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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독립국가 창설과 중동의 갈등-4

영국신사77 2009. 2. 28. 15:20

                  이스라엘의 독립국가 창설과 중동의 갈등-4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새로운 모습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고 당시 이 지역 경제발전에 동참했다. 1936년경 팔레스타인에는 6만 독일계 유대인이 거주하게 되었고, 팔레스타인이 필요로 하던 과학자, 기술자, 경영자, 화학자, 연구원을 공급하여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상품의 질도 향상시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유명한 학자들이 팔레스타인 교육계에 종사하게 된 것이다. 금융전문가와 전직 정부 관리들이 당시까지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고 있던 팔레스타인에 자치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기초를 세우게 됐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회교 율법사와 지주들은 멍청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을 예측했다.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되지 않으면 그 일이 곧 닥칠 것이었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의 아랍 지도자들은 나치와 비밀 협정을 체결했다. 그 대가로 독일의 재정지원과 무기로 아랍 지도자들은 독일과 영국이 전투를 벌일 경우 히틀러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영국은 유대인과 아랍인들이 소모전을 벌이면 결국 영국이 통제권을 가지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뒷전으로 물러나 기다렸다. 그러나 그런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예견되었던 폭력사태가 1936년 발발했고, 나치의 지원을 받은 회교 율법사들의 군대가 도시와 교외, 노상과 고속도로, 버스와 자동차에서 총을 난사하며 공격했다. 팔레스타인은 무장지역이 되었지만, 공식적인 시온주의자들의 정책은 준군사조직인 하가나(Haganah)는 공격이 아닌 방어를 위해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야보팅스키는 이러한 정책을 격렬하게 반대했고, 유대인들로 하여금 아랍과 영국에 반격하도록 촉구했다. 그는 이르군(Irgun)이라는 지하조직을 만들었다. 이 조직의 목표는 아랍인들과 전투를 벌여 전쟁을 그들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영국을 팔레스타인에서 떠나게 만들고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선포하겠다는 것이었다.

 

 아랍의 테러가 가중되면서 야보팅스키의 이르군의 수도 증가했다. 아랍측은 유대인의 이민을 저지시켜야 하고, 팔레스타인 유대인은 소수 민족으로 남아 있어야 하며, 팔레스타인의 주도권은 아랍인에게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고집했다. 유대인들 역시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주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입장에는 변화가 없었다. 점점 많은 수의 유럽 유대인들이 나치의 공포를 벗어나려 했고, 그들에게 다른 국가로의 문호가 닫혀 있어 팔레스타인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폭력사태가 증대되는 것을 우려한 영국은 6명으로 된 “필 조사 위원회”를 위촉하고 팔레스타인 소요를 조사하여 대책을 강구하려 했다. 영국은 전혀 실제로 벌어질 상황으로 결론이 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필 위원회는 장기간의 조사 끝에 영국 위임 통치가 먹혀 들어가지 않으며 팔레스타인이 유대국과 아랍국으로 분리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유대인들은 의혹을 가지면서도 이를 수락했지만, 아랍은 총격을 가하며 이를 거부했다.

 

 팔레스타인의 분할을 막아보기 위해 영국은 재빨리 타협안 1939년 백서를 발표했다. 이 백서를 아랍측은 마지 못해 수락했지만 유대인은 이를 총격으로 거부했다. 이 백서에 의하면 유대 이민자 수를 5년간 매년 15,000명으로 제한하고 5년 후에는 금지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백서로 유대인들이 최초로 영국에 공개적으로 저항하게 되었다. 유대 젊은이는 야보팅스키 지하조직에 자원하고, 이들 이르군은 유대 이민을 저지시키는 영국이 아랍측과 협력하고 있으며 그래서 아랍인들뿐만 아니라 영국도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르군의 젊은이들은 거만하게 영국 제국주의 사자의 꼬리를 잡아당겼다. 유대인과 영국인은 양측이 원치 않았지만, 사태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불화를 잉태하게 되었다.

