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선교의 선구자 아도니람 져드슨(Adoniram Judson)
그는 미국 최초의 해외 선교사였고 버마(지금의 미얀마)에서 일생동안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였다. 그의 밑에서 수 많은 버마 영혼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으며 버마 기독교 역사의 그루터기를 형성하였다.
그의 인생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참으로 비참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많은 자식들이 비참한 모습으로 병들어 죽어갔고, 그 또한 많은 질병과 고독 속에서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는 진정 버마인들의 영적 아버지였다. 그의 눈물과 땀방울과 헌신의 핏방울은 버마인들의 생명의 양식이었던 버마어 성경을 잉태했으며, 또한 영어-버마어 사전을 잉태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밑에서 수많은 버마 영혼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으며, 버마 기독교 역사의 그루터기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그의 영혼을 향한 정신과 희생의 삶은 지금도 많은 하나님의 종들 마음 가운데 남아있으며 계승되어지고 있다.
아도니람 져드슨(Adoniram Judson)은 1788년 메사츄세츠에서 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6세에 브라운 대학교에 입학해 4년 과정을 3년만에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로 수재였다. 하지만 그는 당시 자연신론에 심취했던 친구로부터 악영향을 받아 방황의 세월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회중교회 목사였고, 어머니의 눈물어린 설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드슨은 20살이될 때까지 구원받지 못했었다.
오히려 성장할수록 그는 확고한 범신론자가 되어갔다. 그 주된 이유는 그가 대학에서 만난 아주 똑똑한 불신자 친구 때문이었는데, 그 친구는 저드슨이 범신론적 신앙을 갖도록 만들기 위해 논리 정연하게 설득했고 결국 그 일에 성공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저드슨이 극적으로 주님께로 회심하고 구원받은 것은 다름아닌 바로 그 범신론자 친구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졸업 후 저드슨은 집을 떠나 방랑자처럼 여행을 하게 되었다. 어느날 한 시골 여인숙에서 하루 밤을 묵게 되었는데, 저드슨은 옆 방에서 어떤 사람이 죽어가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밤새도록 들려오던 그 남자의 끝임 없는 신음소리로 인해서 저드슨은 한 잠도 잘 수 없었다. 저 축어가는 남자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 그는 어디에서 죽음 후의 영원한 시간을 보내게 될까? 그는 그리스도인이었을까?, 하늘 나라에서의 삶에 대한 희망으로 평안하고 차분한 마음을 갖고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그는 어둡고 낮은 지옥으로 떨어지려는 절벽의 가장자리에서 떨고 있는 죄인은 아닐까?
저드슨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지금까지 가져왔던 그의 철학과는 정반대로, 죽음 이후에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 생각을 몰아내려고 밤새도록 싸웠고, 그러면서도 자기가 이련 유치한 걱정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의 천재 대학 친구가 그를 얼마나 나무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저드슨이 여관 주인에게 그 죽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가 들은 대답은 저드슨의 생애 중 가장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는 프로비던스 대학출신의 매우 똑똑한 젊은이였습니다. 이름은 E 였지요."
E는 저드슨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파괴시켰던 바로 그 불신자였다. 이제 그는 죽었다. 그리고 그의 혼은 지옥에 버려진 것이다. 버려졌다! 버려졌다! 버려졌다‥‥! 이 단어가 그의 뇌리를 파고들었고, 귀에서 떠나가질 않았으며 그의 마음 속에서 큰 소리로 메아리치고 있었다. 버려졌다! 버려졌다‥‥ !
그 날 이후로 저드슨은 자신도 역시 잃어버려진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여행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앤도버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혼을 지옥으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렸으며,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영원히 불타는 지옥으로부터 구원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주님을 위해 바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가 회심하고 구원받음으로 인해서 그동안 자기가 꿈꾸어 왔던 모든 것들, 즉 명예를 얻고 세상의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는 마음을 버렸다. 이제 그의 유일한 목표는 오직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것이었다.
회중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1807년, 아도니람 저드슨은 선교사가 되려는 부담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다. 그는 월리암 대학에 다니는 몇 몇 친구를 알게 되었는데, 그들은 저드슨과 같은 부담을 갖고 있던 친구들로서 그 대학의 운동장에 있는 건초더미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복음을 듣지 못한 야만인들과 미개인들이 구원받게 해달라고 전심으로 기도했고, 그들이 선교사로서 갈 수 있도록 복음의 문을 열어 추시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다. 그 장소가 바로 미국 선교의 발원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한 영국 선교사의 선교사역 보고서를 읽는 중에 크게 감동되어 미국 최초의 해외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미국 선교회를 결성하게 되었고, 1812년 이제 막 결혼한 그의 아내 낸시와 함께 인도로 파송되었다. 하지만 동인도회사의 방해로 인도를 떠나게 되었고, 엄청난 박해의 소문을 듣고 버마로 향하게 되었다.
