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경건주의 운동과 선교
18세기의 경건주의 운동과 영적 각성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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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선교 운동의 역사는
17세기의 독일 경건주의 운동
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운동의 영향을 받은
독일 교회가 18세기의 선교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되고,
19세기에는 영국교회가, 그리고
20세기에는 미국교회가 주도적인 역할
을 수행하게 된다. 물론 21세기에는 한국교회가 세계 선교의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하게 될 것이다.
특히 이러한 선교 운동은 경건한 몇몇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고 확장되어 졌다. 즉
독일의 프랑케와 진젠도르프,
영국의 웨슬레와 윌리암 캐리,
미국의 죠나단 에드워드, 챨스 피니, 무디, 학생 자원 운동의 윌더와 모트
등이다.
이 글은 17세기의 개신교 선교 활동에 대하여 간단히 고찰한 후, 특별히 독일에서의 영적 각성 운동과 이에 따른 선교 운동을 다루려고 한다. 독일 경건주의와 선교 운동, 프랑케의 할레 경건주의, 그리고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의 선교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 운동이 영국과 미국, 새로운 세기에 선교 운동의 주역이 될 한국교회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 17세기의 개신교 선교 활동
회개의 절박성만을 강조하고 해외 선교의 중요성을 간과한 마르틴 루터나, 예정 교리에 의해 선교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칼빈주의자들과는 달리, 칼빈 자신은 당시 개척자들 중에서 선교 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는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근거로 Ruth A. Tucker는 칼빈은 수 십 명의 복음 전파자들을 조국인 프랑스로 보냈으며, 또 프랑스의 위그노파(Huguenots) 선교사들과 연합하여 브라질의 인디안들에게까지 선교사를 파송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 일은 1555년 빌레가뇽(Villeganon)의 배교로 인해 선교는 어이없이 끝나고, 선교사들은 예수회 신부들에 의해 학살되고 말았다.
17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상당한 활기를 띠는 것처럼 보였으너, 결실이 없는 선교가 되었다. 궤이크 교도에 의한 선교로 1661년 죠지 폭스(George Fox)는 3명의 선교사를 중국으로 파송하였으나 도착하지도 못하였고, 루터교의 첫 선교사인 유스티니안 폰 벨츠(Justinian von Weltz)가 남아메리카의 대서양 연안에 있는 수리남(Surinam)에 파송되었으나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개신교의 선교의 문은 18세기가 되어서야 열리게 된다. 그 첫 번째 그룹이 바로 독일 루터교회의 경건주의자들이었다.
2. 슈패너(Philipp Jakcob Spener)와 독일 경건주의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M. Luther)가 죽은지 100년이 지난 17세기 중엽의 독일 루터교회는, 생명력을 잃은 사변적 기독교(a speculative Christianity)로 전락하고 말았다. 특히 30년 전쟁은 독일 경건주의 운동을 발생케 하는 원인이 되었다. 정권과 손을 잡은 목회자들은 결국 정치권이 교회를 이끌어 가는 결과를 가져오게 함으로써, 교회의 타락은 더욱 심화되었다.
경제적 심각성은 전쟁 후 100년이 지나도 회복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학교는 문을 닫았고, 교회는 불태워졌으며, 병자와 가난한 자는 거리에 버려졌다. 집 없는 무리는 이리저리 구걸하기 위하여 몰려다니며 강탈과 파괴를 일삼았다.
그러나 부자들은 달랐다. 농민들은 거지처럼 살았으나 부자들은 맥주 의자에 앉아있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교회의 타락과 영적인 침체에 있었다.
성직자들은 교리 논쟁에 치우쳐 신조를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하였고, 기독교의 신앙을 하나의 지적인 고백이나 진술로 간주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17세기 중엽의 독일 루터교회는 완전히 활력을 잃고 말았다. 소위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스티시즘(Protestant Scholasticism)에 빠진 종교 정통주의 시대(Age of Orthodoxy)가 된다. 이러한 때에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필립 야곱 슈패너가 등장하게 된다.
