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역사(제2차 성전시대 이후)
제2성전시대
북 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앗수르의 공격으로 ,남 왕국 유다는 주전 586년 바벨론의 침략으로 각각 망하면서 구약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설하고 이스라엘 국가가 존재하던 시기를 보통 제 1 성전 시대라 하고, 바벨론포로 이후에 다시 재건한 성전을 시작으로 하여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성전이 파괴될 때까지를 제2 성전시대라 부른다. 제 2성전시대는 정치적 사건을 기준으로 페르시아 시대(주전 516년 - 주전 332년), 헬라 시대(주전 332년 - 주전 167년), 하스몬 왕조 시대(주전 167년 - 주전 63년), 로마 시대(주전 63년 - 주후 70년)로 구분할 수 있다.
헬라 시대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은 세계사에 큰 분기점을 마련했다.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를 통일한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공격하고, 주전 332년에는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를 정복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 이후 그의 제국은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의 세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셀레우코스 왕조는 가장 큰 제국이며,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프톨레마이 왕조는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지중해 동부 연안을 다스리게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사업으로 그리스 문화와 동방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시대는 이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할 것 없이 큰 세계의 한 구성원이 되는 세계주의가 강조되었다. 코이네 헬라어는 이 새로운 세계를 하나로 묶는 공통의 언어로 새로운 세계의 신분증이 되었고, 종교적으로는 혼합 주의의 결과로 제우스, 말둑, 바알은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하나의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것은 유대인 공동체에게는 하나의 도전이었다. 유대인에게는 헬라 세계의 일원이 될 것인지 유대인으로 남을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해야만 할 시기가 오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정복자인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3세(주전 223-187)는 유대인에게 그들의 종교적인 전통에 따라 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셀레우쿠스 제국 내의 경제적 위기는 모두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안티오쿠스 3세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하고(주전 190) 로마는 그에게 군대의 규모를 축소시키도록 하고 과중한 세금을 물렸다. 부친을 이은 안티오쿠스 4세는 왕조를 다시 일으킬 야망이 있었다. 그는 왕국의 남쪽 경계에 강조를 두고 이집트를 두 번이나 공격했으며 팔레스타인은 전쟁에 시달리게 되었다. 안티오쿠스 4세는 대제사장 오니아스3세를 해임하고 헬라 경향이 강한 그의 형제 야손을 대 제사장에 임명하고, 다시 대 제사장 가문 출신이 아닌 메넬라우스를 임명했다. 주전 168년 이집트를 공격한 안티오쿠스는 알렉산드리아를 거의 정복하려는 순간에 그의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견제하는 로마에 의해 할 수 없이 이집트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에 팔레스타인에서는 안티오쿠스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고, 쫓겨났던 야손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서 술렁이게 된다. 안티오쿠스가 이집트에서 돌아오자 예루살렘은 다시 그의 손에 넘어가고, 할례와 안식일 준수를 금지하는 등 반 종교적인 정책을 실시한다. 이러한 종교적인 박해는 곧 반란을 불러 일으켰다.
마카비 반란
주전 167년 안티오쿠스는 안식일 준수와 할례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교 제사를 수행하라는 왕의 명령을 받은 시리아 군이 모디인에 도착하고, 한 유대인이 희생 제사를 드리려 하였다. 그때에 분을 참지 못한 여호야립 가문 출신의 제사장 마타디아스는 그를 살해하고 산지로 피하자 이에 동조하는 많은 하시딤들이 그를 따랐다(마카비 1서 2:15-30). 이들의 저항 운동은 마타디아스의 세 아들, 마카비라고 불리는 유다와 요나단 그리고 시몬에 의해 계속 수행되었다. 하스몬 가문으로 불리는 이들이 이제 약 130년간 유대를 다스리게 될 것이었다. 드디어 주전 164년 유다 마카비는 이교도에 의해 더럽혀졌던 예루살렘의 성전을 되찾고 성전은 정화되었다. 이후로 성전 정화를 기념하는 하누카(수전절, 요 10:22)라는 절기를 지키게 되었다. 셀레우쿠스 제국과 유대 반란군간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대 제사장이었던 메넬라우스는 셀레우쿠스에 의해 숙청되고 알키무스가 임명된다. 알키무스도 죽자(주전 169년) 몇 년 간 대 제사장직은 공석으로 남겨졌다. 마타디아스의 아들인 요나단은 셀레우쿠스 제국 내의 내분을 기회로 초막절에 대 제사장직을 맡는다(주전 152년). 이제 대 제사장직은 사독의 후손이 아닌 반란을 승리로 이끈 공로로 평범한 제사장 가문이 차지하기 되었다. 그는 전투에서 계속적인 승리를 거두어 사마리아, 에그론, 욥바를 그의 수중에 넣고 팔레스타인의 남쪽 해안에 위치한 헬라 도시까지 통치 지역을 확대해 나갔다. 요나단의 대 제사장직의 수행으로 그의 집안은 자연스럽게 최고의 통치 가문으로서의 위치를 굳히기 시작했다. 요나단이 시리아 군의 음모로 살해되고 그의 형제 시몬이 뒤를 이었다. 그는 데메트리오 2세와 동맹을 맺고 그 동안 내던 세금을 면제 받게 된다. 로마와 스파르타와도 동맹 관계를 새롭게 했다. 그는 통치 중에 유대인의 법적인 권리를 회복하는데 주력하였다. 주전 140년 모든 백성은 예루살렘에 모여 시몬을 '진정한 예언자가 나타날 때까지 영구적인 지도자(Nasi), 대 제사장'으로 삼을 것을 선포하였다(마카비 1서 14:42).
하스몬 왕조
주전 586년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처음으로 다시 독립 국가가 형성되었다. '하스몬'이라는 말은 반란의 선봉이었던 마타디아스의 선조 아사모나이오스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대사 12.265). 셀레우쿠스 제국은 데메드리오 계열과 안티오쿠스 계열간의 오랜 내분으로 힘이 분산되어, 유대는 셀레우쿠스의 세력에서 벗어났다. 하스몬 왕조는 본격적으로 주변 민족을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시키고 독립 국가의 번영을 누렸다. 민족의 지도자, 대 제사장으로 추대된 시몬의 뒤를 이은 요한 힐카누스는 그리심산의 사마리아 신전을 파괴하고 이두매를 정복하여 이들을 개종시켰다. 힐카누스는 대 제사장이면서 스스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대부분의 헬라 도시는 하스몬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고 영토는 몇 배로 확대되었다. 아리스토 불루스를 이은 알렉산더 야나이는 남아 있던 해안 도시를 정복한다. 그의 시대에 하스몬 왕조는 최고의 절정에 도달했다. 야나이는 바리새파를 미워하여 무려 8백 명의 바리새인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야나이는 죽을 무렵 바리새파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그의 부인 알렉산드라에게 바리새파와 화해할 것을 당부한다. 여왕이 된 알렉산드라는 바리새파를 옹호하여 평화로운 시대를 누렸다. 그녀의 죽음 이후(주전 67) 나라는 두 아들의 왕위 다툼에 휩싸이게 된다. 동생 아리스토 불루스는 형 힐카누스를 몰아내고 자신이 왕위를 차지한다. 아리스토 불루스를 탐탁하지 않게 여겨 왔던 이두매 출신의 안티파테르는 나바티안 원조를 받아 다시 왕이 되도록 도와주겠다고 힐카누스를 부추긴다.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왕권을 차지하려는 형제간의 전쟁은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예루살렘에 진격하여 힐카누스의 편을 들어줌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그와 함께 유대인의 독립 국가는 끝이 나고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주전 63년).
