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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지방 선교(1) -언더우드의 선교보고-

영국신사77 2008. 7. 30. 15:30

 

     

                                                      7인 선발대 선교사

 

                                      호남지방 선교(1)

                                     언더우드의 선교보고

 

호남지방에 복음이 들어 오기 시작한 것은 1894 2월경이다.

1891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안식년을 맞이해 본국에 들어갔을 때 미국 각 지역을 순회하며 선교 상황 보고와 강연을 했는 데, 1891 9월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에서 한국 선교에 관해 강연을 하게 되었다.

이때에 신학생 테이트(Lewis Boyd Tate, 崔義德)가 감동을 받았다.

1891 10월에 테네시 주 내쉬빌(Nashiville)에서 개최된 전국 신학교 해외 선교연합회(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s) 주최의 집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와 반더빌트(Vanderbilt) 대학교 유학생인 윤치호(尹致昊) 강사로 초청해 한국 선교에 관한 강연을 듣고 한국의 현재 정세와 장래에 대해서 문답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4사람의 한국 선교결심

 

벅찬 감격으로 강연을 들은 맥코믹 신학교의 테이트와 리치몬드의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학생 존슨(Cameron Johnson)·레이널즈(William Davis Reynolds, 李訥瑞전킨(William McCleary Junkin, 全緯廉) 등 네 사람은 한국 선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테이트는 지체하지 않고 미 남장로교 외지 선교부 실행위원회에 한국 선교사 지원서를 냈다. 다른 세 사람도 이어서 지원했다.

그러나 남장로회 외지 선교부는 은자(隱者)의 나라(the Hermit Nation)로 알려진 한국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었고, 재정적인 이유와 그 지역 선교에 관심을 아직 두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선교사 청원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열정적인 그들은 물러서지 않고 더욱 결속해 한국 선교에 뜻을 같이하는 청년들(Miss Mattie S. Tate, Miss Linnie Davis. Mrs. Potsy Bolling)과 전킨의 신부 레이번(Mary Leyburn) 등이 동참·가세했다.

그들은 기도하며 선교 본부를 깨우치는 방도를 강구하기로 하고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미국 남장로회의 지역인 버지니아 주, 북캐롤라이나 주, 테네시 주 등에 있는 주요 교회들을 순방해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해 줄 것을 부탁했는 데 언더우드는 쾌히 승낙하고 각 지역의 교회는 물론 각 신학교, 노회, 교계의 각종 집회 등에 나가서 한국의 형편을 설명하고 한국 선교의 긴급성을 역설했다.

기적 같은 기도의 응답

그들의 열성은 더욱 높아져 교회 잡지에도 한국 선교에 관한 논문을 투고하며 1892 2월에는 <선교(The Missionary)>라는 잡지에왜 우리는 한국에 가기를 원하는가?”라는 글을 실어 한국 선교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또한 그들은한국에 선교사로 나가게 될 것인가, 아닌가의 중대한 일을 앞에 놓고 매일 오후 3를 기도의 시간으로 정하고 기숙사의 방문을 닫고 마음을 같이해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께 구했다.

그들은 2년 안에는 기도의 응답을 받을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합심 기도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그들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되었다.

뉴욕에 있는 언더우드의 형으로서 사업가이고, 미 북장로회 선교 위원인 언더우드(John T. Underwood) 장로가 해외 선교 자금이 부족해 고민중인 남장로회 선교부에 3천 달러를 보내온 것이었다. 여기에 선교사 언더우드 자신도5백 달러를 보태어 보냄으로써 남장로회 선교부는 용기를 얻고 때마침 그리스 선교 방침을 중단하게 됨으로써 한국 선교 사업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래서 기도하고 있는 그들에게 ‘8월에 떠날 준비를 하라는 승낙 전보를 보내게 된 것이다.

언더우드 형제는 북장로회인이었음에도 남장로회의 한국 선교를 위해 교단을 초월해, 자진해서 도왔다.

