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상의 발견과 신대륙 선교
- 중세기의 아메리카 신대륙 선교를 중심으로-
손윤탁 2001-01-11
I. 신대륙의 발견 (Discovery of New Continent)
십자군의 원정 이전의 서유럽인들은 지중해 건너의 아프리카나 중동 지역의 동쪽에 위치한 아시아 외에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그들의 지도 중앙에는 예루살렘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지중해의 나일강과 돈강이 T자를 이루고 있었고, 모든 육지는 O자형의 대양에 둘러 싸여 있어서 그들이 생각한 지도는 TO형 지도로서, 이 지도의 정상은 북이 아니라 동이었다.
이런 지도를 가지고는 한 발자국도 유럽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1. 지리상 발견의 배경(historical background)
동방에 대한 동경(Yearning of the East)
유럽인들이 지리에 대한 지식이 넓어지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이후이다. 몽고제국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64-1324)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은 당시 극동에 대한 가장 자세한 기행문으로 널리 읽혀지고 있었다. 당시 이 견문록은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욕구와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동방의 부(富)인 금과 향료를 비롯 진귀한 풍습에 대한 동경이었다.
새로운 항로 모색(Search for a new sea-route)
더구나 15세기 오스만투르크(Osman Turks)의 콘스탄티노플의 점령과 중동 통일로, 소아시아와 이집트 일대가 제압 당하자 이곳을 통과하는 상품에 대한 과중한 통과세는, 동방 물산에 대한 가격의 등귀로 다른 길을 찾기 위하여 부득이 힘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항해 기술의 발달(Improvement in Maritime Technology)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선술의 발달이다. 더구나 지도 제작이 발전하고 나침반, 천구의, 관측기 등의 개량은 원양 항해의 가능성을 더욱 짙게 하였으며, 지구 구형설과 지도의 제작으로 피렌체의 토스카넬리(Paolo Toscanelli)는 서방 항로의 유망성을 논하게 되었다.
일찍부터 해상 무역에 국운을 걸기 시작한 나라는 이베리아 반도의 제국들이었다. 포르투갈이 앞섰으나, 뒤이어 스페인도 15세기 말 포르투갈이 뒤를 따랐다.
인도 항로의 발견(Discovery of Sea route to India)
인도 항로의 발견은 포르투갈의 노력에 의한 결과이다. 포르투갈의 항해왕 헨리(Henry the Navigator, 1394-1460)는 사그르(Sagres)에 항해 학교를 세워 탐험과 발견에의 의욕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슬람에 대한 측면 공격을 위하여 아프리카 탐험을 개시하였다.
헨리의 노력으로 포르투칼인은 1434년 유럽인이 더 이상 항해하기를 무서워했던 모로코의 보자도르(Bojador)봉을 회항하게 되었으며, 이어 아프리카의 콩고강을 발견하였다.
1487년 세 척의 배를 준비하여 효과적인 탐험을 하기 위해 나선 바르돌로뮤 디아즈(Bartholomeu Diaz, 1400?-1500)는 드디어 아프리카의 남단 희망봉을 회항하는 데 성공하였다.
10년 뒤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1524)는 4척의 배로 1497년 7월 8일 리스본 항을 출발하여, 디 아즈가 발견한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하였는 데, 리스본을 떠나 10개월 14일만에 인도의 서중부 캘커타의 말라바르 해안에 도착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유럽인들은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인도로 직행하는 새 항로를 개척하게 되었다. 본국 정부의 강력한 보호 아래 인도와의 무역을 개척하여 독점하였으며, 16세기초에는 고아에 인도 총독부를 두어 그 확고한 기지를 마련하고 이 기지를 거점으로 하여 동남아와 중국 마카오, 그리고 일본과의 무역을 시작하였다.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Discovery of New Continent by Columbus)
포르투갈에 이어서 신항로 개척에 앞장서기 위해 몸부림쳤던 나라는 같은 이베리아 반도의 에스파니아다. 특별히 스페인은 인도로 향하는 신항로를 대서양 쪽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이사벨라 여왕(Isabella, 1451-1504)은 이탈리아의 제노바 인인 콜룸부스(Columbus, 1451-1506)를 지원함으로 새로운 인도 항로를 개척하도록 하였다.
