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선교사 · 신앙偉人/韓國기독교 역사와 교회사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재발견―①美하와이] 이민 설움 달랜 교회

영국신사77 2008. 12. 14. 22:42

2008.12.09 16:02:22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재발견―①美하와이] 이민 설움 달랜 교회는 삶·신앙 중심지


글로벌 금융위기는 국제적인 관광도시인 하와이에도 큰 타격을 주고 있다. 달러화 강세까지 겹쳐 관광수요가 급감하면서 교민들은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상당히 위축돼 있는 모습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곳의 교회들은 첫 이민이 시작된 1903년 이래 교민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하와이의 교회=현재 하와이 한인교회협의회에 등록된 교회수는 40여개이며, 전체 성도수는 3000명 가까이 된다. 하와이 교민이 3만여명이란 점을 감안하면 미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복음화율이 떨어지는 편이다. 성도수 100명이 넘는 교회는 10여개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하와이는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역사적 상징성이 있는 곳이다.

지난 3일(미국시간) 호놀눌루시의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수요일 저녁 예배. 김낙인(57) 담임목사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이 계실까 의문이 생길 정도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믿음을 붙잡으면 반드시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이라고 성도들을 위로했다. 성도들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이 교회는 북미 최초의 한인 이민자 교회로 1000여명의 성도들이 출석하고 있는 대표적인 한인교회다. 주일에는 한국어와 영어로 5부 예배까지 드린다. 14개 목장별로 80개 소그룹 모임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방과후 학교를 비롯해 지난 70년 미주에서 처음 개설된 한국어 학교도 운영되고 있다. 교회는 평일에도 24시간 개방돼 있다. 1년 예산은 150만 달러 규모로 해외 28곳에서 선교활동도 하고 있다.

이 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는 1903년 인천 내리감리교회가 선교목적으로 파송한 홍승하 전도사다. 같은해 11월10일 홍 전도사의 인도로 교민들이 모여 첫 예배를 드렸다.

1904년 이곳에 한인교회가 14개 생겨났다. 한인 교인수는 402명. 그로부터 10년 후인 1914년에는 교회수가 39개로 늘었고 교인수는 2800여명에 이르렀다.

1918년 이 교회와의 갈등으로 30여명이 '이승만 박사 교회'로 불리는 한인기독교회를 개척해 갈라져 나왔다. 올해로 90주년을 맞은 한인기독교회는 하와이 현지에서 교회앞 길 이름을 딴 '릴리하교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현재 사무엘김(35) 목사가 17대 담임목사로 일하고 있다. 이 교회는 한때 900여명의 등록교인이 있었으나 현재 120여명이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교회 재정은 연간 50만달러 규모다.

◇하와이 한인 이주의 역사=하와이 이민은 구한말 때 추진됐다. 미국인 농장주들에 의해 운영되던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은 노동력이 부족했다. 농장주들은 싼값에 쓸 수 있는 양질의 한인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초대 주한 미국공사인 호레스 알렌은 1902년 하와이제도 총독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당시 조선인들을 '인내심이 강하고, 근면하고, 순종적인 민족. 윗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에 부리기 쉬운 민족, 매우 훌륭한 노동자'라고 묘사했다.

하와이 이주 노동자 모집에 121명이 지원했다. 이 중 50여명은 인천 내리감리교회 성도들이었다. 이들은 1902년 12월22일 대한제국 여권을 들고 제물포항을 떠났다. 일본 고베항에 들러 실시된 신체검사에서 20명이 떨어지고, 101명(남 55, 여 21, 어린이 25명)이 1903년 1월13일 호놀눌루에 도착했다.

이 가운데 8명이 건강상의 이유로 탈락돼 귀국했다. 이런 방식으로 1903년 한해동안 1133명이 이주했다.