필립 야곱 슈패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
슈패너는 알자스 주 라폴츠바일러에서 태어나 16세에 대학에 입학하여 1662년까지 바젤, 제네바, 슈투트가르트, 튀빙겐을 돌아다니며 공부하였고, 1664년 신학박사가 되었다.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서 19년 동안 목회를 한 그는, 바로 이곳에서 경건주의 운동을 구체적으로 구상하게 된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의 불신앙과 비종교성, 사치와 불경건에 대하여 가슴 아파한 나머지, 그들을 책망하며 설교와 교육을 통한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주일 오후 어린이들에게 교리 문답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평신도들의 신앙생활을 장려한 그는, 1670년 어느 날 마태복음 5:20-26을 본문으로 하여 철저한 회개와 산 믿음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설교를 하였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차츰 주위의 사람들이 주일과 수요일마다 슈패너의 집에 모여 경건 서적과 신약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경건의 수련을 위한 모임 (Collegia Pietatis)이 된다.
[피아 데시데리아] (Pia Desideria ; 경건한 소원)
그 후 1674년 슈패너는 프랑크푸르트의 한 출판사로부터, 새로 출판되는 아른트(Arndt)의 [진정한 기독교]에 서문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이 서문에 자기가 오랫동안 생각해 오던 경건주의 이념을 피력했는데, 그 서문이 바로 경건주의 운동의 헌장이 된 [피아 데시데리아](Pia Desideria;경건한 소원)였다.
슈패너는 이 책의 제 1부에서 사람들을 3 계층(권력자, 목회자, 일반성도)으로 나누어, 개신교의 내적인 부패를 확인한다.
제1부:교회의 타락상에 대한 개관(Conspectus of Corrupt Conditions in the Churh)
세속 정부의 결점(Defects in Civil Authorities)
성직자의 문제(Defects in the Clergy)
평민들의 문제(Defects in the Common People),
그리고 이와 같은 결점에서 비롯되는 범죄들(Offenses Resulting from these Defects)이다.
제2부 : 교회는 과연 개선되어 질 수 있는가?(The Possibility of Better Conditions in the Church)
제3부에서 그 방법을 제언한다.
특히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여섯 가지의 개혁안을 제시하고 있다.
1). 첫째, 하나님 말씀의 광범위한 적용(More Extensive Use of the Scriptures)
2). 둘째, 영적 제사장직의 바른 정립(Exercise of the Spiritual Priesthood)
3).세째, 지식이 아닌 행함의 기독교(Practice vs, Knowledge of Christianity)
4). 네째, 신학논쟁에 있어서도 기도, 사랑, 실천을 통한 해결(Conduct of Religious Controversies)
5). 다섯째, 학교 특히 대학의 개혁(Reform of Schools and Universities)
6). 여섯째, 설교의 초점의 변화(Preaching for Purposes of Edification).
즉, 지식의 화려함이 아닌 경건과 복음 전파, 그리고 위로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독일 개신교 안에서 일어난 이 경건주의 운동은, 경건성과 교회의 철저한 갱신을 위한 운동이 되었으며, 이 경건주의 운동의 여파로 파당화되어 교리 논쟁에 열중하면서 활력을 잃고 영적 침체 상태에 빠져 있었던 개신교에, 본격적인 개신교 선교 운동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슈패너가 그리스도의 승천 축일 설교에서 선교를 강조했고, 프랑케를 중심으로 한 할레에서 선교 운동이 맹렬히 일어나서 18세기에는 60명이나 되는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고, 그 후 모라비안을 비롯한 유럽· 미국 각 선교회들이, 19세기에 위대한 선교 운동을 벌린 사실 등을 통하여, 우리는 선교 운동과의 그 연속성을 찾을 수 있다.
3. 프랑케의 할레 경건주의와 선교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9)
뤼벡에서 태어난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는 사상의 개혁 교육을 강조하는 분위기인 고타(Gotha)에서, 매우 젊은 나이에 홀로 된 경건한 어머니에 의해 양육되었다. 이미 어렸을 때 아른트(Arndt)의 '진정한 기독교' 라는 책을 읽었으며 누이로부터 성경을 배웠다.