무명의 탐험가인 콜룸부스는 1492년 8월 3일 아침, 새벽 미사를 마친 후 지휘선 산타 마리아호를 타고 스페인의 카디스를 출항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10월에 바하마 제도의 작은 섬인 산살바도르(워틀링섬)를 발견하고, 오늘날의 쿠바, 산토도밍고 섬을 발견하였다. 그 이후에도 그는 네 번이나 신대륙을 탐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을 때까지도 자신이 발견한 것이 신대륙인 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이 지방을 서인도(West India)라고 부르고, 원주민들을 인디안(Indian)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신대륙의 새 이름과 태평양 (new Name of New Continent and Pacific)
콜룸부스가 발견한 것이 신대륙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사람은, 역시 이탈리아 사람으로서 스페인에 봉사한 아메리고 베스풋치(Amerigo Vespucci, 1451-1512)이다.
그는 북미에서 남미에 이르는 전혀 새로운 대륙의 존재를 소개하였고, 이에 따라 독일의 지리학자 마르틴 발트제에뮐러가 1507년에 발간한 새 지도에 그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America)라 함으로 신대륙의 새 이름이 주어진 것이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포르투칼 사람이다. 그러나 마젤란(Ferdinand Magellan,1480?-1521)은 스페인 정부에 봉사하고 있었다. 1519년 서방항로를 발견하라는 왕명으로 남미의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다가 남미의 남단에 있는 마젤란 해협을 지나 태평양으로 진출하였다. 태평양 횡단에는 3개월 20일이 걸렸다.
파도가 잔잔하다고 하여 「태평양」이라고 명명하였으며, 어렵게 필리핀에 도착하였으나 마젤란은 이곳에서 원주민에 의하여 죽고, 일행은 1522년 9월 8일 카디스에 귀항하였다. 5척의 배에 243명이었던 선원이 빅토리아호 한 척에 18명이 살아 돌아왔다.
II. 그 후의 식민 활동(植民 活動)과 지리상 발견의 의의
1. 포르투칼과 스페인의 식민활동
인도 항로의 발견과 신대륙 개척에 앞장 선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각각 아시아의 여러 연안 지역과 광대한 중남미 대륙에 통상 활동과 식민지 활동을 시작하였다. 주로 포르투갈은 아시아 지역과의 통상에, 스페인은 신대륙의 식민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아시아의 필리핀이 스페인령이 되고, 남미의 브라질이 포르투칼령이 된 것은 각각 마젤란과 토르데실라스 조약의 결과이다.
포르투칼의 아시아 연안 개척(Colonization of Asia by Portugal)
지금까지 인도 방면의 무역권을 쥐고 있던 사라센인을 구축하고 1510년 인도의 서해안의 고아를 동방무역의 근거지로 삼은 포르투칼은 다시 실론, 말래카를 점령하고 향료의 주산지인 뮬러카스 제도를 점령함으로 인도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1517년 중국의 명나라와 광동에서 통상을 개시하고, 1557년에는 마카오를 조차(租借)하였으며, 1543년에는 일본과도 통상을 하게 되었다.
상업 무역에 힘을 기울인 포르투칼은 리스본을 향료, 비단, 차, 귀금속등 동방 산물의 최대 집산지로 번성시켰다.
스페인의 신대륙 점령(Colonization of South America by Spain)
반면 스페인은 신대륙 지방의 식민 활동에 주력하였으며, 특별히 캐톨릭 선교에 힘을 기울인 것도 사실이다.
브라질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메리카 대륙을 그들의 영토로 삼았으며, 1521년 코르테즈(Cortez, 1485-1547)는 멕시코의 아즈텍크 왕국을 멸하였으며, 1532년 피사로(Pizarro,1478-1541)는 잉카제국을 멸망시켰다.
특히 스페인은 페루와 멕시코에 총독을 두고 독점 무역을 강화하였으나, 원거리로 인하여 총독들은 후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과 밀무역을 하게 된다. 페루 총독은 남미지역을, 멕시코 총독은 파나마 이북과 필리핀을 지배하였다.
