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선교사 · 신앙偉人/♣ 호남 지역의 선교사

예수병원 설립자 잉골드와 78교회를 개척한 테이트 부부

영국신사77 2009. 6. 8. 12:30

             예수병원 설립자 잉골드와 78교회를 개척한 테이트 부부


                                                                                                       신호철 장로(양화진선교회장)

 전주 선교사 묘지에는 미국 남장로회 개척 선교사 테이트(Tate)와 잉골드(Ingold)부부의 딸(Tate, Baby) 묘가 있다. 1910년 9월 15일 출생하여 당일 사망했다. 어머니 잉골드는 “나는 9월 15일 여자 아이를 사산했다. 그것이 우리에게 마음 아프고 비통하며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원했던 작은 생명을 잃어버렸다.”고 슬픈 사연을 일기로 썼다. 



                          33년간 78교회를 개척한 테이트(1862-1929, 67세) 선교사
 테이트(Lewis B. Tate, 한국명: 崔義德)는 1862년 9월 28일 미주리 주에서 출생하여 폴던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다가, 선교 사역을 위하여 시카고의 맥코믹 신학교를 29세에 졸업하고, 1892년 11월 3일 미국 남장로회 7인 개척 선교사 중 1인으로 내한했다.

 1893년 1월 28일 선교사 공의회가 처음 조직되고, 남장로회는 호남지역을 담당하면서 그해 9월과 11월에 두 차례 전주를 답사했다. 테이트의 첫 여행이 선교 가능성 타진을 위한  답사라면, 두 번째 방문은 호남지방 선교의 정착을 위한 것이었다. 이를 토대로 그해 12월 전주선교부가 설치되었다.

 

 그 후 1894년 3월 19일 테이트는 서울에서 여동생 매티(Mattie Samuel, 한국명: 崔馬太)와 함께, 말과 가마를 타고 3월 24일 전주에 도착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선교 개시 3개월 만에 동학혁명으로 서울로 돌아오게 되어 선교활동은 일시 중단되었다.

 1895년 크리스마스 주간에 테이트 남매는 다시 서울을 떠나, 전주의 초가집 두 채에서 선교활동을 재개(再開)했다. 테이트의 집은 2개의 온돌방으로 하나는 서재로, 다른 하나는 침실로 사용되었다.

 

 1897년 테이트와 레이놀즈는 1,500$씩 드려 이국풍 가옥 두 채를 새로 지었지만, 왕실(이태조 조부)의 사적지여서 새로운 선교지(화산동)로 이전해야했다.  

 1908년 테이트는 선교 보고서에서 “나는 전도하거나 책을 팔 때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어학선생과 성서공회 매서인을 동반하고, 두 명의 짐꾼이 따른다. 낮에는 마을을 돌며 사람들을 모아 설교하고 성서와 소책자를 판다. 저녁에는 예배하고 대화한다. 현재 세 곳에 정기 모임 장소가 있으며, 평균 150명이 모이고 30명의 세례 교인이 있다.”고했다.

 

 1909년에는 “한 해 동안 1,190명에게 문답하고 316명에게 세례 하였으며, 400명의 학습교인이 등록하고, 1,203명이 성찬에 참여했다”고 선교본부에 보고했다.

 그는 교회법의 권위자로서 회무처리에 아주 능숙했고, 한국 선교 33년간 78개 교회를 설립했다는 기록이 있다. 선교사 공의회장(1897)과 전라 노회장(1913)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1925년 귀국하였으며, 플로리다에서 낚시 하다가 심장 마비로 귀국 4년 후인 1929년 2월 9일, 67세로 별세하여  프로스트프루프(Frostproof) 실버 힐 묘지에 안장되었다. 

 

                         전주예수병원 설립자 잉골드(1867-1962, 95세) 선교사
 마티 잉골드(Mattie Ingold)는 1867년 5월 31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르노아에서 출생하여 윈트롭(Winthrop)대학을 졸업하고, 의료선교사 되기를 결심하여 1896년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전례 없는 2개의 금메달을 받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1897년 9월 15일 내한하여 같은 해 11월 3일 전주에 도착, 은송리 초가집에 부녀자와 어린이를 위한 진료소를 설치했다. 개소 첫날에 6명을, 첫 달에 100명 정도를 진료하였다. 그의 의술(醫術)은 훌륭해서, 기초 위생과 청결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환자를 완치하였으며,  침을 놓았던 자리의 고름을 제거하고 비누와 물로 충분히 씻어내는 것만으로도 진료의 효과가 있었다. 종기의 절개, 백내장 제거, 흉터의 수술과 화상 등을 치료했다.
그 후 이 진료소는 새 선교부지로 이전되고, 1902년 남편의 노고로 예수병원이 건립되었다.

 잉골드는 진료 중에 복음을 전하며, “소아 요리 문답”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한국 어린이들이 암송하는 책이 되었다. 1903년 전킨의 진료를 위하여 군산에서 활동한 일이 있으며, 1904년 5월 안식년 휴가로 전주의 의료선교사업은 일시 중단되었다.

 

  1905년 9월 테이트(Lewis B. Tate)와 8년의 열애 끝에 결혼하였으며, 결혼 후에는 남편과 더불어 농촌선교에 진력하는 한편,  진료소 책임을 사임하고 부녀자 성경교육에 치중하였다.

 한편 그는 1905년 딸기(Strawberry) 종자(Dewey품종)를 처음 한국에 들여와, 예수병원 근처인 “화산동”을 딸기의 본고장으로 정착시켜 전국에 보급했다. 이 근거는 “딸기는 한국의 토종(Native)이 아니며, 잉골드(Mrs. Tate)가 1905년 50쪽을 들여와 전주 뿐 아니라 전국에 확산 보급했다”라는 랭킨(Rankin, Nellie B.)의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1925년 귀국하여 ‘플로리다’에 정착하고, 1962년 10월 26일 별세하여 남편 묘 곁에 안장되었다. 잉골드의 고증에 도움을 준 김천식 역사사료실장(예수병원)께 감사한다.


 

                                                                                                         by:송광우 http://cafe.daum.net/sumgi2/ELEp/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