로마의 통치와 헤롯 왕조
세계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로마는 이스라엘의 전략적인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은 소아시아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하고, 주변에는 로마가 정복하지 못한 나바티안과 파르티아 왕국이 남아 있었다. 로마의 폼페이는 하스몬 왕조 치하에 있던 많은 헬라 도시를 해방시켰다. 힐카누스는 왕이라는 칭호 없이 대 제사장만으로 만족해야 했으며 아리스토 불루스는 로마로 잡혀갔다. 힐카누스를 도왔던 이두매 출신 안티파테르는 아리스토 불루스의 아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로마를 도와 신임을 얻게 된다.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된 안티파테르는 장남 파사엘을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차남 헤롯을 갈릴리의 총독으로 임명한다(주전 47년).
헤롯왕
로마로 잡혀갔던 아리스토 불루스의 아들 안티고노스와 파르티아 왕국이 팔레스타인으로 쳐들어오자 헤롯은 급히 로마로 건너가서 원조를 청한다. 안토니와 원로원의 신임을 얻어 유대의 왕으로 임명받은(주전 40년) 헤롯은 삼 년간 그의 반대자들과 전쟁을 치르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안토니에 의해 왕으로 임명된 헤롯은 안토니가 실각하고 옥타비아누스가 정권을 잡자(주전 30년) 위기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로마로 건너가서 옥타비아누스를 만난 그는 비굴하지 않고 도리어 당당한 자세로 자신이 안토니를 위해 충성을 바쳤듯이 옥타비아누스를 위해서도 충성을 다하겠다는 결의를 보이고 유대의 왕위를 유지시킬 수 있었다. 헤롯은 로마의 정세가 변해도 새로운 권력자들의 신임을 얻어 낼 수 있을 만큼 민첩하고 권력에 대한 애착이 많은 인물이었다.
헤롯에 대한 유대인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는 하스몬 왕조의 찬탈자이면서 순수한 유대인이 아닌 개종한 이두매 출신이었다. 유대인 자료는 그가 하스몬의 노예였다고 경멸하기를 서슴지 않았다(바벨론 탈무드. 바바 바트라 3b). 그는 남아있는 하스몬의 후손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간다. 대 제사장이었던 힐카누스, 처남이며 대 제사장이었던 아리스토 불루스를 제거하고, 하스몬 왕조의 마지막 왕녀이자 부인인 미리암을 누명을 씌어 살해한다. 부인 미리암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도 결국은 부친의 손에 죽음을 당하고, 헤롯 자신이 죽기 며칠 전에도 아들 안티파터를 살해 할 정도로 잔인했다. 로마에서는 그를 두고 헤롯의 아들로 태어나기보다는 돼지의 새끼로 태어나는 것이 낫겠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대제사장직은 하스몬 가문에서 맡아 왔으나 헤롯은 고의적으로 하스몬 가문과 연관이 없는 바벨론 출신의 하나멜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한다. 로마는 헤롯의 로마에 대한 충성심과 능력을 인정하여 그를 유대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로마 황제를 위한 충성심은 그가 도시를 건설하고 황제의 이름을 따라 도시를 명명한 것에 잘 나타난다(가이사랴, 세바스테의 경우). 헤롯은 로마의 상류층과 특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사위인 마르크스 아그립바와는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를 지속시켰으며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러한 관계를 적절히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내국의 유대인과 헤롯의 관계는 좋지 못하였으나,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는 헤롯이야말로 헬라 세계에서 유대인을 보호하는 실력자로 여겨졌다. 헤롯의 통치 기간 중에 헬라 문화의 물결은 쉽게 유대인 세계로 유입되었다.
백성들의 헤롯에 대한 적개심은 그의 강압적인 통치로 인해 비록 그의 생전에는 크게 표면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의 다음 세대에는 반란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헤롯의 후예들
헤롯이 죽은 후(주전 4년) 그의 왕국은 세 아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으며, 이들은 로마에 의해 분봉왕으로 인정을 받았다. 헤롯이 죽자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을 경감시켜 달라는 청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소요가 발생했다. 예루살렘과 유대, 이두매, 남부 사마리아 지역을 맡은 헤롯 아켈라오는 선정을 베풀지 못한 것이 원인이 되어 로마로부터 해임을 당한다(주후 6년). 아켈라오의 후임을 선정하려는 때에 더 이상 헤롯 가문에서 통치자를 세우지 말기를 호소하는 유대인들로 인해 로마는 대안을 마련해야만 했다. 시리아와 합병을 시키자니 유일신 사상의 유대인과 헬라인이 화합을 하지 못할 것은 분명하고, 결국 로마는 직접 유대에 총독을 파견하여 다스리기로 결정한다. 헤롯 빌립(주전 4-주후 34)은 갈릴리 북부를 다스리며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그의 영토는 주후 37년 이후 아그립바 1세가 다스리게 된다. 갈릴리와 베레아는 헤롯 안티파스(주전 4- 주후 39)가 통치하게 되었다. 갈릴리 호숫가에 도시를 세우고 로마 황제 티베리아스의 이름을 따라서 티베리아라고 불렀다. 남편을 버리고 안티파스와 결혼한 헤로디아스는 아그립바 1세가 로마의 신임을 얻어 빌립이 다스리던 지역을 얻게 되자, 안티파스에게 로마로 건너가 왕권을 얻어오라고 부추긴다. 마지못해 로마로 건너간 안티파스는 왕권을 얻기는커녕 반역죄로 기울로 추방당한다. 아그립바 1세는 부친인 헤롯 대왕에 의해 목숨을 잃은 아리스토 불루스의 아들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지내면서 가이우스 칼리굴라와 친분을 맺고, 칼리굴라가 로마의 황제가 된 후 아그립바 1세는 빌립의 영토를 받는다. 주후41년 칼리굴라가 암살당한 후 아그립바는 글라우디오스가 왕위에 오르는데 공헌하여 헤롯 대왕 이후 처음으로 분봉왕이 아닌 왕으로 임명된다. 그는 헤롯 대왕이 다스렸던 모든 영토를 손에 넣는다. 아그립바 1세가 죽을 당시(주후 44) 그의 아들 아그립바 2세는 17세에 불과했다. 로마는 어린 후계자에게 지배권을 넘겨주지 않았으나, 주후 50년 삼촌 칼키스가 죽은 후 그의 영토를 다스리게 되고 점차 빌립의 옛 왕국과 다른 영토를 얻게 된다.
