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선교사 · 신앙偉人/海外선교* 선교사

★●중세의 아시아 선교 I, II.

영국신사77 2008. 9. 29. 00:38
                                        중세의 아시아 선교 I.

                                                   -프란시스칸과 도미니칸의 활동을 중심으로-


  

                                                                                                                                             손 윤 탁  2001-01-11

 

                               I. 레이몬드 룰과 아시아의 이슬람지역 선교

   설탄왕을 개종시키기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이슬람지역으로 뛰어 들었던 아시시의 프란시스 이후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선교에 힘쓴 사람은 레이몬드 룰(Raymond Lull 혹은 룰루스 Ramon Lullus. 1232-1315, 83세)이다.

   그는 프란시스칸 선교사인 동시에 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30세가 되기까지 방탕한 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회개하기 전에는 일개 시인에 불과하였던 그는, 화려하고 경박한 그러면서도 여자들의 비위나 맞추는 젊은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세 차례나 반복된 주님의 음성을 듣고 회심하게 되었으며, 그 이후 50년간 단 한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주를 섬겼다. 스테반 닐은 그의 개심은 완전한 것이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처음 도미니칸이 되고자 하였으나, 자신의 계획과 일치하지 않음을 알고 프란시스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교단의 제3회 원(Tertiary)이 되었으며, 학자와 저술가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미라미르, 몽펠리에, 파리 등지의 대학에서 가르쳤으며, 저서만 해도 290여권으로서 지금까지 240여권이 전해지고 있으며,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사랑 받는 자와 사랑하는 자 (Book of the lover and the Beloved)'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업적은, 이슬람교도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한 선교사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슬람교도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기로 결심하고 아랍어를 배웠으며, 아랍의 생활 방식을 배웠다. 당시의 모든 책들이 라틴어로 기록되었으나, 그는 카탈로니아어와 아랍어로 저술함으로 말미암아, 그는 라틴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기술한 최초의 기독교 신학자가 되었다. 자신만 아랍어를 배우고, 그 아랍어로 책을 저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를 위해 언어를 교육할 학교를 세워야 함을 역설하였고, 선교사로 파송되는 사람은 최상의 설교가여야 함을 강조하였으며, 교회 수입의 1/10을 선교를 위하여 씀으로서 전 세계를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정리하면 바로 다음과 같이 룰이 말한 사라센 복음화를 위한 세 가지의 요건 (the opinion for the evangelization of the Saracens)으로 요약될 수 있다.

   1) 폭넓은 아랍권 언어에 대한 이해와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룰이 꼭 필수적이라고 지적한 언어는 히브리어, 아라비아어, 시리아어, 그리스어 등이었다.

   2) 그리스도의 진리가 이치에 맞게 필연적으로 밝혀져 있는 책의 출판이다.
      모슬렘들도 그들 나름대로 스콜라철학을 발전시켜 왔다. 필연적으로 논리적인 증거에 의해

      참과 거짓을 밝히기 위해서는 책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하 였다.

   3) 사라센을 개심 시키기 위해서는 생명을 잃는 한이 있어도,

      충성과 용감한 자세로 복음을 전하겠다는 자발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모슬렘 선교를 위하여 네 번이나 북아프리카를 방문하였으며, 또 이들을 위하여

      선교하다가 순교하기를 원하였다.

 

      결국 그는 1315년 부기아(Bugia)로 갔다가, 돌에 맞아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II. 탁발 수도사들의 중국(몽고제국) 선교 

  중국에 기독교를 처음으로 전파한 사람들은 네스토리우스파였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파의 중국 선교가 실패하고, 제2차로 중국 선교를 위하여 찾아온 사람들은 프란시스회와 도미니크회의 수도사들이었다. 당시의 중국은 몽고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마치 1세기가 로마의 평화로 사도들의 길을 준비하였던 것처럼, 13세기는 몽고의 평화를 이루어 콘스탄티노플과 아시아의 횡단으로 절반이나 되는 세계에 카톨릭 선교의 문을 열어 놓았다.

   그 중에서도 먼저 파송된 선교사는 교황 이노센트 4세에 의하여 파송된 프란시스회 수도사인 조반니(Giovanni, John of Plano Carpini, 1180-1252)였다.

