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독립국가 창설과 중동의 갈등-5
1948년 5월 14일 영국이 철수하고, 다윗 벤구리온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포했다. 그날 저녁 유대인들은 새로운 조국을 위해 축배를 들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경계선에 군대를 배치했다.
이스라엘의 독립전쟁(1948-1949)은 역사 소설에서 찾을 수 있는 음모와 행운, 그리고 모든 극적 요소를 다 가지고 있다. 운명의 갈등은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텐트를 접고 국기를 끌어내리고 철수하면서 시작되었다. 로렌스의 정신적 후계자로 지목된 존 글럽 파샤가 주도하는 아랍 군대들이 이스라엘을 다각도로 공격하고, 첫 공개 문서로 일주일 이내에 전쟁은 끝날 것이고 유대인들은 바다로 내몰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아랍이 주장하는 것이 옳은 것처럼 보였다. 이스라엘 전체 인구는 758,700명이었고, 독립 이틀 후 5개 방면에서 침공하는 아랍군을 저지할 군대는 불과 19,000명에 불과했다. 부인과 아이, 그리고 토라 이외는 손에 들어 본 적도 없는 사람들도 총을 들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영국에서 제공받은 아랍군의 현대식 무기에서도 압도당하고 있었다. 첫 전투에서 많은 유태인이 살상되었고, 전선이 휘청거리고 5월 20일 구 예루살렘이 아랍측에 넘겨졌다.
1918년에 유대인과 영국은 아랍의 민족주의를 과소 평가하는 실수를 범했지만, 1948년 아랍인들은 유대인의 민족주의를 과소 평가하는 실수를 범했다. 유대인들의 정신 속에는 승리에 대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곳에서 그들의 조상은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이집트, 셀류시드와 싸웠었다. 또한 바로 이곳에서 유대인들은 로마에 세 번씩 봉기를 했었다.
전투 상황이 필사적인 방어에서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변했고, 경계선은 강화되었다. 1인치의 땅도 아랍 측에 내어주지 않고 후퇴는 있을 수 없고 오로지 전진만이 있었다. 아랍측은 이런 정신적인 저항에 부딪혀 후퇴하게 되었다. 프랑스가 1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을 베르덩에서 저지시킨 것처럼, 유대인은 아랍의 대공세를 5개의 전선에서 저지시켰다. 아랍측에서 1주일이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전쟁은 한 달이나 지속되었고, 아랍측은 고맙게 6월 11일 폴크 베르나도트 공(公)이 제안한 휴전의 조건을 수락했다.
양측은 전쟁을 종결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휴전을 이용해 군사력을 강화시키려 했다. 중립을 가장한 서유럽은 모든 무기 판매에 금수조치를 취했지만, 이런 조치를 예측한 이스라엘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무기를 구매했다. 주로 밤중에 추진되어 “검은 작전”이라고 알려진 공수작전을 통해 이스라엘 비행사들은 총, 75밀리 대포, 탱크를 실어 날라 이스라엘 전선에 배치시키고 다음에 있을 결전에 대비했다. 영국과 미국 공군에 근무했던 유대인들이 영국, 프랑스, 코르시카, 유고슬라비아에서 과거 동료들의 은밀한 도움으로, 기지에서 연료를 채우고 날으는 박스카, 허리케인, 메서슈미츠를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초조하게 아랍측이 휴전을 깨기를 기다렸다. 아랍측은 훨씬 더 초조하게 휴전이 깨어지기를 고대했다. 아랍측은 영국제 대포와 탱크로 입지를 훨씬 강화시키고, 징병을 통해 군사력도 24,000에서 60,000명으로 증가시켰다. 한편 유대 군대는 소폭 늘어나 20,000명이었다. 이번에는 아랍측이 승리할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한달여 지속된 휴전이 끝나자 아랍은 공격을 감행하고 곧장 이스라엘의 총부리 앞으로 달려들었다. 결국 아랍 전선은 와해되고 이스라엘은 반격에 나서 앞에 놓인 모든 것을 쓸어내고 전쟁은 적국 내에서 전개되었다. 두 번째 전쟁은 불과 10일 동안 이어지고, 아랍은 휴전을 요청하고 베르나도트 공은 즉시 백기를 들고나와 기간의 제한없이 휴전을 명령했다.
