챨스 스터드 (Charles Thomas Studd 1862- 1931): WEC의 창시자
믿음 선교로 유명한 WEC의 창설자 챨스 스터드은 영국이 낳은 불세출의 선교의 영웅이었다. 스터드는 빅토리아 여왕시대인 1862년 12월2일 부유한 가정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에드워드 스터드는 인도에서 염료를 재배하는 농장을 소유한 자로, 엄청난 돈을 모은 탁월한 사업가로 영국에 돌아와 경마를 하며 한가한 여생을 보냈다.
운동을 좋아하는 가정에서 태어난 스터드는 어려서부터 사냥과 크리켓, 그리고 멋진 경마를 하면서, 그 시대의 상류사회가 누리는 모든 안락함을 맛보고 성장했다. 젊은 아내를 잃은 그는 1856년에 훌륭한 가문의 도라 토마스와 재혼했다. 그리하여 여섯아들과 외동딸을 둔 이 가정은 부러울 것이 없는 유복한 가정이었다.
비록 학교규정상 교회는 출석했으나, 단지 의무감에서 교회마당만 밟았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 신앙은 주일에 입는 옷과 같아서 월요일에는 벗어도 되는 것으로 나는 생각했다. 주일은 주 중에 가장 지루한 날이었다. 그것은 내가 신앙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의 가정에 스터드가 15살 되던 해, 그의 아버지 에드워드는 무디의 설교를 듣고 와서 긍정적인 회심으로 변화되어, 가정에 혁명이 일어났다. 회심 후 투기성 경마광이던 아버지는 소유했던 모든 말을 곧 팔아 버렸다. 그리고 저택 거실에 의자와 소파 등을 갖춰놓고, 런던에서 뛰어난 성경선생님들을 모셔와 친척들과 친구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의 세 아들(Kynaston, George, Charles)은 특별 전도대상이었다. 이러한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가 결실을 맺어, 마침내 1년 후 아버지 친구가 집을 방문하여 그의 전도로 인해 삼 형제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1년 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챨리는 열광적으로 크리켓을 좋아했고, 그의 관심은 점점 거기에 매료되었다. 그는 명문고등학교인 이튼(Eton)고등학교 때부터 크리켓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크리켓은 당시 영국의 대표적인 인기 스포츠 종목으로 야구와 비슷한 경기이다. 그의 투구와 타격은 완벽에 가까웠고, 반세기동안 깨지지 않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워 10대의 우상이 되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국가대표까지 한 장래가 촉망되고 인기를 한 몸에 받던 마이클 조단과 같은 각광 받는 스포츠 스타였다. 그리하여 크리켓 세계에서 인기를 얻었던 6년 동안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멀어져 갔다. 이때 그의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형, 죠지가 죽게 되었다.
챨리는 그의 곁에서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마음 속에 떠오르게 되었다. "이제, 세상의 화려한 인기가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세상의 명예와 찬사 그리고 부는 무슨 가치가 있는가? 한 인간이 영원 앞에 서게 될 때 무슨 의미를 갖는단 말인가?"
그 후 유명한 부흥사 무디의 설교를 듣고 그는 다시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였고, 크리켓 동료들을 주님께 인도하였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삶의 비결이란 바로 주님께서 그것을 원하고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임을 깨닫고 그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고자 결단하였다.
"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내가 그분을 위해 하는 어떤 희생도 결코 클 수 없습니다.
“ If Jesus Christ is God and died for me,
then no sacrifice can be too great for me to make for Him."
챨스 스터드 (Charles T. Studd)
그는 백만장자인 아버지 유산으로 엄청난 재산을 상속 받았지만 "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신 말씀에 순종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주고 3,400 파운드를 신부가 될 부인에게 주지만, 그녀마저 주님께서 모두 주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다 나눠주고, 자신들은 다른 선교사들처럼 믿음으로만 생활을 유지했다. 건강이 안 좋은 상태에서도 그는 미국과 유럽 전 지역 캠퍼스를 순회하면서 학생들에게 선교 비젼을 심는 선교 부흥집회를 가졌다. 가는 곳마다 수천명의 학생들이 그의 집회에 모여 들었는데 때로는 하루에 여섯 번이나 집회를 가졌다. 이러한 부흥회를 통해 수백명의 학생들이 해외 선교사로 자원하게 되었다.