로마의 총독들
아켈라오의 해임 이후 로마의 총독은 아그립바 1세가 왕으로 통치하던 시기를 제외하고 유대를 다스렸다. 디베리야 황제는 총독을 자주 바꾸지 않았다. 아픈 사람의 상처에 앉아 피를 빨아먹는 파리는 점차 그것에 만족을 하지만, 만일 이 파리를 쫓아내면 새로운 파리떼가 몰려들어 더 극성을 부리게 된다는 것이 황제의 이유였다. 총독의 착취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설명인 셈이다.
유대의 대 반란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로마가 부과한 과중한 세금은 백성들로 하여금 가혹한 이방 통치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켰다. 더군다나 팔레스타인 내에 이방인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그들은 유대인보다 더 많은 권익을 누리게 된다. 하스몬 왕조 말기부터 싹트기 시작한 메시야 사상은 절정에 이르러 이방인의 압제에서 유대를 구하고 메시아가 통치하는 왕국을 고대하는 이들이 늘어나게 된다. 그즈음 로마는 빈번한 황제의 교체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주후 66년 가이사랴에서는 헬라인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유대인들이 공격을 받았다. 반란은 갈릴리 지역으로 번져 갔다.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베스파시안 장군이 갈릴리로 진격하였으며, 갈릴리의 철통같은 요새 요타파타가 무너졌다. 이때 반란군의 사령관이던 요세푸스(요셉 벤 마티디아스)는 포로로 잡히고, 로마 편에서 유대인 전쟁사를 기록한다. 추종자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베스파시안이 로마로 떠나고(주후 69), 그의 아들 티도 장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한다. 반란군 유대인은 단일한 지도 체제를 유지하지 못했다. 기스갈라의 요한, 시몬, 시몬 바르기오라를 지도자로 한 반란군은 예루살렘에서 로마군과 맞서서 싸웠으나 결국 주후 70년 예루살렘은 성전과 함께 파괴된다. 이때에 도망친 일부 유대인이 맛사다 요새에서 로마군과 대항하지만 3년 만에 자결로 끝을 맺는다. 이제 유대인은 2천년의 방랑길에 나서게 되었다.
종파의 형성
하스몬 시대에 처음으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등장한다. 이런 종파의 등장은 요나단이 대제사장직을 맡게 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다윗 시대의 대 제사장 사독 이후 사독의 후손은 공식적인 대제사장직을 맡은 가문이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요나단이 대 제사장이 되어 끊어지게 되었고, 사독의 후손은 처음에는 대제사장직을 빼앗은 하스몬 가문을 비난하였으나 결국은 기득권을 포기하고 하스몬 가문과 결탁하여 정치적 종교적인 이익을 나누는 길을 선택한다. 그러므로 사독의 후예 즉 사두개파는 사회적으로 상규 계층에 속했다. 그들은 구전(口傳)을 부인하고 오직 토라만을 신봉하는 점이 바리새파와 달랐다. 그들은 자유의지를 주장하며 천사와 부활을 믿지 않았다. 바리새파는 요한 힐카누스가 대 제사장의 자격이 없다고 공격하면서 그 첫 모습을 드러낸다. 바리새는 '분리주의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들은 사두개파의 신앙, 정치와 의견을 달리했다. 즉 분리주의자라는 이름은 그들 스스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반대자들이 붙여 준 이름이었다. 바리새파는 하시딤의 후예로 토라의 생활화를 목표로 하였다. 토라뿐만 아니라 구전과 전통을 인정하고, 영혼 불멸, 부활의 신앙을 갖고 있었으며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에세네파는 도래할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모든 일원이 재산을 공동 소유하며 독특한 금욕 생활을 하는 집단이라는 점에서 동시대 헬라 로마 작가의 관심을 끌었다. 1947년 사해 부근 쿰란의 발견은 이들의 사상과 생활에 관한 새로운 많은 정보를 줄뿐만 아니라 1세기를 전후한 유대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세기말 카이로 회당에서 발견된 다메섹 계약(Damascus Covenant)은 이 종파의 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느브갓네살왕에게 팔린 후 390년간의 진노의 시간이 지나면(겔 4:5) 하나님이 남아 있는 의로운 자를 찾으신다.(주전 586 - 390 = 주전 196년) 그러나 20년간은 장님처럼 어둠 속에 있었다. (주전 176년) 이때에 하나님이 이들에게 찾아오셔서 이 종파의 창시자인 '의의 교사'를 주었다. 그리고 의의 교사는 한 세대(40년)을 가르쳤다. 의의 교사가 죽은 이후 최후의 구원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40년이 지날 것이다. 이렇게 주어진 490년이라는 시간은 다니엘 9:24 와도 일치한다. 이들은 자신이야말로 새 계약의 수행자이며 죄악에 물들지 않은 남아 있는 참 이스라엘이라고 여겼다. 이렇듯 이 시대는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이 충만해 있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
제 1성전이 파괴된 이후 유대인의 디아스포라(離散이라는 헬라어에서 파생되어 이스라엘밖에 흩어진 유대인을 일컬음)는 시작된다. 제 2 성전시대의 독특한 현상중 하나는 팔레스타인 본토에 살고 있던 유대인보다 다른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의 숫자가 더 많다는 사실이다. 제 1 성전 시대에 유대인의 역사는 이스라엘 땅(에레쯔 이스라엘) 에서 이루어 졌으나 이제는 에레츠 이스라엘밖에 살고 있는 유대인에게도 관심이 나누어 져야 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에 대한 정보는 오순절에 각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온 순례자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들은 파르티아(바대), 메디아(메대), 엘람, 메소포타미아, 갑바도기아, 본투스(본도), 브루기아, 이집트, 키레나이카, 로마, 크레데, 아라비아에서 온 유대인이었다(행 2:9-11). 모든 유대인은 일 년에 세 번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절기에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여 제사를 드릴 의무가 있었으며, 이것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이러한 순례를 통하여 팔레스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해 나갔으며 특히 예루살렘의 성전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도 심장과도 같은 중요성을 띠고 있었다. 이방인의 눈에는 반 세겔의 성전 세와 헌물을 예루살렘에 보내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행동이 헬라 세계의 일원이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헬라 세계의 유대인은 조상의 율법에 따라 할례와 안식일을 지키고 이교의 제사를 거부했다. 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율법을 지키고 주변 세계에 동화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유대인의 종교적 열심은 주위의 미움을 사기도 했으나 경건한 유대인을 보고 유대교로 개종하는 이방인도 생겨났다. 헬라 세계에 살고 있던 유대인은 각 지역에서 헬라인과 동일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였으나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통치자들은 때로는 가혹한 처사를 일삼았다.
