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선교사 · 신앙偉人/海外선교* 선교사

★● 아도니람 저드슨의 생애[2]

영국신사77 2008. 9. 26. 20:26

 

 

                      고난의 삶을 살았던 미얀마 선교사
                        - 아도니람 저드슨의 생애 -

이은경(MIR 2기)

 

 

 

 현재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한 국가는 미국이다. 이러한 미국의 선교역사 속에서 의미있는 날이 있었으니, 이는 1812년 2월 5일, 미국 최초의 해외 선교사 파송식이 있던 날이었다.

 이 날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던 8명의 남녀 중 아도니람 저드슨와 그의 아내 앤[낸시]은 인도로의 4개월 항해를 신혼여행으로 여기며, 미국 최초의 선교사로서의 여정을 시작하였다.

 아도니람 저드슨은 1788년
미국 동부 메사츄세츠에서 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6세에 명문 브라운 대학교를 입학해 4년의 과정을 3년만에 수석으로 졸업하고, 정통신학을 고수하는 앤도버 신학교를 졸업한 후, 한 저명한 교회로부터 목회자로 청빙을 받기도 했었다.

 1810년 저드슨과 동료 신학생들은 회중교회 목회자회의에 그들 자신을 선교사업에 헌신하겠다는 내용과 조언, 방향 제시, 기도 요청을 담아 청원서를 냈다. 이 젊은이들의 열정이 자극제가 되어, 미국 선교역사에 큰 역할을 하게 될 해외선교회가 구성되었다.

 이후, 저드슨은 세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자신을 파송하였던 회중교회와 달리하게 되어, 침례를 받은 후 회중교회를 사임하고 미국 침례교회를 위해서 봉사하게 되었고, 이것이 미국 침례교 해외선교부가 탄생되는 계기가 되었다.

 인도에 도착한 후, 동인도회사로부터
인도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는 이곳저곳을 알아보다 여유치 않아, 결국 추방을 피하기 위해 남은 배를 타게 되었는데, 이 배는 미얀마 랭군으로 떠나는 배였다.

 

 애초에 저드슨을 처음 파송했던 선교회와 저드슨이 처음 원했던 선교지가 미얀마(당시 버어마)였으나, 외국인에 대한 박해의 소문으로 인해 선교지를 바꿔던 나라로 1813년 저드슨이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미얀마에서의 저드슨의 생활은, 정부의 박해, 열대성 열병, 투옥생활, 아내와 자녀들의 사망 등과 같은 고난와 고뇌로 점철되어 있었다.

 

 저드슨은 정부의 통제의 고삐가 조여올 때는 집에 틀어박혀 성경번역에 힘을 다하고, 조금 자유스러운 때가 되면 미얀마 사람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는 전도활동에 힘을 다하였다.

 

 저드슨이 미얀마에 발을 딛은 후, 6년이라는 긴 세월 후에 최초의 개종자를 얻게 되었고, 7년째였던 1820년에는 10명의 미얀마인들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


 1820년대 초반, 미얀마와 영국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미얀마 정부는 모든 외국인들을 영국의 첩자로 생각하였고, 이로 인해 저드슨도 1년 반 동안 족쇄와 어둠이 내리깔린 벌레와 병균이 들끓는 감옥에 지내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영국 군의 북상으로 인한 북으로의 행군에 죄수로서 끌려가게 되어, 말로 다하지 못할 고초를 당하였다.


 저드슨의 투옥생활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 저드슨의 아내 앤은 병약해진 몸으로 인해 소천하였고, 몇 달 후 저드슨 자신이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동냥젖을 먹였던 어린 딸도, 열병으로 미얀마 정착 초기에 죽은 첫째 아기와 아내 낸시의 길을 따라 죽음을 맞았다.


 무거운 죄책감과 슬픔으로, 저드슨은 2년 이상 사람들과의 만남을 끊고 홀로 떨어져 살았으며, 하나님을 믿지만 그분을 발견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 빠져 있기도 했다.


 그러나 치유될 수 없을 것 같았던 상처의 아픔도 차차 아물어져 가게 되어, 신앙과 사역에도 영성이 더해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미얀마 여러 지방을 순회하면서 미얀마 땅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깊이 맛보아 감격하기도 하였다.

