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선교사 · 신앙偉人/♣ 호남 지역의 선교사

★ 유진 벨과 린튼가문의 행보

영국신사77 2009. 6. 8. 12:33

                                      유진벨 재단의 뿌리를 찾아서

                                                                 유진 벨과 린튼가문의 행보

                    
강희정 (rivernwill)

 

▲ 유진 벨 선교사의 모습
ⓒ 유진벨 재단

 유진 벨(Eugene Bell, 1868-1925)은 구한말에 미국의 남장로교에서 한국에 파송되었던 선교사이다. 유진 벨 선교사의 외증손인 스티브 린튼(Stephen W. Linton) 박사가 1995년 유진벨재단을 설립하고, 이후 대북 의료 지원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어, 이제 '유진 벨'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는 않다.

 100여 년 전 유진 벨 선교사가 한국 땅에 들어와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며 교육과 의료 사업을 벌인 이래, 그의 한국 사랑은 자손들에게 이어져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4대째 이어지고 있는 유진 벨 가문의 한국 사랑은 많은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감동을 전해 준다.

유진 벨 선교사는 첫번째 아내 로티 위더스픈(Lottie Witherspoon Bell, 1867-1901)과 함께 1895년 4월[27세] 한국에 도착했다. 당시 한국에는 미국의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선교사들로서 1884년에 입국한 알렌(Horace N.Allen, 1858-1932)과 1885년에 입국한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 등이 활동하고 있었고, 이들은 서울 정동을 중심으로 의료 및 교육 사업을 하면서 복음 전도 활동을 펴고 있었다.

▲ 유진벨은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된 선교사로, 1895년에 한국에 들어와 당시 가난과 일제의 억압으로 고통당하던 조선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였다. 위 사진은 그가 목회 사역하던 중에 찍은 사진으로, 오른쪽 말 위에 탄 사람이 유진 벨 선교사이다.
ⓒ 유진벨 재단


 이때 선교사들은 중복을 피해 지역을 나누어 선교 활동을 벌였다. 전라도 선교는 미국의 남장로교 한국선교회에 맡겨졌다. 이에 따라 유진 벨 선교사는 광주를 비롯한 전라남도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유진 벨 선교사는 목포와 광주 여러 곳에 교회들을 세우고 당시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긴 채 도탄에 빠진 조선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유진 벨 선교사는 교육과 의료 사역에도 중점을 두어 목포에 정명학교와 영흥학교를 세웠고, 광주에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를 세웠으며, 광주에 최초의 종합병원인 광주기독병원(현 제중병원)을 세웠다.

 유진 벨 선교사가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던 도중, 그의 아내 로티 위더스픈이 헨리와 샬롯 두 자녀를 낳고 1901년에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로티 위더스픈은 심장병에 걸렸으나, 치료도 받지 못하고 고생하다가 남편이 전도 여행하는 중에 홀로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묻혔다. 선교 사역 초창기에 당한 이런 시련에도 불구하고, 유진 벨 선교사는 한국 땅에서 선교 사업을 계속해 나갔다.


▲ 유진 벨 선교사는 나주, 목포, 광주 지역 선교에 힘을 쏟아 당시 호남 지역에 여러 교회가 세워지고 기독교 신자들이 많이 늘어났다. 그는 '호남 신학의 선구자'로 불리기도 한다. 유진벨 선교사는 마차를 타고 먼 지역에까지 전도 여행을 다녔다.
ⓒ 유진벨 재단


 유진 벨은 1904년 마가렛 벨(Margarlet W. Bell)과 재혼했으나, 마가렛 벨은 1919년 3월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을 조사하고 광주로 돌아오다가 병점역에서 열차와 자동차가 충돌하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후 유진 벨은 호남 지방 선교에 헌신하다가 격무로 건강이 악화되어, 1925년 9월 28일 57세로 별세하여 광주 양림동 묘역에 안장되었다.