그는 에르푸르트(Erfurt)와 키일(Kiel) 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1684년 라이프찌히 대학교에서 히브리어 교수가 되었다.
1687년 여름 프랑케는 성서학에 있어서 더 나은 교육을 위하여 주석가로 알려진 헤르만 잔트하겐에게 가게 되어, 새로운 계기를 가지게 된다. 간절한 기도와 영적인 각성을 통해, 그는 참되고 확신에 찬 그리고 결연한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고 목표가 분명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시작하였다.
새롭게 변화된 프랑케의 모습을, 그의 말을 통해서 찾아 볼 수 있다.
"신앙은 우리를 바꾸며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나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행위이며, 옛 아담을 죽이고 우리를 몸과 마음과 생각과 모든 능력으로 전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만들며 성령을 동반한다. 신앙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살아있고 대담한 확신이며,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그러한 확신과 인식은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기쁘고 확고하고 신나게 만드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은 성령께서 신앙 가운데 행하시는 것이다. "
그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성경 공부반을 인도하기 시작하였고, 그 영향은 곧 학생들과 시민 사이의 새로운 부흥 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슈페너가 그러했던 것처럼, 프랑케에게도 반대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이 오히려 훗날의 귀중한 사역을 위한 길이 열리게 된다. 1691년 슈패너의 도움으로 글라우카(Glaucha)에 있는 시골 교회의 목사로 임명되었을 뿐 아니라, 할레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할레 경건 운동
이 할레에서 프랑케는 빈민 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 학교는 곧 유명한 고아원, 상급반 학생들을 위한 예과(Padagogium), 라틴어 학교, 화학 실험실, 서점, 가난한 과부들을 위한 가정, 떠돌이 걸인들을 위한 가정, 성경의 출판과 배포를 위한 성서공회, 세탁소, 농장 및 양조장 등으로 발전되어 갔다.
1695년 가난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목사관에서 시작된 임시학교가 몇 년 안에 교육 기관, 경영 기관, 그리고 기업체로 발전하면서 전 도시 인구의 5%가 여기에 종사할 정도의 규모가 되었다. 영주와 왕의 도움을 받아 점점 성장한 이 곳에는, 인쇄소와 약국들까지 들어서 자선 기관에 많은 유익을 제공하였다. 그가 사망한 그 해 그의 교육 기관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던 학생 수는 2,200명이었고, 고아가 134명, 교사 175명, 8명의 감독관이 고용되었고, 150명의 학생들이 기숙사를 제공받은 것으로 나타난 있다. 그러므로 사회복지 사업을 포함하였던 습관적인 토착 그리스도인들에게 향한 내부 선교는, 프랑케로 소급된다.
덴마크-할레(Denish-Halle) 선교회
프랑케의 할레를 통하여 이방인 선교가 1706년 이후가 된다.
덴마크-할레 선교회는 독일 개신교 역사에서 최초의 해외 선교 기관이 된다. 덴마크-할레 선교회의 배경은 경건주의자인 덴마크 왕 페르디난드 4세(Ferdinand IV)로부터 시작된다. 왕은 덴마크의 식민지인 인도의 남쪽 끝에 위치한 트랜쿼바(Tranquebar)를 복음화하기 위하여 할레대학에 선교사를 요청하게 됨으로 지겐발크와 헨리 플뤼차우가 자원하게 됨으로 덴마크-할레 선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1714년 코펜하겐에 선교사 대학을 설립하였으며, 그린랜드 선교사인 한스 에게드(Hans Egede)도 이 학교 출신이다.
사실은 19세기 윌리암 캐리보다 90년이나 먼저 인도에 파송된 이들이 덴마크-할레의 바돌로뮤 지겐발크(Barthelomew Ziegenbalg,1682-1719)와 하인리히 플뤼차우(Heinrich Plutschau, 1677-1747)이다. 그들은 할레로부터 세계의 여러 지역으로 보내진 많은 선교사들 가운데 첫 번째 사람들이다. 1705년 11월에 출발을 해서 1706년 7월에 도착하였다.