 1834년, 저드슨은 선교사 미망인이면서 미얀마에 계속 남아 선교사역을 감당하던 사라 보어드맨과 재혼하여, 11년의 결혼생활을 통해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 자녀 중 장성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들은 다섯 명이었다.

 

 1845년 저드슨과 아내 사라, 세 자녀가 미국 방문길에 올랐는데, 불행히도 여정 중에 아내 사라는 병으로 인해 사망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33년만에 조국인 미국땅을 밟은 저드슨은 명사가 되어 , 많은 사람들이 저드슨의 설교를 듣고자 몰려들었다. 저드슨은 순회설교를 승낙하고는, 낯선 땅의 이상한 풍습과 복장 등의 이야기를 듣고자 모였던 사람들에게, 오직 복음에 대해서만 설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순회 설교 중, 저드슨은 생동감 넘치는 젊은 작가 에밀리 첩보크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 에밀리가 저드슨의 세번째 부인이 된다.
 
 결혼 후 에밀리는 저드슨의 아내로 아이들의 엄마로의 생활에 적극적으로 임하였고, 언어와 선교사역에도 열심을 내었으며,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선교지에서 많은 기록을 남겼다.
 저드슨과 에밀리가 미얀마에서 함께 사역한 기간은 3년이었다.
 
 1859년 저드슨은 병의 치료를 위해 배에 올랐으나, 여정 중 62세의 나이로 주님 품에 안기어 바다에 수장되게 된다.
 
 다음해 미국으로 돌아온 에밀리도 병들어, 3년후 남편 저드슨의 뒤를 따라 하늘나라로 향하였다.

 

                                                          맺는 말

 미얀마에서 37년을 보낸 아도니람 저드슨은 성경을 미얀마어로 번역하였고, 그의 기념비적인 미얀마 영어사전가지 완성하였다. 그의 말년에 미얀마 교회는 7,000명의 교인들이 있었고, 163명의 선교사들을 감독하였다.

 
 아도니람 저드슨은 사역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사에 나타나는 질병과 사망으로도 평범하지만은 않은 선교사이다. 미국 최초의 선교사였고, 미얀마 선교의 기초를 닦은 선교사였다.

 
 저드슨의 세 아내는 고생 끝에 모두 병들어 한창 일할 나이에 모두 사망하였으며, 열세 명의 자녀 중 두 명은 출산 중 사산되고, 다섯 명은 열병 등과 같은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미얀마 선교를 위해 지불한 아도니람 저드슨 가족의 값진 희생은 하나님께서 받아 그의 나라가 미얀마에 임하게 하는데 사용하셨다.

 약 150년 전에 미얀마를 위해 자신의 일생과 가족을 불태웠던 아도니람 저드슨의 길을 따라, 미얀마 선교를 위해 오늘도 수고와 눈물을 아끼지 않고 계시는 분들을 기억하며, 미얀마에 복음이 편만케 되는 날을 기대해본다.


- 아래의 책들을 참고하였습니다 -
# 선교사 열전 크리스챤다이제스트
# 아도니람 저드슨 - 신앙인물 만화 도서출판 두란노
# 세계선교역사 기독교문서선교회
 
 

                       미국 최초의 선교사 -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아도니람은 메사츄세츠주의 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1788년 태어났다. 불과 16세에 브라운 대학교에 입학하여, 4년 과정을 3년 만에 수석으로 졸업하는 수재였던 그,는 대학 시절에 만난 제이콥 임즈의 영향으로 성경의 기적과 초월성을 부인하던 자연신론에 심취하게 되었다. 미래에 대한 낙담으로 살던 그가,  20세까지에 제이콥 임즈의 처참한 죽음을 보면서 영혼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1808년, 그의 아버지와 다른 몇몇 목사들이 그 당시 뉴 잉글랜드의 신학교들과 다르게 정통신학을 고수하는 앤도버 신학교를 세우면서 아도니람은 이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기로 서약하였다. 이 학교에는 1806년 건초더미 기도회의 핵심일원이었던 사무엘 밀즈가 다니고 있었고, 밀즈는 아도니람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어 선교의 열정을 불태우게 된다.


