타내는 말인데, 상술한 Knn는이 말로부터 된 말이며, 따라서 원래는 누시의 주된 언어였으며, 후르리어(Hurrian,hurri의 말)라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언어학적으로도 무리가 있다. 구약성경에는 kna'an(i)이 상인을 나타내는 별명으로 쓰이고 있는 예를 보는데(습 1:11,장사하는) 이 Kn'n 자체는 kinah-hu(자주 물감)을 나타내는 후르리어에서 온 말이 아니고, 오히려 `가나안'이라는 본래부터 이름이 있던 곳, 즉베니게나 우가리트(Ugaritie) 문서에서 볼 수 있는 두로,시돈,우가리트 등의 자주 물감의 산지로서 알려져 있던 이 지명 자체가 이것을 거래하는 상인의 대명사로도 쓰이게 되었으며,또 자주 물감을 나타내는 말로서 누시 따위로 후르리어화(語化) 되어 쓰이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가나안'과 `자주 물감'과의 관계는 이와 같이 깊은데, 희랍어로도 이것을 나타내고 있다. 는 `자주 물감'을 나타내는데, 선문자(線文字) B에는 이미 ponika로 나와있는 것과 비교할 수 있으며, 이것은 오래된 말이다. 그런데 희랍어로 `베니게'를 이 말에서 유래한<로 표시하고 있다.이 `베니게'야말로 이사야 23:11 등에서 보면 분명히 시돈^두로 등을 가리키고 있으며, 또 이 곳 주민을 `가나안 사람'이라 부르고 있다.

 

한편 창세기 12:5, 민수기 33:51에 `가나안'은요단 강 서쪽의 땅을 가리키고 있으며, 민수기 13:29, 14:25, 여호수아 11:3에는 동지중해 연안의 땅 내지는 평야를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구약성경에서 이 `가나안'이라는 땅은 경우에따라서 요단 강 서쪽의 지역 전체 중에서 상당히 한정된 지역에 대해 쓰이고 있는 말이라는것을 알 수 있다.

 

그에 관련하여 우가리트(Ugarit) 문서의 Kn'n도 마찬가지로 한정된 지역에 대해 쓰이고 있다. 그리고 후에 `가나안'이라는 명칭은 요단 협곡에, 다음에 요단 강서쪽 전체에 확대되었다.히브리인 거주지의 일반적 명칭으로 되었다(창 11:31,민 13:2). 이스라엘 사람의 정복 후의가나안 언어는 히브리어, 즉 하나님의 백성의 말이었다(사 19:18).

 

히브리인은 모세의 사후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가나안을 정복하였지만, 출진 계획에서는 길갈에 장막을 고정하게끔되어 있었다. 그 유적은 요단 저지(低地)의 여리고 동쪽에 있다(수 4:19,5:10).

 

여기서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아이와 기브온으로 올라갔다(수 7:3,8:1,3,10:10). 이 길갈은 전략상 많은이점이 있었다. 즉, 이 부근은 후방에 적이 없고, 물이 풍부하며, 요단 강 동쪽에 정주한 두지파 반으로부터 조달을 받을 수 있었고, 또 노획품 저장에도 안전하였다. 여기에는 회막(수6:24→9:23, 18:1, 22:19), 언약궤(수 3:17,4:11,7:6등), 제단(수 9:27→ 22:19, 28, 29), 요단 강 도하 기념으로서의 열 두 돌(수 4:20)이 있고, 또 제사장 엘르아살(수 14:1→16:6)과다른 제사장(수 6:5,12,8:33)들이 있었다.

 

여호수아는 여기서부터 가나안 공략의 요충인 여리고를 점령하고 즉시 서진하여 산으로 들어가 아이를 전멸시켰던 것이다. 아이는 길갈과서로 대하여 계곡의 산정에 있었으며, 거기서 적군이 진영으로 쳐내려 올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모세의 명령에 따라 에발 산에 제단을 쌓았다(수 8:30-35,신 27장).

 

여기에 기브온에서 대표자들이 나타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그들과 조약을체결한 것이 큰 잘못이었다. 이와 같이 확고한 거점을 얻었으므로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을 진행시켰지만, 이들 다섯 왕들은 동맹하여 대항했으므로 남부 토벌에서 그들과 접전하게되었다(수 10장).