(성전파괴이후 ( 미쉬나, 탈무드 시대 )
성전파괴이후
유대인의 구심점이던 성전은 파괴되었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방황하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만 했다. 사두개파와 에세네파는 사라지고 오직 바리새파만이 남았다. 랍비 문학은 바리새파가 어떻게 성전 파괴 후에 대처해 나갔는지를 보여준다. 성전 파괴를 슬퍼하는 요슈아 벤 하나니아에게 스승 요하난 벤 자카이가 말한다. "파괴된 성전을 위해 슬퍼하지 말아라. 우리에게는 다른 보상이 있으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호 6:6)는 말씀이다"(아봇 데 라비 나탄 4.21). 성전 파괴 후 포도주와 고기 먹기를 거부하는 백성에게 요슈아는 그렇다면 숨도 쉬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아야 할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바벨론 탈무드.바바 바트라 60b). 성전 파괴는 유대인에게 끝이 될 수 없었다. 요하난 벤 자카이의 가르침대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토라가 남아 있었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예루살렘에서 떨어진 야브네에 새로운 기초를 다져 나갔다. 뒤를 이은 라반 가말리엘하에서 야브네는 성전이 있던 당시의 산헤드린이 행사하던 모든 기능을 회복했다. 율법을 공부하는 학교(Batei Midrash)가 야브네를 비롯하여 모든 유대인 마을에 생겨났다. 주전 1세기 힐렐과 샤마이에서부터 시작하여 주후 3세기 랍비 예후다가 등장하기 이전까지의 율법의 지도자들인 타나(선생)의 지도하에 율법이 계승되어 갔다.
바르 코크바(Bar Kokhba) 반란(132-135)
성전이 파괴되고 60여 년이 지났으나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별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 코크바를 중심으로 하여 로마에 대한 반란이 시작되었다. '예루살렘의 해방' '이스라엘의 구속'이라고 히브리어로 쓴 동전이 발행되었다. 바르 코크바는 자신의 이름으로 반란군에게 보내는 서한을 아람어가 아닌 히브리어로 작성하였다.
랍비 아키바는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민 24:17)라는 구절과 연관시켜 그를 이스라엘을 구속할 메시야로 선포하였다. 로마는 마지막 요새 베타르를 진압하는 데 고전했다. 하드리안은 원로원에 보내는 편지에서 의례적인 '나와 군대는 잘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생략했다. 반란의 결과는 참혹했다. 유대인의 마을은 훼파되고 많은 이들은 살해되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예루살렘은 알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 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었다. 예루살렘에는 유대인 거주가 금지되고 오직 성전 파괴일(아브월 9일)에만 방문이 허락되었다. 하드리안 황제는 지금까지 유다로 부르던 속국의 이름을 시리아 - 팔레스티나로 바꾸었다. 더 이상 유대인이 이 땅에 대한 애착을 갖지 못하도록 한 조치였고, 이후로 이 땅은 이스라엘이나 유대가 아니라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리게 된다.
미쉬나, 탈무드의 편찬
성문 율법과 함께 구전 율법도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 받았다는 전승은 구전 율법의 권위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바리새파에 의해 발전되었고 유대교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원래 구전 율법은 기록이 금지되었다. 율법은 구두로 율법 학교에서 암송되고 토론되어 다음 세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이런 구전 율법은 랍비 아키바와 랍비 메일과 같은 타나임의 지도를 거쳐 랍비 유다 나시(Nasi, 지도자 )에 의해 종합되어 3세기 중엽 미쉬나(‘반복하다’. ‘가르치다’라는 뜻)로 편찬되었다. 구전 율법은 토라에 규정되어 있지 않은 관습과 전통을 규범화시킨다. 예를 들어 토라에는 남편이 아내에게 이혼 증명서를 써 주면 이혼이 성립된다고 하였으나, 구전 율법은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에 이혼이 성립되고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토라에는 언급이 없으나 전통으로 내려오는 결혼 계약서의 작성과 효력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미쉬나는 씨앗(Zeraim), 절기(Moed), 여성(Nashim), 손해(Nezikin), 성물(Kodashim), 정결(Teharoth)의 6편으로 되어 있고, 각 편마다 다시 여러 항목으로 세분화 되어 있다. 미쉬나는 다시 아모라(해설자)의 토론과 설명이 덧붙여져 탈무드로 편찬되었다. 탈무드는 미쉬나를 본문으로 하고 그마라(주석)가 추가되었다. 4세기 후반 팔레스타인의 아모라임은 예루살렘 탈무드(또는 팔레스타인 탈무드로 부름)를 편찬하고, 한 세기가 지나서 바벨론에서도 바벨론 탈무드가 편찬되었다. 탈무드는 유대인의 모든 도덕, 민속, 역사, 삶의 방식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후에 기독교 통치하에서 탈무드는 금서로 정해져, 1242년 파리, 1553년 이탈리아, 1757년 폴란드에서 불태워졌다. 탈무드의 첫 인쇄판은 1520-1523년 비엔나에서 출판되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갈등
초대 교회는 핍박으로 인해 대부분 팔레스타인 밖으로 흩어진다. 2세기 예루살렘을 제외한 기독교인의 공동체가 있는 곳은 가이사랴뿐이었다. 한 두 세기가 지나면서 팔레스타인 내의 기독교 공동체는 점점 늘어나서 욥바, 세바스테, 아스글론, 가자등에는 외부에서 온 기독교인이 정착한다. 유대인으로 예수를 믿는 이들은 유대인에 의해 미님(Minim, 종류, 분파의 뜻으로 이단을 가리키는 말)으로 불렸다. 오리겐에 의하면 5세대에 걸친 미님은 15만 명이 넘지 않는다고 한다. 이들 중에는 에비온파가 있었는데 마태복음만을 받아들이고 예수가 다윗의 후손으로 온 메시야임은 인정하지만 신성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초기의 유대 크리스천의 한 분파는 유대인도 받아 주지 않았고, 기독교인도 인정해 주지 않자 결국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다. 가이사랴에는 초대 교회 교부들이 기독교의 교리를 세워 가는 곳이 되었다. 오리겐과 유세비우스는 왜 유대인이 버림을 받았는지 논증했고, 이에 대해서 유대인은 탈무드와 미드라쉬를 사용하여 유대교의 담을 쌓아 나갔다. 양쪽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자 교회는 이제 유대인을 대항할 정치적인 힘을 얻게 되었다.