  앤도버 신학교의 소수의 학생들의 선교에 대한 높은 관심으로, 미국 선교사 파송 위원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파송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아도니람은 이방인 선교에 헌신한 아내 앤 해설틴 저드슨(Ann Haseltine Judson)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1812년 2월에 결혼하고, 13일 뒤 인도를 향해 떠나서 6월 중순 캘커타에 도착하였는데, 오랜 항해 기간을 신혼여행으로 여기고 성경공부에 힘썼다.


  인도에 도착한 아도니람은 동인도회사의 방해로 동부 아프리카 해안의 프랑스령 섬으로 갔다가, 다시 인도로 돌아가서 말레이반도의 페낭으로 가서 선교사역을 하려 했다. 추방직전까지도 페낭으로 가는 배를 구할 수 없어서, 미얀마(버마)로 가는 배에 오르게 되었다.


  미얀마는 선교사 박해로 악명이 높았던 지역이었는데, 미국을 떠나온 지 2년 만에 저드슨 부부는 마침내 자신들의 힘만으로 미얀마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 랭군에 집을 장만하고 매일 12시간씩 미얀마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앤은 동네 아낙네들과 접촉하며 빠른 속도로 구어를 익혔으나, 저드슨은 마침표나 대문자도 없고 단어와 문장과 절 사이에 아무런 구별도 없는 미얀마의 문자만을 대하며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단지 언어의 장벽 뿐 아니었다. 미얀마인들에게는 인간을 사랑하시고 영원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의식적이고 우상을 섬기는 불교가 미얀마의 종교였다.

 

                                            자야트 중심의 선교로 많은 부흥
저드슨이 미얀마 유일의 개신교 선교사로 활동을 시작한 후, 얼마 있다가 인쇄공인 죠지 휴 가족이 선교사로 입국하여 아도니람의 성경번역 사역과 출판이 활기를 띄었다. 저드슨 부부는 미얀마인들과의 접촉을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해 미얀마의 문화인 자야트를 세우게 되었다. 자야트는 사방이 트인 정자 같은 곳으로 누구든지 와서 쉬며 토론하고, 가끔 쉬어가는 승려들에게 설법도 듣는 장소였다. 저드슨 부부는 선교기지에서 가까운 도로 주변에 자야트를 건설하여, 대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야트에 몰려 들었고,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 중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이들이, 자야트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석하게 되면서 서서히 개종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미얀마 정부의 박해는 큰 어려움이었다. 그 다음의 장애물은 열대성 열병이었는데, 저드슨 부부는 자주 이 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곤 했다. 그들이 랭군에 도착하던 해에 태어난 아들 로저도, 6개월 만에 이 열병에 걸려 숨졌다.

 

  영국과 미얀마의 전쟁으로 아도니람은 다른 선교사들과 같이 간첩의 누명을 쓰고 발에 족쇄를 채우고, 어둡고 더러우며 벌레와 병균이 들끓는 감옥 속에 갇혔다. 1년 6개월여의 감옥생활은 감옥 밖의 앤에게도 고난의 시기였다. 앤은 아도니람이 미국인이며 영국군과 관계 없음을 관리들에게 설명하며 선처를 구하고, 아도니람의 옥중생활을 돕고, 어린 딸 마리아를 돌보는 등 어려운 상황을 감당해야 했다.

 

  1825년 아내 앤과 어린 딸 마리아가 죽음을 당했고, 그로 인한 충격으로 아도니람은 무거운 죄책감과 슬픔의 시간을 보내며, 사람들과의 관계도 끊고 정글에서 혼자 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그의 마음의 병은 계속되지 않았는데, 그를 위해 엄청난 사랑의 기도를 드렸던 동료선교사들과 개종자들 때문이었다. 모든 시련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신앙으로 그의 마음의 병이 치료되고, 깊은 영성이 회복되었다.