6년 후 건강이 나빠 플뤼차우는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지겐발크는 계속 남아 교회를 보살피고 수많은 인도 방언 중의 한 언어로 신약 성경 전부와 구약 성경의 대부분을 번역하는 등의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
지겐발크가 사망하였을 때에, 트랑크바르에는 350명의 기독교인 공동체가 존재하였다. 이들의 남인도 선교는 처음부터 5개의 분명한 원칙(Five principles for South India Missions)이 있었다.
1. 교회와 학교를 병행하여야 한다. (Church and School are to go together)
2.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하려면 그들의 글자로 기록된 성경이 있어야 한다.
(If Christian are to read the Word of God, that word must be available to them
in their own language)
3. 복음은 주민들의 정신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기초로 하여야 한다. (The preaching of the gospel
must be based on an accurate knowledge of the mind of the people)
4. 목적은 개인적인 명확한 개심이어야 한다.(The aim must be definite and personal conversion)
5. 가급적이면 속한 시일 내 교역자를 가진 인도 교회를 출현시켜야 한다.
(At as early a date as possible an Indian Church, with its own Indian ministry,
must come into being)
덴마크- 할레 선교회 출신 중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사람은 1750년부터 인도에서 48년 동안 헌신적으로 선교한 크리스챤 프레드릭 슈바르츠(Christian Frederic Schwartz)이다. 그는 주로 인도 해안을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였는 데 여러 가지 말과 방언에 능통하였기 때문에 그 일을 잘 해 낼 수 있었다. 그는 독신으로서 자식도 없었으나 입양해 기른 자식들이 믿음 안에서 성장하여 탄조레(Tanjore)교회에 2,000명 정도의 교인으로 부흥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가 살아 있을 때에는 할레대학 출신의 선교사만도 60명이 넘었으나 차츰 초기의 열정은 퇴색되어져 갔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할레대학의 경건주의 영향을 받은 또한 그룹의 선교운동이 일선에 나타나게 되는 데, 이것이 바로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형제회(The Moravian Brethren ; Unitas Fratrum)이다.
4. 진젠도르프(Zinzendorf)와 모라비안의 선교
경건주의의 물결은 슈패너와 프랑케를 거쳐 모라비안 교회의 창시자요, 마르틴 루터 이후 개신교에서 가장 거대한 종교적 천재라고 불림을 받는 진젠도르프(Count Nicolaus Ludwig von Zinzendorf)에 이르게 된다.
진젠도르프(Count Nicolaus Ludwig von Zinzendorf, 1700-1760, 60세)
진젠도르프는 1700년 5월 26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드레스덴의 귀족 가문으로 작센의 고위 관리였으나 일찍 죽고 어머니는 재혼을 하게 되어, 진젠도르프는 경건주의자로서 슈패너와 프랭크의 절친한 친구인 외할머니 밑에서, 그녀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게 된다. 바로 이때 진젠도르프에게는 선교에 대한 관심의 씨앗이 뿌려졌던 것이다.
진젠도르프는 10세가 되던 해에 할레대학에 입학하여 17세까지 그곳에서 공부하였는데(1710-1716), 이때 프랑케와 밀접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의 종교적 견해가 확립되었다. 이 때에 그의 경건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이상을 가지게 되었으며, 덴마크-할레 선교회 출신의 인도 선교사를 만난 후 해외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열심 있는 다섯 소년들과 함께 '겨자씨 모임 (the Order of the Grain of Mustard Seed)'을 조직하여, 기독교적 형제애를 가지고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고 세계 인류를 사랑할 것을 서약하였다.
당시 그의 가족들은 정치에 관심을 갖도록 계속 압력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비텐베르그에서 법률을 공부하였다(1716-1719). 1719년부터 1720년까지 당시 유행하였던 연구 여행을 화란과 파리로 떠나게 되었는데, 그 도중에 뒤셀도르프의 미술 전시회에서 도메니코 페티(Domenico Feti)의 "내가 너를 위하여 이 고통을 당했건만 이제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주겠느냐?" 라는 글이 새겨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고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선교의 빚을 갚아야 하겠다는 결심에 이르게 된다.
