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암 캐리(William Carey)
선교사 열전
가난하기 짝이 없던 영국의 구두 수선공 출신의 윌리암 캐리는 “위대”라는 말과는 거리가 먼 사람같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해외 선교의 위대한 세기가 도래하도록 이끈 “현대 선교의 아버지”로 크게 사용하셨다.
케리는 빈곤과 비참한 결혼생활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성경을 공부하며 영적 훈련을 스스로 실천하였는데, 어느 날 우연히 “쿡 선장의 항해기”라는 책을 읽던 중 넓은 미지의 세상과 그 곳에 사는 불쌍한 영혼들에 대한 선교의 열정이 불붙는 계기를 접한다.
그 이후로부터 그는 선교의 시각으로 성경을 이해하게 되고, 또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선교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의 지상명령이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명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리어 캐리를 비웃었다.
그러나 캐리는 주위의 선교에 대한 무관심과 비판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선교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연구하여, 1792년 봄 87페이지짜리의“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이 강구해야 할 수단들을 찾아서” 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하여 해외 선교의 필요성을 알린다. 그는 소책자에서 선교사를 보낼 이유가 없다는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왜 선교를 해야하며 어떻게 선교를 실천할 것인가를 도전한다.
그리고 침례교연합회 모임에서, 많은 목사님들에게 이사야 54장 2-3절을 설교하며,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긴다.
이사야 54: 2,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결과를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 하십시오”
그는 자신의 선교지 상황에 대한 연구에 그치지 않고, 대가족들을 이끌고 인도에 선교사로서 첫 발을 내딛는다. 그는 동인도회사로부터 숱한 방해와 적대 속에서 사역을 시작해야 했다. 또한 말라리아, 5살 된 아들의 죽음, 아내 도로시의 정신병, 인도인 개종자가 없는 사역 등으로, 초기에 많은 고전을 겪는다.
그리고 그는 동인도회사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덴마크령 세람포로 사역지를 옮기고, 그곳에서 34년의 생애를 보내면서, 세람포를 인도에서의 침례교 선교의 중심지가 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의 선교 임무수행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태도는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따르고자 하는 열망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감싸주는 신기한(!) 능력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 세람포는 성공적인 선교팀의 모범이 되었고, 사역의 열매들이 그 증거였다.
학교 설립, 인쇄시설 설립과 번역사업 등의 진행은 캐리가 벵갈어, 산스크리트어, 마라디어로 성경을 완역하고, 다른 언어로 완역하는 것을 촉진시켰다. 캐리는 번역과 복음사역에도 바빴지만, 교회 지도자와 복음 전파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세람포 대학을 세우기도 하였다.
1834 년 캐리가 인도에서 잠들기 전까지, 그가 인도에 끼친 영향은 언어학, 교육학, 목회 영역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인도의 나쁜 관습과 싸워 과부의 화형, 유아 살해 등을 폐지하는데 앞장섰고, 인도의 좋은 문화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캐리는 선교의 방법론적인 면에서 그 시대를 앞서 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후배 선교사들과는 달리, 서구문화를 인도에 이식시키려고 하지 않았고, 인도문화를 존중하였다.
그는 인도에 “현지인 목사에 의한” 토착교회를 세우는 것과,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을 제공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
한국컴퓨터선교회
세계 선교의 문을 연 윌리엄 케리
구두 수선공이 위대한 Vision의 선교사로
1761년 햇볕이 따사로운 8월의 어느날 영국의 노스햄프턴셔의 작은 마을에서 우렁찬 음성이
들렸습니다. '응 애!!' 그것은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 1761-1834))가 하나님나라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음을 알리는 울음소리였습니다.
캐리는 어려서 꽃과 나무와 새 그리고 곤충을 벗하며 자라난 전형적인 촌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주특기는 나무타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공부에 대한 욕구도 강했습니다. 당시 문맹률이 매우 높던 시절, 그는 끈질긴 도전으로 글을 깨우쳤습니다. 더 나아가 외국어인 라틴어와 헬라어에도 손을 대었습니다.
고교를 졸업한후 캐리는 아버지의 압력으로 구두수선공이 되었습니다. 당시는 두 발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에 구두수선은 유망직종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평생 신발만 어루만지다 죽을 팔자였습니다.