 

 영국이 2차 세계대전에 휘말리자, 13만 유대인들은 영국 아프리카 부대에 지원했다. 경계심이 많은 영국은 그렇게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무장하는 것을 걱정했지만,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유대인 3만 명을 수용하고, 이들이 독자 부대로 전투에 참여한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이들 유대 군인들의 용기를 치하했다. 처참하게 롬멜 아프리카 군대는 총으로 무장한 유대인 앞에서 그들이 초인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영국이 생각했던 것처럼 유대인은 나치와 대적하기 위해 전투에 참여했고 팔레스타인에서 있을 수밖에 없을 대결을 위해 훈련을 했다. 전쟁이 끝나자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 아주 능숙해졌다.

 

 1945년 팔레스타인 드라마의 막이 오르자 배우들은 활기를 띠고 1941년의 역할을 다시 재연했다. 영국의 정책은 과거 백서에 근거를 두었고, 아랍의 정책은 여전히 유대인의 유입에 반대하는 것이었고, 유대인 정책은 무제한적 이민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1946년 영국이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의 선언에 따라, 10만 유대인을 독일에서 이주시키지 못하도록 하자 다시 테러가 발생했다. 팔레스타인 유대난민을 금지시키고, 유대 난민을 키프러스 섬에 구금시키는 영국의 정책에 격분한 이르군은 이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려 했다.

 

 이르군 대원들은 예루살렘 영국 사령부가 있는 다윗 왕 호텔을 다이나마이트로 폭파시키고 80명의 영국 장교와 사병을 살해하고 70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보복 조치로 영국은 모든 유대 상가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였지만, 유대인들의 결속을 와해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유대인들의 영국에 대한 감정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영국은 미국이 영국의 지배에 저항했을 때 식민지 시대에 폈던 것과 같은 무익한 정책으로 같은 역사를 반복했다. 팔레스타인의 정책을 재고하거나 의회의 유화정책을 참작하려 하지 않고, 유대인 이민자를 실어 나르거나 이에 협조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에게 벌금을 부과했다.

 이런 정책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5년 동안 11만 3천 명의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에 이주시켰다. 영국이 집 없는 유럽 유대인들에게 정당한 피신처 제공을 거부하여 인권을 무시하고 있다고 항의했다.

 영국은 유대인을 대규모 검거하여 무장 해제시키고 지도자들을 교수형 시켜 보복했다. 그러나 사막에는 무기가 점점 늘어갔고 대량 검거에 따라 대규모 저항이 발생했고, 유대 지도자의 처형에 대항해 이르군은 보복의 법칙을 적용했다.

 유대인 하사관이 처형되면 영국 장교를 살해하고, 유대 장교가 처형되면 영국군 고위 장교를 살해했다. 전체 국가가 저항 캠프가 되자, 1947년 몹시 시달린 영국은 다른 곳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자, 그동안 팔레스타인 문제에 충분히 간여했다고 선포하고 이 문제를 유엔에 넘겼다.

 

 한편 유엔은 특별 위원회를 팔레스타인에 파견하여 상황을 조사했다. 유엔 특별 위원회는 1939년 필 위원회가 제안한 것과 기본적으로 같은 내용으로, 영국의 위임통치를 종식하고 팔레스타인은 아랍과 유대국가로 양분시켜야 한다는 보고서를 냈다. 1947년 9월 유엔 총회는 이 팔레스타인 분할을 결정하고, 26년간의 소란스러웠던 영국의 위임통치를 끝냈다.

 이 모든 사건, 백서, 보복 조치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찬사를 받을 만하다. 영국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민간 정부를 대표하는 문명국의 군대로 행동을 했다. 그들은 열심히 싸우고 용감하게 패했다. 그들의 악마적 의도나 비인간적인 정책은 실시하지 않았다.

 현재 이스라엘과 영국이 선린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영국이 강력한 적이었지만 반유대주의자들이 아니었고, 영국이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다른 문제로 골치가 아파 포기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승리했다는 것을 이스라엘이 인정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출처:http://blog.naver.com/yousunpark/17588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