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삶을 살았던 미얀마 선교사
- 아도니람 저드슨의 생애 -
이은경(MIR 2기)
현재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한 국가는 미국이다. 이러한 미국의 선교역사 속에서 의미있는 날이 있었으니, 이는 1812년 2월 5일, 미국 최초의 해외 선교사 파송식이 있던 날이었다.
아도니람 저드슨은 1788년 미국 동부 메사츄세츠에서 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6세에 명문 브라운 대학교를 입학해 4년의 과정을 3년만에 수석으로 졸업하고, 정통신학을 고수하는 앤도버 신학교를 졸업한 후, 한 저명한 교회로부터 목회자로 청빙을 받기도 했었다.
1810년 저드슨과 동료 신학생들은 회중교회 목회자회의에 그들 자신을 선교사업에 헌신하겠다는 내용과 조언, 방향 제시, 기도 요청을 담아 청원서를 냈다. 이 젊은이들의 열정이 자극제가 되어, 미국 선교역사에 큰 역할을 하게 될 해외선교회가 구성되었다.
인도에 도착한 후, 동인도회사로부터 인도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는 이곳저곳을 알아보다 여유치 않아, 결국 추방을 피하기 위해 남은 배를 타게 되었는데, 이 배는 미얀마 랭군으로 떠나는 배였다.
미얀마에서의 저드슨의 생활은, 정부의 박해, 열대성 열병, 투옥생활, 아내와 자녀들의 사망 등과 같은 고난와 고뇌로 점철되어 있었다.
저드슨이 미얀마에 발을 딛은 후, 6년이라는 긴 세월 후에 최초의 개종자를 얻게 되었고, 7년째였던 1820년에는 10명의 미얀마인들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
저드슨의 투옥생활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 저드슨의 아내 앤은 병약해진 몸으로 인해 소천하였고, 몇 달 후 저드슨 자신이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동냥젖을 먹였던 어린 딸도, 열병으로 미얀마 정착 초기에 죽은 첫째 아기와 아내 낸시의 길을 따라 죽음을 맞았다.
무거운 죄책감과 슬픔으로, 저드슨은 2년 이상 사람들과의 만남을 끊고 홀로 떨어져 살았으며, 하나님을 믿지만 그분을 발견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 빠져 있기도 했다.
1834년, 저드슨은 선교사 미망인이면서 미얀마에 계속 남아 선교사역을 감당하던 사라 보어드맨과 재혼하여, 11년의 결혼생활을 통해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 자녀 중 장성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들은 다섯 명이었다.
1845년 저드슨과 아내 사라, 세 자녀가 미국 방문길에 올랐는데, 불행히도 여정 중에 아내 사라는 병으로 인해 사망하게 되었다.
순회 설교 중, 저드슨은 생동감 넘치는 젊은 작가 에밀리 첩보크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 에밀리가 저드슨의 세번째 부인이 된다.
맺는 말
약 150년 전에 미얀마를 위해 자신의 일생과 가족을 불태웠던 아도니람 저드슨의 길을 따라, 미얀마 선교를 위해 오늘도 수고와 눈물을 아끼지 않고 계시는 분들을 기억하며, 미얀마에 복음이 편만케 되는 날을 기대해본다.
- 아래의 책들을 참고하였습니다 -
# 선교사 열전 크리스챤다이제스트
# 아도니람 저드슨 - 신앙인물 만화 도서출판 두란노
# 세계선교역사 기독교문서선교회
미국 최초의 선교사 -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아도니람은 메사츄세츠주의 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1788년 태어났다. 불과 16세에 브라운 대학교에 입학하여, 4년 과정을 3년 만에 수석으로 졸업하는 수재였던 그,는 대학 시절에 만난 제이콥 임즈의 영향으로 성경의 기적과 초월성을 부인하던 자연신론에 심취하게 되었다. 미래에 대한 낙담으로 살던 그가, 20세까지에 제이콥 임즈의 처참한 죽음을 보면서 영혼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1808년, 그의 아버지와 다른 몇몇 목사들이 그 당시 뉴 잉글랜드의 신학교들과 다르게 정통신학을 고수하는 앤도버 신학교를 세우면서 아도니람은 이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기로 서약하였다. 이 학교에는 1806년 건초더미 기도회의 핵심일원이었던 사무엘 밀즈가 다니고 있었고, 밀즈는 아도니람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어 선교의 열정을 불태우게 된다.