   1245년 리욘(Lyons) 회의의 결정에 따라 교황의 서신을 가지고 1246년 일행과 함께 몽고에 도착한 그들은 선교에는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그 대신 몽고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들이 있음을 전해 주었다.

   두 번째 보낸 파송사절은 첫 번째 사절 때보다 더 결과가 좋지 못하였고, 그 이후에도 몇 차례 선교사겸 사절단을 보내었으나, 선교에는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260년 베니스의 상인 니콜로와 마페오 폴로 형제가 육로로 북경까지 가서 쿠빌라이 칸으로부터 후대를 받고 1269년 귀국한 이후, 1271년에 다시 니콜로는 그의 아들 마르코 폴로를 데리고 북경에 데리고 가게 되었는 데, 이것이 바로 마르코 폴로가 17년동안 황제를 봉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1292년 상해로 내려와 지나해, 인도양을 거쳐 파사로 지중해를 지나 귀국하였으며(1295년), 마르코 폴로가 제노아와 싸우는 베니스 군에 가담하였다가 포로가 되어, 중국 여행 경험을 동료 포로로 하여금 프랑스어로로 기록케 하였는 데, 이것이 19세기까지도 서양에서는 유일하였던 동방견문록 이다.

  

                                 <선교의 길이 열려 있던 100여 년 간 파송된 수도승들>

  그러나 모두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프란시스 수도사인 몬테코르비노의 요한(John of Montecorvino, 1246-1328)은 인도를 거쳐 1294년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는 칸의 후계자인 티무르(Timur)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으나, 너무 깊이 우상 숭배에 빠져 있는 황제를 개종시키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교회를 세우고, 1305년까지 6,000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150여명의 소년들을 모아 희랍어와 라틴어를 가르쳤으며, 서방 교회의 양식에 따라 예배 때에 노래를 부르도록 훈련을 시켰다.

 

  교황 클레멘트 5세는 1308년에는 그에게 대주교로 임명까지 하였다. 그는 교회 법에 따라 극동 라틴 교회의 첫 캄발렌의 대감독이 되었다.

   1328년 몬테코르비노의 죽음으로 선교 사업도 약화되고 말았다. 그 후 여러 번 선교사들이 파송되기는 하였지만, 그 때마다 중국에 도착하지 못하였으나 1335년 마리그놀리의 요한(John of Marignoli)이 50여명의 수도사들과 함께 아비뇽을 떠나 3년이 넘는 육상여행으로 32명이 중국에 도착하여 티무르의 환영을 받았으나, 사실은 이번에도 한 차례의 사절로 끝나고 말았다.

   1362년 몽고족이 중국으로부터 축출됨으로 최후의 라틴 감독 플로렌스의 제임스는 순교를 당했다고 전해지며, 1369년 라틴교회는 중국에서 최종적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명나라의 등장과 함께 몽고도 교회도 함께 축출되고 말았던 것이다. 서방교회에 주어졌던 기간은 200여년이었다. 

 
                                        III. 그 이후 예수회 선교사들의 중국 도전

   무려 2세기에 걸친 기간 동안 프란시스회와 도미니쿠스회가 탁발승단으로서 선교 활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였고, 회교권 선교와 아시아 그 가운데에서도 중국 선교에 특별한 열의를 가지고 힘을 썼으나, 16세기와 17세기 중간에 예수회(Jesuit Order)가 창설되면서, 열정적인 선교 교단으로서 새로운 자리 매김을 하게 된다.

   중국 선교도

      제1차를 네스토리안의 경교 시대,

      제2차 선교 시기를 프란시스칸들과 도미니칸들이 활동하던 때로 잡는다면,

      제3차로 중국 선교에 나선 사람들은 바로 예수회 회원들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회의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인 프란시스 자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는 중국 선교의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프란시스 자비에르의 인도와 일본 선교

   1542년 인도에 도착하여 인도 선교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어린이 교육과 하층민 중심의 선교에 힘썼다. 그러나 상류층에서 사회 질서를 문란케 한다는 이유로 많은 박해를 받은 후, 1549년 일본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는 중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들른 것이 27개월이었다.

 

  일본에는 계속적으로 예수회 선교사들이 들어와 선교하게 되고, 처음에는 가난한 계층에서 개종자들이 많았으나, 1563년 오무라 스미타다(Omura Sumitada)라는 다이묘가 세례를 받음으로, 다이묘의 개종이 시작되었다.