불교 문화권에서의 사역은 쉽지 않았다. 언어의 장벽, 문화의 장벽, 정부의 간섭 등 많은 장벽들이 있었다. 수백만 명이 살고 있는 버마 땅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한 명도 없었다. 게다가 도둑과 강도들이 들끓고 우상숭배가 만연하며, 죄악으로 가득찬 그 땅에서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라고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콜레라로 죽은 수천 명을 위하여 우울하게 둥~둥~ 울리는 죽음의 북소리와 몽둥이로 집을 두들기는 관습 역시 이 선교사 부부의 민감한 영을 괴롭게 했다.
6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난 후, 마침내 그들은 버마에서 첫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게 되었다.
1819년 6월 27일, 구원받은 첫 번째 버마 사람인 멍나우(Moung Nau)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그들의 선교사역에는 너무나도 엄청난 고통과 눈물과 희생이 동반되었다. 그들은 열대성 열병으로 수십 번 죽을 고비를 넘겼고, 그들의 자녀는 사산되거나 대부분 열병으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로 보내야만 했다. 저드슨은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오, 오늘을 기점으로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버마 사람들이 끊임없이 회심하고 침례를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구원받는 사람들의 숫자는 2명, 3명, 6명, 18명으로 천천히 늘어갔다. 그러나 마귀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저드슨은 영국에서 보낸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21개월 동안이나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간절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또한 저드슨의 아내가 공무원들에게 끊임없이 간청한 결과, 저드슨은 죽임을 당하지 않고 마침내 영국의 중재로 인하여 그는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는 미친 듯이 일(번역사업과 복음사역)에만 푹 파묻혀 지냈다. 져드슨의 이러한 마음의 병은 그를 위해 엄청난 사랑의 기도를 드렸던 동료 선교사들과 개종자들로 인하여 점점 치유되어 정상의 생활로 돌아왔다. 그는 더욱더 열심히 성경 번역 작업과 복음 사역에 힘썼다.
1834 년 그는 버마에 머물면서 선교 사역을 감당했던 30세의 미망인 사라 보어드맨과 재혼했으며, 그녀와 함께 계속해서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1810년부터 그가 버마어 성경번역을 시작한지 23년 만에, 많은 질병과 아내와 자녀들의 죽음을 맛보는 고통의 사투 끝에 그는 결국 버마어 성경을 완성하게 되었다.
사역이 진행됨에 따라 복음은 진전되었고, 놀라운 복음의 능력이 죄인들의 감겼던 눈을 뜨게 하고, 우상에 속박된 마음을 깨뜨리기 시작했으며, 갓 거듭난 회심자들을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로 변모시키기 시작했다.
그가 죽은 직후 정부의 보고서에 의하면 버마에 210,00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것으로 보고 되었다. 이는 버마인 58명 중 한 명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놀라운 숫자였다! 이것은 성령의 위대한 업적이었으며, 그는 버마 수도인 아바(Ava)에서 부처의 사원을 응시하면서
"머지않아 나의 목소리보다 훨씬 더 강력한 한 음성이 너의 왕국의 모든 흔적을 쓸어 없애 버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곧 이 우상숭배의 신전을 대신할 것이며, 열렬한 불교도의 노래 소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찬양 앞에 사라지게 될 것이다!"
라고 강력하게 도전한 저드슨의 헌신적인 사역의 결과였다.
1850년 4월 12일 62세 때, 그는 결핵으로 해상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무런 장례식도 없이, 평소 자주 입었던 검정색 양복 차림으로 바다에 수장되었다.
< 여성의 한계를 극복한 앤 져드슨 >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12:24)"
주님을 위하여 불타는 한줄기 불꽃같은 삶, 앤 져드슨 선교사의 생애는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헌신과 희생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며, 주님을 향한 애정의 불길이 얼마나 위대한 일들을 가능케 하는 가를 보여주는 좋은 표본입니다.
자립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고 동역자를 헌신적으로 동역 했던 앤 져드슨 선교사를 통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진정한 헌신과 동역을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가 영국 해외 선교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는 것처럼, 아도니람 져드슨(Adoniram Judson)과 그의 아내 앤(Ann)은 미국 해외 선교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엔은 선교현장에 마지못해 끌려갔거나, 선교사 남편의 수동적인 보조 선교사가 아니라, 자립적인 선교사역으로 고난의 선교지인 미얀마 선교를 능력 있게 이루었습니다. 앤의 선교사역이 귀감이 되어 19세기 수많은 자매 선교사들이 해외 선교에 헌신하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습니다.