*. 참고 - 토르데실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 1494)
포르투칼과 스페인의 대양 일대의 정복과 무역의 독점권 다툼은 로마 교황청에 청원을 낼 정도로 치열하였다. 십자군의 구실을 맡음으로 약간의 세속적 이득을 차지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포르투칼과 에스파니아 사람으로서 교황이 된 알렉산더 6세의 힘을 업은 에스파니아의 다툼은 결국 1494년 6월 두 나라가 서로 양보하는 가운데 토르데실라스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아조레스(Azores)의 서방 270리그, 서경46도 37분 자오선을 경계로 동은 포르투칼, 서는 스페인의 세력권으로 분할하였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방법이었으나, 1493년 교황교서를 내린 적이 있는 교황청도 이를 인정하게 됨으로 포르투칼은 남미의 동쪽 끄트머리에 걸려든 브라질을 손에 넣었다.
2. 지리상 발견의 의의 (Significance)
지금까지 논란이 되어 왔던 지구 구형설(地球 球形說)이 입증되었으며, 동방 무역을 독점하였던 이탈리아 중심의 지중해 상업권은 완전히 대서양 중심으로 확대됨으로 지리상의 혁명을 가져오게 되었다.
동시에 이탈리아의 상업권은 물론 르네상스도 쇠퇴하게 되었다.
식민지에서 들어 온 막대한 금은(金銀)의 유입은 물가의 등귀를 일으켜 소위 가격 혁명을 일으켰으며, 이로 인하여 상공업의 발달이 촉진되고 각 나라는 중상주의를 추구하게 된다.
이제 시장은 유럽에 국한되지 아니하고 세계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유럽의 문화가 세계 각지로 전파되어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世界史)가 전개되기 시작하게 되는 데, 지금까지는 지중해를 지배하는 자가 서양 세계를 지배하였으나, 이제는 대서양을 지배하는 자가 유럽 세계는 물론, 전 세계에 군림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종교적으로도 지리상의 발견은 크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십자군 전쟁으로 유일하게 서방교회의 세력을 지탱해 준 포르투칼과 스페인이 새로운 세계를 개척함으로 말미암아 선교의 범위를 확대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개혁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이러한 선교가 바람직한 선교였는가에 대한 문제로 여전히 남겨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됨에 따라 중세 교회의 과도한 현실 간섭과 그 허구성을 입증하게 됨으로,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한 종교 개혁이 성공할 수 있는 새로운 분위기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당시의 유럽인들은 신대륙의 발견과 더불어 많은 사회 연구를 하게 되었고, 차츰 자기 정부에 대한 결함을 반성하기 시작하였으며, 탐험가나 선교사들에 의한 문화 인류학적 연구는 유럽의 정치와 종교에 많은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콜룸부스의 신대륙 발견(1492년)과 마르틴 루터의 비텐베르그 반박문 게재(1517년)는 불과 25년 차이다.
지리상의 발견이 없었으면 캐톨릭의 지배를 받지 않는 새로운 땅을 찾을 수도 없었을 것이며, 1620년의 영국 청교도 이주나 오늘의 아메리카 합중국도 생각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III. 신대륙 선교
1. 16세기의 중남미 선교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는 스페인 사람들과 포르투칼 사람들에 의하여 선교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신 세계로 접근하는 방법(the method of approach to new world of the West)은 정복(conquest), 정착(settlement), 전도(evangeiization)였다.
이들은 새로운 땅을 정복한 후 상당수의 유럽인들을 이 땅에 이주시켜 영구히 정착케 함으로 야만적인 이교도들을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래서 1502년에는 2500명의 이주민들이 히스파니울라( Hispaniola)로 왔다.
초기 국왕의 지시 사항 속(the requirements by the king of Spein)에도 선교를 위한 깊은 배려들이 있었다. 폭력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인디언들을 보살피며, 마을에 정착하여 교회와 학교를 세울 것(care for the Indians without the use of violence, settle them in villeges, build churches and schools) 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1519년 코르테즈(Cortes)가 아즈텍( Aztecs)과 접촉하였으나 1521년 이들을 진멸하고 말았으며, 피사로(Pizarro)는 페루의 잉카 제국에 들어가 1532년 이들을 또한 파괴시키고 말았다.
1500년경 카브랄(Cabral)에 의해 발견된 브라질에 남미 최대의 도시인 상 파울로(Sang Paulo)가 건설된 것은 1553-4년이었다.
