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철 장로(양화진선교회장)
미국 남장로회 해외선교위원회는 1892년 2월 한국선교를 결정하고 7인의 개척선교사를 임명했다. 미혼여성인 린니 데이비스(Linnie Davis), 테이트 남매(Lewis B. Tate와 Mattie S. Tate), 레이놀즈 부부(William D. Reynolds와 Patsy Bolling), 전킨 부부(William M. Junkin과 Mary Leyburn) 등이었다. 이들은 1892년 9월 7일 세인트루이스(St. Louis)에서 한국 출발에 앞서 함께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이들의 내한 경로는 서로 다르다. 전킨은 덴버에서 후두염 치료 때문에 레이놀즈 부부와 출발을 늦췄으며, 데이비스와 테이트 남매는 예정대로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했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테이트 남매가 잠시 체류하므로, 데이비스 혼자 한국으로 향했다. 이때 데이비스는 이자윤(워싱턴주재 한국공사관 서기관)의 부인(이씨)과 동행하여, 1892년 10월 17일 최초로 내한하였다. 다른 선교사들은 일본에서 합류하여 1892년 11월 3일 내한했다.
‘생명을 바쳐 선교한 여장부’ 데이비스(1862-1903, 41세)선교사
린니 데이비스 해리슨(Harrison, Linnie Davis)은 1862년 6월 16일 미국 버지니아 아빙돈(Abingdon)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 어머니의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리니 데이비스
한국 선교를 결심하고 서울에 도착하여 알렌(Allen) 집에 머물다가, 서대문 선교부로 옮겨 동내 아이들과 부인들을 사귀며 복음 전도를 시작했다. 낮에는 평균 80여 가정을 심방함으로써, 1년 동안 무려 1,693명에게 복음을 전했다. 밤에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성경과 찬송가를 가르쳤다.
1896년 군산선교부로 배치되어 어린이와 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1898년 해리슨(Harrison)과 결혼했다. 남편 해리슨은 4살 연하로, 그녀보다 2년 뒤에 내한한 선교사로 전주에서 사역 중이었다.
이들은 전주에 터전을 잡고 어린이· 부녀자· 환자 등을 주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다. 김창국(金昶國) 소년을 자기 집 사환으로 채용하고, 가르침을 통하여 주님과 더욱 교제를 갖게 하여 훗날 훌륭한 목회자가 되게 하였다.
전주 예수병원을 중심으로 불신자(不信者) 어린이와 부녀자를 전도하며 환자를 돌보다가, 그녀 자신도 발진티푸스(Typhus)에 감염되어, 1903년 6월 19일 41세로 순교했다.
전주 선교사 묘지에 최초로 묻힌 선교사로, 동료 선교사들은 “생명을 바쳐 선교한 여장부”라고 하면서 애도 했다.
<전주의 한알의 밀 - 리니 데이비스( Linnie Davis) 선교사>
안녕하십니까 ? 재미있고 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시간입니다.
오늘은 미국 남장로교에서 조선에 , 파송되어 최초로 순교한 여자 선교사님이신 데이비스 선교사님의 조선 사랑 이야기를 통해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조선 선교의 시급성에 대한 호소를 듣고 , 데이비스는 조선에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데이비스가 조선에 오기는 어려움이 많이 있었습니다.
당시 어머니가 중병으로 사경을 헤메고 있었기 때문에 , 데이비스는 떠나는 날을 늦추려 하였지만, 어머니가 강력하게 떠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데이비스는 그래도 어머니를 돌보면서 떠나는 날을 늦추었지만 , 어머니는 내 말에 순종하라고 하면서 야단치듯 빨리 떠나라고 강권하였습니다. 데이비스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역만리 한국 땅으로 향한 것입니다.
남장로교 7인의 선발대로 오신 선교사님 중, 처녀 선교사는 데이비스와 메티 선교사 두 분이 었습니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7인의 선발대중 가장 먼저 한국에 도착하는데 , 그날이 1892년 10월 17일이었습니다. 나머지 6명은 11월 3일에 도착하였습니다.
서울에 도착한지 9일만에, 어머니가 돌아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데이비스는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한국과 미국은 너무 먼 거리여서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뵐 수 없지만 , 천국에서 어머니를 다시 만날때는 한국의 수 많은 영혼들과 함께 만나겠다고 눈물로 기도하면서, 오직 한국인을 위하여 최선의 삶을 살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7인의 남장로교 선교회 선교사님들은 한국에서 추운 겨울을 나면서, 어학공부와 기도로 호남선교를 준비하였습니다. 준비하는 기간에 각 지역을 전도하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언어와 한국의 풍습을 배우며 , 선배 선교사들의 선교현장을 방문하면서, 철저히 호남선교를 위해 준비하였습니다.
드디어 1896년 군산으로 내려가 어린이들과 부인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시작하였고, 학교사역도 감당하였습니다. 그후 데이비스 선교사는 전주로 이전하여 해리슨 선교사와 결혼하였습니다. 당시 해리슨 선교사는 서문밖에서 약방을 개설하고 환자를 치료하면서 선교하고 있었습니다. 데이비스는 결혼하여 더욱 더 안정되게 선교에 힘쓸 수 있었습니다.