 

  16세기말에는 세례 받은 신자가 3000명에 이르렀으나, 도요도미 히데요시(1537-1598)가 정권을 잡으면서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었고, 그 이후 수많은 사람이 순교를 당하고 선교사들이 추방 당함으로써, 이후 극소수의 비밀 신자들을 제외하고는 200년 이상 공식적인 기독교는 사라지고 말았다.

  중국 선교에 있어서 프란시스 자비에르의 꿈을 이어받은 사람은, 같은 예수회 소속의 마테오릿치였다. 마테오릿치(Matteo Ricci, 1552-1610)는 이태리 사람으로 수학과 천문학에 밝았으나, 중국식 기독교를 표방함으로 후에 프란시스회와 도미니크회 수도사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중국 선교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상 숭배와 공자 숭배를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존경을 표현하는 사회적인 관습으로 보아 인정하였으며, 그 자신도 처음에는 불교 승려복을, 후에는 유학자의 복장을 하였으며, 전도에도 적극적이지 못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IV. 탁발 수도승의 인도, 중앙아시아, 몽고족 선교

   중국은 물론 당시의 세계는 몽고제국의 지배권 아래 있었다. 교황청과 탁발 수도사들로 구성된 프란시스회와 도미니쿠스회의 선교는 중국의 심장부에 그치지 않고, 주변국과 몽고족 선교를 위해 노력한 여러가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인도는 오래 전부터 기독교가 있어 왔던 나라이다. 사도 도마에 의하여 설립되었다는 도마 교회가 있기는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인도의 선교에는 진전이 없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중국으로 오가던 그리스도인 여행자들이 잠깐 체류하는 곳으로, 그 때마다 전도의 흉내를 내는 정도에 그쳤을 뿐, 항구적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시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14세기 후반 프란시스 수도회의 세 명의 수도사와 한 명의 평신도로 구성된 일행이, 봄베이 근처 타나(Tana)에 머무르면서부터 색다른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발단은 단순히 내방객이었던 이들에게, 톨렌티노의 도마(Thomas)가 모하메드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모하메드는 지옥의 자식임을 말하면서, 그를 따르는 자들도 재앙과 저주를 당할 것이라고 대답함으로, 조르단(Jordan of Severac)만 겨우 살아남았을 뿐 나머지 세 명은 모두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게 된다.

 

  이것이 기회가 되어, 조르단은 인도의 복음화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게 되고, 결국 1329년 교황은 이 프란시스칸을 콜룸붐(Columbum) 감독에 임명하게 된다. 서품 여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그가 콜룸붐에 있게 된 것은 북부에서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개방적인 남쪽을 택하였고, 그가 정착한 곳도 트라반코레(Travancore)에 있는 콜룸붐으로, 그곳은 네스토리안 그리스도인들의 거주지였다.

 

  몇 년후 같은 프란시스 수도사로서 중국으로 파송된 마리그놀리의 요한에 의하여 그 자취들이 발견되었으며, 1542년 프란시스 자비에르가 인도에 도착함으로 인도 선교에 새 힘을 불어넣으려고 힘썼으나 그 후 인도 선교는 특별한 진전이 없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그 너머 카스피해의 초원과 흑해 연안 지역은, 서방교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선교의 시도가 좌절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란시스 수도회와 도미니쿠스회의 수도사들은 포기하지 아니하고, 1300년경 새로운 선교적인 시도를 도모하였다. 중요한 것은 이들 수도사들에게 이례적인 특권이 부여되었는 데, 그것은 금전의 휴대와 승려복 이외의 의복 착용, 턱수염을 기를 수 있는 것등의 허용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목민인 몽고족들과 똑같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1335년경부터 이 탁발 수도승들은 몽고의 복식을 하고, 몽고의 마차에 올라, 몽고족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돌아다니며, 움직이는 수도회(mobile convents)를 통한 활동을 하였다. 성공적이었다. 특히 러시아 동부의 황금 유목민들(Galden Horde)을 관장하는 칸(Toqtai)이 1311년 프란시스칸 수도사로 말미암아 신앙을 받아들이고, 아내와 세 아내와 몽고족의 추장들과 함께 세례를 받게 된 것이다. 물론 몽고 민족의 미래는 이슬람의 손에 있게 되어버렸으나, 1362년 사라이(Sarai)에 감독이 파견될 정도로 대감독 교구로 승격하였던 것이다.