 

결국 예루살렘왕은 기브온을 치기 위해 헤브론, 야르뭇, 라기스 및 에글론왕을 소집하였다. 여호수아는 조약을 맺은 기브온 사람들을 도와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가나안 다섯 왕은 벧호른을 지나 도망쳤지만, 여호수아는 그들을 추격하여 해변의 평원과 막게다를 공략하여 거기에 임시로 장막을 치고 평원에 있는 립나와 라기스를 점령하였다.

 

라기스에서는 원군인 게셀 왕도 격파하였다. 또 에글론을 점령하고 거기에 다시 일시적인 장막을 치고 헤브론을 점령했다. 헤브론에서 철군하여 산지인 드빌을 침으로써 기브온,가사,가데스바네아를 포함하는 전 지역을 토벌하고 여호수아는 길갈로 돌아왔다. 그가 태양에게명하여 머물러 서게 했던 것은 이 싸움에서였다(수 10:12-15).중부와 남부를 정복했으므로 여호수아는 북부 동맹과 싸우기 위해 블레셋 사람의 북쪽 작은 성을 무시하고 북상하여 인구가 많은 유력한 성읍을 치기로 작정했다(수 11장).

 

하솔왕이 이 땅의약소한 왕들의 우두머리였으나, 남쪽에 있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승리에 대한소문을 듣자, 그는 다른 왕들과 연합하여 여호수아를 분쇄하려고 하였다. 연합군은 북쪽의메롬 물가(湖畔)에 모였다. 여호수아는 그 부근에서 그들을 격파하고 패주자들을 서북쪽 시돈까지, 또 동쪽으로는 미스바 골짜기까지 추격하였다. 그리고 그는 되돌아서서 하솔 성읍을점령하고 이를 불사르고, 동맹을 맺었던 약소 왕국의 도성들을 점령했다(→수11:16-12:24).

 

가나안 사람의 세력은 이것으로 분쇄되었으나, 주민이 완전히 멸절되지는 않았다. 많은 주민이 남아 있었으며, 또 중요한 성읍들은 가나안 사람들의 수중에 남아있었다(수 11:13,15:63,16:10). 그리고 가장 심하게 파괴된 곳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숨어 있다가 이스라엘군이 철수하자(수 10:43) 그들은 돌아와 폐허된 성읍들을 재건하고 황폐된 들을 다시 갈아 일구었다.

 

후에 이스라엘 제족속이 각지에 산재했을 때 가나안 사람들의 저항이 각지에서 속발하였다(삿 1장→헤브론,인여호수아).가나안 정복은 시간이 오래 걸렸다(수 11:18,19). 즉, 출애굽기 제 2년에 척후병을 보내고서부터(→ 민 10:11,13:20,신 1:2) 토지 분할을 하려고 했을때 갈렙에게 헤브론의 재정복임무가 부여 되었는데, 이 때까지 45년간이었다(수 14:7,10).

 

척후병 파견으로부터 세렛 시내를 건널 때까지는 38년간이었다(신 2:14).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의 동쪽과 서쪽의 정복을위해 6, 7년 걸렸다. 여기서부터 동방의 땅 정복과 싯딤에서의 사건에 소비된 시간을 빼야할 것이다. 아론의 죽음은 출애굽 제 40년의 5월 1일이며(민 33:38), 요단 강 도강은 정월10일이었다. 그러면 시혼과 옥의 땅 정복과 싯딤에서의 사건은 약 8개월9일이되며,그기간 중 싯딤의 사건이 약 2개월을차지하고있다(신 1:3,4,수 4:19,신 34:8,수 2:22).

 

그러므로 서쪽 팔레스틴 정복에 소요된 연수는 5, 6년이 된다. 여호수아는 세 가지 정치적 실책을 했다. 즉, 기브온 사람과 조약을 체결한 것(수 9장),여부스사람을예루살렘에서 추방하지 않고 거주를 허락한 것(수 15:63), 블레셋 사람을 추방하지 않음으로써 바다에 이르기까지의 땅을 지배하지 못한 것 등이다. 이들 과실의 결과 유다와 시므온의 양 지파가 다른 이스라엘 사람으로부터 고립되어 버렸다. 그 고립의 결과는 중대한 것인데, 분명히 그 후의 역사 코오스에 영향을 주었다. 이스라엘 사람은 가나안 사람을 전멸시켜야만 했었다.