탐험이나 정복을 위한 모든 원정에는 승려들과 수도사들이 수행을 하였으며, 처음에는 Franciscans이나 Dominicans이 주역을 담당하였으나 후에는 Jesuit파가 그 뒤를 따랐다.
빠른 속도로 감독 교구들이 조직되어 갔다. 닐(S. Neil)은 이 감독 교구들의 설치 연대가 곧 그리스도교의 정복 속도라고 소개할 정도이다.
1511년 산토 도밍고 교구 설립(대서양 서쪽 첫 감독 교구),
1522년 8개의 교구를 거느린 Antilles 교회조직 완성
1525년 Tlaxcala 교구 설립(멕시코 최초의 교구)
1526년 멕시코 시티 추가
1548년 7개의 교구를 거느린 대 감독 교구로 승격
남아메리카 최초의 교구는 카라카스(Caracas)였으며,
1541년 리마, 1575년 에콰도르, 볼리비아, 페루, 칠레를 감독하는 대감독교구 설치되었다.
백성들은 크게 주저하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스테반 닐은 프란체스코 선교사였던 페트로(Peter of Ghent)의 1529년 6월 27일 편지를 소개한다.
"나와 함께 일하는 형제는 멕시코의 이 지방에서 20 만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사실 너무 많은 숫자여서 정확한 숫자를 파악할 수 없다. 하루에 1만 4천명에게 세례를 준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날은 1만명, 혹은 8천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baptized of 200,000 persons, so many in fact that I cannot give an accurate estimate of the number, baptized in a single day 14,000peoples, sometimes 10,000 or 8,000.) "
방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인디언들의 반란과 선교사들의 집단 살해가 있었다. 현재 뉴 멕시코주로 알려진 곳에서 1540년 두 프란체스코 회원이 원주민에 의하여 살해되었고, 40년 후에도 다른 세 프란시스 칸이 원주민에 의하여 난폭하게 학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지역 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더 큰 장애 요소는, 스페인에서 이주해 온 이주민들의 잔인성 때문이었다.
이주민들은 일정한 숫자의 인디언들을 보호하고, 그리스도인의 신앙으로 이끄는 책임과 함께, 그들에게서 곡물과 노동력을 제공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무력한 인디안 들을 좋은 제도(uncombined)의 근본 의도를 완전히 파괴하고, 자신들의 탐욕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켰다. 잉카를 점령한 페루의 정복자 피서로는 인디안 강탈을 중지하고 기독교의 가르침이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는지 조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내가 온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의 황금 탈취를 위해 왔다 고 대답할 정도였다.(Pizarro replied I have not come for any such reason, I have come to take away from them their gold )
그러나 인디언들을 위한 투사도 있었다. 도미니크 수도사인 안토니오 데 몬테시노스(Antonio de Montesinos)와 바르돌로뮤 데 라스 카사스(Bartholomew de Las Casas, 1474-1566)가 대표적 인물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선교는 일반적으로 일정한 방침이 있었다.
토착 언어에 의한 선교, 학교 설립, 그리고 인디언 교회의 성례식 문제로 2차에 걸쳐(1552, 1585) 리마에서 회의가 열렸으며, 현지인 곧 인디안 사제를 양성하기까지 하였다. 오늘날 전 세계 카톨릭 인구의 40% 이상이 이 지역에 살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닌 것이다.
2. 17세기의 북미(캐나다) 선교
17세기 초까지 캐나다는 거의 미지의 나라였다.
1534년 여행가인 자크 카르티에(Jacques Cartier)가 이 나라를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카르티에는 이 나라를 뉴 프랑스( New France)로 불렀다.
대형 십자가를 세우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한 내용은 매우 고무적이다.
'우리는 두 손을 모아 수많은 이들의 면전에서 십자가를 받들어 모십니다. 이는 우리의 손을 하늘을 향하여 듦으로서, 우리의 구원이 오직 십자가에 의존하고 있음을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
1615년 6월 24일 몬트리얼 시에서 최초의 로마 카톨릭식의 미사가 거행되었다. 그러나, 시작과 같지는 않았다. 당시 주민은 후론(Hurons), 알곤퀸(Algon quins), 이로쿠오이(Iroquois)등 세 인디안 부족(three group of Indian)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인구는 15만 명을 넘지 않았으나, 다툼과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이었다(all constantly at the war with one another).