버마 선교사로 회심한 말괄량이 앤은, 1789년 미국 보스턴에서 독실한 신앙을 가진 부모님 사이에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놀기를 놓아했고, 특히 춤추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이 좋아하는 것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놀기를 좋아하는 딸을 위해, 이층에 있는 큰 방을 개조하여 댄스홀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댄스홀은 곧 그 마을 젊은이들의 사교장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좋아하는 말괄량이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그녀를 택하여 귀하게 쓰셨습니다.
어느 날 앤은 영국의 개척자 '한 나모어'가 쓴 책을 읽던 중, 한 문자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쾌락 중에 살고 있는 여자는 살고 있는 동안 죽어 있는 것이다."
16세의 앤은 그 누구에게도 책망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 책을 내팽개치고 대신 죤 번역(John bunyun)의 「천로역정」을 꺼내 읽기 시작했습니다. 앤은 천로역정을 읽어내려 가면서 장망성의 쾌락을 좇는 것이요, 심판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그녀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열정적인 성격의 앤은 회심 후, 곧바로 북미지역에서 서서히 일기 시작한 해외선교에 동참하고자 간절히 바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앤과 친구의 죽음을 통해 극적인 회심을 한 아도니람 져드슨(Adoniram Judson)과의 만남은, 미국 해외 선교의 문을 여는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져드슨이 앤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한눈에 반해버려,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한 달 후에, 그는 앤의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결혼승낙을 요구하는 서신을 띄웠습니다.
"저는 지금 당신께 내년 이른 봄에 당신의 딸과 이별하여, 이 세상에서 다시는 못 보게 될지도 모를 이 결혼에 동의하실 것인 묻고자 합니다. 당신의 딸이 바다의 위험, 인도 남부 기후의 치명적 영향, 극심한 가난과 빈곤, 모욕, 박해, 그리고 어쩌면 참담하게 죽을 수도 있다는 것에 동의하실 수 있으신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져드슨의 노골적인 청혼에 그녀의 아버지는 놀랍게도 승낙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을 앤에게 맡겼습니다. 앤은 열정과 선교 비젼으로 달려드는 져드슨의 청혼을 받아 들였습니다.
1812년 2월 5일 매사추세츠주의 브래드퍼드에서 23세의 아도니람(Adoniram Judson) 과 22세의 앤(Ann Hasseltine)이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혼한지 5일 후에, 선교지인 인도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녀가 해외선교를 위해 미국을 떠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선교사로 떠나는 것은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의 집착 때문이 아니라,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 대한 나의 책임을 다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이 인도에 도착하였지만, 동인도 회사가 그들의 선교사역을 허락지 않아, 그들은 다시 인도를 떠나 버마로 향했습니다.
여인들의 무지를 깨우치는데 힘쓰다.
그들의 버마에 대한 첫 인상은 "어둡고 쓸쓸하고 장래성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져드슨 부부는 먼저 그곳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하루에 12시간씩 언어공부에 전념했습니다. 그런데 앤은 가정일을 하면서 버마인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아, 남편보다 언어를 더 빨리 배웠습니다.
그러나 버마에서의 복음사역은 진전이 없었고 고되었습니다. 게다가 1815년 그들에게 커다란 기쁨이었던 첫 아들이 열병에 결려 여덟 달만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앤은 아이를 잃은 슬픔을 딛고 일어나 더욱 열정적으로 선교사역을 했습니다. 그들은 버마소녀들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 수많은 교리문답책, 몇 편의 복음서 번역, 주간 성경반, 그리고 카운셀링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5년의 세월이 흘렸지만 개심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그들은 낙심치 않고 꾸준히 사역을 계속했습니다. 이 기간에 져드슨은 「하늘가는 길」 (The Way Heaven)이란 책을 썼고, 앤은「져드슨 여사의 교리문답」이란 책을 썼습니다. 앤이 이 책을 쓸 때 낮에는 주민들과 아이들을 돌보고, 밤늦게 피곤을 무릅쓰고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1818년 버마에 새 황제가 취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져드슨이 왕의 신민들에게 기독교를 가르칠 수 있도록 정식허가를 받고자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져드슨은 황제를 설득하는데 실패하고 풀이 죽어 돌아왔습니다.