그래서 초대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언더우드를남장로회 한국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호남지방의 7인선발대 선교사

미남장로회 선교부에서는 테이트, 레이널즈, 전킨 등 3명의 남선교사와 이미 동참하기로 결심하고 지원을 한 매티, 볼링, 레이번, 데이비스 등 4명의 여선교사 등, 모두 7명의 선교사를 초대 한국 선교사로 파송하여 이들을 ‘7인의 선발대(Seven Pioneers)’라고 일컫게 되었다.

이들은 189277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남 장로교 소속 목사들과 해외 선교부 직원 그리고 가족 친지들의 전송을 받으며 한국을 향하여 떠나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전킨선교사가 후두염으로 인하여 수술을 받게 되어 함께 떠나지 못하였다.

또한  레이놀즈 부부도 일주일 동안  전킨을 기다리게 되어 테이트와 누이 메티테이트 데이비스 이렇게 3명만 먼저 떠나오게 되었다.

 

데이비스 양은 테이트 선교사와 그 누이동생 매티 양과 일행이 되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오는 데 마침 워싱턴 주재 한국공사관 이자윤 서기관의 부인인 이씨가 함께 승선해 장기간의 항해를 하게 되었는 데 도중에 두 여인은 서로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다.

일본 요코하마에 들른 테이트 남매와는 달리 데이비스 양과 이씨 부인은 곧바로 한국으로 오게 되어 1892년 10월 17 제물포에 상륙했다.

그러므로 미남장로회 선교사 7인의 선발대 중 가장 먼저 한국에 도착한 사람은 여선교사인 데이비스 양이었다.

그후 이들은 일본 요꼬하마에서 머물며 전킨과 레이놀즈 일행을 기다리다가 1892년 11월3 인천제물포항에 도착함으로서 한국선교의 역사적인 첫발을 힘있게 내딛게 되었다.

 

 

 

호남지방 선교(2)

 

전주 지역의 첫 사역자 정해원

한국에 선교사들이 찾아오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호남 땅을 밟은 선교사는 호주 장로회에서 파송을 받고 온 데이비스(J. Henry Davis) 목사였다.

그는 1889년 서울에서 선교지인 부산으로 향해 가던 도중에 충청도와 전라도를 경유하였다. 이후 1892년 말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인 레이널즈(한국명: 이눌서)와 미국의 북장로회 선교사 마펫이 선교 지역 책정 문제를 앞에 두고 호남의 초입인 충남 공주 지방까지 말을 타고 답사한 일이 있었다.

그후 1893년 1월 28 장로회 미션공의회에서는 예양협정(Commity Agreements)에 의해 선교지역을 배정했는 데, 호남 지방인 충청도와 전라도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회의 선교 지역으로 지정(指定)했다.

 그러므로 남장로회 선교회는 앞으로 자기들이 선교를 할 호남 지방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준비 과정으로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의 현지 답사와 선교 중심지역 지정 등에 관해 숙의했다

 

그 당시 호남에는 동학교도들의 움직임으로 민심이 흉흉했고 선교사들은 민심의 동향과 지역 사정에 밝지 못했다.

이에 미국 공사관의 만류로 자기들이 나서기보다는 우선 믿을 수 있는 한국인을 선임해 파송하기로 했다. 그들은 파송 인물 선정이 현지 선교 사업의 개시(開始)인 만큼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국 남장로회 7인의 선발대는 한국에 도착해 이미 수개월을 지내면서 먼저 조선말 배우기에 열성을 가지는 한편 복음 전도에도 노력을 기울이면서 많은 한국인과 접촉했다.

그래서 전주에 처음으로 파송하는 인물은 레이놀즈(이눌서)선교사의 어학 선생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일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던  정해원을 파견하여 거점을 마련하기로 정한다.

그는 상당한 식견이 있어 의사 소통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쁨으로 영접한 신앙인이어야 할 뿐 아니라 금전을 맡겨도 될 만한 인격자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레이널즈 선교사는 우선 자기의 선교 경비 중에서 정씨에게 전주에 가서 집을 구입할 경비와 여비 등을 마련해 주며 여행길에 타고 갈 당나귀를 10(미화 5달러 상당)에 구입해 주었다.

정해원 아마도 1893년 늦은 봄에 5∼6일 걸려서 전주에 도착한 듯하다.