윌리암 캐리
1779년 19살 때의 회심
그러나, 어느날 그의 팔자를 고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779년 캐리가 19살 때, 한 기도모임에서 히브리서 13장 13절 말씀을 심령으로 깊이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그는 이 한 말씀을 통해 그동안의 세상과 타협하여 살던 미지근한 신앙을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과 능욕을 받고자하는 분명한 결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생애를 그리스도께 헌신하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그 후 그는 다른 어떤 학문보다 성경공부에 전념하였습니다. 그의 목표는 구두공장 공장장에서 예수님의 선전부장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당시 영국은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가 이끄는 영적 부흥운동이 전 영국을 휩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세계선교에 대해선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비레인 교회에서 목회에 전념하고 있던 캐리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쿡 선장의 마지막 항해'를 읽고 크게 충격을 받음
그러나 캐리가 '쿡 선장의 마지막 항해' 라는 책을 읽고있을 때,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그 인생을 바꾸어 놓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쿡선장은 미지의 세계를 항해하며 태평양의 알려지지 않은 섬들과 원주민들의 원시적인 삶에 대해 자세히 기술해 놓았습니다. 문명의혜택을 못받아 옷도 없이 코난과 포비처럼 살아가는 부족, 사람을 맛있게 먹는 풍습을 지닌 부족등... 그리고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해 주려고 하지않습니다. 거기에는 명예도 유익도 뒤따르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 책을 읽고 있던 청년 캐리의 가슴은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맥박은 힘차게 고동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케도냐인의 끈질긴 외침을 들었습니다. 그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내가 여기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결단했습니다.
그 때부터 캐리는 세계지도에 이미 알려진 나라의 인구,종교등을 표시하며 선교지도를 만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지도는 그의 기도 목록이었습니다. 그는 세계지도를 꼭 껴안고, 세계를 품고 기도하는 기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영국교회에 해외선교의 중요성을 역설
18세기 영국교회는 캘빈주의의 영향으로 선교운동에 눈을 돌리지 않았으며, 선교는 예수님이 사도들에게만 주신 특별한 사명으로 국한 시켰습니다. 세계선교에 눈을 뜨게 된 캐리는 교회안의 무감각한 그리스도인들을 일깨워야겠다고 방향을 잡았습니다.
어느날 목사들의 모임에서 캐리는 해외선교에대한 그의 원대한 계획에 대해 열변을 토했습니다. 그러자 한 원로목사가 일어나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보게 젊은이, 그만 열내고 자리에 앉게나, 만약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려고 한다면 자네나 우리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하실수 있을걸세.'
이것은 그의 선교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캐리안에 불붙은 세계선교에 대한 vision과 성령의 불은 더욱 크게 타올랐습니다.
캐리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성령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리라'
하시는 예수님의 유언적 명령이 곧 우리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인 것을 믿었습니다.
'이교도 개종에 대한 크리스챤의 의무에 관한 연구'라는 책 발간의 센세이션
이 믿음으로 1792년 봄 그는 '이교도 개종에 대한 크리스챤의 의무에 관한 연구'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세계선교는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해야 할 의무임을 역설하였습니다. 이책은 루터의 95조항과 함께 베스트 셀러가 되었으며, 세계선교열풍을 전 유럽으로 확산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 후 캐리는 침례교회연합회 모임에서
이사야서 54:2,3 '네 장막터를 넓히라.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니라'
말씀을 전하며, 간절한 기도가운데 여러 목사들에게 하나님의 비젼을 심었습니다.
그는 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는 지금이 바로 하나님이 나와 당신을 통해 위대한 세계선교의 역사를 이루실 때인 것을 역설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대하고 그것을 시도하라했습니다.
침례교 선교회 결성
그의 비젼이 넘치는 메시지에 감동을 받은 목사들이, 당장에 그 다음날로 유명한 침례교 선교회를 만들었습니다.
7년동안 아무도 그를 이해하거나 도와주지 않고 배척했지만, 그가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이루시리라는 믿음으로 현실에 절망치 않고 끈질기게 도전하였을 때, 18세기의 타락한 영국을 구원하였을뿐 아니라 세계각지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였습니다.
위대한 시도
1793년 캐리가 32세 되던 해, 그는 인도 영혼들을 향한 상한 목자의 심정을 안고 인도 선교사로 가고자 결단했습니다. 그러자 그 길을 가로막는 많은 장애물들이 나타났습니다.