당시 본격적으로 선교동원운동의 중요성을 보여준 계기는 몇몇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1882년 미국의 복음전도자 무디(D. L. Moody)가 캠브리지 기독학생단(Cambridge Inter - Collegiate Christian Union: C.I.C.C.U.)의 초청으로 영국을 방문하고 캠브리지에서 집회를 하였다. 이 집회가 끝난 직후 많은 학생들이 '영국교회 해외선교회'(The Church Missionary Society of the Anglican Church)에 지원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에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에 의해 창설된 '중국 내지 선교회'(China Inland Mission)에도 관심이 쏠렸다.
그리하여 무디의 캠브리지 집회 2년 후인 1884년에 '캠브리지 세븐'(Cambridge Seven)이라 불리는 7명의 학생들이 중국 내지 선교에 자원하여 헌신함으로, 당시의 캠퍼스 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가져왔다. 이 같은 영국 학생들의 뜨거운 선교열은 곧 미국으로 확산되었다.
'캠브리지 7인'의 강력한 힘
'캠브리지 7인'은 강력한 힘으로 한 세대의 양심을 일깨웠으며, 선교 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그들은 1885년 2월 중국으로 가서 허드슨 테일러를 도와서 중국 내지 선교회를 이끌기도 했고, 그들 중 한 사람인 챨스 스터드 (C. T. Studd)는 WEC (International Worldwide Evangelization for Christ)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선교사로 나가는 데만 그치지 않고, 여러 지역과 학교를 순회하면서 선교의 붐을 일으켰다. 대학을 졸업한 후 이들은 영국과 스코틀랜드 전 지역을 여행하면서 그 지역의 대학들과 교회들을 방문하여 많은 학생들과 사람들에게 선교를 계몽하였다.
챨스 스터드가 중국으로 떠나기 전에 한 마지막 간증은 아직도 그 당시의 긴급함과 중대함을 잘 전해준다.
"여러분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드린 후에야, 하나님은 여러분 속에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실 것입니다."
스터드는 허드슨 테일러와 함께 중국으로 가서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그가 중국 북부에서 일한 기간은 어려움으로 가득했다. 그들이 처음 살게 된 집은 흉가였고, 그들이 5년 동안 문밖에 나서기만 하면 중국인들로부터 양귀라는 심한 저주의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점차로 그들과 친해졌고, 생활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브리스길라는 여자들 사이에서, 스터드는 아편 중독자들 사이에서 주로 일하였다. 그는 7년 동안 800명의 마약중독자들이 새 삶을 살도록 도왔다.
중국 오지에 가서 자신의 젊음을 묻히는가 했더니, 다시 인도에 아내와 네 자녀를 데리고 가서 삼십년 이상을 쉼 없이 섬겼다.
여기서 머물지 않고 "식인종들도 선교사를 기다린다?"는 문구를 보고 수십만의 중앙 아프리카 사람들이 복음을 들어 본 일도 없이 죽어가고 있는 흑암에 사는 영혼들을 위해, 아프리카의 밀림 속에서 개척적인 선교사역을 했다.
18년간 벨기에령 콩고강에서 복음사역
그는 병약하여 의사로부터 아프리카로 가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를 받았고 재정적인 뒷받침도 없었다. 게다가 아내 브리스길라도 심장쇠약으로 병중에 있었기 때문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스터드는 "황금을 찾기 위해 도박하는 불신자들도 있는데,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도박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이때부터 그는 18년동안 아프리카 중심부에 위치한 벨기에령 콩고강에서 복음사역을 섬겼다.
'아프리카 심장 선교회(HAM)를 조직하고 'WEC 국제선교회로 발전시킴
53세가 되던 1913년,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아프리카 심장부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벨기에령 콩고(옛 자이레공화국)에 '아프리카 심장 선교회(The Heart of Africa Mission)'을 설립하였고, 이것이 'WEC 국제선교회(1918)'의 전신이 되었다.