 

그것은하나님의 명령이었다(신 7:2-4). 하나님은 그것으로 가나안 사람의 사악(邪惡)을 벌하고(창 15:16,레 18:25,신 9:3,4,18:12), 또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더럽히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출 23:31-33,34:12-16). 이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공의의 그릇이었다.요단 강 서쪽의 정복지 분배는 일부는 길갈에서, 또 일부는 장막이 옮겨진 실로에서 행해졌다(수 14:1,2,6-18:1,2).

 

그것은 제사장 엘르아셀, 여호수아 및 10지파에서 뽑힌방백들에 의해 행해졌는데(수 17:4→ 민 34:17,18), 제비를 뽑아 정해졌다(수 18:6). 분배방법은 이미 제정되어 있었다. 즉, 큰 지파에는 많은 기업을 주고 누구에게 어디가 뽑히건 뽑힌 곳이 그의 소유로 된다는 것이다(민 26:52-56,33:54). 그러나 이 일은 그 경계를 정확히 한정하지 않고, 어떤 지방을 골라 제비에 따라 어느 지파가 그것을 소유할 것인가를 결정했을 것이다.

 

① 사사기 1:1의 물음의 형식 참조. ② 이 설은 민수기 33:54을 만족시킨다. ③ 여호수아 18:1-10을 참조.

 

거기서는 땅이 먼저 일곱 부분으로 나뉘어져 그 후 여호수아가 제부족을 위해 제비를 뽑았다.

 

④ 이 설은 또 여호수아 19:1 등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후의 분배에 있어서 두번째 제비가 시므온에게, 세번째는 스불론에게 뽑힌 것이 기술되어 있다.

 

⑤ 제지방은 마치 제비로 결정되지 않은 것처럼 순서 바르게 배당이 진행됨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을 긴밀히 구성하여 여기 저기 뛰지 않고 거주지가확정되었다.

 

⑥ 분명히 많은 것이 지도자나 감독자들의 사려(思慮)에 남겨졌다. 유다족의 주요 부분의 제비가 그들을 그 부근에 정주하는 것을 허용하건 안하건 갈렙은 헤브론을 가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야곱의 마지막 소원은 제비의 범위 안에서 정해졌을 것이나(창 49장), 그의 기업은틀림없이 조상의 소원에 가급적 가깝도록 조정되었다.

 

그러나 잘못도 있고 수정도 있었다. 분배를 끝맺기에 앞서(그것은 하루나 한 주일에 완료되지 않았지만) 유다족이받은 땅이 너무 많다고 보고했다. 그래서 과잉분은 아직 분배되지 않는 땅에 부가되었다. 이에 반하여 요셉의 아들들은 여호수아에게 그들의 땅을 너무 작다고 고하여 더 줄 것을 소청했다. 야곱의 소원에 맞도록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나란히 살게 되고, 그 때문에 제비를 따로따로 뽑지 않고 요셉의 아들들로서 합하여 뽑았다(수 16:1,4).

 

이리하여 백성은 긴밀히 짜여졌으며, 장막에 가장 가까운 지역에서부터 먼저 분배 되었다. 남부 구릉 지대는 레아의 네째 아들 유다에게, 중앙 산지는 라헬의 맏아들 요셉, 즉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중간에 있는 구릉 지대는 라헬의 둘째 아들 베냐민에게, 유다가 반환한 남부 구릉 지대의 잉여 부분은 레아의 둘째 아들 시므온에게, 중앙 산지의 북부 경계지는 레아의 여섯째 아들 스불론과 다섯째 아들 잇사갈에게, 인접 해안 지대는 레아의 여종의 둘째 아들에게, 잇사갈과 스불론의 북쪽 지역은 라헬의 여종의 둘째 아들 납달리에게 분배되었다.