   이미 로마, 파리를 비롯한 유럽지역과 북아프리카를 네 차례나 방문하며 사라센지역 선교를 위해 헌신한 프란시스칸 룰루스에 대한 기록을 살펴 본 것과 마찬가지로, 미래적인 역사에 관계없이 도미니쿠스파 수도사들과 프란시스파 수도사들의 선교 공적은 대단한 것이었다. 흑해와 발트해 사이의 광대한 땅을 몽고 주둔군 밑에서 통치하던 알란공(Alan of Vospro)을 개심 시킨 것도, 1333년 도미니크 수도사인 프란시스(Francis of Camerino)와 영국인 윌리암이었다.

  
                                                                 V. 맺음 말

   프란시스회와 도미니크회는 선교에 특별한 열정을 가진 수도 교단들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순교적인 자세로, 당시 사라센 지역뿐 아니라 멀리 중국과 인도 지역까지 헌신적으로 선교하였다. 어두움 가운데 표류하던 중세의 교회사에서, 이 두 탁발 승단은 선교사(史)를 빛낸 작은 등대들이었다.

   그러나, 아직 몽고 제국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기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수고와 노력은 한 때의 교회 세력에 불과하였을 뿐, 또 다시 아시아와 모슬렘 지역들이 어둠 속으로 침잠하도록 버려진 세계가 되어 버렸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선교 열정과 순교적인 정신, 선교 전략적인 차원에서의 효과적인 방법과 지속적인 교회 성장을 위한 새로운 방안 등을 생각케 하는 이들의 업적은, 오늘날까지 매우 중요한 선교적 교훈이 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중세의 아시아 선교 II

                                            - 프란시스 자비에르와 그 이후 제수이트 교단을 중심으로-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손 윤 탁 목사

 

 


                     I. 제수이트 교단(예수회, Jesuits ; Society of Jesus) 

   1540년에 주어진 이름이지만 1534년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가 창설하였다. 여섯 사람이 이그나티우스에게 가담하였는데, 그들은 프란시스 자비에르, 바베르(Pierre Le Favre), 라이네즈(James Laynez), 살메른(Alphonsus Salmeron), 보다딜라(Nicholas Bodadilla), 로드리게즈(Simon Rodriguez)등으로 1534년 몽마르트 맹세로 유명하다. 그 서약 내용은 교황에게 충성하되, 교황이 파견하는 곳에는 어디든지 갈 것을 맹세한 것이다.

  1540년 Regimini militantis ecclesiae 라는 칙서에 의하여 예수회로 조직되었다.

   1540년에서 1555년까지 급속히 성장한 예수회는 독재적인 구조가 필요하였는데, 이그나티우스는 군사적인 훈련과 실천으로 이 요구를 만족시켰다. 교황에 대한 특별한 복종과 예수회에 대한 완전한 헌신은 명상적인 수도회가 되기보다는, 사회에 대한 봉사 를 강조함으로 고아원과 매춘부들을 위한 보호소, 학교, 빈민 구제 센타, 가난한 농민들을 위한 은행 체제등을 만듦으로서, 예수회의 선교 사업은 더욱 확장되었다.

 


           종교개혁을 선봉에서 지적(知的)으로 공격했던 제수이트파의 가톨릭 변증가들 

 안타까운 것은 1556년 이그나티우스가 죽었을 때 예수회는 대단히 강력해져 있었으나, 사역의 방향이 가난한 사람보다는 귀족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중등학교와 대학교 설립으로 당대의 유럽에서는 가장 효과적인 교육 방법을 제공하는 단체로 알려져 있었으며, 그 결과 종교개혁을 지적(知的)으로 공격하는데 가장 선봉에 선 사람들 바로 제수이트파에 소속된 가톨릭 변증가들이었다.