355년 황제가 된 율리아누스는 헬라의 종교를 신봉했다. 그는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고 유대인에게 성전 재건을 약속했다. 이일은 기독교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유대인에게는 새로운 희망이었다. 성전 재건은 예상치 않았던 천재지변으로 중단되고 기독교인의 승리로 끝난다. 3세기 중엽 랍비 예후다가 나시(지도자)가 되면서 나시는 로마의 승인을 받은 유대인의 지도자가 되었다. 나시는 성전 파괴 이전 산헤드린이 가졌던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기독교인에게 나시의 존재는 부담스러웠다. 결국 429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나시를 폐지하여 유대인의 최고 지도자는 사라지게 된다.
유대인에 관한 로마의 법률 (콘스탄틴부터 테오도시우스까지)
콘스탄틴 황제(324-337)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자 교회는 공적인 단체로 인정을 받고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 유대교와 기독교는 로마의 핍박을 받는 종교였다. 이제 기독교는 로마의 보호를 받고 유대교는 계속적인 박해를 받아야 했다. 유대인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것을 보호하고 유대인으로의 개종은 금지되었다. 예루살렘에는 유대인의 거주가 금지되었으나, 일 년 중 하루 성전 파괴일(아브월 9일)에만 예루살렘 방문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법은 나중에 제정된 법과 비교할 때 그리 치명적인 것은 아니였다. 콘스탄티우스 2세(337-361)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결혼을 금지시켰으며, 유대인은 기독교인 노예를 소유할 수 없도록 했다. 이것은 종교적인 목적만을 갖는 듯하나 결과적으로는 노예를 거느리고 있던 유대인 경제에 큰 손실을 입히고 경쟁자인 기독교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유대인을 사회에서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법을 제정했으며, 테오도시우스 2세는 438년 지금까지의 법을 종합화하였다. 이러한 모든 법에 대한 유대인의 반응은 동일하지 않았으나, 이방인으로부터의 분리 조항은 유대인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으므로 지도자적인 유대인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팔레스타인의 통치자들
7세기 중엽 아라비아 반도의 모슬렘은 그 세력을 페르시아에서 대서양에 이르기까지 모슬렘 제국을 확장시켜 나갔다. 팔레스타인의 새 주인은 팔레스타인을 두 지역으로 나누었다. 팔레스타인의 북부는 티베리야를 수도로 하는 우르둔(Jund Urdunn)으로, 중앙과 남부는 람레를 수도로 하는 필라스틴(Jund Filastin)으로 구분되었다. 예루살렘은 메카와 메디나를 이어 모슬렘의 세 번째 성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행정적으로는 중요성을 띠지 못했다. 모슬렘 제국은 우마이야드(Umayyad 661-750), 아바시드(Abbasid 750-974), 파티미드(Fatimid 975-1171) 왕조가 통치를 하였으며 파티미드 왕조의 정치적 문화적 분열은 이슬람 제국의 몰락과 십자군의 진출로 이어졌다. 초기 모슬렘 시대에 팔레스타인 내의 많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는 모슬렘으로의 개종이 강요되었으며, 이러한 모슬렘이 20 세기까지 팔레스타인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모슬렘의 정복 이전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던 유대인의 대부분이 박해가 심해지자 새로운 거처를 찾아 떠나고 소수의 유대인만이 남게 되었다.
십자군 (1099-1291)
모슬렘의 통치하에 있는 성지를 해방시킨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유럽의 십자군이 팔레스타인을 차지하였다. 1099년 예루살렘을 탈환한 십자군은 모슬렘과 유대인을 학살하고 팔레스타인을 기독교의 성지로 회복시켜 나갔다. 일부 유대인은 파티미드계 모슬렘과 함께 십자군에 대항하였으며 전쟁의 결과 대부분의 유대인 거주지는 파괴되었다. 12세기 후반이 되자 유대인 거주지는 아코, 가이사랴, 아쉬켈론의 해안 도시에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항구가 있는 해안 도시는 상업과 무역으로 경제적인 요인을 충족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티베리야와 사페드에도 고립된 유대인 마을이 있었다. 십자군은 정치와 경제적 이득권 때문에 성지 탈환이라는 본래의 순수한 목적이 퇴색되어 갔고, 이집트에 거점을 둔 모슬렘인 맘룩이 팔레스타인을 공격하여 십자군의 마지막 요새인 악고를 손에 넣었다.
맘룩 (1291-1517)
맘룩은 악고, 욥바, 그리고 다른 해안 도시를 파괴하였고 결과적으로 팔레스타인은 국제적 무역로의 역할을 상실하면서 경제적으로 쇠퇴해 갔다. 예루살렘의 많은 지역도 황폐한 채로 남겨졌으며 1488년 예루살렘을 방문한 오바디야는 예루살렘의 4천 가구 중 유대인 70여 가구는 매우 빈곤한 상태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람레, 나불루스(세겜), 가자는 이 시기에 비교적 번성한 도시였다. 팔레스타인은 아랍 문화권에서도 별다른 중요성을 갖지 못하였으나, 교육은 지속되었다. 십자군 시대의 교회는 파괴되고, 모슬렘 사원이 건설되었다. 15세기 악화된 경제 사정과 오스만과의 전쟁으로 팔레스타인의 치안은 불안정했다.
오스만 터키 (1517-1917)
오스만 터키의 술탄 셀림 1세는 시리야,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정복하여 팔레스타인의 주인이 되었다. 이미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비잔틴 제국을 약화시키고 헝가리, 흑해 연안과 북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의 페르시아만 북부 지역을 통합하여 거대한 모슬렘 제국을 건설했다. 팔레스타인은 행정적으로 예루살렘, 가자, 나불루스, 사페드의 4 지역으로 구분되었다. 1492년 스페인에서 쫓겨난 유대인은 터키 제국으로 이동해 왔으며 일부는 팔레스타인에 정착한다. 사페드에는 카발라 신비주의를 신봉하는 유대인의 이주하여 사페드는 유대 신비주의의 본거지가 될 것이었다. 새로운 유대인 이민자로 인구가 늘어났다. 16세기 예루살렘을 방문한 랍비는 그곳에 유대인 3백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17세기 샤브타이 쯔비에 의한 메시야 운동이 유럽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 영향을 미쳐 메시야 도래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17세기말 예루살렘 내의 유대인은 1200명이었는데, 18세기가 되자 메시야 도래를 기다리는 천여 명의 새로운 이주자들이 예루살렘에 정착하였다. 당시 이들의 생활은 빈곤했고 대부분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보내 주는 기부에 의지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19세기말 팔레스타인의 인구는 증가하여 전체 인구 45만 명중에 유대인은 24,000명이었고 과반수이상이 예루살렘에 거주하였다. 터키는 모슬렘의 대 제국이라는 자만심으로 유럽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나 나폴레옹의 이집트 점령에 자극을 받아 개혁을 서두르게 된다. 그러나 내부의 반란과 외세의 침입이 계속되고, 프랑스와 영국이 중동의 질서에 끼어들자 터키는 흔들거린다. 1917년 팔레스타인의 지배권은 영국으로 넘어가지만, 유대인 사이에 시온주의가 확산되어 이스라엘 회복의 꿈이 번져 가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밖의 유대인
유대인은 기독교와 모슬렘의 통치하에서 살게 되었다. 기독교는 유대인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대가로 저주를 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겼고, 모슬렘은 무하마드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여기지도 않고 코란도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을 박해했다. 모슬렘 통치하에서는 기독교 국가에서보다 다소 억압의 정도가 심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고난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유대인의 열등한 사회적 지위를 법으로 공포했다.