 

유대의 잉여분의 나머지부분은 라헬의 여종의 맏아들 단에게, 레아의 장자 르우벤, 레아의 여종의 아들 갓과 라헬의자손 므낫세의 반지파는 요단 강 이동에 땅을 받았다. 레아의 아들 레위에게는 분배가 없었다(수 13장-19장).

 

(2)주민:

창세기 9:18, 10:6을 보면 가나안은 함의 아들이다. 따라서 `가나안 사람'이란 함족 계통이라고 구약성경은 생각하고 있다. 또 창세기 10:15 이하를 보면 가나안의 아들에는시돈, 헷, 여부스, 아모리, 기리가스, 히위, 일가, 신, 아르왓, 스말, 하맛 등이 있는데, 이것을보면 가나안은 애굽인과 형제이며, 또 힛타이트인(Hittites, Heth)의 조상으로 되어 있다. 인종ㆍ언어상으로 보더라도 힛타이트인(헷 사람)이 함족에서 나온 자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일이다.

 

창세기 23장에 나오는 `헷 족속'(힛타이트인)처럼, 구약성경에 있어서 힛타이트인은소아시아를 장악하고 있는 힛타이트 제국 본국 사람이 아니고, 애굽도 또한 이미 BC 2000년 기(期) 초에는 수리아에 그 세력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애굽의 이 기 `시누헤' 따위에서도발견된다. 또 BC 15세기의 아마르나 문서(The Amarna Letters)에서 이 시대에는 애굽이 팔레스틴 일대를 옛날처럼은 장악하고 있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 결정적인 패퇴(敗退)는 하지 않고 있다. 민수기 13:29, 여호수아 1:2-4를 보면 `힛타이트 사람'이란 실제로 어떠한 인종을 이 경우에 가리키고 있는지가 일단 문제이나, 성경의 기술에따라 말하면 유다 산지에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들은 요단 서쪽에 상당히 식민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힛타이트 사람이나 애굽 사람 등 인종적으로도, 그 언어상으로도, 가나안 사람과는 다른 사람들이 일찍부터 수리아나 팔레스틴 지역에식민하고 있어 상당히 셈족화 되어 있었다. 아마 이들 상황의 반영이 상술한 창세기의 계보의 기술로 되어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설이 있다. 우가리트(Ugarit) 문서가 보이듯이, 가나안은 일찍부터 이들 이종(異種) 민족 문화(에게의 것을 포함하여)에 의하여 영향을 받고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가나안의 주류로 되어있는 인종은 셈족이며, 그 언어는 순수한 것이 못된다고 할찌라도 여하튼 셈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결론적으로 가나안 주민이란, 가나안 지방에서 함의 자손과 합체(合體)한 사람과 부족은 모두 `가나안 사람'이라고 불리운다. 특히 함 자손의 하나를 가리킨다. 지리적으로 가나안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두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가나안 사람'이란 말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좁은 의미의 가나안 사람이란 해안, 또는 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창 15:21,수 9:1)이고, 넓은의미의 가나안 사람이란 창세기 10:15-19에 열거되어 있는 민족을 말한다.

 

가나안 사람은 그 죄 때문에 멸망의 운명에 있었지만(신 20:17),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전멸하라는 명령을 완수하지 못하여 대개의 경우 가나안 사람들로 하여금 조공을 바치게 함으로써만족하였다(삿 1:27-36). 솔로몬은 그들에게 강제 노동을 부과하였다(왕상 9:20,21). 끝으로 가나안 사람들은 상업에 종사하여 그 이름이 상인과 동의어로 되었다(사 23:8).

 

(3) 가나안의 언어:

가나안 사람에 대해서는 아마르나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전술했지만,가나안어는 셈어 중 북서 셈어 방언에 속한다. 이 문서에 의하면, 우가리트kinahhi(가난)에 포함되어 있으며, 베이루트에서 발견된 주화에는 베니게 사람이 자기의 토지를 Kn'n라고 말하고 있다.