   1578년 영국에 들어갔을 때부터 상당한 위협을 받은 이들은, 18세기 폴투칼(1759), 프랑스(1764), 에스파니아(1767)에서 모두 추방을 당하였을 뿐 아니라, 여러 나라들로부터 압력을 받은 교황(클렌스14세)은 1773년 예수회를 억압하는 칙서(Dominus ac Redemptor)까지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814년이 되어서야 교황 보니파우스 7세에 의하여 (칙서 ; Sollicitudo omnium ecclesiarum) 회복되었다. 지금도 예수회는 교육계에서 강력한 세력으로서 카톨릭의 많은 대학과 아카데미들을 맡고 있음을 보게 된다.

   오늘날의 선교가 복음 전도와 사회 선교라는 양축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처럼, 프란시스 수도회나 도미니크 수도회와 비교되는 교단이 바로 예수회였다.

   그러나 이 제수이트 교단(예수회)이 결코 복음 선교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잠깐 소개한 프란시스 자비에르나 마태오 릿치등과 같은 선교사가 있었으며, 인도의 회교도들에게 나아가 회교도가 코란을 들고 불 속에 들어간다면 그들도 성경을 가지고 그렇게 하겠다 고 제안할 정도로 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남미와 중미, 북 아메리카 선교의 대부분과 필리핀 선교는 모두 예수회 선교사들의 공이다. 


 
                                   II. 제수이트 교단의 아시아 선교 

                             
1. 대표적 선교사 프란시스 자비에르와 마태오 릿치

                              
프란시스 자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

   스페인의 바스크(Basque) 가문의 귀족 출신인 프란시스는 나바레에 있는 자비에르성에서 태어났다. 파리대학교 법학과 출신으로 예수회의 설립 멤버이기도 한 그는 가난과 정절로 예수님을 따르고, 이교도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서약하였으며, 1537년 베네치아에서 서품을 받았다.

 

   1539년 포르투칼 왕 후안 3세의 요청으로 교황 사절에 임명되어, 말레이반도의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1542년 고아에 도착하여 3년간 병자들을 상대로 전도와 봉사에 전념하였으며, 인도 남서부 진주조개잡이들을 상대로 한 전도에 크게 성공하여. 수 천명에게 세례를 베푼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549년 말라카에서 만난 일본인 야지로를 데리고 일본에 도착하였다. 일본어를 배웠으며, 2년만에 교인수 2,000명의 기독교 공동체를 설립하였으나, 불교 승려들에 의하여 추방당하게 되었으며, 그 후 기독교는 큰 박해를 받았다.

   1552년 인도 고아대학에서 일하다 중국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애를 썼으나, 입국을 거절당하여 산시안 섬에서 5개월간 병들어 그해 12월 3일 죽었다.

   그의 시체는 고아에서 장사되었으며, 1622년 성자 반열에 올랐다.

   자비에르 프란시스는 전도에 성공하였으나, 방법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있다. 동양 종교에 무지하였으며, 상황 개선의 노력보다는 종교 재판소를 설치하였고, 인도에서는 사람들의 개종을 위하여 고아 정부를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 해외 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 공로가 있으며, 예수회에서는 자비에르에 의하여 개종된 사람의 수는 70만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마테오 릿치(중국이름 ; 리 마태, Matteo Ricci, 1552-1610)

   프란시스 자비에르가 죽었던 해에 태어났다. 이탈리아 예수회의 수사로서 로마에서 법률을(1568년), 로마대학에서 수학· 천문학· 지리를 공부하였다(1572-6).

   1577년 리스본을 경유 인도에 도착한 그는, 1582년 마카오에 살던 발리냐노(Alexander Valignano)의 요청으로 마카오에 들어가, 그곳에서 중국어 문법과 회화를 공부하였다.

   1583년 중국 자오칭에 있는 행정관의 초청으로 본토에는 들어갔으나, 일본 풍신수길(도요도미 히데요시)의 침략으로 외국인 북행이 금지되어 1594년에는 쑤저우(蘇州)에서, 1599년에는 난징(南京)에 머물다가 1600년에 난징에서 출발, 텐진(天津)에서 구금까지 당하였으나 1601년 드디어 베이징(北京)에 당도하여, 황제를 만나 거류 허락을 받았다.

 

  그 이후 그는 그곳을 떠나지 아니 하였으며, 그 곳에서 죽어 어명 묘지(황제가 하사한 타타르시의 묘지)에 안장될 정도로 중국인으로 살았다.