아프리카의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가지게 되어, WEC(Worldwide Evangelization for Christ)라는 선교단체를 창설했다. WEC은 100년이라는 역사와 전통을 가진 복음적이고 초교파적인 국제선교단체이다.
전세계에 2000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WEC
장기 선교를 주 사역으로 하고 있으며, 가능한 모든 사역자들이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최전방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며, 그들 중심으로 영적 재생산을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우리의 선교력을 총동원하고 있다. 현재 이 선교단체에는 2,000명 가까운 선교사들이 세계 각지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WEC은 전세계에 2000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선교단체다.
WEC의 선교사들은 사람들에게 호소하지 않고,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필요한 재정을 공급해 주시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Faith Mission(믿음선교)을 하고 있는 것이다. C. T. 스터드도 아프리카로 들어가기 위해, 영국 귀족으로서 모든 삶의 안락과 명예를 포기하였다. 생존을 위해 사는 삶을 포기한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는 바뀐다.
귀족 가문의 불타는 열정의 경주자. 그의 세상적인 자랑을 버리고 주님을 위해 헌신한 후, 1931년 7월 50세로 그는 콩고 아밤비에서 지병인 담석증으로 소천하였다. 이때 7천명이나 되는 아프리카인들이 그의 장례를 보러 왔다.
한 젊은이가 변화하여 자기 삶을 주님께 드리기로 결단하고 헌신한 복음의 열매가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완전히 드릴 때 순종의 열매를 볼 것이다.
스터드는 강한 도전으로 마지막 모임을 장식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오늘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영원한 삶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니까? 아니면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니까? 우리가 심판의 보좌에 이를 때 사람들의 말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권고했다.
"여러분의 마음을 넓히고 이 세상으로 나아가십시오. 우리가 이 나라에서 발견한 빛을 다른 곳에 전달하지 않는다면, 어두움의 세력으로 인해 우리의 빛마저 간수하지 못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 궁금해하고 있는가? 그 해답이 지금 여기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방법은 변하지 않았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히 자신을 드릴 때까지 기다리신다. 크리켓 선수로 전력을 쏟았던 스터드는 그 열정을 하나님 나라 확장하는데 전력을 아낌없이 쏟았다.
스터드가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드리기까지는 두세 번의 헌신이 있었다. 그를 볼 때 용기가 생기지 않는가? 주께 다시 나아가자.
by Global Youth
챨리 스터드(C.T. Studd)
-"식인종은 선교사를 원한다"-
그는 모든 부와 특권을 기꺼이 포기하고 세계복음화의 과업 앞에 용기있게 마주 서서 철저히 헌신한 학생 선교자원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넓히기 위해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미친듯이 뛰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세계복음화 십자군의 설립자와 지도자였으며, 중국 선교사 10년, 인도선교사 6년 그리고 아프리카 선교사 18년을 사역한 가장 위대한 현대 그리스도인 선교사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그의 세 아들에게도 꾸준히 전도하여 모두 회심시켰는데, 그 중 맏아들인 챨리 스터드가 무디의 집회에서 자신의 일생을 해외선교사역에 드리기로 결단한 것은 또 한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이튼과 케임브릿지에서 크리켓 선수였으며, 유명한 캠브릿지 11인팀의 최고의 만능 선수이자 주장이었고, 사람들은 그가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크리켓 선수라고 입을 모았다.
그의 헌신이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했던 것은, 이른바 "캠브릿지 7인"이 스터드와 함께 중국선교사로 선교사역을 하겠다고 헌신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신문은 "선교 역사상 이렇게 우수한 학생들이 한꺼번에 선교사로 해외에 나간 일은 없다."고 말했다.
그가 중국에 머문 기간은 10년이 못되었으나, 많은 활동을 하였다. 중국에서 네 딸을 낳았는데, 중국식으로 양육했다. 그는 부모의 많은 유산 상속을 모두 포기하고, 다른 선교사들처럼 믿음으로만 생활을 유지해 나갔다.
그는 1900년에 다시 인도로 가서 6년간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역하였다.
그러나 스터드의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어느 문에 새겨진 "식인종은 선교사를 원한다"라는 문구였다.