앤도버 신학교의 소수의 학생들의 선교에 대한 높은 관심으로, 미국 선교사 파송 위원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파송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아도니람은 이방인 선교에 헌신한 아내 앤 해설틴 저드슨(Ann Haseltine Judson)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1812년 2월에 결혼하고, 13일 뒤 인도를 향해 떠나서 6월 중순 캘커타에 도착하였는데, 오랜 항해 기간을 신혼여행으로 여기고 성경공부에 힘썼다.
인도에 도착한 아도니람은 동인도회사의 방해로 동부 아프리카 해안의 프랑스령 섬으로 갔다가, 다시 인도로 돌아가서 말레이반도의 페낭으로 가서 선교사역을 하려 했다. 추방직전까지도 페낭으로 가는 배를 구할 수 없어서, 미얀마(버마)로 가는 배에 오르게 되었다.
미얀마는 선교사 박해로 악명이 높았던 지역이었는데, 미국을 떠나온 지 2년 만에 저드슨 부부는 마침내 자신들의 힘만으로 미얀마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 랭군에 집을 장만하고 매일 12시간씩 미얀마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앤은 동네 아낙네들과 접촉하며 빠른 속도로 구어를 익혔으나, 저드슨은 마침표나 대문자도 없고 단어와 문장과 절 사이에 아무런 구별도 없는 미얀마의 문자만을 대하며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단지 언어의 장벽 뿐 아니었다. 미얀마인들에게는 인간을 사랑하시고 영원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의식적이고 우상을 섬기는 불교가 미얀마의 종교였다.
자야트 중심의 선교로 많은 부흥
저드슨이 미얀마 유일의 개신교 선교사로 활동을 시작한 후, 얼마 있다가 인쇄공인 죠지 휴 가족이 선교사로 입국하여 아도니람의 성경번역 사역과 출판이 활기를 띄었다. 저드슨 부부는 미얀마인들과의 접촉을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해 미얀마의 문화인 자야트를 세우게 되었다. 자야트는 사방이 트인 정자 같은 곳으로 누구든지 와서 쉬며 토론하고, 가끔 쉬어가는 승려들에게 설법도 듣는 장소였다. 저드슨 부부는 선교기지에서 가까운 도로 주변에 자야트를 건설하여, 대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야트에 몰려 들었고,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 중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이들이, 자야트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석하게 되면서 서서히 개종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미얀마 정부의 박해는 큰 어려움이었다. 그 다음의 장애물은 열대성 열병이었는데, 저드슨 부부는 자주 이 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곤 했다. 그들이 랭군에 도착하던 해에 태어난 아들 로저도, 6개월 만에 이 열병에 걸려 숨졌다.
영국과 미얀마의 전쟁으로 아도니람은 다른 선교사들과 같이 간첩의 누명을 쓰고 발에 족쇄를 채우고, 어둡고 더러우며 벌레와 병균이 들끓는 감옥 속에 갇혔다. 1년 6개월여의 감옥생활은 감옥 밖의 앤에게도 고난의 시기였다. 앤은 아도니람이 미국인이며 영국군과 관계 없음을 관리들에게 설명하며 선처를 구하고, 아도니람의 옥중생활을 돕고, 어린 딸 마리아를 돌보는 등 어려운 상황을 감당해야 했다.
1825년 아내 앤과 어린 딸 마리아가 죽음을 당했고, 그로 인한 충격으로 아도니람은 무거운 죄책감과 슬픔의 시간을 보내며, 사람들과의 관계도 끊고 정글에서 혼자 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그의 마음의 병은 계속되지 않았는데, 그를 위해 엄청난 사랑의 기도를 드렸던 동료선교사들과 개종자들 때문이었다. 모든 시련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신앙으로 그의 마음의 병이 치료되고, 깊은 영성이 회복되었다.