기독교 국가에 정착한 유대인은 모슬렘 세계에 서구의 일용품을 공급해 주었다. 모슬렘 세계에 살던 유대 상인이 이러한 무역을 연결함으로써, 근동과 서유럽을 왕래하는 무역에 종사하게 된다. 이들 유대 상인 중 일부는 궁정과 연결되어 상류층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유대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고 유대인 무역상이 지방 무역에 개입하자, 봉건 영주는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유대인 무역상을 활용하였다. 화폐가 중요성을 더 할수록 그들의 활동은 도시 경제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8세기 초 아랍이 스페인을 공격하고 유대인에게 관용을 베풀자 스페인의 유대인은 약 3백년간 자유롭게 시, 철학, 과학뿐 아니라 유대교를 발달시킬 수 있는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모슬렘 세계에 살던 유대인은 또한 아랍 문화를 유럽에 전해 주는 매개 역할을 한다.
중세의 유대인
십자군은 유대인을 핍박하고 그들의 거주지를 파괴시켰다. 무역과 농업에 종사하던 이들은 생계유지를 위한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토지가 없는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대금업(貸金業)이었다. 12,13 세기 기독교인에 대한 유대인의 고리 대금업은 때로 금지 당했다.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자(1348-1349), 유대인이 흑사병을 퍼뜨렸다는 의심을 받는다. 1492년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은 유대인 추방령을 내린다. 유대인은 개종을 강요당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죽임
을 당하거나 추방당했다. 개종한 유대인 중에는 비밀리에 유대 전통을 유지하기도 했다. 추방당한 이들은 그리스, 북아프리카, 오스만 제국 내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오스만 제국은 비교적 유대인에게 관대했다. 16세기 주변 세계는 유대인을 격리시키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다. 1516년 베니스에서 처음으로 유대인을 게토
(Ghetto 鑄造場)라는 구역에 격리시킨다. 16세기에 도시의 유대인 인구가 늘어나자 추가로 구역이 할당되었으며 같은 이름이 주어졌다. 이리하여 게토는 유대인이 강제로 살게 되는 격리 구역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1655년에 비엔나의 게토에 살던 유대인은 모두 5천명에 이르게 되었다. 곧 게토는 독일, 프랑스, 폴란드, 보헤미아의 도시에도 생겨난다. 중세 말 게토는 유럽에서 공식적인 기구가 되어, 유대인은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고립에 직면한다. 그러나 주변 세계와 단절된 게토에서 유대인은 자유롭게 토라에 열중할 수 있었고, 자체적인 교육을 통하여 정체성을 지켜 나갔다. 게토에서의 삶은 한편으로 유대인의 시야를 좁게 만들었다.
유대교 사상의 발전과 사상가들
모슬렘 시대는 가온(Gaon 뛰어난 자. 6세기 -11세기)이라 불리는 지도자들에 의해서 탈무드 연구가 부활되었으며 바벨론의 수라와 품베디타는 탈무드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종교적인 문제뿐 아니라 세속적인 모든 문제는 가온이 제시하는 지도에 의존하며, 바벨론의 가온이 그 역할을 상실하자 이집트, 스페인, 독일의 탈무드 학자들이 이 책임을 맡게 된다.
이집트 출신으로 바벨론의 수라에서 가온으로 임명된 사디야 가온(Saadyah ben Joseph 882-942)은 유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처음으로 체계적인 유대 철학을 정립했다. 그는 문법, 사전 편집, 시, 주석, 기도문, 달력 제정의 분야에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 성경의 아랍어 번역이며 주석인 '타프실'(Tafsir)은 아랍어를 사용하는 유대인과 기독교 학자에게는 표준 성경이 되었다.
스페인 출신의 이븐 가비롤(Solomon Ibn Gabirol c.1021-1056)은 네오 플라톤 철학자로 유대인의 지식 영역을 바벨론에서 유럽으로 옮겨 놓았다. 그는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에 자극을 받아 철학적 시를 구상해 냈고 이러한 시의 일부는 유대인의 기도문에 포함되었다. 시적 철학 작품인 '고귀한 왕관'(Keter Malkhut)은 운율이 있고 모든 절이 성경의 구절로 끝나도록 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창조와 지혜를 찬양하는 성가이다. 이성에 근거한 사디야 가온의 철학은 마이모니데스 (Moses ben Maimon 1135-1204,보통 Rambam으로 부름)가 뒤를 이었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그는 모슬렘의 박해를 피해 모로코, 팔레스타인으로 전전하다 이집트에 정착했다.
'미시네 토라'(Mishneh Torah, 토라의 반복1166-1176)는 지금까지의 할라카, 율법의 집대성이며, '모레 네부킴'(Moreh Nevukhim, 당황한 자들을 위한 안내)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바탕을 두고 쓰여졌다. 그의 이성에 대한 우위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의 조화는 당시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사후 그의 책은 기독교와 유대교 모두에게 이단으로 몰려 불살라졌으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기독교 학자에게 철학적인 근거와 영향력을 줌으로 해서 그에 반대하는 논쟁은 끝을 맺었다. 그의 율법에 대한 정립은 지금까지 가장 권위 있는 율법 해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의 사상은 유대교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프랑스 출신으로 성경과 탈무드 주석의 대가인 라쉬(Rabbi Solomon Yitzhaki 1040-1105, 보통 Rashi로 부름)는 유럽의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과 바벨론의 전통을 이어주었다. 스페인의 기독교 통치하에서 유대인은 많은 제약을 받았으나, 모슬렘이 스페인을 정복하면서 유대인을 관대하게 대하자 유대인은 자유롭게 철학과 사상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카발라 (Kabbalah), 신비주의의 발생
카발라는 전통(傳統)이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로 '전통을 받아 들인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원래 카발라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 종교적인 가르침을 말하나, 특별히 11세기 이후의 유대교의 신비적인 사상을 지칭한다.