"왜 단 한 명의 기독교인도 가지 않았나요?" "그러는 너는 왜 가지 않았느냐?" " 의사가 절대 못가게 막을 것입니다." "내가 의사가 아니냐? 내가 너를 치료할 수 없겠느냐? 내가 너를 지켜주지 못할 것 같으냐?"
그는 아프리카로 가기로 결심했다. 나이도 이미 50살이며 병들었고 후원자도 없었으며 그의 아내가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1910년 현지 답사후, 다음해 아프리카의 마음 선교회(HAM)를 조직하고, 1913년 사위 한명을 데리고 콩고에 들어가 그 곳에서 18년간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1931년 그는 현지에서 주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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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3. 8 -월] 국민일보
부·명예 버리고 中·美·印·아프리카 사역 … 세계선교운동에 생애 바친 CT 스터드 | |
“복음화되지 않은 세계를 위해 나의 목숨을 포기하겠습니다.” ‘케임브리지 7인’ 중 한 명인 C T 스터드(1860∼1931)는 부와 명예를 버리고 전 생애를 중국 미국 인도 중앙아프리카 등 세계선교운동에 바쳤다. 미국의 대학생선교자원운동(SVM)에 깊은 영향을 미친 그는 복음주의선교단체 WEC(Worldwide Evangelization Crusade)의 전신인 HAM(Heart of Africa Mission)을 설립한 선교동원가이자 현장선교사였다. 이는 오직
‘내 삶을 취하시어 감춘 당신을 드러내는
십자군이 되게 하소서’
란 이유 한 가지 뿐이었다.
스터드는 먼저 중국선교의 사명을 깊이 인식했다. 중국내지선교회(CIM) 대표였던 허드슨 테일러를 만난 뒤, CIM 협력회원이 됐다. 이어 그는 1885년 2월 소위 케임브리지 7인이라고 불리는 스탠리 P 스미스, M 비우챔프, 윌리엄 W 캐슬스, 딕슨 E 호스트, 아서 T 폴힐터너, 세실 H 폴힐터너 등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이는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고난의 시간이었다.
그는 매일 새벽 2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촛불을 밝히고 성경을 읽었다. 4시면 선교 여행길에 나섰다. 한곳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경우, 아침식사 후 중국어로 기도하고 점심식사 전까지 복음서를 3∼4시간씩 읽었다. 협소한 잠자리나 바로 옆이 돼지우리인 헛간같은 방,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불결한 여인숙도 불평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는 구세군 선교사인 프리실라 리빙스턴 스튜어트와 결혼한 뒤, 아편중독자 요양소 사역에 힘썼다. 7년동안 요양소에서 약 800명이 치료를 받고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그러나 예배당과 그의 집은 파괴되곤 했다. 심지어 생명의 위협도 받았다. 18개월간 미국에서 쉬지않고 강연
10년의 사역을 끝낸 뒤 영국으로 돌아왔지만, 쉬지 않고 강연과 집회에 열중했다. 심한 과로와 영양부족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에게 휴가란 임지의 변경을 의미할 뿐이었다. 이어 그는 D L 무디 초청으로 미국에서 18개월간 머무르면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집회를 쉴틈없이 인도했다. 허버트 케인은 “수천명의 학생들이 그의 집회에 모여들었는데, 때로는 하루에 6차례나 집회를 가졌다. 그리고 이러한 부흥회를 통해 수백명의 학생들이 해외선교사로 자원했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1900년에 이르러 스터드는 사역지를 인도로 옮겼다. 심한 천식을 앓았지만, 인도 북부 우타카문드 유니언교회에서 목회했다. 그러던 중 리버풀에서 그는 ‘식인종은 선교사를 원한다’는 벽보를 보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1931년 7월 콩고 이밤비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자기 부인(否認)’의 삶을 살았다. 진흙바닥에 대나무와 풀로 만든 초라한 오두막에서 거하면서, 빛바랜 몇 장의 카키색 담요와 천막용 천으로 만든 베개가 그의 침구였다. ‘질병박물관’이라고 표현할 만큼 많은 병에 허덕였지만, 그의 선교 열정에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못했다. 함태경기자 zhuanjia@kmib.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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