1). 첫째는 그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캐리의 말을 듣고 딱 한마디 했습니다. '미친놈'.
2). 둘째는 그의 아내였습니다. 그의 아내는 문맹의 평범한 주부였습니다. 그녀는 아기랑 캐리랑 오손도손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녀는 캐리에게 '여보, 인도는 절대로 안돼요, 제발 우리 아기들도 좀 생각해 주세요...엉엉엉'. 여자가 눈물을 흘릴 때, 갈대와 같은 남자의 마음은 얼마나 흔들리기가 쉽습니까?
그러나 캐리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나는 그 부름에 응답했기 때문에 이제 돌이킬 수가 없소.' 캐리는 사랑하는 가족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3). 셋째는 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하비레인 교회의 성도들은 캐리와 같은 훌륭한 목회자를 잃는다는 생각으로 교회의 장래를 위해 절대로 목사님을 보내지 않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곧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간절히 기도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캐리의 중심을 보신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사랑하는 가족 모두와 처제, 그리고 토마스라는 선교 동역자와 함께 인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그들이 인도땅에 도착했을 때, 인도는 선교할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힌두 과부들은 사티(Sati)라는 제도에 따라 남편이 죽으면 함께 불에 타야했고, 갠지스 강가에선 'Gunga mai kai jai (갠지스강의 여신이여 영광을 받으소서)' 외치며 어린아이들을 악어가 득실한 강에 던지는, 그런 미신이 가득한
나라였습니다. 또, 당시 인도는 동인도 회사의 점령아래 있었고, 선교를 절대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캐리는 추방을 면하기위해 내륙으로 이동했는데, 그곳은 말라리아가 창궐한 곳이었습니다. 아내 도로시와 큰아이 2명은 이질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한 아들을 잃게 되었고, 아내는 정신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열대기후와 입에 맞지 않는 음식들도 고난이 되었습니다.
캐리는 멋지게 선교를 하려던 이상적인 꿈이 산산이 깨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캐리는 그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하나님은 부요하신 분이시며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내가 이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나의 모든 근심을 내어 맡길수 있었습니다. 내가 설사 이곳에서 생명을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나에게 이 고귀한 사명이 맡겨진 사실만으로도 기뻐하고 또 기뻐하겠습니다.'
자비량 선교의 본
캐리는 자비량 선교의 본을 보였습니다. 그는 결코 본국의 선교회를 의지하지 않고 자립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인디고 공장의 감독으로 취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캐리는 충분한 선교비를 벌면서 선교의 기초가 되는 인도어 정복에 온 힘을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1년후부터 그의 위대한 시도가 구체화 되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캐리는 성경번역과 더불어 말씀을 전파하고 또 여러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벵갈에서 7년간 땀흘렸지만, 단 한명의 인도인 개종자가 없었습니다. 큰 아픔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세람포(Serampore) 정착
1800년, 19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동인도 회사의 추방령으로 캐리는 선교기지를 덴마크 영내인 세람포(Serampore)로 옮기게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캐리가 인도에서 흘린 모든 눈물과 땀의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쉬나 팔이라는 첫 번째 개종자가 탄생했습니다. 그가 카스트 제도와 우상숭배를 거부하자 2천명의 군중이 그를 재판장으로 끌고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회개와 변화의 역사가 줄기차게 일어나, 그 후 18년간 600명이 세례를 받고 수천명이 예배에 참석하는 승리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세람포 역사가 흥왕히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합심 동역에 있었습니다. 캐리와 워드와 마쉬만, 그들은 '세람포의 삼총사(Serampo Trio)'라 불리웠는데, 23년간 팀을 이루어 서로간의 긴밀한 사랑의 교제로 힘을 얻으며 믿음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휴식없는 캐리의 사역중 가장 큰 불행은 1812년 대형화재로 인해, 수년간 작업하여 완역한 성경원고와 두권의 문법책, 다국어 사전들이 소실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캐리는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삼총사는 팀웍을 새로이 갖추고 다시 도전했습니다.