그가 헌신적인 선교의 삶을 살 수 있었던 절대적인 기회는 1722년 한 그룹의 기독교 피난자들이 나중에 주님의 보호처 라는 이름의 른후트(Herrnhut)'로 명명된 그의 영지로 피해 왔을 때부터이다. 그의 소유지에 몰려 온 피난자들로부터 모라비안 운동이 시작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헤른후트(Herruhut)와 모라비안(Moravian)
1722년 모라비아(Moravia)로부터 보헤미아의 형제단(Bohemian Brethren)의 그룹이 크리스챤 데이비드(Christ David, 1691-1751)의 인도로 안식처를 찾아오게 되었다. 이때만 해도 진젠도르프는 별로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나 암흑의 때에도 기도를 그치지 않은 그들에게, 부흥의 불길이 붙기 시작하였다. 당시 드레스덴에서 법정 변호사로서 상당히 중요한 법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백작 진젠도르프가 적극적으로 모라비안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1727년). 거기에 모라비안의 본부를 짓도록 하고, 바로 흩어진 형제단의 중심지인 그곳을 '헤른후트 (Herruhut : 주의 보호처)'라고 명명하기에 이르렀다.
영적 부흥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으나, 해외 선교에 불이 붙게 된 것은 진센도르프가 덴마크 왕 크리스챤 6세의 대관식에 참여하기 위하여 코펜하겐(Copenhagen)을 방문하게 된 1730년부터이다. 이 때 서인도 제도(West Indies)로 부터 온 한 흑인과 그린랜드(Greenland)로 부터 온 두 명의 에스키모인이 선교사로 헌신하는 서약을 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아 헤른후트로 돌아와 모라비안 형제들에게 뜨거운 도전을 던짐으로서, 즉각적인 응답을 얻어 1732년 버지니아 제도(Virgin Island)로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다.
그 뒤를 이어 1733년에는 그린랜드(Greenland), 1734년에는 북아메리카, 그리고 라플랜드(Lapland)와 남아메리카(1735), 남아프리카(1736), 라브라도(Labrador, 1771)등에 선교 기지(Mission Station)를 구축하였다.
진젠도르프는 단순한 선교 지도자에 그치지 않는다. 1738년 3명의 새로운 선교 지원자들을 데리고 카리브해까지 가서 이미 사역하고 있던 선교팀과 합류하게 되는데, 사실 그들이 도착하였을 때에 그 전의 사역자들은 모두 감옥에 있었다. 진젠도르프는 귀족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석방할 수 있었으며, 선교회 조직을 개편하고 선교 영역을 할당해 주기도 하였다.
1739년에는 미국 식민지를 방문하였다. 모라비안 선교지인 죠지아에 베들레헴 촌을 건설하여 인디안 선교에 힘을 썼으며, 특히 독일 개신교 교인들을 모아 Church of God in the Spirit 를 창설, 8개의 모라비안 교회 건설과 학교 설립, 선교 순회 단체를 조직하였다.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선교 운동의 의의
진젠도르프에게도 개인적인 아픔과 고통도 있었다. 1760년 주님 앞에 부름을 받기까지의 10년 동안, 형제단의 분열, 아내의 죽음, 아들의 죽음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가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가 죽기까지 모라비안들의 28년간 활동은 226명의 선교사를 배출하였으며, 1760년 당시 그린랜드 13개 지역, 중, 북부 아메리카, 서인도 등에서 49명의 형제와 17명의 자매들이 6,125명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었다.
진젠도르프 이후에도 모라비안 선교 운동은 계속된다. 서인도로 건너간 모라비안들은 2백년에 걸쳐 3천명의 선교사를 지원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낳았으며, 모라비안 교회는 다른 교회로서는 하나도 이루지 못한 헌신적인 표준을 세워 놓았다. 외지 선교구에 속한 신자의 수가, 내지 교회의 신자의 수의 3배나 되는 특수한 예가 그것이다.