   세계 지도· 시계· 서적· 수학 도구들을 통하여 지식인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으며, 상해의 선교 아버지라 불리우는 서광계(徐光啓)등도 그의 제자이다.

 

  1594년 쑤우저(蘇州)에서부터 복장과 예법을 완전히 중국 지식인들의 것으로 바꾸었으며, 유교의 문화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접근하여 유교 제례를 인정하여 중국 전례 논쟁(中國 典例 論爭)에 불을 붙였다.

   20여종의 종교· 과학· 우의· 기행에 관한 책을 남겼고, 참 하나님· 십계명· 욜 문답 등 문서 전도용의 서적들도 남겼다.


                *
참고 - 중국 전례 논쟁(中國典例論爭, Chinese Rites Controversy)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일어난 선교 방법에 관한 논쟁으로, 실제적으로는 로마 가톨릭 사제였던 마테오 릿치와 관련된 논쟁이다.

   릿치가 말한 중국인들에게는 그들 자신의 용어로 기독교를 설명하여야 한다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조상들과 죽은 친족들을 숭배하는 전례(典例)들을 용납하였고, 공자 숭배를 인정하였다. 그것이 곧 중국인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현대 선교 신학에서까지 논쟁을 일으키는 문제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황 클레멘스11세에 의하여, 그 전례들을 정죄하는 교령을 내렸다(1704, 1715).

  

                                              2. 지역별 선교 활동

                                                   인도 지역 

   1500년경 인도의 최남단 지역에서 폴르투칼 사람들에 의해 발견된 성 도마의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신도 10만을 헤아리는 기독교 공동체로서, 오래전에 이 나라에 설립되어 전혀 외국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일이 없이 내려 오고 있었다. 이 공동체는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주변 백성들의 습관과 방식에 동화되어 있었으나, 이 무리들은 의심할 나위도 없는 그리스도의 백성들이었다.

   16세기 이후 감독 없이 지내 오던 인도의 교회는 메소포다미아 감독들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포르투칼인들에게 거부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마르 조셉(Mar Joseph)은 인도에 들어오지 못하고, 1558년 트라반코레(Travancore)주로 알려진 산악 국가 세라(Serra)에서 자신의 교구를 마련하였으며, 인도인의 요청에 의해 파견된 마르 아브라함(Mar Abraham) 역시 폴투칼인들과 접촉을 피하였으나, 결국 체포되어 로마로 이송되었다. 다시 감독의 서품을 받아 인도로 오게 됨으로, 당시 예수회 교단의 수도사들은 케랄라(Kerala)로 들어와 바이피코타(Vaipicotta)에 신학교를 세우는 성과를 올리게 된다.

   시리아어와 라틴어를 가르친 이 학교는 성직자를 양성하는 학교였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회 교단은 교육을 중히 여기는 선교회였다.

  예수회 소속의 프란시스 자비에르는 인도 선교는 고아에서 시작된다. 어려운 타밀어를 완전히 배운다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고, 그래서 그는 불완전한 통역의 도움으로 주 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들을 번역하였으며, 주위의 소년들을 모아 교육함으로 이들이 어른들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포르투칼인들의 악행· 폭력과 파라바스족의 무지와 변화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교육에 힘쓴 결과, 그가 떠난 이후 예수회가 열 여섯 개의 큰 부락에 파라바스족을 모우고, 부락마다 예수회 신부를 상주시킬 정도로 큰 변화를 일으켰다.

   스티븐 닐은 지금도 모래 언덕 넘어 마나파두(Manappadu)의 거대한 교회들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되는 데, 이것이 바로 예수회 선교의 결과임을 강조한다.



                                                           
일본 선교

   1549년 8월 15일 일본의 가고시마 항구에 상륙한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 자비에르의 활동에 대해서는 간단하게나마 이미 고찰하였다.

   프란시스 당시의 일본은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로, 중앙집권적인 형태가 아닌 250여개의 다이묘요(大名)라고 하는 분할된 지방 군주 중심 체제였다.