캐리는 편지에 '잃어버린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길을 두번 가는 것이 비록 고통스럽기는 하겠지만, 처음보다 훨씬 더 충실한 결과를 낳아 더 유익이 될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벌써 다시 시작했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낙망치 않고 도전하여, 결국 수 많은 인도방언과 중국어 버마어 말레이어등 44개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 출판했습니다.
윌리암 캐리는 이처럼 그 일생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위대한 일을 시도함으로 인도선교의 기초를 쌓았습니다.
캐리는 1834년 73세를 일기로, 그토록 사랑했던 인도 세람포에 묻혔습니다.
윌리암캐리는 그의 그칠줄 모르는 열정과 도전으로, 18세기 침체된 영국을 선교사를 파송하는 제사장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그가 인도에 끼친 영향은 언어학적 업적, 교육적인 공로, 목회 사역뿐 아니라, 과부의 화형이나 유아살해 같은 인도의 나쁜 관습을 폐지하고, 좋은 전통을 계승시켜 나가는데까지 미쳤습니다.
또한 그의 업적은 인도에만 국한되지 않고, 인도 국외적으로도 런던선교회, 스코틀랜드의 글라스고우 선교회, 네덜란드 선교회, 교회 선교회, 영국 해외 성서공회, 미국 해외 선교위원회, 미국 침례교 선교협회, 미국 성서 공회가 창설되어, 오늘날 선교의 기틀이 되는데까지 미쳤습니다.
그는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세계선교의 불을 댕긴 위대한 믿음의 용사였습니다. 그의 믿음으로 근대선교역사가 시작되었고, 19세기의 선교황금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인도의 한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는 진정 근대 선교의 문을 활짝 연 근대 선교의 아버지였습니다.
by http://www.aspire7.net/belief-2-13.html[빛과 흑암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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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암 캐리[William Carey(1761-1834, 73세)]의 선교 운동
-구두 수선공에서 위대한 선교사로(From Shoemaker to Great Missionary)-
일반적으로 '근대 선교의 아버지 (the father of modern missions)'로 불리는 윌리암 캐리의 선교 사업이 근대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선교로 이야기되어 왔다. 그러나 스테반 닐(Stephen Neill)은 오히려 이것이 잘못된 생각임을 지적하면서, 케리는 그 앞서 활약한 여러 개척자들의 후예로서 그 고귀한 대열을 계승한 것이며, 그도 이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 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사업이 선교에 있어서 커다란 전기(a turning-point)가 되었으며, 영어권 세계 선교가 본격화되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비가톨릭계 선교사의 4/5를 공급해 오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허버트 케인(J. Herbert Kane)은 19세기 선교에 있어서 선교 사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윌리암 캐리라고 말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며,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러도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1. 그의 생애(His Life)
윌리암 캐리는 1761년 영국의 노스햄프튼(Northampto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직조공이었다. 그래서 그는 가족을 위하여 공장에서 일하였으며, 그 결과 가정 생활은 비교적 평범하게 먹고사는 그렇고 그런 가정이었다.
정원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던 캐리는 16세에 구두방의 도제로 들어가, 28세가 되기까지 그 일을 하였다.
1781년[20세] 스무 번째의 생일을 맞기 전에 주인의 처제와 결혼한 그는, 자기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아내 도르시(Dorothy Plackett)와 빈곤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더구나 그 아내는 글을 읽고 쓸 줄도 모르는 여인이었다. 더욱 어려웠던 것은 전 주인의 미망인(처형이 됨)과 4명의 아이들까지 캐리가 부양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리는 공부와 평신도 목회를 해 나갔으며, 1788년[27세] 목사로 안수 받았다. 4년후인 1792년 봄 87페이지 짜리의 책을 발간하였으며, 1793년 6월 13일[32세] 인도로 출발하여 11월 19일 인도에 도착하였다.
캐리에게 있어서, 아내 도르시는 선교의 협력자라기보다는 방해자에 가까웠다. 그래서 루스 터커(Ruth A. Tucker)는, 만약 그녀를 선교의 어머니로 내세운다면 그것만은 결코 아니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인도 내륙의 말라리아는 그의 아내를 잃게 하였고, 그 보다 먼저 그의 아들을 잃는 슬픔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 후 그는 덴마크 왕족 출신의 샬로테 루머(Charlotte Rumohr)와 결혼하였으나 13년후에 죽게 되었고, 세 번째의 아내는 62세의 캐리보다 16세나 연하인 그레이스 휴지(Grace Hughes)라는 미망인이었다.
