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웬 선교사가 뿌린 씨앗
▲ 오 목사네 집.(by 양국주)
수피아여고 뒷동산 광주 양림동에 오 목사네 집이 있다. 사방으로 툭 터진 구릉에 자리 잡은 오 목사네 집에서 바라보면 광주천을 끼고 크고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정경은 흡사 다정한 친구들이 어깨동무하고 있는 모습이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은 비교적 입지 조건이 좋은 서문 밖 일대에 정착했다. 서문 밖 보작촌(洑作村, 현 황금동과 불로동)에 사원도 지었다. 이곳에는 아직도 일본인들이 심은 설송과 기와 기붕을 얹은 일본식 가옥들이 눈에 뜨인다. 일본인들이 서문 밖 황금정 일대에 유곽을 형성하고 성안의 본정통(本丁通, 현재의 충장로)을 중심으로 거점을 구축했던데 반해,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은 양림천 주변 달동네에 자리 잡은 탓에 ‘서양촌’이라고도 불렸다. 지지리도 궁상맞은 가난뱅이들이 살던 터라, 양림천의 거지들 뿐 아니라 갈 곳 없는 문둥병 환자들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오 목사 집 주변에 장사진을 쳤다.
서울 정동에 잡리 잡은 언더우드가 정승 강노의 고래 등 같은 한옥을 사들여 고아원을 세우고 교회를 열었지만,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출발과는 판이한 양상이었다. 당시 정동에는 언더우드 목사의 사택을 중심으로 아펜젤러와 스크랜턴이 담장을 나누었고, 제중원을 맡았던 헤론이 북동쪽에, 정신여학교를 세운 애니 앨러스가 남동쪽에, 마포삼열이 북서쪽에 이웃하며 살았다. 이들이 고종 황제 곁에서 육혈포를 차고 권력의 심장 가까이 지냈던데 반해,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면서 가난한 민중의 삶에 깊숙이 다가섰다.
배유지와 포사잇, 서서평과 유화례, 코잇이 보여준 사역의 정형들은 예수의 인카네이션에 대한 깊은 자성을 돌아보게 한다. 이러한 사역 결과는 이들 선교사들이 죽었을 때, 복음을 전수받은 사람들, 삶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들의 태도와 반응에서 확연한 차이가 난다.
서서평 선교사가 자신에게 부쳐온 헌금을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몽땅 써 버린 후, 정작 본인은 영양실조로 죽게 된다.
처녀의 몸으로 이 땅에 와 죽기까지 자신을 연소한 후 그녀에게 남겨진 재산은 오로지 현금 27전이 전부였다. 텅 빈 저금통장은 그녀가 빈민들을 위해 사용하느라 마를 날이 없었다. 궁색하기 짝이 없는 반쪽 자리 담요는 반을 찢어 가난한 이들에게 구제하느라 주고, 나머지 반쪽으로 가냘픈 육신을 가려야 했다.
서울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에게는 식모뿐 아니라 유모를 고용하거나 자녀 교육비, 심지어는 애완견의 사육비까지 지급되었다. 선교사의 하루 식대가 3원인데 반해, 서서평의 하루 식대는 언제나 10전이었다. 그야말로 다른 선교사의 생활비 30분의 1로 하루하루 자신의 목숨만 버텨온 셈이다. 그리고 그녀가 입양했던 요셉이 외로운 유족이었다. 요셉은 그녀가 보호하던 한센병 환자의 아들이다.
서서평의 뒤를 이어 이일성경학교 교장이 되었던 도마리아 선교사 역시 한센환자의 사내아이를 입양하고 이삭이라고 이름 지었고 수피아 교장이던 유화례 역시 한센 환우의 어린 딸을 양녀로 입양해 진주라고 이름 지었다. 이들이 조선의 버림받은 한센환자의 자녀를 입양해 제 자식인양 키운 것은 단순한 자비심에서가 아니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당연한 삶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런 멋진 처녀 선교사들이 광주에 몸 담고 일했던 것은 빛고을 광주뿐 아니라 조선의 축복이다. 그러한 축복의 중심에 오 목사가 있다.