그가 전주에서 처음 유숙한 곳은, 그 해 9월에 두 사람의 선교사(테이트(한국명,최의덕)와 전킨(한국명: 전위렴)가 전주에 답사차 왔을 때 정해원의 안내로 묵었던 곳으로, 성밖 서문 곁에 있는 주막인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는 성 안에 양인(洋人)의 거주를 금하는 때였으므로 몇 날을 전주 주변을 배회하며 전주의 지세도 참작했다.

변두리라 할지라도 성내 중심지와 가까운 곳이며 성벽을 돌아서 서문 밖 지척에 있는 냇물을 건너 변두리 마을인 은송리(隱松里, 지금의 서부 완산동 지역) 뒷편의 언덕과 벼랑은 있으나 꽤 넓은 마당이있고 행랑채가 딸려 있는 초가집 한 채를 52(미화 26달러 상당액)을 주고 정해원이 구입했다.

 6월에 집마련을 마치고 이 사실을 서울에 보고했다.

정해원은 자기의 거처를 주막에서 은송리로 옮긴 후 이웃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다니며 자기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준비차 온 사람임을 밝히며 부근의 냇가에 있는 저잣거리에 돌아다니며 민심을 살피는 일과 장터 전도를 시도했다, 주일이 되면 은송리 집에서 그간 사귀어 온 사람들에게 복음의 도리를 전하고 예배드리며 전주에 처음으로 온 신자답게 생활했다.

그는 선교사들의 신임을 받아 서울에서 전주까지 파송을 받은 사람인만큼 믿음의 열성이 강했던 초대 교회의 인물로 여겨진다.

  그 해 9월에 정씨는 자기 가족을 전주로 데려와 은송리 집에서 살면서 선교사가 지급하는 적은 보수로 생계를 꾸려 나가면서도 전도와 교회 관리에 열성적으로 책임을 다했다. 그의 사역을 돌이켜보면, 초기 전주 교회의 시작 단계에서 그의 노력은 참으로 큰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혀 일반화되지 못한 암울한 사회에서 더구나 척외(斥外)사상이 팽배하던 전주 토반(土班)의 의식구조와 배타심이 강렬한 동학교도의 주창이 보편화되어 있는 이 지역 서민층을 상대로 천주교로 오인받는 기독교 전파의 개시는 심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같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복음을 담대히 전하고 또 교리를 풀어 가르치는 일까지 했던 것이다. 선교사들이 찾아온 뒤 그들의 짧은 우리말 전도에 보충 설명을 하면서 결신자를 얻는 일에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또 그는 조사(助事)라는 명칭을 가진 바 없었으나 훌륭한 조사(Helper)의 역할을 담당했다. 가족과 더불어 약 1년간의 어려운 생활을 하며 1894년 늦은 봄까지 지탱해 오다가 부인의 생활고 호소로 정해원은 선교사에게 사임할 것을 제의했다. 선교사(최의덕)는 한 가정의 최소한의 생계 유지책을 세워 주지 못하면서도 그가 떠나는 것에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이것은 초기 선교사들의 경제 관념이 한국인의 관념과 달랐기 때문이다.

선교사는 보조를 받는 만큼의 부분적 활동을 생각했으나, 정씨는 삶 전체를 바쳐서 일했으므로 다른 방법으로 생계비를 마련할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경제 관념의 차이 때문에 선교사들과 그를 돕던 조사들 간에는 이런 일들이 그 뒤로도 종종 발생하였다. 정해원 씨는 선교사들이 서울에 주재하고 있을 때에도 이 고장에서 열심으로 개인 전도와 교리 공부를 시켜왔다.

1894년 이른 봄에 레이널즈 선교사 일행이 전주에 들렀을 때 세례를 받기 원하는 수삼인이 있어 교리에 대해서 문답해 보니 정확하게 대답하는 것을 보고 정해원이 아주 잘 가르친 것을 인정한 바가 있었다.

이같이 훌륭하게 훈련된 일꾼이 전주를 떠난 후, 전주 지방 선교는 동학 농민군의 난리가 겹쳐서 신자를 돌보는 사람이 없어 다 흩어지고 1년 이상 공백기를 가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