미얀마 여러 지방을 순회하며 다른 선교사들을 돕던 중에, 그는 미얀마어 성경에 대한 큰 사명을 깨닫고 성경 번역과 개역작업에 온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미망인인 사라 보어드맨과 결혼하여 8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사라는 여러 가지 사역에 지쳐 1845년 병을 치료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는 도중에 임종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저드슨은 전설같은 사역을 하는 존재로 유명해져 많은 설교요청을 받았는데, 그는 그곳에서 복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이는 영웅적인 설교, 이상한 풍습 등에 대해 기대를 하던 지지자들을 실망시키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에밀리 첩보크란 소설가를 만나, 다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녀도 한때는 선교사 지망생이었다. 함께 미얀마에 도착한 후 3년 동안 사역한 후, 1850년 아도니람은 심한 병에 걸려 치료를 위한 항해 도중 임종하여 바다에 수장되었다.
그 다음해 1월에 에밀리는 어린 딸과 저드슨의 남은 두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왔으나, 그 자신도 3년 후 36세의 나이로 저드슨의 뒤를 따랐다.
아도니람 저드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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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니람 저드슨(영어: Adoniram Judson, 1788년 8월 9일 ~ 1850년 4월 12일)은 미국의
[편집] 생애
- 1788년 메사추세츠 주의 한 조합교회(Congregational Church) 목사의 아들로 태어남.
- 1794년 브라운 대학교 졸업. 대학생 시절 기독교 신앙을 버리기도 했지만,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일을 계기로 신앙을 다시 갖게 되었다고 한다.[1]
- 1808년 엔도버 신학교(Andover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하였다. 신학생시절 아도니람은 신학교 친구들과 선교사가 될 것을 기도로서 다짐한다.
- 1810년 신학교 졸업
- 큰 교회로부터 부목사로 사목해줄 것을 요청받았으나, 해외선교를 위해 거절.
- 1812년 2월 5일 아내 앤과 함께 미국 조합교회 소속의 인도선교사로 임명받고 인도 캘커타에 입국하였으나[2], 동인도회사와의 갈등으로 선교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 동년 저드슨은 윌리엄 캐리의 영향으로 침례교로 교파를 옮긴다.
- 1813년 당시 선교사가 없던 지역인 버마 랭군에 입국하여 카렌족[3]을 대상으로 전도함.
- 아내와 같이 현지인에게 버마말과 문법을 배움.
- 1817년 신학교에서 배운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마태 복음서 번역
- 1818년 전도를 시작
- 1819년 첫 현지인 신도인 정원지기에게 세례를 집전하였다.
- 1820년 10명의 버마 사람들이 세례를 받음.
- 1820년대 버마와 영국간의 갈등으로 1년 6개월간 수감됨.
-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준다는 조건을 제시한 영국군의 버마어 통역으로 활동.
- 아내 앤과 딸이 병으로 죽음
- 1834년 버마 랭군에 교회를 세움, 여성 선교사 사라 보이드맨과 재혼
- 1845년 선교에 필요한 자금확보를 위해, 미국으로 되돌아가던 중에 사라 보이드맨이 병으로 죽음.
-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전도
- 작가 에밀리 첩보크와 재혼, 3년간 버마에서 선교사로 같이 일함
- 1850년 질병치료를 위해 미국에 돌아가다가 뱅골 만에서 죽음. 시신은 수장됨.
[편집] 번역물
- 2편의 성가
- 미얀마 문법
- 미얀마-영어사전
- 미얀마어 성서
2008년 6월 4일 보낸 기도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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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니람 저드슨이 세 살이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아도니람에게 성경을 건네주었고, 어린 아도니람이 성경 한 장을 모두 읽어내자, 그의 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 아도니람 저드슨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미전도 종족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앞장서서 헌신할 많은 젊은이들이 일어나도록 기도합시다. (GTM 제공 www.gtm.or.kr)
◆ 아도니람 저드슨 (미국, 1788-1850년) 2007/02/06 (화)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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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과 루터 라이스(Luther Rice)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강한 교회"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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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교회의 협력 사역 - 교단과의 협력사역 | |||
중심진리 / 모든 개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지방회와 총회의 다양한 협력 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아도니람 저드슨과 루터 라이스가 인도에서 만났을때, 침례교회의 견해에 대해 서로 동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도에서 선교 사역하고 있던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에게 침례를 받았다. 이들은 미국에 있는 회중교회의 선교본부에 사표를 제출했다. 그후 아도니람 저드슨은 미얀마(버마)로 갔고, 루터 라이스는 미국 침례교회로부터 선교 후원을 받기 위해 1813년 9월 미국으로 돌아왔다.