   외국인에 대해 문호는 개방되어 있었고, 특히 조총에 관심이 높았으나 무역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에서 27개월을 봉사한 자비에르가 일본을 떠난 후(1551년), 1593년까지 일본의 전도 사업은 전적으로 예수회가 장악하였으며, 선교사의 숫자는 급속히 증가되었다. 특별히 개종한 다이묘오 가운데 오무라 수미타다는 1571년 그의 신민 중에 5600명의 그리스도인들을 1575년 4년만에 5만 명 이상의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

   1579년에는 이태리 출신의 예수회 수도사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1537-1606)가 동양지역의 순찰사로 일본을 방문하였으며, 그 당시 일본 선교의 책임자는 카부랄(Francis Cabral)이었다. 카브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발리냐노의 주장대로 일본에 신학교가 개교되었는,데, 1593년의 통계에 의하면 56명의 유럽인 사제와 11명의 평신도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신학교에는 87명의 신학생과 5명의 초신자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폴투칼 사람들과 마닐라에서 들어온 스페인 사람들과의 세력 다툼으로 일본은 혼란하였으나, 1601년 10월 22일 일본인으로서는 최초의 사제들을 안수하게 된다. 한 사람은 세속 사제였으나, 예수회 수도사로 안수받은 사제는 세바스티안 키무라(Sebanstian Chimura)와 알로이시우스 니아바라(Aloysius Niabara)이다. 

   16세기말 일본의 세례받은 신자 수는 30만명에 달하였으나, 1590년 풍신수길(도요도미 히데요시)의 일본 천하 통일과, 그 뒤를 이은 덕천가강(이에야수)과 덕천가광(이에미쓰)의 통치 기간을 지나면서, 거의 모든 신자는 죽임을 당하거나 배도함으로 그 막을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일본의 탄압은 1614년에 시작되어, 1630년 완전히 진멸되고 말았다. 일본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처형하는 데 거의 십자가를 사용하였으며, 예도(Yedo)에서는 70명의 그리스도인들을 얕은 물에 거꾸로 매달아 밀물이 들어올 때 익사시켰으며, 유럽인의 경우는 산채로 불에 태웠다. 24년 동안 1900명이 사형을 당하였는데, 유럽의 선교사가 62명이었다.

                                                          
중국 선교


 중국은 일본보다도 더 접근이 어려운 나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동 어귀에 있는 마카오는 중국 선교를 위한 중요한 종착지였다.

   마태오 릿치가 중국 대륙을 향하여 나아가기 위하여 중국의 언어와 관습을 익히기 위하여 준비하였던 곳이다. 천주(天主)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도 릿치이며, 공자의 이름 앞에 성(聖)을 붙혀 성 공자(St. Confucius)라고 부른 것도 릿치다.

   중앙 아시아 세촨(四川, Szechwan)의 수코우(Suchow)에 도착한 예수회 소속의 평신도 아조레스 출신의 베네딕트 데 고에스(Benedict de Goes, 1562-1607)의 기록은, 중국 선교의 예수회 활동에서 빼 놓을 수 없다.

   그는 1602년 아그라(Agra)에서 카테이(Cathay)라는 나라와 확인되지 않은 기독교 대왕국을 찾기 위하여 출발, 사천에 도착하였으나, 그가 도착한 땅이 중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605년이었다. 그는 무슬림 지역인 그곳에서 억류 생활이나 다름 없는 생활을 하였으며, 북경으로 구조를 요청하는 편지를 1606년 부활절에 보내었으나, 8개월 후에 도착하였다. 1607년 3월에 구조원이 수코우에 도착하였으나, 거의 죽음 직전이었고, 그는 그로부터 10 일 후에 죽고 말았다. 당시 세계와 기독교 선교, 예수회의 성격을 이야기해 주는 주요한 자료이다.

  
                                                                  
마닐라 선교

   스페인 선교사가 일본으로 들어 온 루트는 마닐라였다. 중요한 것은 1579년 교황이 마닐라 교구를 창설하였고, 1595년 대감독 교구로 승격하였는데, 이 때까지 이 교구는 멕시코 교구의 부감독 교구였다는 사실이다. 인도양이 아닌 대서양을 횡단, 태평양을 건너는 루트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선교사는 아우그스티누스회 신부들이며(1565년), 16세기말 스페인의 예수회 회원들이 들어 옴으로 교회와 학교와 고아원을 세웠으며, 1611년 예수회의 어린이 학교 개방과 함께 도미니칸에 의해 단과 대학이 설립되었다.