1905년 일본의 압력으로 이주가 제한될 때까지 모두 7226명(남 6048, 여 637, 어린이 541명)이 이주했다. 20∼30세의 젊고 일 잘하는 독신 남성들이 대다수였고 여성은 남성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이들은 하와이에 도착하자마자 여독을 풀 새도 없이 각 섬에 있는 40여개의 농장으로 분산됐다. 잡목을 잘라 밭과 관개시설을 만들고 사탕수수를 재배했다. 하루 10시간의 노동으로 하루 품값은 남자 67센트, 여자 50센트였고 판잣집에서 담요 한장으로 생활했다.

호각소리에 맞춰 잠자리에서 일어나 오전 6시부터 오후 4시30분까지 일했다. 이름 대신 목에 번호표가 걸렸다. 감시관들은 일하는 도중 잡담을 금하고 이를 어긴 노동자들에게 채찍질을 하기도 했다고 초기 한인 이주자들은 회상하고 있다. 농장주들은 한인 이주자들에 대한 식비로 봉급의 반을 제했으며, 일하는 속도가 느리거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벌금을 징수하기도 했다. 심한 경우에는 아예 월급을 못받고 오히려 농장주들에게 빚을 지기도 했다.

이들은 귀국하고 싶어도 농장주가 지불한 돈으로 하와이에 갈 때와 달리 배삯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여서 하와이보다 나은 삶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몇년이 지나자 독신 남성의 결혼문제가 심각해졌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사진결혼이다. 고국의 처녀와 사진으로 선을 본 뒤 결혼하는 방식이다. 신부가 하와이로 오는 여비는 신랑이 지불한다. 1910년 11월28일 23세의 최사라씨가 호놀룰루에 도착해 이내수(38)씨와 결혼한 것이 사진결혼의 시초다. 1924년 미 의회의 동양인 배척법안 통과로 이민이 중단될 때까지 951명의 여성이 사진만 보고 하와이로 건너갔다. 가난과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하와이에 온 이들은 열악한 환경에 실망했지만 고국으로 되돌아갈 형편도 안돼 현실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한인교회는 민족운동과 교육기관의 역할도 했다. 교회를 중심으로 교민들은 3·1 운동 직후인 1919년 10월 3만4034달러5센트를 모아 만주의 독립군에게 보냈다. 이후 해방되기 전까지 300만달러가 넘는 독립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야간에는 교회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한글을 가르쳤다.

하와이=글·사진 신종수 기자
jsshin@kmib.co.kr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재발견―①美하와이] “한인 네트워크 구심 하와이 교회 담당”

"하와이 교회들이 연합해 한인들을 네트워킹하는 구심점이 돼야 합니다."

김낙인(사진) 하와이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담임목사는 하와이 한인들의 의식에 남아있는 역사적 뿌리를 거론하며 교회의 역할을 강조했다.

글로벌 경제위기 상황에서 고통받고 좌절하는 한인들에게 소망을 주고 격려하는 일은 교회의 몫이며, 안티 기독교 풍조를 넘어 복음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크리스천 한사람 한사람이 회개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점도 역설했다.

"어려울수록 나눠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온세상이 기근이 들어도 서로 나누며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울러 김 목사는 하와이 한인들의 교회 출석률이 10%도 채 안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유동인구가 많은데다 인증된 신학교가 한군데도 없고, 교회 사역자를 구하기 힘든 여건을 원인으로 꼽았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교회들이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교회는 끊임없이 비전을 세워나가야 한다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의 경우 앞으로 10년 이내에 목회자 10명과 선교사 10명 이상을 배출하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한국과 미국의 교회들이 하와이에서 만나 교류하고, 영성훈련을 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선교센터를 세우는 계획도 마련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당선자를 모델로 삼아 소수민족인 한인 자녀들이 비전을 갖고 각계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라고 설명했다.

연대 치대 재학 중 목회자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온 그는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석사 및 박사 과정을 마치고 1981년부터 목회자의 길을 걸어왔다. 지난해 이 교회 21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하와이=글·사진 신종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