  미얀마 여러 지방을 순회하며 다른 선교사들을 돕던 중에, 그는 미얀마어 성경에 대한 큰 사명을 깨닫고 성경 번역과 개역작업에 온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미망인인 사라 보어드맨과 결혼하여 8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사라는 여러 가지 사역에 지쳐 1845년 병을 치료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는 도중에 임종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저드슨은 전설같은 사역을 하는 존재로 유명해져 많은 설교요청을 받았는데, 그는 그곳에서 복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이는 영웅적인 설교, 이상한 풍습 등에 대해 기대를 하던 지지자들을 실망시키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에밀리 첩보크란 소설가를 만나, 다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녀도 한때는 선교사 지망생이었다. 함께 미얀마에 도착한 후 3년 동안 사역한 후, 1850년 아도니람은 심한 병에 걸려 치료를 위한 항해 도중 임종하여 바다에 수장되었다.

 

  그 다음해 1월에 에밀리는 어린 딸과 저드슨의 남은 두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왔으나, 그 자신도 3년 후 36세의 나이로 저드슨의 뒤를 따랐다. 

 

 

                                           아도니람 저드슨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도니람 저드슨(영어: Adoniram Judson, 1788년 8월 9일 ~ 1850년 4월 12일)은 미국

침례교 선교사이다.

[편집] 생애

[편집] 번역물

  • 2편의 성가
  • 미얀마 문법
  • 미얀마-영어사전
  • 미얀마어 성서


 

2008년 6월 4일 보낸 기도편지입니다.

  열방 기도 제목 - 아도니람 저드슨 1
                            (Adoniram Judson)

 

 아도니람 저드슨이 세 살이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아도니람에게 성경을 건네주었고, 어린 아도니람이 성경 한 장을 모두 읽어내자, 그의 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도니람이 네 살이었을 땐 아버지를 흉내내어 이웃집 친구들에게 설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영적이었고, 모든 일에 열정적이었습니다. 1
 
 1808년, 스무 살이 되던 해에 깊은 회심을 경험한 아도니람은 그날 이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유일한 비전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1807년까지 북미로부터 파송된 선교사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과, 해외선교를 후원하는 어떤 선교단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이들의 관심 밖이었던 선교에 대해 고민해온 아도니람은 앤을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 1812년 결혼을 앞두고 런던선교협의회를 찾게 됩니다. 그리고 결혼식을 올리고 목회자 안수를 받은 후 바로 선교지 인도로 향했습니다.

■ 아도니람 저드슨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미전도 종족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앞장서서 헌신할
많은 젊은이들이 일어나도록 기도합시다.  (GTM 제공 www.gtm.or.kr)
 
 
   하나님의사람들

              ◆ 아도니람 저드슨 (미국, 1788-1850년)

                                                                                        2007/02/06 (화) 22:55

 



 “기쁠 때나 슬플 때, 건강할 때나 약할 때에도 우리는 앞을 향하여 나가리라. 미얀마의 광야에 씨를 뿌리고, 시온의 언덕에서 추수를 하리라”

 아도니람 저드슨은 동남 아시아에 위치한 정글에서 복음을 듣지 못한 원주민들을 찾아다니며 30년 동안 복음의 씨를 뿌린 전도자였어요.

 미국의 매사추세츠 주 말덴에서 목사님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아 신앙의 갈등도 많았어요. 그러나 여러 선교단체들과 신학교의 활동으로 온전히 변화되어, 1810년 2월에는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2년 후 아내와 함께 저드슨은 인도로 선교하려 가게 되었어요.하지만 동인도회사의 반대로 선교사역을 할수 없게 되자, 미얀마의 랭군을 향해 출발하여 1813년 7월에 도착했어요.

 저드슨은 곧바로 미얀마어를 배워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어요. 불교 나라인 미얀마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의 일기를 보면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복음을 전하셨어요.

 열병을 앓고 아무 일도 할수 없을 때, 두 마을에서 온 아홉명이 세례를 받았어요. 험한 산과 무릎까지 이르는 물과 미끄럽고 날카로운 바위들이 가득한 강을 따라 다니며, 구석구석 복음을 전했어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도 했지만 반대도 만만치 않았어요.

 새로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을 핍박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얻는다는 것은 마치 살아있는 호랑이의 사랑니를 뽑는 것과 같다”라고 말할 정도였어요.

 성경을 번역하라는 임무를 받고 1820년에 신약 성경을 번역했어요. 1834년에는 구약 성경이 미얀마어로 완역되었는데, 번역된 성경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어요.