그의 초기 선교지였던 벵갈에서는 7년을 땀 흘려 수고하였으나, 단 한 명의 개종자도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말디, 세람포로 이주하면서 그의 사역은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1819년[58세]에는 세람포대학을 설립하였다.
본국의 선교 본부가 새로운 회원에 의하여 주도되면서 단지 서면으로만 캐리를 알고 있는 본부와의 마찰로, 1826년[65세] 영국의 침례교와는 공식적인 관계가 두절되었으나, 캐리는 인도를 떠나지 아니하고 1834년 74세로 그 땅에서 잠들었다.
그는 한 번도 안식년이나 휴가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He never had a sabbatical leave or vacation throughout his missionary career).
그의 비문(tombstone)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천하에 무능한 이 벌레는 당신의 친절한 팔에 누워 있습니다."
- A Wretched poor the helpless worm on thy kind arms I fall -
2. 그의 사역(His Missionary Work)
[1]. 선교에 대한 관심(An Interest in Missionary Work)
캐리에게는 선원 일을 하는 숙부가 있었다. 어린 캐리에게 그는 먼 나라에 대한 진기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캐리는 여행에 대한 동경과 다른 세계에 대한 예민한 관심이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구두 수선공에 불과하였으나, 그가 읽은 책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의 곁에는 항상 책들이 쌓여 있었다고 전한다.
· 쿡 선장의 마지막 항해(The Last Voyage of Captain Cook)
지리학 입문(Geographical Grammer by Guthrie)
죠나단 에드워드의 데이비드 브레너드의 생애와 일기
(Life and Diary of David Brainerd by Jonathan Edward)
특히 그는 덴마크-할레(Denish-Halle) 선교회와 뉴 일글랜드의 죤 엘리오트(John Eliot), 그리고 모라비안 선교사들과도 가까이 지내오던 사이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 선교의 열정과 준비 과정(Missionary Passions & Mission Preliminaries)
1792년 그는 87페이지의 "이교도를 구원하기 위한 수단을 찾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에 관한 연구 (An Inquiry into the Obligations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s)"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확신에 찬 선교적 호소를 하고 있는 이 책을, 루스 터커는 루터의 책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책(Ranked alongside of Luther s Ninety-five Theses)으로 평가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해외 선교의 필요성을 설득력 있게 서술한 다음, 먼 곳까지 선교사를 보낼 이유가 없다는 주장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공박하였다. 특별히 1792년 5월[31세] 노팅햄(Nottingham)에서 열린 침례교 교역자 연합회(the Baptist Ministers Association)의 설교는 유명하다.
노탐프톤셔(Northamptonshire)의 교역자 회의에서 주님의 지상 명령의 적용에 대한 토론을 제의하였다가, 죤 라이랜드(Dr. John C. Ryland)로부터 "젊은이, 그만 앉게! 이교도 회심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면, 자네나 나의 도움 없이도 하나님은 행할 것이네" 라는 책망을 들은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사야(Isaiah 54:2,3) 말씀을 통하여 놀라운 설교를 하게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Expect Great things from God)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Attempt Great things for God.)"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설교에 감동을 받은 이들이 많았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침례교 선교회(Baptist Missionary Society)가 된다. 헌금된 13파운드 2쉴링 6펜스로 선교회는 시작되었다. 앤드류 풀러(Andrew Fuller)가 총무가 되고, 레이놀드 호그(Reynold Hogg)가 회계가 되며, 선교회의 초대 선교사는 죤 토마스(John Thomas)라는 평신도가 추천되었다.
그러나 스스로 선교사로 자천하고 나선 사람은 캐리 자신이었다. 가족의 반대와 재정, 선교지의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793년 6월[32세] 그는 인도를 향하여 출발하게 되었다. 스티븐 닐의 표현대로, 드디어 영어 사용권의 국민에 의한 해외 선교의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The day of the English-speaking peoples in overseas missions had begun.)
[3]. 그의 선교 전략과 성과(His Mission Strategy and the Outcome)
선교지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모두가 불리한 조건들 뿐이었다. 동인도 회사의 인도의 지배적인 권력으로 향한 성장은 캐리를 내륙으로 몰아넣었고, 그는 그곳에서 심지어 인디고농장의 지배인으로 일하기까지 하였다.