 

또 BC 5세기의 카르타고의 베니게인도 자기들에 대해 역시 Kn'ny(가나안 사람)라고 부르고 있다. 또 이사야 19:18에는 히브리어를 `가나안 방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가나안 방언'이라는 것은 팔레스틴과 수리아 연안 지대의 오래된 방언군(方言群)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우가리트어가 가나안어인지, 그렇지 않으면 아모리 사람들의 방언인지 어떤지가 문제로 되는데, 원래 바벨론 사람이 말하는 Amurru는 서방의 나라를 나타내는말인데, 아모리어 자체가 반드시 꼭 같은 말이 아니라면 가나안어도, 아모리어도 엄밀하게는구별하기 어렵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가나안어 중 북방에서 언어학적 변화를 이루고, 더우기베니게어와 비교할 경우 아람어와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 우가리트어이다.

 

베니어를 중부 가나안어 또는 남가나안어로 하고, 우가리트어를 북가나안어로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이 때문이다.

 

(4) 역사:

최근의 고고학은 가나안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애굽인은 일찍이 BC2200-2000에 수리아, 팔레스틴 일대에 대한 정치적 지배를 시작하고 있다. 애굽의제 12왕조(BC 1990-1790경)의 소위 주술문서(execration texts)는 우리에게 셈어명(語名)을 애굽어의 자음으로 나타내 보여주고 있으나, 이것들은 이 시대의 팔레스틴과 수리아에 있어서 애굽의 힘과 그 관계를 말하고도 남음이 있다.

 

BC 15세기 경이 되자 이 땅에있어서 애굽의 힘이 약화되고 그 세력화의 팔레스틴과 수리아의 제국이 혼란하여 이미 애굽의 위세가 옛날 같지 않다는 것을 아마르나 문서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BC 14, 13세기의우가리트 문서는 이 이후 힛타이트 제국(帝國)의 힘이 수리아로 신장하고 있는 것을 가르치고, 애굽의 이야기 `웬 아몬'은 BC 11세기에는 벌써 가나안에 대한 애굽의 힘이 쇠진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애굽의 세력이 쇠퇴한 가나안으로 이동해 온 것이 이스라엘 민족이며,이 이후 그들이 정치적, 문화적 면에서 이 가나안을 이을 자로 된 것이다.

 

(5) 사회 구조:

가나안 사회의 구조에 대해서는 우가리트 및 알랄라크 왕실의 여러 가지 문서가 청동기 시대 말경의 실제 상황을 직접으로 꽤 자세히 말해주고 있으나, 양자 사이에는상당한 차이가 있다.

 

고대 셈족 중에는 두 가지 지배 형태가 있었는데, 그 하나는 카리스마적이라고 하는 것으로 개인의 능력이 위기에 부딪쳐 신적(神的)인 축복을 받아 권위를 갖고백성을 지도한다는 것인데, 구약성경의 사사와 같은 것이며, 아들은 이것을 세습하지 않는것이 원칙이다.

 

우가리트의 서사시 중에서 이전에 이와 같았던 것을 반영하고 있으나, 우가리트 문서 시대, 적어도 도시 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시대의 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왕은 세습하며, 상당히 정비된 관료 조직을 가지고 많은 성읍과 촌락 공동체를 지배하고, 그 하나하나에 조공,부역, 각종 세금을 부과하고, 농목,수공업,상업에 걸쳐 통제 지배를 하고 있다.우가리트는 육지와 바다를 통한 상업 무역을 세계 각 지역에서 활약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으므로 다른 가나안 제성읍과는 사회 구조상 상당히 상이한 점을 보이고 있다.

 

각 왕실은 상당한 노예를 소유하고, 군사,상업,농목,수공업을 함에 있어서 전문 기술의 길드가각각 형성되어 있어 왕은 이것들을 통하여 지배하고 있었다. 토지도 원칙적으로 모두 왕의것이며, 공신(功臣)에게 세습지를 상으로 주어도 왕은 자기의 의지로 이것을 언제든지 회수하여 마음에 드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 있었다. 소위 동양적인 전체 군주적 왕권 본연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는 이보다도 300년 후인데, 그 왕조와 그 관직등에는 이들 가나안의 도시 국가의 것이 많이 반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토지의 세습권에 대해서는 아합 왕의 나봇의 포도밭에 대한 태도를보면(왕상 21장)이스라엘왕의토지에 대한 지배는 가나안 왕처럼 절대적이 아니었음을 알수 있다.