 또한 팔레스타인(지금의 이스라엘 땅) 지역에서 유대인들을 전도하고 싶었는데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그가 미얀마 지역에서 활동한 선교사역을 기록한 책들이 독일에 있는 몇몇 유대인들에게 소개되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기도 했어요.

 저드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순종하는 충성된 사람이었어요.

 아도니람 저드슨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았으며, 그가 가는 곳마다 그 땅과 그에 속한 백성들을 하나님의 것으로 회복시켰어요.

아도니람 저드슨은 25세의 젊은 나이로 불교의 나라 미얀마에 들어가, 37년 동안 온갖 고난을 겪으며 복음을 증거했고, 사랑하는 아내와 세 자녀를 모두 미얀마 땅에서 죽어 묻기까지 하였습니다.

 무지한 미얀마 사람들을 위해 10년에 걸쳐 성경을 미얀마어로 번역하는 것을 완성하고, 1850년 4월 12일 하나님의 나라로 갔습니다.

                                                                                                     원본 : 아도니람 저드슨 (미국)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과 루터 라이스(Luther Rice)


'크리스챤 트레닝 하우스'에서 발간한 유상채목사의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강한 교회"를 연재합니다.

 
이름  
  21tv (작성일 : 2004/08/24, 조회 : 1109
제목  
 건강한 교회의 협력 사역 - 교단과의 협력사역

중심진리 / 모든 개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지방회와 총회의 다양한 협력 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학습목표 / 학습자는 침례교회의 지방회와 총회와의 협력사역이 무엇이며 어떻게 동참해야 하는가를 이해함으로서, 독립교회가 아닌 침례교회로서의 합리적인 교회 운영 원칙을 실천해야 한다.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과 루터 라이스(Luther Rice)는 회중교회 선교부에서 인도 선교사로 파송한 사람들이다. 아도니람 저드슨은 인도로 가던 배에서 열심히 성경을 읽고 연구하던 중 침례(immersion)가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루터 라이스는 인도 선교사로 사역하던 중에 침례를 인정하게 되었다.

 

 아도니람 저드슨과 루터 라이스가 인도에서 만났을때, 침례교회의 견해에 대해 서로 동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도에서 선교 사역하고 있던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에게 침례를 받았다. 이들은 미국에 있는 회중교회의 선교본부에 사표를 제출했다. 그후 아도니람 저드슨은 미얀마(버마)로 갔고, 루터 라이스는 미국 침례교회로부터 선교 후원을 받기 위해 1813년 9월 미국으로 돌아왔다.

 

 루터 라이스는 아도니람 저드슨의 미얀마 선교를 후원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1812년에 보스톤의 침례교인들은 "인도 및 기타 해외지역 복음전도 침례회협회(The Baptist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India and Other Foreign Parts)"를 조직했는데, 이들이 루터 라이스를 지원했다.

 

 루터 라이스는 토마스 발드윈(Thomas Baldwin)과 루시우스 볼레스(Reverend Lucius Bolles)의 후원으로, 미국 중부 및 남부의 여러 지역을 순회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전국적인 침례회 선교단체를 창설하려는 지역적 관심이 필라델피아· 찰스톤·  서바나등에서 발생했다.

 

 1814년 5월에 전국의 침례회 연합회들이 전국적인 선교협회를 창설하려는 목적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회합하기로 상호 합의함으로써 총회가 소집되었다. 이 총회에서 33명의 출석 대의원들은 "미합중국 침례교단 외국선교 일반선교 총회(The General Missionary Convention of the Baptist Denomination in the United States for Foreign Missions)"를 만들었고, 이 총회를 매 3년마다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침례교 총회는 이렇게 협동 선교사업을 위해 결성되었다.

  침례교회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개교회의 권위나 자치권에 대한 강조이다. 즉 침례교회는 개교회의 결정을 지도하거나 지시하는 인간적인 권위는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개교회의 자치권의 원리는 각 교회를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의 주권과 성령의 인도하심 그리고 신약성경의 가르침 아래에 두게 한다.

 

 그러나 침례교회가 개교회의 자치권을 강조하더라도,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들 사이의 협동사업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하고 실천해 왔다.