이 곳에서 그는 벵갈어로 신약성경 번역을 끝마쳤다. 그러나 그는 어학 재능이 뛰어나지 못한 독학도였다. 낱말은 벵갈어였으나 관용어가 숙달되지 않아, 일을 다시 시작하는 지경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의 선교 전략이 빛을 보게 된 것은 당시 덴마크의 식민지였던 세람포였다.
그의 선교전략과 그 성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복음을 전파한다.
(the widespread preaching of the gospel by every possible method.)
이를 위하여 캐리는 선교사들과 원주민 전도자들을 사정이 허락하는 한 멀리, 그리고 광범위하게 보냈다. 그들은 갠지스강을 거슬러 오릿사(Orissa)까지 갔으며, 버어마와 같이 먼 곳까지 손을 뻗쳐 그곳에 전도소를 개설하기까지 하였다.
(2) 그 나라의 언어로 기록된 성경을 보급하여 전도 활동을 지원한다.
(the support of the preaching by the distribution of the Bible in the languages of the country.)
캐리의 위대한 점 가운데 빠뜨릴 수 없는 점이 이것이다. 1804년 이후 캐리의 선교 사업은 주로 이 성경 번역 배포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30년 동안 여섯 개의 성경전서 번역판을 완성하였고, 이 중 벵골, 산스크리트, 마라티어등은 모두 캐리 자신이 책임진 번역판이다. 그 외에 23개 방언의 신약전서가 추가되었으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언어로 번역된 쪽 성경이 있다.
(3) 가급적 신속한 장래에 교회를 세운다.
(the establishment 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 of a church.)
선교사들은 세람포에 영국 침례교회를 창설하였다. 그러나 캐리는 선교지의 사정이 교회 설립을 보장되기까지 교회를 세우지 않도록 하는 세심한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4) 비기독교인들의 배경과 사상을 깊이 연구한다.
(a profound study of the background and thought of the non-Christian peoples)
캐리와 그의 동료들은 기독교 신앙의 고유한 진리에 대하여는 분명하고 확실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인도의 종교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시간과 노력을 기우려 인도의 종교와 서적을 읽고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5) 가능한 신속한 장래에 토착인 교역자를 양성한다.
(the training 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 of an indigenous ministry)
캐리는 일찍이 유럽인은 결코 수 백만 인도인을 개종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원주민들만이 자기 종족을 개종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캐리는 원주민 기독교인들에게 믿음을 가르침으로, 자기 민족에게 내 보낼 수 있는 지도자 양성을 위한 대학 창설을 꿈꾸고 있었다. 1819년 세람포대학이 창립됨으로 그의 꿈은 실현되었으며, 이 대학은 인도 최초의 학사 학위를 수여하는 대학이 되었다.
샤티(Sati)제도와 카스트제도의 페지, 경제 발전과 농업 발전 계획(The Agricultral Society of India의 발족, 1820년 9월)등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특별히 캐리의 선교 정책은 선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발전 과정에 충실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Herold Fuller가 말한 발전 과정은 A Pioneer Stage A Paternal Stage A Partnership Stage A Participation Stage 의 네 단계로, 캐리는 빠른 시일 내 현지 교회를 세우는 일에 우선권을 두었다.
3. 윌리암 캐리의 선교 평가 (Assessment of his mission)
캐리는 스스로 자신의 후기 사역을 미천한 업적으로 평가하였으나, 그의 끈질긴 노력과 선교에 열중하는 그의 모습은 과연 선교의 아버지로 불러도 손색이 없는 뜨거운 열정 그 자체였다.
그의 선교는 암흑기에 빠진 영국과 세계 선교의 큰 빛이었던 것이다.
[1]. 긍정적인 면 ( positive) aspects)
(1) 그의 선교에 대한 뜨거운 소명감과 열정감이다.(missionary zeal)
선교의 가장 기초적인 초석은 열심이다. 많은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끊임 없이 다시 일어나 복음을 전하는 그의 열정을 이르는 말이다.