1632년 예수회에서 50명 가까운 프랑스계 수도사(French Jesuits)들이 파송되었고, 1639년에는 우르술라(Ursuline) 수녀 3명과 간호사 수녀 3명이 파송되었으나, 인디안 사이에 벌어진 끊임없는 전쟁으로 선교는 오히려 위협을 받게 되었다.
1642년에는 Isaac Jogues신부가 이로쿠이오스족에게 잡혀 무참한 고문을 당하였고, 1646년에는 Iboet non Redibo 신부와 젊은 평신도 Jean de la Lande가 살해를 당하였으며, 1649에서 50년 사이 이로쿠이오스 족이 후론 족을 완전히 전멸시키는 가운데, 3명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고문 당한 후 산채로 화형을 당하게 되었다.
사실 북미의 선교는 비인도적이면서도 부끄러운 선교사(史)로 기록되어지고 있다(In fact, the most shameful passages of colonial history).
인디안과 인디안의 싸움 뿐 아니라, 유럽인과 인디언의 싸움을 조종하여 인디안들을 싸움에 동원시킨 사건(the white man engaged the Indian in his own quarrels)뿐 아니라, 더 나쁜 것은 이들에게 알콜 곧 화주(火酒)를 공급함(the supply of alcohol)으로 거의 고의적인 살인행위를 자행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3. 17세기의 남미의 구아라니스(Guaranis) 건설
17세기의 남미의 선교 가운데 괄목한 만한 것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 정책 가운데 소위 구아라니스 공화국 (the Repblic of the Guaranis)이라는 것이다. 주로 파라과이에서 최대한으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보호와 바람직한 기독교 교육을 위하여 주민들을 한 곳에 모아 촌락을 형성하였던 것을 말한다.
1610년 최초의 그리스도인 촌락 로렛토(Lorretto)가 건설된 이후 1623년까지 23개의 정착지가 라 구아이라(La Guayra)에 건설되었는데, 총 인구는 10만에 달하였다. 이들 주민 대다수는 그 때까지는 이교도들이었으나, 신부들이 보장하는 평화와 노예 운명으로부터의 보호를 믿고 옮겨 온 사람들인데, 이들을 붙잡아 노예로 부리고자 하는 포르투갈 인디언인 마멜루크족(Mamelukes)으로부터 많은 공격과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였다.
대개 이 지역의 모습은 또 같았다. 마을 중앙에 교회가 건립되고, 주민들은 질서 정연하게 줄지어 서 있는 가옥에서 살았으며(The plan of all the reductions was much the same in the centre stood the church. The people were lodged in houses neatly arranged in rows), 교회에 속한 경작지는 주민들에게 매 주 배당된 시간만큼 일하였고, 개인적인 전답도 소유하고 있었다.
초등교육도 베풀었으며, 축제와 음악에 대한 관심도 대단하였으며, 평화와 행복과 질서가 있는 곳으로 평가된다. 신부는 자체 방어를 위하여 인디언들에게 무장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단 한 명의 현지인 사제나 여자들을 위한 수도원도 설립하지 않았던 점이다. 이미 확인한 것처럼 예수회가 추방되었을 때 중세 선교의 막이 내려진 것처럼, 남미에서도 선교의 이러한 정책의 결과가 그대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선교 사업은 18세기 후반 서서히 그리고 비참하게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붕괴의 원인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국제적인 정세의 변화였다. 스페인과 포르투칼은 더 이상 세계의 열강도 아니며, 교황의 교서가 더 이상 효력을 가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스티븐 닐은 이러한 카톨릭 선교에 대하여 '남은 것이라고 하나도 없는 선교, 오직 깊은 수풀만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고 하면서 '모든 것이 붕괴하고 말았다' 고 혹평하였다.
세상 나라는 영원하지 않다. 세상 나라나 인간의 힘을 의지한 선교의 결과는, 언제나 그 결과가 분명하다.
그러므로 선교는 언제나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성경적인 선교, 성령의 능력에 의지한 선교라야 함을 교훈해 주면서, 중세 카톨릭의 선교는 그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개혁 교회가 위대한 세기(Great Century)를 맞이함으로 그 빛이 나타나기 시작한 그 시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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