 

(6) 문학과 종교:

최근까지는 가나안의 문학과 종교에 대해 직접적인 자료에서는 이것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1929년 프랑스대(隊)에 의하여 북수리아 연안의 라스 샴라(Ras Shamra)에서의 발굴 이래 우가리트 왕국의 제문서(諸文書)가 밝혀지고 있다.

 

이것에 의하여 BC 2000년 전의 가나안 문학과 종교의 상황을 어느 정도 분명히 하게 되었다. 이가나안 문학과 종교 및 언어가 구약성경과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의 발견은, 개개의 문제에대해서도 구약 연구에 획기적인 의의를 주고 있다. 상술한 라스 샴라 종교 서사시의 문서에서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 의식과 그 저급한 품성에 대한 지식이 또한 밝혀졌다.

 

가나안 사람의 두 큰 신전 사이에 있던 수 천 개의 점토판(BC 15-14세기)에 의해 가나안 사람의 판테온(그들의 신을 모시는 전)의 형편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고대에 있어서 가나안 사람의 풍산(豊産)의 제사는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더 상스럽고 비열하였다. 그 때문에 히브리인의 강한 유일신 신앙도 항상 부도덕한 우상신, 불결한 여신, 뱀, 비둘기, 황소의 우상, 기타 더러운 자연물 숭배에 오염될 위험성이 다분히 있었다.

 

판테온의 주신(主神) 엘은 탐욕,비천,난폭,범죄의 영웅이었다. 그는 피비린내 나는 폭군이며 부친의 왕위를 빼앗고,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고, 또 딸의 목을 베었다. 이와 같은 폭행에도 불구하고 엘은 `해(年)의 아버지' `인간의 아버지'라고 불리워 제신의 조상으로 되었다.

 

가나안 사람이 일반적으로 숭배한바알은 엘의 아들인데, 가나안 사람의 판테온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뇌신(雷神)인데, 그목소리는 폭풍우 때 천지에 반향하였다. 라스 샴랴의 돌 비석에는 바른손은 창을 휘두르고,왼손에는 양식화(樣式化, 예술상의 표현과 수법 등으로)된 뇌전(雷電)을 가진 바알이 묘사되어 있다. → 바알. 아나스, 아스다롯, 아세라의 세 여신은 모두 성욕과 전쟁의파트론(Patron)이며, 동시에 매춘부의 우상이기도 하였다.

 

그 밖의 가나안의 우상에는 모토(죽음), 레셉(惡疫), 슐만(건강), 고샬(예술) 등이 있다. 모두 부도덕하고 부패와 더러움이 심한 것이며, 그 우상 신자의 생활을 파괴로 몰고갈 위험성이 다분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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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해

출애굽기 15장 1~21절 말씀 -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 큰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리는 자를 엎으시니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초개같이 사르니이다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대적의 말이 내가 쫓아 미쳐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인하여 내 마음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주께서 주의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흉용한 물에

납같이 잠겼나이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 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이 함께 바다에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바닷물로 그들 위에 돌이켜 흐르게 하셨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서 육지로 행한지라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

 

 

이에 대한 성경 주석은,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의 찬송 출애굽기 15:1-21

 

14장에는 애굽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이제 본문에서 우리는 그 승리가 어떻게 찬양되었는가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분명히 모세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이 노래를 지었을 것이며, 그것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해 주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곳을 떠나기 전 그들은 해안에 밀려온 애굽인의 시체를 보며 그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기쁨과 감사를 노래를 표현했던 것이다.

 

1. 모세의 찬송(1-19)

(1) 우리는 이 노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1)이 노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의 노래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노래이다.

2)이 노래는 아주 아름다운 곡조와 고상하고 장중한 문체, 그리고 생동적이고 적절한 상징적 표현들을 사용함으로써 전체적으로 매우 깊은 감동을 준다.

3)이 노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의 이름을 높이며 오직 그에게만 찬양을 드리는 거룩한 노래이다.

 

(2) 이 노래를 통하여 모세가 주로 목적한 바는 무엇이었는가.

1)모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승리의 개선가를 바쳤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의도였다(1절).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다음과 같은 분으로 즐거워했다.

①그들 자신의 하나님으로 즐거워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힘'이요 '노래'요 '구원'으로 즐거워했다(2절).