첫 번째 휴전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휴전도 역시 뻔뻔스럽게 양측 모두에 의해 위배되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아랍측과 또 한 차례의 결전을 원했고, 참패가 우연에 의한 것이라고 확신한 아랍측은 유대인들과 맞서 그들을 끝내려고 했다. 보다 많은 무기가 양측에 쏟아 부어졌다.
과거 전투에는 이집트 전선에서만 아랍측이 성공했었다. 네게브 사막을 확보한 이집트 군은 한번 더 전쟁을 치르면 예루살렘을 수중에 넣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휴전을 어겼다. 유대인들은 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격을 감행한 이스라엘 군은 이집트 국경을 넘어 지중해에 있는 이집트 군 본부 엘 아리쉬 외곽까지 공격한다. 이곳이 점령되면 이집트는 무방비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인지한 영국은, 이스라엘이 철수하지 않으면 영국이 전쟁에 개입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스라엘은 후퇴했고, 이집트와 다른 아랍 국가들도 평화를 원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은 돈으로가 아니라, 이스라엘 아들들의 피로 국가를 수호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군대 규모가 큰 편에 서지 않고 보다 나은 쪽에 서셨다.
독립전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이스라엘 정치가들은 유대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유대국가 건설에 역점을 두었으며, 첫 전국적 선거가 1949년 개최되었다. 새로운 헌정의 의회가 소집되었고 카임 와이즈만이 대통령, 데이비드 벤구리온이 수상으로 임명되었다.
벤구리온은 이스라엘 수상으로는 배역 감독이 선정한 꿈의 인물이었다. 벤구리온은 흰 머리에 햇빛에 그을린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교묘한 수완을 가지고 있었고 감성적이고, 거칠지만 자비로웠으며, 시온주의 혁명주기에 요구되는 4가지 역할 모두를 역사적 확신을 가지고 수행했다.
1886년 폴란드의 플론스크에서 출생한 벤구리온은 일찍이 유대인 촌락의 유대교를 저버리고 하스칼라와 서구 계몽주의에 빠져 1906년 팔레스타인으로의 운동에 가담하여 스스로 동기 유발자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 그는 농지 경작자가 되었고 1910년 정당을 만들고 신문을 발간했다. 1912년 그는 동기 유발자에서 선동가로 변신을 꾀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법대에서 수학하고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자, 그가 미래의 문제아가 될 것으로 생각한 터키인들은 그를 즉각 추방했다.
1차 세계대전 중에 그는 야보팅스키 군대에 유대인 전투요원징집에 협조했고, 본인도 이 부대에 입대했다. 전쟁 후 벤구리온은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정치가가 되어 국제 연맹과 유엔에서 다른 국가의 여론을 주도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1922년 위임통치 팔레스타인을 설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1947년 유엔 총회에서 이스라엘의 독립 표결에 큰 역할을 했다.
이스라엘이 독립되자 벤구리온은 자신의 역할이 더 이상 소용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시온주의 선동가로서의 역할을 포기했다. 그는 정치 관료로 변신했고 대담하게 시온주의 정당은 사망했으며 그 임무가 완수되었고 성공적으로 자살했다고 선언했다. 이제 관료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승리를 공고히 하고 새로운 관습을 제정하고 혁명의 분위기를 정상적 활동으로 가꾸어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자유와 풍요에 기초를 둔 새로운 민주주의를 공고하게 할 시기가 된 것이다.