                                   유진 벨의 딸 샬롯 벨, 윌리엄 린튼과 결혼
 유진 벨의 딸 샬롯 벨(Charlotte Bell)은 로티 위더스픈의 사후 미국으로 보내져, 성장기를 미국에서 보내게 되었다. 샬롯은 성인이 되어 아버지를 찾아 한국을 방문했고, 선교를 위해 군산에 도착했던 윌리엄 린튼(William A. Linton, 1891~1960)을 만난다. 윌리엄 린튼은 샬롯 벨과 결혼한 후, 전주 기전여고, 전주 신흥고 등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의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미국의 남장로교는 교육과 의료 사역에 중점을 두었고 선교지 내정 간섭이나 문화 충돌은 적극 피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에는 철저하게 반대하였다. 미국의 북장로교가 신사참배를 그리 문제시하지 않았던 것과는 크게 달랐다.

 

 1937년 윌리엄 린튼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강제 출국을 당하였고, 그가 교장으로 재직하였던 전주 신흥고를 비롯하여 미국 남장로교가 세운 학교들은 모두 폐교 조치를 당하였다.

▲ 샬롯 벨과 결혼한 윌리엄 린튼은 교육 사업에 주력하여 전주 기전여고와 전주 신흥고에서 교장으로 재직했다. 신흥고에 재직하던 중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미국으로 추방당하기도 하였다. 샬롯 벨과 윌리엄 린튼의 결혼으로 두 가문의 연합 사역이 이루어진다.
ⓒ 유진벨 재단


 해방이 되어 다시 한국을 찾은 윌리엄 린튼은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젊은 지도자 양성'이라고 생각하여, 1956년 한남대학교(HNU)의 전신인 대전대학을 설립하였다. 한남대학교 외에도 윌리엄 린튼 목사 부부는 40여년의 사역 기간 동안 군산, 전주, 목포, 광주, 대전 등에 여러 학교를 세웠다. 

                                       휴 린튼이 대를 이어 선교
 유진 벨로부터 시작되어 윌리엄 린튼 가문으로 이어진 한국 선교의 사역은 윌리엄 린튼과 샬롯 린튼의 세째 아들인 휴 린튼(Hugh M. Linton, 1926-1984)이 이어 받았다. 휴 린튼은 1926년 군산에서 태어났으나, 신사참배 거부로 가족이 강제 출국 당한 뒤에는 미국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휴 린튼은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부인 로이스 린튼과 함께 한국의 선교사로 들어와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선교 사역을 이어갔다. 휴 린튼과 로이스 린튼 부부는 전라남도 섬 지방과 벽지를 돌아다니며 200곳이 넘는 교회를 세우며 도시보다는 농촌과 간척지 사역에 집중하였다. 휴 린튼은 검정 고무신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될 정도로 검소하고 겸손하게 지역 주민들을 위해 봉사하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 휴 린튼과 로이스 린튼 부부 가족의 모습이다. 휴 린튼 부부는 전라남도 섬 지방과 벽지에 많은 교회를 세웠다. 로이스 린튼은 1960년 순천 일대에 큰 수해가 나면서 결핵이 만연해지자, 결핵진료소와 요양원을 세우는 등 결핵 환자들을 위해 평생을 봉사하였다. 자녀들 중 둘째 아들인 스티브 린튼이 유진벨재단 이사장이다.
ⓒ 유진벨 재단

 

                                           로이스 린튼의 결핵 퇴치사업
 1960년대에는 전라남도 순천 일대에 큰 수해가 나면서 결핵이 유행하자, 휴 린튼의 아내 로이스 린튼은 순천 지역에 결핵 진료소와 요양원을 세우게 된다. 결핵이 유행할 당시 린튼 가문의 세 자녀도 결핵에 걸렸었다고 한다. 로이스 린튼은 35년간 결핵 퇴치 사업을 벌이고, 1994년에 은퇴하였다. 현재 스티브 린튼이 벌이고 있는 유진벨재단의 북한 결핵 퇴치 사업 지원이 그의 부모님들이 해왔던 사역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유진벨재단 설립
 휴 린튼과 로이스 린튼의 둘째 아들인 스티브 린튼과 막내 아들인 존 린튼은 자신들의 외증조부인 유진 벨 선교사의 한국 선교 사역 100주년을 기념하여, 1995년에 유진벨재단을 설립하였다.