 

 침례교회는 결코 독립교회가 아니다. 침례교회의 협력 사역에는 지방회와 총회가 있다. 그러므로 모든 침례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지방회와 총회의 다양한 협력 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강한 교회 확산 방안 (결 론)
건강한 교회의 협력 사역 - 협력 사역 원리

 

 

 

 

                                                        

 

                                      아도니람 저드슨

                                                                                   2006-07-21

 

 

                                                    배가 없어서 미얀마로

  아도니람 저드슨 부부와 다른 6명의 선교사들은 1812년 6월 중순 인도의 캘커타에 도착했다. 이들은 미국 최초의 해외선교사라는 영예를 안았다. 이들 미국 선교사들 역시 다른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동인도회사의 방해 공작으로 인도를 떠나도록 명령을 받았다. 이에 대한 항의와 타협을 하는 동안, 저드슨 부부는 말레이 반도의 페낭에 가서 선교하려 했으나 배를 구할 수 없어서 미얀마로 가게 되었다.

 

  동인도회사에 의해 저드슨 부부가 인도에서부터 쫓겨나서 복음에 가장 적대적이었던 미얀마로 가게 된 것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들이 미얀마에 첫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그 당시 미얀마에 있는 유일한 개신교 선교사로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랭군에다 커다란 집을 장만하여 침례교 선교본부로 삼고, 그 속에 틀어박혀 날마다 12시간씩 어려운 미얀마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저드슨은 1788년 메사츄세츠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겨우 16세에 브라운 대학교에 입학해 4년 과정을 3년 만에 수석으로 졸업해, 졸업생대표로 고별사를 했다.

 

  한 때 그는 자연신론에 심취한 제이콥 에임즈라는 친구와 가깝게 지내면서 영향을 받았다. 그는 부모에게, 그들의 하나님은 자기의 하나님이 아니며 성경이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는다고 폭탄선언을 하고 뉴욕으로 갔다. 뉴욕에서 몇 주일 방랑생활을 했으나, 다시 낙담하고 좌절한 채 돌아가는 중, 밤에 어느 여관에 머문다. 밤새도록 옆방에서 죽어 가는 한 환자의 신음소리와 헐떡이는 숨소리를 들으면서 아침을 맞았는데, 죽은 사람이 바로 자기의 친한 대학친구 제이콥이란 사실을 알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는다.

 

 돌아오는 길, 갑자기 자기 아버지의 하나님이 진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몇 몇 그리스도인 사상가들과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결국 그는 정신과 마음속에 성경은 참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1808년 12월 어느 날 -그가 결코 잊지 못하는 날- 그는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렸다. 헌신을 서약한 후 그는 영국선교사로부터 온 선교사역보고서를 읽고 커다란 감동을 받아, 미국 최초의 해외 선교사가 되리라고 결심하였다.

 미얀마라는 토양은 기독교를 성장시켜 나가는데 부적합한 토양 같았다. 모든 복음의 씨앗은 뿌리도 내리기 전에 뽑혀버렸다. 조금 성장할 만하면 정부의 단호한 제재 조치로 시들곤 했다.

 

 

                                            미얀마 특유의 자야트로 선교활동

 

 그는 선교기지에 사람들을 초청하는 대신, 원두막 같은 미얀마 특유의 자야트를 만들고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자, 그것을 만든지 한 달만에 한 사람이 결신하고 예배에 참석했다. 그후 약 8년 만에 10명의 사람이 침례를 받았다.

 

 정부 다음으로 선교사역에 장애를 주는 것은 열대성 열병이었다. 이들은 이 병에 자주 걸려 죽을 뻔했다. 그는 정부의 박해와 투옥으로 건강을 잃어버렸으나, 미얀마 성경을 완성하는 보다 큰 사명이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성경번역에 몰두하여 1년 만에 신약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여, 1850년 그가 죽던 해 그는 최초로 미얀마어로된 성경을 완성했으며, 최초의 미얀마 영어 사전도 거의 완성단계에 있었다.

 

 

                                                                                                                                                                                                                                                                                                 

 
                                             by  http://www.ds-ch.org/mission/main.html[동신세계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