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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목사가 되다 피팅톤으로 이사한 후 케리는 마을 아이들을 위해 야학을 열기도 했으며 자신 또한 성경연구를 열심히 했다. 그래서 성경을 원어인 헬라어와 히브리어로 보기 시작했다. 이 일은 후에 그로 하여금 목사가 될 수 있는 계기가 되게 한다. 학문에의 길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독학으로 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 등 고전어와 이태리어, 프랑스어, 화란어 등 현대 유럽언어와 후일에는 인도어, 뱅갈어 등 동양언어를 독학으로 습득하였다. 또 여러 가지 책을 통해 학식을 넓혀갔다.
1785년에는 피팅톤에서 18킬로미터 떨어진 몰튼 마을로 이사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그는 교사로 임명되었고, 케리는 이곳에서 학교와 구둣가게를 동시에 운영하게 된다. 케리의 집 옆에는 침례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목회자가 없던 이 교회에서 케리에게 도움을 요청해왔다. 그 교회의 일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었다. 1786년 8월 10일 케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그해 11월 몰튼 교회는 케리를 정식 목회자로 받아들였고, 다음해 3월에 케리는 목사로 안수 받는다. 그는 한 사람이라도 더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목회사역에 진력하였다. 몰튼교회에서 4년을 섬긴 후 케리는 레스터의 하비레인(Harvey Lane)교회로 옮기게 된다. 케리는 1789년 가을부터 레스터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이곳은 모든 면에서 몰튼보다 조건이 나은 편이었다. 케리는 부지런하였다. 목회하는 동안 일주일의 하루하루를 계획적으로 보냈다. 월요일에는 고전을 읽었고, 화요일에는 과학에 대한 기본 서적을, 수요일에는 역사에 관한 책, 그리고 글쓰는 일 또 다른 날에는 히브리어 성경 헬라어 성경, 주말이 다가올 때 설교준비 등으로 알찬 목회자로 생활하였다. 그는 많은 교육을 받지 못했고 좋은 환경이 주어지지 못했지만, 강단에서 그의 입술을 통해 전해진 말씀들은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하였다. 그의 설교는 능력이 있었고 회중의 마음을 사로잡곤 하였다.
어느 날 케리는 "쿡선장의 마지막 항해(The Last Voyage of Captain)"을 읽고 있었다. 태평양의 알려지지 않은 섬들을 열심히 찾아다녔던 탐험가 쿡 선장의 여행기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접하게 된다. "아무도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아무 명예도 이익도 뒤 따르지 않기 때문이지요. " 쿡 선장의 항해기는 그의 선교열을 뜨겁게 자극하였다. 이방족속과 섬들, 산호초, 옷을 입지 않은 야만인들, 부족 전쟁과 식인파티 등 흥미진진한 항해기를 읽던 케리는, 이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온통 사로잡히게 된다. 교실벽에 붙어 있던 세계지도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는 이미 알려진 나라의 인구와 종교, 또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을 지도 위에 표시해 가면서, 선교지도를 매일매일 알차게 만들기도 하였다. 케리는 또한 조나단 에드워드의 책도 읽었고, 미국 인디언들을 위하여 선교했던 존 엘리엇과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작품도 자세히 탐독했다.
특별히 조나단 에드워드가 브레이너드의 일기와 편지를 모아 출판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는 케리와 헨리마틴(H두교 Martin)등 후대의 많은 선교사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감동과 새로운 영감을 제공해 주었다. 케리의 학구적인 열심은 "이교도의 개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관한 연구(An Enquire Into the Obligation of Christian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s)"란 논문을 발표하게 했다. 이 책은 1792년 봄에 라이체스터에서 출판되어 선교사역의 고전이 되었다. 케리의 책은 선교를 해야 하는 논리적 이유를 명쾌하게 제시했는데, 이는 수많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선교의 세계적 차원을 보고 선교사역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게 하였다. 힘이 넘치는 그의 강력한 결론은, 기독교에 있어서 선교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는 것이다. 이 책이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1792년 5월 30일에 노팅햄의 침례교 교역자 연합회 모임에서 설교하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도 복음을 전 세계인들에게 전해주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을 반복하여 강조하였다. 이 설교는 두 가지 요점의 선교를 위한 감동적인 호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1892년 10월 2일 케터링에서 개최된 협회의 차기 모임에 참석한 침례교인들은, "이방선교를 위한 침례교 특수 선교회를 구성하기로 하다"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케리처럼 적은 수입으로 사는 대부분의 참석자들에게, 이것은 부담이 되는 결정이었다. 12명의 목회자들과 신학생 한 명, 평신도 한 명이 기구 발족을 위해 13파운드 1실링 6펜스를 기부하겠다는 서명을 하였다. 엔드류 풀러는 그 선교회의 첫 총무가 되었다.
케리의 주위에는 좋은 동역자들이 있어서 효과적으로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와 케리 자신의 인격적 성숙과 노력이 이런 관계들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을 주기 위해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말은 열정적인 케리가 무력감에 빠져있는 성도를 각성시키기 위해 외친 감동적인 슬로건이 아니다. 이 말은 당시 그의 삶의 주제이자 생활의 지표였고, 그의 경험을 명확하고 분명하게 기술해 놓은 것이었다. 그는 세계선교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과업이 바뀌어 가는 과정을 목격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효율적인 삶을 살고 싶어했으며 또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귀하게 쓰임받기를 진실로 원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다. 케리의 선교적 헌신은 위대한 세기로 흐르는 거대한 선교 물줄기의 시작으로 힘있게 솟았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케리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선교사 케리에 대한 연구를 통해, 오늘 이 시대에도 케리와 같은 헌신적인 선교사가 계속 배출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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