②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으로 즐거워했다.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2절). 그들은 이 사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무가치함과 하나님을 진노케 했던 사실을 인식하신 일들이 그들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비, 곧 그들의 조상들로 인한 것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신 4:37).

③무한한 능력의 하나님으로 즐거워했다.

④당할 자 없고 비교될 수 없이 완전하신 하나님으로 즐거워했다(11절). 먼저 이 사실은 보다 일반적으로 표현되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이니까(11절). 애굽은 많은 신들을 섬기는 나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은 그것들보다 훨씬 더 강하셨으므로 그것들을 모두 찍어 버리셨다(신 32:23-39). 또한 이 사실은 보다 특별하게 표현되었다.

 

첫째,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그의 거룩하심은 곧 그의 영광이시다. 하나님은 자비가 풍성하시다-이것이 그의 보화요, '거룩함에 영광스러우심'인 것이다-이것은 그의 영예이다.

 

둘째,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찬양의 제목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기쁨이 되지만 하나님의 대적들에게는 두렵고 매우 떨리는 것이 된다(시 66:1-3).

 

셋째,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그의 기적은 자연의 힘과 일상적인 법칙을 초월하므로 모든 자들에게 기이한 일인 것이다. 이 기적들은 권능의 기적이며 은혜의 기적이다. 우리는 이 은혜와 권능 안에서 겸손히 하나님께 경배를 드려야 한다.

 

2)모세는 그들이 지금 개가를 부르고 있는 그 구원의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노래는 그 은총에 대한 그들의 감사를 표현하고 고취시키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후세까지 이 경이적인 일을 영구히 기념하고 보존시키려는 의도에서 지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① 대적의 멸망 : 바닷물이 갈라졌다. 파도가 언덕같이 일어서고(8절),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10절). 이로 말미암아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는 수장되고 말았다. 거센 물결이 교만한 죄인들을 덮쳐 버린 것이다. 그들은 죄로 말미암아 돌과 같이 완악해졌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돌처럼 가라앉게 된 것이다.

 

② 이스라엘의 보호와 안내(13절) :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을 뿐 아니라 홍해에서의 여러 가지 위험 속에서도 그들을 살려내셨다(19절).

 

3)모세는 그들을 위하여 나타나신 하나님의 이 놀라운 출현을 강조하려고 노력한다.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해 주셨으므로, 이제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성막을 세우는 일에 어떤 대가나 노력도 아끼지 말 것을 결심해야 했으며 그리고 그들은 그 성막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그렇게 영광스럽게 시작된 그 구원의 행복한 결과에 대하여 이 시인의 확신은 너무나 컸으므로 그는 벌써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처럼 노래하고 있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주의 성결한 처소로 들어가게 하시나이다(13절).

하나님의 이 위대하신 구원을 통해 이스라엘 자손들은 두 가지의 위로를 받았다.

첫째, 이 구원은 그들의 대적들을 떨게 하시고 그들을 아주 낙담케 만드신 하나님의 권능의 실례였다(14-16절). 이 구원으로 말미암아 에돔 족속이 그들을 두려워하게 되었고(신 2:4), 모압 족속도 그러했으며(민22:3) 가나안 족속 또한(수 2:9, 10:5,1)마찬가지였다.

 

둘째, 이 구원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의 완전한 자비를 베푸시는 은혜가 시작되었음을 나타낸다. 둘째, 이 구원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의 완전한 자비를 베푸시는 은혜가 시작되었음을 나타낸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17절).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의 무가치함과 그들을 구원하는 데 가로놓인 난관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다면 분명히 그는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끝으로 이 기적의 역사로부터 그들이 용기를 얻을 수 있었던 큰 근거는 '여호와의 다스림이 영원 무궁하시다'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다스릴 것이요 그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라는 사실이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 모두에게는 말할 수 없는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2. 이 노래가 장엄하게 불림(20,21)

모세는 그 시를 지어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주었고 미리암은 그것을 이스라엘 여자들에게 주었다. 위대한 승리들은 이스라엘의 딸들에 의해 늘 찬양되어지곤 하였는데(삼상 18:6,7) 이번도 그와 같은 경우이다.

(출처 : '출애굽기 15장이요~' - 네이버 지식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