오 목사는 남장로교 선교사 가운데 양림동 뒷산에 최초로 묻힌 선교사다. 광주며 순천에 부임하는 선교사마다, 양지 바른 양림동 오 목사댁을 방문하고 선교적 열정과 사명을 되새김하곤 하였다.
피곤할 때마다 외로울 때마다 선배의 조언이 그리운 때면, 이들은 오웬의 무덤에 앉아 자문자답하고 하였다. "오 목사는 왜 이곳에 있느냐고?" 얼핏 오 목사네 집 문패처럼 보이는 이 사진은 오웬 선교사의 비석에서 따온 것이다.
오웬 목사
1867년에 태어나 마흔 두 해 짧은 인생, 가장 건강하고 황금같은 시기를 조선에서 보내고 이 땅의 사람들을 섬기다 간 사람. 오웬을 가리켜 당시 사람들은 그저 ‘오 목사’라 불렀다. 이름 석 자 뒤에 흔하게 붙을 법도 한 목사님 존칭도 없고 박사 학위조차 없다. 정말 겸손하고 가슴이 넉넉한 분이었던 것 같다. 오 목사가 죽고 난 이후 세워진 비석인지라 존경의 뜻을 덧붙여서라도 ‘오 목사님’이라고 불러도 좋으련만, 왠지 요즈음의 세태와는 거꾸로 산 분 같아서 오히려 신선하고 잔잔한 감동마저 준다.
1897년 목포가 개항하면서 서남지역에도 크나큰 변화가 불어 닥쳤다. 일본 승려의 뒤를 이어 목포에 자리 잡았던 선교사들이 나주관찰부가 폐지되면서 광주가 전라도의 도청이 되자 기독교 선교의 중심지로 광주가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 코잇 선교사의 무덤. (by 양국주)
원래 의사였던 오웬은 1904년 광주에 들어와 간호사였던 부인과 함께 선교 및 의료봉사로 순회하던 중 급성폐렴으로 죽었다. 1909년이다.
포사잇 의사와 더불어 나병환자를 돌보던 오 목사의 뒤를 이은 윌슨 선교사가 광주 봉선리에 작은 집을 지어 나환자 10명을 수용했다. 후에 최흥종과 쉐핑, 윌슨선교사가 모금을 해 나환자 600명을 여천군 율촌으로 옮기면서 여수애양원이 세워졌다. 사람이 사람을 낳고 인물이 인물을 낳는다.
오 목사 집 주위로 유진 벨, 마가렛 벨, 서서평, 그리고 이 땅에 태어나 일 년 하고 7개월을 갓 넘기고 천국에 간 로베르타 코잇의 무덤도 있다. 흡사 십계명의 두 돌피처럼 나란히 묻힌 그녀의 오빠 토마스 역시 3년 7개월의 짧은 목숨을 살다 동생이 죽고 난 다음날 죽었다.
1913년 4월, 사랑하는 아들과 딸을 하루건너 가슴에 묻어야 했던 코잇 선교사 내외는, 이듬해 순천에 순천 기독진료소를 세우고 어린이 성경학교를 열었다. 두 자식을 떠나보낸 빈자리에 이 땅의 자녀들로 채워 나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오 목사가 죽자, 미국의 친지들과 후원자들이 1914년에 오웬기념관을 세웠다. 오 목사의 뒤를 이었던 서서평 선교사가 이 건물에서 조선 최초의 여자신학교인 이일 성경학교를 만들었고 간호전문인을 양성하는 학교를 만들었다. 140평 남짓 건물에서 한국 의료역사의 큰 꿈도 이루어지고 기독교 선교 역사의 미래도 펼쳐졌다.
광주에 자리 잡고 이 땅의 버림 받은 이들을 섬기던 오 목사가 뿌린 씨앗이다. 내년 4월이면 클레몬트 오웬이 이 땅에서 숨을 거둔 지 100주년이 된다. 양림동 뒷산에 올라 오 목사댁을 방문하면서 절대 경외를 경험하게 되었다.
양국주/ 열방을섬기는사람들 대표
by:호도알(http://cafe.daum.net/p1a2p3/DJwn/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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