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선교사 · 신앙偉人/♣ 호남 지역의 선교사

★기전학교장과 불신자 주일학교 설립자 랭킨(Rankin,羅恩希))

영국신사77 2009. 6. 8. 12:32

           기전학교장과 불신자 주일학교 설립자  랭킨(1879-1911, 32세)


                                                                                           
신호철 장로(양화진선교회장)

 교육 선교사로 헌신하다가 이 땅에 묻힌 처녀선교사가 있다. 넬리 B. 랭킨(Rankin, Nellie Beckwith 한국명: 羅恩希)은 전주기전여학교 교장과 불신자 가정의 어린이를 위한 한국 최초의 주일학교를 세웠다.

 

 그는 1879년 12월 25일 미국 조지아 주 서배너(Savannah)에서 장로의 딸로 출생하여 애그니스 스콧(Agnes Scott)대학을 졸업하고,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여 호놀루루와 고베를 경유하여 1907년 2월 13일[28세] 내한하였다.  

                                여성 교육과 전도에 헌신한 랭킨 선교사
 1900년 4월 24일 테이트(Tate, Mattie)가 전주에서 6명의 소녀를 모아 자기 집에서 여학교를 시작하고, 1904년 전킨(Junkin)부인이 교육을 담당하다가, 1907년 2월 랭킨이 이를 계승하여 기전여학교 터전이 마련되었다.

 

 랭킨은 1907년 2월 20일 어머니에게 쓴 첫 편지에서 한국인들이 보여준 환영에 정말 감동했으며, “우리 소녀들을 가르칠 선생님을 보내 달라고 오래 동안 기도해 왔는데, 당신을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라는 말에는 가슴 뭉클 했다고 했다.  

 그는 여학교 건립을 위하여 새벽 6시에 일어나 저녁까지 참으로 바쁘게 활동했으며, 한순간도 한국에 온 것을 후회 해 본적이 없고 한국에서 계속 살려고 하기 때문에 “제 무덤에 꽃을 심을 기회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라는 편지(1908.10.20)를 가족에게 보냈다.


 

 그가 여학교 건립을 얼마나 열망했는지 1909년 2월 8일 동생 윌(Will)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진정으로 가장 원하는 것은 여학교를 세우는 일이며, 이곳 소녀들이 얼마나 배우기를 원하고, 이들의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를 것이다. 휴스톤(Huston)이 보낸 2,500$로 겨울이 가는대로 학교를 지을 계획이며, 우리는 여리고(Jericho)성을 행진하여 마침내 그 성이 무너지고 있다”고 했다.

 

 결국 1910년 10월 3일 “전킨긔렴여�학교(紀全)” 건물이 준공되었으며, 초등학교 4학년 이상을 고등과 과정에 편입시키고, 성경· 지리· 산수· 생리학 등을 가르쳤다. 이때 기숙사에  27명 학생이 수용되고, 결혼한 여학생도 14명 있었다.  

  한편 그는 서문교회에서 소녀 주일학교를 개설하고 어린이를 위한 복음 전도에 힘썼다.

 

  1908년 4월에는 주일학교가 성장하여 거의 400명이 출석했다.

 

  1910년[31세] 불신자 가정의 어린이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다니엘(Daniel)의료선교사와 협력하여 한국 최초의 주일학교를 세웠다.

                                        한국을 사랑한 랭킨의 삶과 죽음
 그는 한국을 지극히 사랑한 선교사였다. 한국이 일본에 합병되는 것을 매우 슬퍼했고, 일본이 취한 방법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다.

 

 “한국은 개화를 너무 늦게 했다. 일본에 합병 될 것이라는 포고령에 한국인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불쌍한 민족들! 한국인들은 자기 땅을 가지고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일본인은 지구상에 가장 파렴치한 민족이다. 하나님! 가엾은 한국인을 불쌍히 보소서.”라고 기도했다.

 

 1910년 8월 일본을 방문했을 때, 한․일 합방 절차가 끝났다는 신문을 보고 울 뻔 했다고 그의 심정을 표현했다. 한국인들은 겸손과 예의범절에서 일본인보다 훨씬 앞서고 있다고 칭찬했다.

 그는 한국 어린이를 딸로 입양하기도 했다. 한국 어린이들이 인형과 장난감이 없는 것을 가엾게 여기다가, 1907년 8월 2일 어린아이들이 장남 감을 가지고 놀며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하고 감격했다.

 그는 한국의 전원(田園)생활을 즐겼다. 정원과 텃밭에 꽃과 딸기, 토마토와 고추, 그리고 다른 농작물도 심고 가꾸었다. 제비꽃과 복숭아꽃을 사랑스럽게 여겼고, 포도넝쿨에 포도가 가득 달려있는 모습도 좋아했다. 말 타기를 좋아하여 걸어서 하루가 넘는 119km(74마일)의 거리를 단숨에 달렸다는 기록도 있다. 한국에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한국어를 배우는 일이었다. 문법이 제일 어렵고, 존대어와 평어를 구별하여 사용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그는 선교활동 중 1911년 8월 13일 오전 4시, 32세로 급성 맹장염으로 별세하여, 당일 오후 늦게 장례식을 거행하고 전주 선교사묘지에 안장되었다. 담당의사 패터슨(Patterson)과 다니엘(Daniel)은 맹장염으로 진단했으나, 수술 장비의 열악 등으로 즉시 수술을 꺼린 것이 그를 죽게 했다고 후회했다.

 랭킨의 죽음은 지속적으로 성장하던 교육선교 사업에 크나큰 손실을 입혔다. 그는 운명하기 전  
“내가 한국에서 일 하면서 가졌던 즐거움을 생각하면 내 목숨을 기꺼이 몇 번이고 바치겠다(I would give my life many times for the sake of the joy have had in the work here)”라는 어록을 남겼다.

 

 자료와 고증에 도움주신 전주기전여고 김연태 교장께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