이러한 모라비안 형제단의 선교사들보다 더 개척적인 역할을 하고, 갖은 어려움을 참고 이기며, 또한 고난에 대하여 영웅적으로 달게 받으며,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활동한 선교사는 없을 것이다.
모라비안의 선교 운동은
1. 독일 개신교 안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자발적인 운동으로,
2. 국가 주도의 선교(덴마크-할레 선교회)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많은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세계 각 곳에서 사명을 완수하였다는 점,
3. 개신교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한 선교 공동체의 지원을 받아 선교사가 파송되었다는 점, 그리고
4. 그 공동체가 선교만을 위한 교회였다는 점
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의 모라비안 선교사들
크리스챤 데이비드(Christian David)
1690년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동정녀 마리아를 숭배하던 그가 개종한 것은, 그의 아내 안나의 권유로 1717년 27세되던 해였다. 1722년 진젠도르프를 만나 헤른후트 설립을 약속한 그는, 전 유럽을 돌아다니며 종교적인 피난자들을 모아 진젠도르프 백작의 영지로 이끌어 왔다.
그가 선교사가 되어 다른 2명의 선교사와 함께 그린랜드로 파송된 것은 1733년이다. 덴마크-할레 선교회 출신의 한스 에게드(Hans Egede)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에스키모인들의 천연두 창궐로 헌신적인 봉사를 한 에게드와 그의 아내로 인하여 선교 사역에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으나, 1734년 아내의 죽음으로 에게드가 크리스챤 데이비드에게 한 고백처럼, "씨는 내가 뿌렸는 데 거두기는 당신들이다" 라는 사실이 이루어지고 말았다. 에게드는 코펜하겐으로 돌아와 재혼한 후, 그리인랜드인들을 위한 교리 지도서를 저술하다가 1758년 72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데이비드와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뉴 헤른후트(New Herrnhut)를 건설하며 큰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게오르그 슈미트(George Schmidt)
이와는 지구 반대편인 남아프리카(South Africa)에서도 헌신적인 모라비안 선교사에 의하여 선교 사역이 진행되고 있었다. 게오르그 슈미트(George Schmidt)라는 독신 선교사로서, 갖가지 장애와 싸우며 기독교 선교에 전념하였다. 헤른후트에서 복음전도자가 되어 고향 모라비아와 홀랜드 등에서 혹독한 시련과 고통을 겪은 그는, 아프리카의 호텐토트족을 위하여 선교하였다. 선교 현지에서의 고난은 물론 다른 모라비안 지도자들의 탄원과 네덜란드 식민지 관리들의 멸시 속에서도 선교한 그는, 1744년 이후 다시 선교지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나, 50년 후(1792년) 다시 모라비안들이 그 곳에 갔을 때 슈미트로부터 세례를 받은 한 할머니가, 50년 이상 신약성경을 보관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오는 말
모라비안들이 선교 현장에 미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그린랜드, 라플랜드, 미국 인디안들까지 선교를 했으며 국내 전도에도 매우 활동적이었다. 오늘날도 모라비안은 그린랜드와 레브로돌(Labrador) 그리고 알라스카와 서인도 제도, 동부 및 남부 아프리카와 빅토리아, 티벳에서 선교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모라비안 교회는 비록 작은 교회이지만, 그들이 다른 종파에게 미치는 영향은 특별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특히 영국 복음주의 운동을 주도한 요한 웨슬레(John Wesley)에게 미친 신앙적 감화를 빼놓을 수가 없다. 이는 곧 위대한 세기가 오도록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를 있게 한 주춧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을 통해 나타났던 영적 각성 운동은, 마침내 교리 논쟁과 부패로 경직되고 생명력을 잃고 있던 독일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게 되었고, 사회 봉사와 선교 운동의 큰 원동력이 되었다.
동시에 이 운동은 18세기에 머무르지 않고, 19세기의 위대한 세기, 20세기의 세계 선교 운동의 근원이 되었으며, 이제 다가 올 21세기의 영적 각성 운동과 교회 갱신 운동에도 중요한 지표를 제시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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