전주의 선교의 문이 더욱 더 활짝 열렸습니다. 선교부는 정식으로 전주에 잉골드라는 여의사를 파견하여 병원사역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전주 예수 병원입니다.
그녀는 남편 해리슨 선교사를 도와 전북지방선교를 위해 헌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은 역사하셨습니다. 그녀는 집집마다 가정방문을 통해 전도에 힘썼습니다. 한해에 1885명을 전도하는 열매를 맛보기도 하였습니다.
데이비스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다니면서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심방하고 전도하면서 자랐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전도의 열정이 강하였습니다. 데이비스는 어린이를 누구보다도 사랑하였습니다. 전주 예수 병원에서 입원해 있는 어린이들을 돌보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모두 예수님께 인도하였습니다.
누구보다도 혼신의 힘을 다해 환자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병들어 힘들어하는 어린아이를 보면 견딜 수 없는 사랑으로 그들을 돌보아 주면서 예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그러다 그녀는 열병에 전염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데이비스는 그 병으로 41세의 나이로, 1903년 6월 20일 순교하였습니다. 동료 선교사들은 그녀를 가리켜 " 생명을 바쳐 선교한 여장부 " 라고 하며 애도 하였습니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희생적인 삶을 잊을 수 없었던 군산 영명고등학교 학생들은 성금을 모아, 1958년 군산 선교지였던 구암에 기념비를 세웠으며, 그 땅이 개인에게 팔리게 되자,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에서 전주시 화산동 외국인 묘지로 기념비를 옮겼습니다.
데이비스는 호남지방의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 순교의 피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됩니다.
지금의 호남지역의 모든 교회와 그 성도들을 생각해 보면 , 데이비스 선교사의 순교가 얼마나 귀하고 값지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2002-10-14 09:55:06
*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의 어머니
리니 데이비스 미국 선교사는 조선에 도착한 지 아흐레만에 홀어머니가 별세 하셨다는 소식을 받았다. 그러나 눈물의 기도로 어머니를 전송했을 뿐, 그 어머니를 위하여 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일찍 남편이 돌아가심으로, 과부로서 리니를 데리고 어려운 사역들을 감당하고 있었다.
리니도 처음엔 멕시코 선교사로 작정하고 있었지만, 거긴 별로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고 해서 리니가 조선 선교를 택하게 된 것이다.
리니가 미국을 떠나게 될 때 모친이 위독한 상황이었지만, 어머니는
“지체하지 말고 가거라. 그 길이 네가 갈 길인데, 한시도 지체치 말아라."
떠밀다시피 하며 보낸 어머니 …….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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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 선교의 개척자’ 해리슨(1866-1952, 86세) 선교사
윌리엄 B. 해리슨(William Butler Harrison, 하위염;河緯廉)은 1866년 미국 켄터키에서 출생하여 켄터키 센트럴대학 화학과를 졸업했다. 루이스빌 의대에서 1년간 수학하고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했다.
1894년 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선교 준비를 위하여 서울에 머물다가 1896년 11월 전주에 도착했다. 1897년 전주 서문 밖 은송리 초가집에 약방을 차리고, 경미한 일반 환자를 진료하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했다.
같은 해 11월 잉골드(Mattie B. Ingold) 선교사가 여성 환자를 위한 진료소를 설치하자, 해리슨은 환자진료를 점차 잉골드에게 인계하고 복음 전도에 주력하다가, 1898년 리니 데이비스(Linnie Davis) 선교사와 결혼했다.
그는 특히 전주에서 매 5일마다 서는 장터에서 설교하였으며, 인근 장터마다 2개의 헛간을 지어 장터 선교를 계속했다. 전도하는 방법으로는 호별 방문보다, 장날에 모여드는 장꾼들을 상대로 전도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장터선교에서 많은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 이유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구경을 하고 싶은 호기심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1903년 부인 데이비스가 별세한 후에는, 선교지역을 군산으로 옮겼다. 전킨 후임으로 군산 영명학교 책임자, 남전교회(1904-1908 및 1916-1917), 개복교회(1905-1911), 담임목사를 비롯하여 웅포교회, 동연교회, 무주읍교회에서 활동했다.
1909년 신축한 신흥학교에서 니스뱃, 레이놀즈에 이어 교장으로 봉직했다.
1911년 10월 15일 전라노회가 서문교회에서 창립될 때에는 규칙위원과 해남, 강진, 장흥, 영암지역의 당회 권리를 위임받아 활동하였다.
1917년 10월 10일 전북노회가 처음 조직될 때에는 규칙위원과 군산 시찰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특히 1921년에는 사기편집위원으로 테이트(崔義德)와 호남지방 기독교역사를 기록하고 편집하는데 기여했다.
1924년에는 익산 송산교회 재건에 협력하여 조왕리로 이전하고, 노회 진흥부 회계로 종사했다. 그 후에도 노회 총대, 규칙위원장, 전도위원, 사경부위원, 재판위원 등으로 폭 넓게 활동했다.
1928년 1월 2일 구암교회에서 개최된 제21회 임시 전북노회에서 기도를 담당한 뒤, 34년간 모든 젊음을 한국에 바친뒤 미국으로 돌아가 1952년 별세했다.
해리슨 부부의 한국 선교를 감사하며 합장 방안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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