(2) 성경 번역에 대한 공로이다.(Bible transiation)
그는 인도의 다양한 64개의 언어와 방언으로 된 34가지의 인도 말을 번역하여 선교하였다. 특히 그 나라의 언어로 된 성경을 번역하여 보급하였고, 문서를 통한 선교와 번역 선교의 장을 개척한 것은 그의 뛰어난 선교의 통찰력이었다.
(3) 교육 사업을 통한 선교의 추진이다.(education)
캐리는 인도의 캘커타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세람포에 순수한 인도인의 대학을 세웠다. 이는 단순한 교육 사업이 아니라, 교육을 통한 선교 사업 그 자체였다.
(4) 팀 선교의 본을 보여 주었다.(team mission)
세람포의 삼총사(Serampo trio)로 기억될 인쇄업자인 윌리엄 와드(William Ward, 1764-1823), 언어학자요 번역자인 죠수아 마쉬멘(Joshua Marshman, 1768-1837)은 캐리와 함께 뛰어난 팀을 구성하여 많은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 당시 대부분의 선교는 선교사 혼자의 능력과 경험을 강조하던 시대적인 상황이었다.
(5) 겸손한 선교의 자세이다.(humility)
그는 선교사로서 잊기 쉬운 겸손의 본보기를 보여준 선교사였다. 스스로 미천한 존재임을 고백하였으며, 젊은 선교사의 질문에 대해, 캐리 본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오직 캐리의 구세주를 이야기하라고 말할 정도로 겸손한 선교사였다.
[2]. 부정적인 면(Negative aspects)
구태여 단점을 들추어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참고적으로 몇 가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선교를 준비하는 이들을 위하여 오히려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1) 가정적인 어려움과 문제점이다.(family issues)
캐리의 부인(Dorothy plackett)은 선교에 무지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심한 반대자요 방해꾼이었다. 인도에 가기까지 수 없이 설득을 해야했고, 현지에서 자녀가 죽게 되자 결국 정신병까지 걸리게 되어 회복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캐리는 세 번이나 결혼(Charlotte Rhumohr, Grace Hughes)을 하게 된다. 가정의 불화와 자녀의 탈선과 불량함 등은 그의 선교에 많은 부담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선교사는 바른 가정관이 정립되어야 한다. 혼자만의 결단과 사역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2) 자금 관리에 대한 문제점이다.(financial issues)
캐리보다는 그가 속한 선교회와 주위 사람들의 문제이며, 캐리 역시 주변 사람들을 너무 믿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도 정착을 위한 1년 동안의 기금이 수주일 내 바닥이 나게 되어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으며, 말년에도 개인적인 후원금과 영국 선교회의 후원금을 일원화하지 못하여, 많은 오해와 어려움을 겪었던 것을 보게 된다.
[3]. 결론
-선교운동사에 미친 영향(Influence on the Missionary Movement)
40년 동안 안식년도 없이 인도와 결혼한 선교사라는 표현 그대로, 73세의 일생을 선교에 던졌던 윌리암 캐리이다.
안주하기를 원하며, 예정론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었던 당시의 잠자던 교회를 깨운 윌리암 캐리의 사역은, 고요한 정적을 일깨운 새벽 닭 울음소리 그 자체였다. 독창적이고, 활동적이며, 무엇보다 실제적인 선교였다.
그가 보낸 편지와 수고로 인하여 영국과 미국에 설립된 선교 단체만 해도 수 없이 많다.
다음은 허버트 케인(J. Herbert Kane)이 밝힌 캐리의 영향으로 창립된 선교 기관들이다.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1795년)
스코틀랜드와 글라스고우선교회(Scottish and Glasgow Missionary Societies, 1796년)
네덜란드 선교회(Netherlands Missionary Society, 1797년)
교회 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 1799년)
영국 해외 성서 공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 1804)
미국 해외 선교 위원회(America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1810년)
미국 침례 선교 협회(America Baptist Missionary Union, 1814년)
미국 성서 공회(America Bible Society, 1816년).
그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개신교의 교단적, 초교파적 선교 단체들이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계속 세워졌다.
그가 주장한 선교사의 결속과 유대를 통한 효과적인 선교 방안을 강구하기 위한 모임은, 그가 주장한 1810년보다 100년이나 지나 이뤄지게 된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그가 주장한 세계 최초의 모든 교파 지도자 회의는 희망봉에서 1810년에 모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인 모임은 1910년 에딘버러에서 그 빛을 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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