 

 유진벨재단 이사장인 스티븐 린튼은 어린 시절을 전라남도 순천에서 보내며 자라서, 자연스럽게 남북한의 분단 현실의 아픔을 목도하였다. 특히 197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대회를 계기로 북한을 방문하게 되면서 '또 다른 한국'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스티브 린튼은 1989년에 '남북한 윤리 및 도덕 교과서'를 비교 연구해 콜럼비아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콜럼비아대학의 한국학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스티브 린튼은 한때 북미 관계가 호전되었을 당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통역 겸 고문으로 5년 동안 북한을 드나들면서 김일성 주석을 세 차례나 만나기도 했다. 

 

▲ 유진벨재단 이사장 스티브 린튼은 자신의 어머니가 남녘 땅에서 평생을 봉사해왔던 결핵 퇴치 사업을 밑거름으로 하여, 현재까지 10여년 동안 북녘의 동포들을 위해 결핵 퇴치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위 사진은 스티브 린튼 유진벨재단 이사장이 평안 남도 문덕군 결핵요양소의 환자들을 방문하고 있는 장면으로 2004년에 찍은 것이다.
ⓒ 유진벨 재단

 

 유진벨재단이 설립된 1995년은 북한이 가뭄과 수해 등으로 극심한 고난을 받던 때였고, 이때부터 유진벨재단의 북한 돕기 사역은 시작되었다. 1997년 북한의 보건성으로부터 결핵 퇴치 공식 지원 요청을 받아, 전라남도 순천에 있는 순천기독결핵재활원 내 해외사업부 소속으로 '유진 벨 프로젝트'가 출범하였다.

 현재 유진벨재단은 비영리단체로서 한국과 미국에 각각 독립된 재단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지금까지 12년간 북한 동포를 위한 인도주의적 지원 사업을 펼쳐왔으며, 북한의 식량난을 돕기 위한 곡물 지원 사업을 비롯해 결핵 퇴치 운동, 의료 약품 및 장비 지원 등 보건·의료 사업에 힘써왔다.

 

 현재 북한 면적 1/3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결핵 퇴치 사업을 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총 400억 원이 넘는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전달했다.

재단법인 유진벨(한국)
서울 마포구 서교동 395-166 서교빌딩 605호 (122-740)
전화: 02-336-8461 팩스: 02-3141-2465

Eugenebell Foundation (미국)
P.O. Box 5099 Hasienda Heights, CA 91745-0099
Tel: 626-824-8211, Fax: 951-769-5879
홈페이지 : www.eugenebell.org

덧붙이는 글 | 미주뉴스앤조이(www.newsnjoy.us)에도 실렸습니다.

 

 

 

 

 

                                     호남지역 선교의 공헌자 벨  

                                            벨 Eugene Bell (1868~1925)
                                                                                                                                     신호철 장로 

 

 


1868년 4월 11일 켄터키주 스코트 선교구에서 출생했다. 1891년 루이스빌 센트럴 대학을 졸업하고 1894년 캔터키 신학대학을 졸업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1895년 4월 9일 부인과 함께 내한했다.
1908년 그의 집 사랑채에서 3명의 여학생을 모아 놓고 학교를 시작했다. 이 학교가 광주에 있는 오늘의 수피아여학교이며, 남학생을 모아 공부를 가르친 곳은 숭일학교로 발전했다.

광주 기독병원 설립에도 산파역을 담당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와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대 총회장(1914), 전라노회 창립 부회장(1911) 등으로 활동했다. 그가 설립했거나 시무한 교회는 목포에서 양동교회(1898)와 광주에서 구소리(九巢里, 1899), 송정리(1901), 북문내(1904), 향사리(1908) 일곡(1909), 월성리(1916), 금당리교회(1917) 등이 있다.

그리고 담양 무정(1900) 및 담양읍교회, 해남 우수영(1902) 및 백호(1903)교회, 함평 영흥교회(1903), 장성 소룡(1905) 및 장성읍교회(1912), 나주 상촌교회(1907), 삼도리(1915) 및 동수리교회(1922), 화순 백암리교회(1920) 등이 있다.