   교회의 재산도 방대하였으며, 비기독교적인 고대 문명도 없어서 19세기말 까지도 이 때에 들어온 기독교라는 문화가 전부였을 정도로 동양 유일의 기독교 국가라 할 만큼 특별한 나라가 되었다.

   아쉬운 것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스페인 소속이었다. 16세기말 필리핀 섬 전체가 스페인의 지배 아래 들어가 식민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포학할 일을 행하지는 않았으나, 이 일로 예수회에서 일어난 상업적 개입, 무절제한 축제 혐의등은 오히려 영적 사역에 큰 손상이 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베트남 지역

   동남아시아 지역은 언제나 어려운 선교지였다. 예수회의 사이암(Siam, 현재의 태국)을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세력을 꺾지 못하였다.

   베트남의 경우 아비뇽 출신의 알렉산더 로드스(Alexander de Rhodos)에 의하여 영웅적인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을 향해 떠났던 로드스가 1623년 도착한 곳은 마카오였다. 그곳에서 일본의 선교사 입국이 금해졌음을 본 로드스는 8년전부터 에수회가 활동하고 있던 베트남으로 갔다. 언어를 익힌 후 베트남에서 추방을 당하자, 다시 북 베트남으로 사역지를 옮기게 된다.

 

  3년 동안 세례를 베푼 자가 6,700명이라 전해진다. 그러나 지방 통치자와의 적대감으로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또 다시 이곳에서 쫓겨난 그는, 마카오에서 10년이란 세월을 보낸다.

 

  1640년 다시 베트남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그에게 있어서 세 번째의 기회였다. 그는 당시 수도 시노아(Sinoa, 현재의 후에 Hue)에 일을 시작하였으나, 끊임 없이 마카오와 후에 사이를 도망 다녀야 했다.

   그래서 창안한 선교 전략이 교리 교사들의 조합 (Company of Catechists)이다. 이들 교리교사가 사제에는 미칠 수 없었겠으나, 주도면밀한 교육과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초적인 의학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이 단체는 1658년 남북 베트남에 30명에 달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으로 로드스가 한 일은 베트남 언어를 라틴어 알파베트로 쓰게 한 점이다.한자에 의한 한문 스타일에서, 백성들의 통용어인 쿠옥쿠(quoc-nqu)를 발전시킨 것이다.

   베트남의 교회는 여러 번 핍박을 당하였으나,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견뎌 온 것은 모두 이러한 선교적인 배경 위에 교회가 든든히 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스티븐 닐은 평가하였다.

  

          III. Dominus ac Redemptor(도미누스 엑크 레뎀프토르); 예수회의 해산 칙령 

   일본의 그리스도교가 탄압으로 말미암아 거의 멸절 상태에 이르고, 중국에서도 로마의 간섭과 일부 수도사들의 무분별한 처신으로 말미암아 예수회 외의 선교사는 모두 마카오로 추방을 당하였으며, 결국 예수회까지도 18세기 말까지 겨우 북경에 머무를 수가 있었다.

   사이암이나 북부 베트남도 마찬가지였으나, 남부 베트남만은 밝은 전망이 보였다. 특히 남부 베트남에는 20만 명의 교인에 28명의 유럽인 사제와 47명의 토착인 사제가 있어서, 평화로우면서도 성장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던 곳이었다. 거의 금세기에 이르기까지 베트남은 카톨릭 국가로서 손색이 없었던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가톨릭의 선교가 빛을 잃게 된 것은 교구 사제와 수도회들이 예수회 수도사들에 대한 적대 감정 때문에, 결국 1773년 7월 21일 교황 클레멘트 14세에 의하여 내려진 칙령의 결과이다.

   예수회는 해체되고, 선교사는 선교지로부터 소환을 당하였으며, 재산은 몰수를 당하였다. 어떤 교황도 예수회를 재건시킬 수 없다고 선언하였으며, 예수회의 이름을 포기한 채 눌러 앉은 선교사들 외에는 마치 가축들처럼 배에 실려 출신 국가로 소환 당하였다. 당시 예수회 회원의 수는 22,589명이었으며, 그 중에 11,293명이 사제였고, 소환 당한 선교사는 3,000여명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