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선교사 · 신앙偉人/♣ 호남 지역의 선교사

★◇ 호남지역 선교의 위대한 공헌자 유진 벨(裴裕祉)

영국신사77 2009. 6. 8. 12:34

  ◇ 호남지역 선교의 위대한 공헌자 유진 벨(Bell, Eugene, 裴裕祉, 1868-1925, 57세) 

 1868년 4월 11일 켄터키주 스코트 선교구에서 출생했다. 1891년 루이스빌 센트럴 대학을 졸업하고, 1894년 캔터키 신학대학을 졸업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1895년 4월 9일[27세] 부인과 함께 내한했다.

 1908년 전남 광주에 있는 그의 집 사랑채에서 3명의 여학생을 모아놓고 학교를 시작했다. 이 학교가 광주에 있는 오늘의 수피아여학교이며, 남학생을 모아 공부를 가르친 곳은 숭일학교로 발전했다.

 광주 기독병원 설립에도 산파역을 담당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와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대 총회장(1914), 전라노회 창립 부회장(1911) 등으로 활동했다.

 그가 설립했거나 시무한 교회는 목포에서 양동교회(1898)와 광주에서 구소리(九巢里,1899), 송정리(1901), 북문내(1904), 향사리(1908), 일곡(1909), 월성리(1916), 금당리(1917)교회 등이 있다. 그리고 담양 무정(1900) 및 담양읍교회, 해남 우수영(1902) 및 백호(1903)교회, 함평 영흥교회(1903), 장성 소룡(1905) 및 장성읍교회(1912), 나주 상촌(1907)교회, 삼도리(1915) 및, 동수리교회(1922), 화순 백암리교회(1920) 등이 있다.(자료: 조선예수교장로교회 사기)

 그는 호남지방 선교에 헌신하다가, 지나친 격무로 건강이 악화되어 1925년 9월 28일 57세로 별세하여 광주 양림동 묘역에 안장되었다.

 

 이곳에는 1904년 재혼하고, 제암리 교회 학살 현장 진상 조사 후 광주로 귀향하다가 병점 건널목에서 열차와 자동차 충돌사고로 1919년 3월 별세한 마가렛트(Bell Margarlet W.) 두 번째 부인도 함께 안장되었다.

 E. 벨의 딸 샤롯은 성장하여 린턴(Linton, W. A., 仁敦)과 결혼하고, 호남지역 선교사로 40여년 활동했으며, 그 후손들이 유진벨 재단을 설립, 운영 중에 있다.
 

 

 

 

 

                 목포·광주지방 초대 선교사로 헌신한 벨(Bell) 부부

                                                                                                

 

 

 양화진 제1묘역에는 전남지역 초기 선교사로 목포지방에서 활동한 최초의 여성 선교사인, 샤롯 위더스픈 벨(1867-1901) 묘지가 있다.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로 헌신적으로 봉사하다가 34세의 젊은 나이로 양화진에 안장되었으며, 호남지역에서 위대한 선교 업적을 이룩한 유진 벨(Eugene Bell, 1868-1925) 선교사의 첫번째 부인이기도 하다.

                ◇ 미국 남장로회 샤롯 위더스픈 벨
                     (Bell, Charlotte Ingram Witherspoon) 선교사


 1867년 5월 13일 미국 켄터키주(Louisville)에서 신학대학장의 딸로 출생했다.

  1884년 17세에 유진 벨과 결혼했고,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로 1893년 임명되었다. 출발이 지연되어 1895년 2월 12일 샌프란시스코 항을 떠나 1895년 4월 9일 긴 여행 끝에 서울에 도착했다.

 

 남편과 서울에서 얼마동안 활동하다가 호남지역으로 배치되어 1898년 목포로 옮겼다. 자녀로는 1896년 5월 27일 아들 헨리(Henry)를 낳고, 딸 샤롯(Charlotte)은 1899년 1월 6일 낳아 양육했다.

 선교 지역이 목포로 변경됨에 따라 우선 마을의 소녀들을 대상으로 가정학교를 시작했지만, 주부 선교사로서 살림살이에 어려움이 컸다. 예를 들면 서울에서 함께 일하던 유모를 동반하지 못하여 새 유모를 맞는 과정의 어려움, 집안 일을 돌보는 시골 하인들이 서구 문명에 익숙하지 못한 문화와 언어의 차이에서 겪는 어려움 등이었다.

 더욱이 선교사 사택 건축공사가 한참 진행중인 상태에서, 한편에는 총각 선교사 오웬(Clement C. Owen)이, 그리고 다른 방에는 여성 선교사 스테레퍼(Straeffer)가 살았으며, 또한 어학 선생까지 동거하였으니 집안을 꾸려가기란 참으로 벅찬 일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남편 유진 벨 목사는 시골의 전도여행과 선교회 활동 등으로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아 심리적 갈등이 있었다.

 

 당시 처했던 상황과 마음가짐에 대하여 그의 여동생에게 1899년 2월 보낸 편지내용은 이러했다.

  “나는 남편이 선교사업을 잘 할 수 있도록 가사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힘쓰고 있다. 남편을 위하여 가정을 돌보고, 아이들을 기르고, 함께 사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앞으로 몇 년 동안 나의 선교사역이 될 것이다. 나는 이 모든 어려운 일을 해낼 것 같지 않으나 해야만 한다. 나는 언제나 향수에 젖지만, 한국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믿는다.”

 결국 그는 심장병을 얻어 치료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일년이 넘도록 외롭게 고생하며 지내다가, 1901년 4월 12일 전도 여행 중 목포에서 별세하고 말았다. 이때에도 남편 유진 벨은 전주(全州) 여행 중에 있었다. 언더우드 목사의 집례로 장례식을 치르고, 양화진 제1묘역(바-13)에 안장되었다.

 남편은 장례식을 치른 뒤 서둘러 목포로 내려가 두 자녀를 데리고 귀국했다가, 1902년 12월 말 목포로 다시 돌아와 선교사업을 계속했다.

 

  ‘샤롯기념예배당’은 1903년 6월 28일 목포에서 헌당되었다.(자료:양림교회사).

 

  양화진 묘비는 2002년 다시 건립되었다. 

 

 


                                                                                                                                                      <양화진 선교회>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선교문화신문 기자 2004-12-06 (129 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