그는 호남지방 선교에 헌신하다가 지나친 격무로 건강이 악화되어 1925년 9월 28일 57세로 별세하여 광주 양림동 묘역에 안장되었다.
이곳에는 1904년 재혼하고, 제암리 교회 학살 현장 진상 조사 후 광주로 귀향하다가 병점 건널목에서 열차와 자동차 충돌사고로 1919년 3월 별세한 마가렛트(Margarlet W. Bell) 두 번째 부인도 함께 안장되었다.

E. 벨의 딸 샬롯은 성장하여 린턴(Linton, W. A., 仁敦)과 결혼하고, 호남지역 선교사로 40여년 활동했으며, 그 후손들이 유진벨 재단을 설립, 운영 중에 있다.

미국 남장로회 샬롯 위더스픈 벨
(Charlotte Ingram Witherspoon Bell, 1867~1901)
양화진 제1묘역에는 전남지역 초기 선교사로 목포지방에서 활동한 최초의 여성 선교사인, 샬롯 위더스픈 벨(1867~1901) 묘가 있다.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로 헌신적으로 봉사하다가 34세의 젊은 나이로 양화진에 안장되었으며, 호남지역에서 위대한 선교 업적을 이룩한 유진 벨(Eugene Bell) 선교사의 부인이기도 하다.
1867년 5월 13일 미국 켄터키주(Louisville)에서 신학대학장의 딸로 출생했다. 1884년 유진 벨과 결혼했고,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로 1893년 임명되었다. 출발이 지연되어 1895년 2월 12일 샌프란시스코 항을 떠나 1895년 4월 9일 긴 여행 끝에 서울에 도착했다. 남편과 서울에서 얼마동안 활동하다가 호남지역으로 배치되어 1898년 목포로 옮겼다. 1896년 5월 27일 아들 헨리(Henry)를 낳고, 딸 샬롯(Charlotte)은 1899년 1월 6일 낳아 양육했다.
선교 지역이 목포로 변경됨에 따라 우선 마을의 소녀들을 대상으로 가정학교를 시작했지만, 주부 선교사로서 살림살이에 어려움이 컸다. 예를 들면 서울에서 함께 일하던 유모를 동반하지 못하여 새 유모를 맞는 과정의 어려움, 집안 일을 돌보는 시골 하인들이 서구 문명에 익숙하지 못한 문화와 언어의 차이에서 겪는 어려움 등이었다.

더욱이 선교사 사택 건축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상태에서 한편에는 총각 선교사 오웬(Clement C. Owen)이, 그리고 다른 방에는 여성 선교사 스테레퍼(Straeffer)가 살았으며, 또한 어학 선생까지 동거하였으니 집안을 꾸려가기란 참으로 벅찬 일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남편 E. 벨 목사는 시골의 전도여행과 선교회 활동 등으로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아 심리적 갈등이 있었다. 당시 처했던 상황과 마음가짐에 대하여 그의 여동생에게 1899년 2월 보낸 편지내용은 이러했다.
“나는 남편이 선교사업을 잘 할 수 있도록 가사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힘쓰고 있다. 남편을 위하여 가정을 돌보고, 아이들을 기르고, 함께 사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앞으로 몇 년 동안 나의 선교사역이 될 것이다. 나는 이 모든 어려운 일을 해낼 것 같지 않으나 해야만 한다. 나는 언제나 향수에 젖지만 한국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믿는다”

결국 그는 심장병을 얻어 치료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일년이 넘도록 외롭게 고생하며 지내다가 1901년 4월 12일 전도 여행 중 목포에서 별세하고 말았다.
이때에도 남편 E. 벨은 전주(全州) 여행 중에 있었다. 언더우드 목사의 집례로 장례식을 치르고 양화진 제1묘역(바-13)에 안장되었다. 남편은 장례식을 치른 뒤 서둘러 목포로 내려가 두 자녀를 데리고 귀국했다가 1902년 12월 말 목포로 다시 돌아와 선교사업을 계속했다. ‘샬롯기념예배당’은 1903년 6월 28일 목포에서 헌당되었다.(자료:양림교회사) 양화진 묘비는 2002년 다시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