이스라엘에는 이류 시민이라는 것이 없고 이스라엘인이 되기 위해 시험을 거칠 필요도 없었다. 시민이 되고 싶은 사람은 이스라엘에 도착하여 시민이라고 스스로 말하면 됐다. 시민권은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아랍인에게도 주어졌다. 모든 사람은 종교, 성별, 과거 경력에 관계없이 참정권과 보편적이 교육을 받고, 능력에 따라 직업을 가질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이스라엘에서 아랍 여성들은 최초로 선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아하드 하암, 비알리크, 체르니코프스키가 말한 것처럼, 이스라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만이 아니라 교육과 문화가 있는 땅이 되었다. 학교가 전국에 세워지고 의무교육이 실시되었다. 마을과 도시가 확대되자 박물관과 음악관, 극장, 오페라 하우스, 화랑, 대학이 나타났다. 최근 「피어 진트」 공연에 이스라엘 아랍인과 유대인들이 함께 관람했다. 모욕을 당하고 핍박을 받았던 유대 어린이들이 과거 아랍 하층민의 아이들과 함께 앉아 발레를 보고 어린이 공연을 참관했다. 1960년 이스라엘은 세계 어떤 국가보다 인구 비율 면에서 많은 신문, 잡지, 화랑, 박물관, 학교, 오케스트라를 가지게 되었다.
두 가지 요소에 의해 단기간에 이룩한 이러한 업적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1992년 팔레스타인은 45,000평방 마일이었고 75만 명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1948년 팔레스타인은 영국과 유엔의 계속된 분할로 8천 평방 마일로 축소되었다.
1960년 이스라엘에는 200만 명이 거주했고 그 중 20만 명이 아랍인이었다. 200만 명 인구 중에 극소수만이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들이 가진 유대 정신이 강해 예멘, 독일, 모로코, 러시아, 터키, 폴란드 등 각기 다른 지역에서 이민 온 유대인들은 몇 주 이내에 새로운 이스라엘 규범에 잘 적응했다. 2,000년 간 세계에 흩어졌던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에 한 나라의 한 국민이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평화의 고요함을 충분히 느끼기 전에 이집트와 한 차례의 전쟁을 더 치르게 되었다. 패배로 감정이 상한 이집트는 특별히 훈련된 페데인이라는 부대를 이스라엘 국경 너머로 침투시켜 유대인을 괴롭혔다. 이들은 밤중에 국경을 넘어와 미국 개척기의 인디언들처럼 국경 주변 농가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살상하고 다시 국경을 넘어 도주하곤했다.
소련권 국가에서 더 많은 무기와 탄약이 유입되면서, 이집트는 공격에 점점 대담성을 보였다.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는 군사협정을 맺고 통합된 사령부를 구성하여 다시 이스라엘국을 초토화시키겠다고 선포했다.
이스라엘은 즉시 군대를 동원하고 1956년 이스라엘 영토 내로 단검처럼 들어와 있는 가자지역을 공격했다. 3일만에 이스라엘 군은 이집트 군을 압도하고 시나이 반도를 건너 이집트 군수품 기지를 포위하고 수에즈 운하를 내려다보면서 카이로를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이집트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집트에게 행운이 닥쳤다. 미국과 소련이 영국과 프랑스가 군사적인 공격을 중단하도록 촉구하고, 반대로 영국은 이스라엘이 이집트 영토에서 철수할 것을 촉구했다. 결국 이스라엘은 철수하였지만, 아랍세계에, 국경을 침공하면 미국, 러시아, 영국 국경이 위협을 받으면 보복하듯이 반드시 군사적인 보복이 있을 것이라는 교훈을 주게 되었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 국경에는 더 이상 페데인의 공격이 없었다.
결국 시온주의 혁명은 끝나고 이스라엘국이 건설되었다.
그러면 이 일이 유대 운명을 완수한 것일까, 아니면 유대 역사의 가혹한 행군 속에 하나의 이정표에 불과한 것일까?
출처:http://blog.naver.com/yousunpark/17588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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