이때 앤은 "내가 해보죠."하며 나섰습니다. 앤은 져드슨보다 버마어에 뛰어났고, 훨씬 사교적이었습니다. 결국 앤은 애교와 사교술로 버마 황제로부터 기독교 선교의 자유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앤은 져드슨을 보조할 뿐아니라, 자립적으로 선교사역을 하며 여러 방면에서 남편만큼이나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녀의 가장 주요한 선교사역은 문서선고였습니다. 그녀는 실제 선교사 생활과 해외이교도(Heathen)들의 영적 상태를 주제로 감동력 있는 글을 썼습니다.
이것은 해외선교에 대한 지식과 헌신이 극히 제한적이었던 미국인들에게, 큰 관심과 감동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특히 그녀는 버마 여인들에 대한 상한 목자의 심정이었습니다.
앤은 버마 여인들의 비참한 생활을 낱낱이 기록함으로, 여인들을 위한 절박함을 호소하였습니다.
앤은 버마의 남자들은 아내를 '나의 종'혹은 '나의 충성스런 개'라는 호칭으로 불렀고, 아내의 식사는 군주와 같은 남편이 식사를 마칠 때쯤 던져주는 찌꺼기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앤은 여인들이 받는 냉대보다, 여인들이 무지에 더 깊은 무제의식을 가졌습니다.
버마 여인들은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하였고, 일생 무지와 게으름으로 보내었습니다.
앤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교육임을 절감했습니다. 앤은 교육이 그들의 삶을 크게 변화시킬 수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읽고 쓰는 교육을 받으면 그들도 성경을 접할 수 있고, 성경은 그들을 얽어매고 있는 굴레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게 때문이었습니다.
버마여인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으로 불탄 앤은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가 잠자고 있는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들의 무지를 깨닫도록
도와, 우리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도 죽으신 주님을 만나도록 해야 합니다.
자! 우리 힘을 합하여, 무지와 미혹으로 사망의 기로 치닫고 있는 동방의 여인들을 구원하는
노력을 함께 하여 봅시다."
앤의 이러한 간절한 호소로 북미지역의 수많은 여인들이 자매 선교사로 결단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앤의 놀라운 선교사역들은 끊임없이 부딪쳐 오는 혹독한 고난을 극복하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질병이 만연한 버마의 기후와 사랑하는 자녀들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하는 앤의 고통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특히 랑군(Rangoon)에서 아바(Ava)로 이사온 지 6개월이 못되어, 영국군의 버마침공으로 져드슨이 감옥에 끌려가는 혹독한 시련을 당했습니다.
그는 짐짝 같은 감옥에서 발목 족쇄로 매인 후 화강암 불록에 묶여졌습니다. 창문도 없는 감옥에서 더위 때문에 그는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고, 그의 얼굴은 흙으로 얼룩졌습니다. 깨끗함을 경건 다음으로 소중히 여기던 아도니람에게, 그러한 상황은 지울 수 없는 충격적인 상처를 주었습니다. 거의 38도를 치솟는 창문도 없는 감옥에서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 버렸습니다.
이때 진취적인 기상을 가진 앤은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였습니다.
그녀의 대담하고 분별력 있는 노력이 없었다면, 감옥의 모든 선교사들이 힘없이 죽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간수들의 마음을 사서, 선교사들에게 사식과 약품을 주었습니다. 또 고위층 간부에게 가서, 선교사들은 전쟁과 상관없는 사람들임을 주장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고위관리와 그 부인의 후의를 입게 되어, 죄수 고문을 완화시키라는 공식 명령을 내리게 하였고, 모든 죄수들을 사형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여러번 번복토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앤은 2년 동안 기도와 인내로 져드슨을 깊은 절망 가운데서 건져내었습니다.
1825년 11월 영국 군대가 와서 그들을 석방시켰을 때, 져드슨보다 앤이 더 심하게 앓고 있었습니다.
천연두와 뇌성척수 뇌막염이 그 지역에 퍼졌는데, 앤도 감염되어 선교사 생활을 시작한지 14년이 지난 3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삶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비극으로 끝난 무용지물에 불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지만. 그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일생 사명자의 길을 간 선교사였습니다.
아내의 죽음 후에,도 져드슨은 24년 동안이나 더 버마에서 복음사역을 계속하였습니다. 그가 변역 한 버마어 성경이 출판되어 수많은 버마 영혼들이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받았고, 져드슨의 살아있는 동안
63개의 교회가 개척되었습니다.
위대한 선교사 아도니람 져드슨이 있는 이면에는 앤 져드슨 선교사의 동역이 있었습니다. 앤 져드슨이 없는 아도니람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져드슨이 곤경에 처했을 때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또한 자립적으로 복음사역을 섬긴 위대한 선교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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