루터 라이스는 아도니람 저드슨의 미얀마 선교를 후원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1812년에 보스톤의 침례교인들은 "인도 및 기타 해외지역 복음전도 침례회협회(The Baptist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India and Other Foreign Parts)"를 조직했는데, 이들이 루터 라이스를 지원했다.
루터 라이스는 토마스 발드윈(Thomas Baldwin)과 루시우스 볼레스(Reverend Lucius Bolles)의 후원으로, 미국 중부 및 남부의 여러 지역을 순회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전국적인 침례회 선교단체를 창설하려는 지역적 관심이 필라델피아· 찰스톤· 서바나등에서 발생했다.
1814년 5월에 전국의 침례회 연합회들이 전국적인 선교협회를 창설하려는 목적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회합하기로 상호 합의함으로써 총회가 소집되었다. 이 총회에서 33명의 출석 대의원들은 "미합중국 침례교단 외국선교 일반선교 총회(The General Missionary Convention of the Baptist Denomination in the United States for Foreign Missions)"를 만들었고, 이 총회를 매 3년마다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침례교 총회는 이렇게 협동 선교사업을 위해 결성되었다.
그러나 침례교회가 개교회의 자치권을 강조하더라도,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들 사이의 협동사업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하고 실천해 왔다.
침례교회는 결코 독립교회가 아니다. 침례교회의 협력 사역에는 지방회와 총회가 있다. 그러므로 모든 침례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지방회와 총회의 다양한 협력 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강한 교회 확산 방안 (결 론) |
건강한 교회의 협력 사역 - 협력 사역 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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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니람 저드슨 200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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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없어서 미얀마로
동인도회사에 의해 저드슨 부부가 인도에서부터 쫓겨나서 복음에 가장 적대적이었던 미얀마로 가게 된 것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들이 미얀마에 첫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그 당시 미얀마에 있는 유일한 개신교 선교사로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랭군에다 커다란 집을 장만하여 침례교 선교본부로 삼고, 그 속에 틀어박혀 날마다 12시간씩 어려운 미얀마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 때 그는 자연신론에 심취한 제이콥 에임즈라는 친구와 가깝게 지내면서 영향을 받았다. 그는 부모에게, 그들의 하나님은 자기의 하나님이 아니며 성경이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는다고 폭탄선언을 하고 뉴욕으로 갔다. 뉴욕에서 몇 주일 방랑생활을 했으나, 다시 낙담하고 좌절한 채 돌아가는 중, 밤에 어느 여관에 머문다. 밤새도록 옆방에서 죽어 가는 한 환자의 신음소리와 헐떡이는 숨소리를 들으면서 아침을 맞았는데, 죽은 사람이 바로 자기의 친한 대학친구 제이콥이란 사실을 알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는다.
돌아오는 길, 갑자기 자기 아버지의 하나님이 진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몇 몇 그리스도인 사상가들과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결국 그는 정신과 마음속에 성경은 참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1808년 12월 어느 날 -그가 결코 잊지 못하는 날- 그는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렸다. 헌신을 서약한 후 그는 영국선교사로부터 온 선교사역보고서를 읽고 커다란 감동을 받아, 미국 최초의 해외 선교사가 되리라고 결심하였다.
미얀마 특유의 자야트로 선교활동
그는 선교기지에 사람들을 초청하는 대신, 원두막 같은 미얀마 특유의 자야트를 만들고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자, 그것을 만든지 한 달만에 한 사람이 결신하고 예배에 참석했다. 그후 약 8년 만에 10명의 사람이 침례를 받았다.
정부 다음으로 선교사역에 장애를 주는 것은 열대성 열병이었다. 이들은 이 병에 자주 걸려 죽을 뻔했다. 그는 정부의 박해와 투옥으로 건강을 잃어버렸으나, 미얀마 성경을 완성하는 보다 큰 사명이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성경번역에 몰두하여 1년 만에 신약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여, 1850년 그가 죽던 해 그는 최초로 미얀마어로된 성경을 완성했으며, 최초의 미얀마 영어 사전도 거의 완성단계에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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