유대교 내에 신비주의 운동이 처음 나타난 것은 주전 2 -1 세기였다. 쿰란의 사해 사본 중에도 신비주의 전통과 관계된 사본들이 발견되었다. 주후 2세기 시몬 벤 요하이 학파는 '창조의 신비'(Maaseh Bereshit)와 '하나님의 수레에 관한 신비'(Maaseh Merkavah)를 다루고 있다. 마아세 베레쉿은 창세기 1장에 나타난 창조의 신비를, 마아세 멜카바는 에스겔 1 장에서 에스겔이 본 환상의 수레에 대한 신비를 주제로 한다. '헤칼롯'(Hekhalot, 하늘의 궁전)문학은 이 신비주의에 관한 작품을 일컫는 말이다. 유대 신비주의는 성경에 근거한다. 모세, 엘리야, 엘리사가 행한 기적은 초자연적인 것이며, 현상적인 세계와 함께 초자연적인 세계에 관심을 갖는다. 이러한 신비주의는 메시야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 세상은 악과 싸우고 있으며 메시야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다. 사변적이며 실천적이기도 한 성격을 띤 신비주의에 관한 주제는 탈무드에도 풍부하게 나타나지만, 탈무드 시대에는 이단과 회의주의자의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하여 널리 알려지는 것을 막고 소수에게만 아는 것이 허락되었다. 12세기 독일에는 카발라에 심취한 '경건한 아쉬케나지'(Haside Ashkenaz)라고 불리는 분파가 생겨났다. 13세기 스페인에서는 카발라 운동이 절정에 달하여 '조하르'(Zohar, 빛남) 라는 신비주의의 고전적인 일련의 작품이 생겨났다. 이 조하르는 6세기 이상 유대인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 영원한 생명과 구원에 대한 신앙은 고난을 견뎌 내게 한 힘이었다.
거짓 메시야
카발라에 영향을 받은 샤브타이 쯔비(Shabbetai Tzevi 1626-1676)가 이끄는 메시야 운동은 17세기 중엽에 절정에 달했다. 중세는 유대인 박해의 시기였다. 탈무드는 불살라지고 유대교의 의식은 핍박을 받았으며, 유대인은 살던 마을로부터 쫓겨나곤 했다. 참혹한 유대인 학살 사건이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났다.(1648-1655) 1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고문을 당하고 죽어 갔으며, 3백 개가 넘는 유대인 마을이 훼파되었다. 왜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에게 이러한 고난을 허락하시는지 질문이 생겨났다.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은 곧 메시야가 온다는 것이었다. 터키에서 태어난 샤브타이 쯔비는 탈무드 교육을 받았으며, 카발라에 심취해 갔다. 그가 20세에 이르자 벌써 그를 따르는 소수의 무리가 생겨났다. 그의 헌출한 키와 잘생긴 용모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으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는 그의 노래는 그의 추종자들을 매혹시켰다. 카발라주의자들은 1648년이 메시야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때라고 믿었다. 이 해에 바로 대 학살이 일어났다. 메시야 정신에 사로잡힌 샤브타이 쯔비를 반대하는 마을의 랍비들이 그를 쫓아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옮겼으나 그곳도 마땅한 곳은 아니었다. 그는 카이로와 예루살렘으로 옮겨 다녔다. 이때 대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라라는 소녀가 메시야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다고 하자 그는 곧 사라와 결혼한다. 1644년 샤브타이는 나탄 벤자민 레비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예언자적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하며, 1665년 샤브타이를 메시야로 선포한다. 터키로 돌아온 그는 열광하는 유대인의 환영을 받고, 암스텔담의 영향력 있는 랍비들이 그를 메시야로 고백한다. 함부르그의 많은 유대인은 그들의 재산을 처분하고 메시야가 거룩한 땅(Holy land)으로 갈 것을 준비한다. 샤브타이는 콘스탄티노플의 술탄이 그를 왕중의 왕으로 인정할 것으로 생각하고 그 곳으로 갔으나 술탄은 그를 체포한다. 그의 추종자들은 샤브타이의 구금이 메시야가 겪어야 할 고난의 과정으로 여겼다. 감옥에 갇힌 샤브타이를 방문한 느헤미야 코헨은 그가 메시야가 아닌 것을 깨닫고 술탄에게 아마도 샤브타이가 오토만 제국을 전복하려 할지도 모른다고 알린다. 술탄은 사람을 보내 그가 모슬렘으로 개종하기를 권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샤브타이는 1666년 모슬렘으로 개종한다. 샤브타이는 그의 개종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명령이었다고 공포하자, 많은 추종자들이 떨어져 나간다. 그러나 일부는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야곱 프랑크가 이끄는 소수의 메시야 운동(Sabbatean)으로 발전한다. 샤브타이 쯔비는 1676년 속죄일에 죽었다. 이 거짓 메시야 운동은 유대인에게 충격과 실망을 안겨다 주었다. 일부는 새로운 신앙을 찾아 동부 유럽에서는 하시딤 운동이, 서부 유럽에서는 하스칼라운동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시딤 운동(Hasidism)
이삭 루리아(Isaac Luria 1534-1572)가 이끄는 카발라 운동은 하시딤의 신조를 채택하여 그 가르침을 대중화시켰다. 하시딤(Hasidim 경건한 자들) 운동은 신비주의에 기초한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운동이다.(주전 2세기 마카비 반란에 동참했던 하시딤이나 12세기에서 13세기에 존재하던 하시딤이 아님) 하시딤 운동의 대표는 바알 쉠 토브(Israel Baal Shem Tov c.1700 - 1760)로 사람은 모든 생각과 행위에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에 존재하며 하나님과 함께 모든 창조물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 과업이다. 이러한 헌신은 기쁨과 무아경을 만든다. 하시딤 운동은 도브 벨(Dov Ber) ,잘만(Shneour Zalman 1747-1813) 의 제자에 의해서 '하바드'(Habad, 지혜, 이해, 지식의 히브리어 약자임)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하바드 운동은 종교적 체험에서 지적인 노력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 원래의 하시딤 운동과 다른 점이다. 하바드 운동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으나 특히 뉴욕, 캐나다, 이스라엘에서 활발하다. 뉴욕에서 포교하던 하바드의 최고 랍비인 멜루바비치는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1993년 1월 메시야로 선포되었으나, 1994년 6월 92세를 일기로 뉴욕에서 죽었다.
하스칼라(Haskalah 계몽주의)
유대인의 계몽주의는 중세의 금욕주의와 관념론에서 유대인을 해방시키는 휴머니즘을 이상으로 하여 18세기와 19세기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계몽주의는 17세기 서구화된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유대인 사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나, 18세기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역사, 철학, 과학의 습득은 유대인의 지식 영역을 넓혀 갔다. 독일에서는 멜델스존(Moses Mendelssohn 1725-1786)의 노력으로 계몽주의가 싹트게 되었는데, 그는 게토의 벽안에 갇혀 있던 유대인을 세속적인 유럽 세계로 이끌어 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유대인에 대한 관용이 포고되자 세속적인 교육이 유대인에게 영향을 주었다. 계몽주의 작가는 활발한 문학 활동을 전개하고 월간지 HaMeassef가 발행되었다.(1783-1829) 계몽주의는 전통적인 유대인의 삶으로 그들을 제한하는 대신 주변의 세계와 융합하며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하였다. 계몽주의는 유대 사상과 삶의 방식에 현대화를 촉구하여 이후 자유주의, 시온주의를 낳게 하였다.
시온주의 운동
16세기의 종교 개혁은 중세 교회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을 수정케 했다. 유대인에 대한 종교적인 관용이 대두되어 갔다.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유럽인들도 유대인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나갔다. 프랑스 혁명은 유대인에게 경제적 정치적 권위를 처음으로 부여했다. 네덜란드와 함부르크에서는 이미 유대인에 대한 제한적이긴 하지만 자유가 주어졌고, 1791년 프랑스는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주어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유대인의 권리를 법으로 인정했다. 약 백여 년 간 유대인은 비교적 많은 자유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안티 세미티즘의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19세기 러시아는 반 유대인 법령을 제정하여 유대 공동체의 지위를 약화시켰다. 1881년부터 1917년까지 대대적인 유대인 박해와 학살이 러시아에서 일어났다. 프랑스에서는 반 유대적인 우파의 정치적 영향력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1894년 프랑스의 대위 드레푸스(Alfred Dreyfus)는 프랑스의 기밀을 독일에 넘겼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드레푸스가 썼다는 편지는 처음부터 위조된 것이었다. 드레푸스는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언론은 그가 유대인임을 강조했다. 에밀 졸라도 그의 무죄를 주장했다. 1899년 재판이 다시 열리고 그는 감형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무죄는 몇 년 뒤에야 인정되었다. 안티 세미티즘의 영향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유대교에 복귀케 했다. 메시야를 기다리든지 유대인의 국가를 건설하든지 행동을 해야 할 시기가 오고 있었다.
시온주의
유대 국가는 헤스, 핀스커, 헤르즐에 의해 구상되었고 그 꿈은 시온주의자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독일 사회주의자였던 헤스(Moses Hess 1812-1875)는 '로마와 예루살렘'(Rome and Jerusalem 1862) 이라는 책에서 유대 국가의 정치적인 회복을 표명하였다. 그가 바란 유대 국가는 모세의 법과 사회주의가 조화된 형태였다. 핀스커(Leo Pinsker 1821-1891)는 헤스의 책을 읽고 그의 견해와 동조했으나 훨씬 극단적이었다.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데 이방인으로부터의 도움 받기를 기다리지 말라는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시온주의의 본격적인 활동은 헤르즐(Theodor Herzl 1860-1904)에 의해 서서히 막이 오르게 된다. 그는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종교적인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났으나 유대인이라는 정체성과 민족의식은 없었다. 비엔나 신문사의 기자로 파리의 특파원이 된 헤르즐은 파리에 거주하면서 프랑스의 반유대주의를 접하면서 유대인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박애, 평등을 부르짖는 혁명의 국가였던 프랑스에는 반유대주의 물결이 넘쳐흘렀다. 헤스의 책을 알지 못했던 헤르즐은 '유대 국가'(Der Judenstaat 1896)를 저술한다. 유대인 문제는 오직 유대 국가 건설만으로 해결된다는 이 소책자는 큰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제안으로 전 유럽의 유대인 대표가 참가한 제 1회 시온주의 총회가 1897년 바젤에서 개최되었다. 이 총회에는 모두 2백여 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는데 헤르즐의 지도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회 시온주의 총회에서는 '국제법의 지지를 얻어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을 위한 국가 건설을 시온주의의 목표'로 결정하였다. 헤르즐은 정치적인 외교 활동을 통하여 유대 국가 건설이 가능하다고 보고 터키와 영국을 대상으로 한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러한 방침에 모두 동조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러시아와 유럽의 유대인이 겪는 고난을 조금이라도 빨리 덜어 주기 위하여 영국이 제안한 '우간다에 유대 국가 건설'안을 받아들여, 제 5회 시온주의 총회에 제출했으나 거센 반발에 부딪힌다. 1904년 그는 총회에서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감동적인 연설을 한다. 그리고 며칠 후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897년 1회 시온주의 총회가 끝난 뒤 9월의 그의 일기에는 "나는 여기에 유대 국가를 세웠다. 만일 내가 이 사실을 크게 소리친다면 모든 세상이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5년 적어도 50년 안에 모든 이들이 확인하게 될 것이다" 라고 적혀 있었다.
히브리어의 부활
히브리어의 부활은 계몽주의 시대에 싹트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히브리어는 구어로 사용되지 않았다. 벤 예우다(Eliezer Ben Yehudah 1858-1922)는 현대어로서의 히브리어 부활에 공헌했다. 1883년 예루살렘에서 교사직을 맡은 그는 히브리어로 가르쳤고, 몇 년 뒤 리숀 레 찌온의 학생들은 히브리어로 수업했다. 그는 히브리어 사전과 필요한 새로운 히브리어 단어를 만들어 냈다. 그 외에 스몰렌스키(1842-1885),세파림(1835-1917),프리쉬만(1839-1922)은 히브리어 잡지를 발행하고 시와 문학 작품을 쓰면서 히브리어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었다.
이스라엘 독립
영국의 외무상인 발포어(Arthur James Balfour)는 유대 국가의 설립을 지지한다는 발포어 선언(1917)을 하였으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882년부터 시작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민은 점차 증가하여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4만 명이 이민을 와서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은 8만 5천명에 달했다. 유대인 정착민들은 주변 아랍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 보호하기 위하여 하가나라는 자위대를 조직한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뒤 나치 정권을 피해서 오는 이민자들도 늘어났다. 2차 세계 대전 중 6백만 유대인이 나치에 의해 희생을 당하고 전쟁은 끝났다. 영국은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민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불법 이민자의 숫자는 증가했다. 영국의 식민지하에 있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일기 시작한 민족주의와 독립을 위한 투쟁은, 식민지의 무역에 의존하던 영국 경제에 큰 타격이었다. 전후 미국은 중동의 이익에 관여하는 새로운 강대국으로 등장한다. 영국이 직면한 경제적 어려움과 독립을 위한 유대인의 계속되는 투쟁은 영국으로 하여금 팔레스타인 문제를 UN에 맡기게 한다. 1947년 5월 유엔의 팔레스타인 특별 위원회는 팔레스타인 내의 두개의 자치 국가안을 제시한다. 1947년11월29일 유엔은 이 안을 표결에 붙여 찬성 33, 반대 13으로 이스라엘 독립을 승인한다. 1948년 영국이 철수를 시작하고 최종적인 철수 전 날인 1948년 5월 14일 벤구리온이 이스라엘 독립을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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