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대회로 본 선교역사 |
1825년 봄베이에서 여러 선교부의 선교사들이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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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년 뉴욕선교대회 - 파송하는 나라들의 첫 번째 국제적 선교사대회들 중 하나로 영국 선교사의원인 알렉산더 더프가 선교의 증진을 위한 협력적 노력을 고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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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리버풀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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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상해선교대회 - 20개의 개신교선교회로부터 473명의 선교사들이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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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성서대회 - D.L. 무디가 후원하고 매서츄세스 노트필드에서 개최된 이 대회에서 세계적인 대회를 열자는 첫 번째 요청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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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A.T. 피어슨은 90여개의 대학으로부터 온 250여명의 학생들을 위해 무디에의해 노트필드에 초대되어 장차 해외선교를 위한 대학생자원선교운동의 지도자들이 될 사람들에게 우리 세대에 세계복음화 를 위하여 헌신하도록 도전, 그 때로부터 현재까지 학생선교운동은 세계복음화의 운동력을 증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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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해외선교 100주년 대회가 6월 1일 런던에서 개최되었는데 1,576명의 선교사와 140여 선교단체들의 대표들이 참가하였다. 대영제국에 끼친 바 이 대회의 충격이 너무도 컸기 때문에 1888년과 1889년 사이에는 선교헌금이 40%나 증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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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상해선교대회 - 선교사 1,295명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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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뉴욕에서 열린 초교파적 선교대회에서 이미 시작되어진 대학생자원선교운동이 상당한 관심을 모았는데 그 이유는 1886년 노트필드에서 열린 대회의 열매가 14년도 채 못되는 기간동안 5,000여명의 자원자를 얻게 되었고 그 중의 거의 3분의 1이나 되는 1,500여명이 이미 선교지로 떠났다. 카네기홀에서 개최된 이 대회에는 대략 20만명의 사람들이 10일간 계속된 여러 회의에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 참가한 허드슨 테일러는 ?우리는 방법과 기계와 자원에 너무 지나친 관심을 쏟았고 능력의 원천인 성령의 충만에 너무 관심을 적게 가졌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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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에딘버러대회 - 20세기 선교사업이 국제적 규모로 형성되기 시작. 복음주의자들은 선교사나 선교회 조직 보다는 오히려 선교정보와 실제교훈을 통하여 자극을 받았다. 에딘버러대회는 개신교선교를 통합하고 조직화하는 새로운 형태의 대회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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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I.M.C.(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 세계선교사협의회)가 개최한 예루살렘대회의 근대주의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회지향적인 메시지는 대륙의 신학자들과 선교사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윌리엄 템플이 대회를 위해 쓴 메시지에는 타종교에서도 약간의 복음의 빛을 찾을 수 있음을 언급하였다. 이것은 복음전도의 의무를 삭감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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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인도의 마드라스대회에서 I.M.C.(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는 보다 온건한 입장 곧 복음전도에 관한 복음주의자와 근대주의자 양자의 종합을 포함할 어떤 입장으로 돌아오려는 시도를 했다. 대회의 의장을 맡았던 1910년 에딘버러의 위대한 지도자 존 R. 모트는 복음전도의 새로운 신학을 ?확대전도?라고 불렀다. (오늘날 이런 종류의 복음전도를 ?전인적?전도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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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I.M.C.의 휘트비대회도 1938년의 마드라스대회와 같이 복음전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세계각처의 생활속으로 들어가심'을 포함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기독교의 사회적 우월성이 복음전도의 동기가 된 것이었다. 결국 휘트비대회는 1928년 예루살렘대회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영혼?과 그들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관심이 명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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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암스텔담에서의 첫 번째 WCC 회합(World Church Council)은 복음전도의 전통적인 견해와 복음주의적인 전도자들과 복음전도에 대하여 더 수용적인 태도를 가질 것을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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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I.M.C.의 윌링겐대회에서 선언된 '실현된 복음전도'는 다른 어떤 교리적 문제보다도 더욱 결정적인 복음주의자들과 에큐메니칼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의 양분을 가져왔다. 실현된 복음전도는 그리스도의 '충분하고 완전한 속죄'가 이미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을 똑같이 구원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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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I.M.C.의 가나대회 -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구원했기 때문에 교회의 선교는 사람들의 교회의 생활에서 발견되어질 수 있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 모아들이는 것이다?라는 속죄에 대한 그릇된 견해 때문에 보편구제설을 I.M.C.를 복음주의적 복음전도에서 더욱 멀리 이끌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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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뉴델리대회 - I.M.C.에 의한 복음주의의 배척이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을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탈퇴하도록 자극했으며 I.M.C.는 복음전도적 열정이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I.M.C.는 계속하여 1961년 뉴델리대회에서 W.C.C.와 통합하는 쪽으로 꾸준히 나아갔고 또한 복음전도에 대한 훨씬 더 자유적이고 급진적인 태도를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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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뉴델리대회에서 설립된 세계선교와 복음전도 분과의 첫 번째 회합 전 제4차 선교대회가 몬트리얼에서 개최되었다. 몬트리얼대회에서는 동방정교회들을 에큐메니칼대회에 공식적으로 끌어들였으며 로마 카톨릭교회가 W.C.C.에 들어오는 것을 용이하게 할 신학적 준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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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멕시코대회 - 복음주의자들은 계속적으로 국내복음전도와 해외선교의 필요성을 선언했고 세계선교와 복음전도위원회는 멕시코시에서 모임을 갖고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웠다는 것을 세상에게 알리도록?국제적인 선교사들의 팀들을 만들어 세계 여러 종족, 사회, 그리고 경제적 문제의 영역들로 들어갈 것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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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베를린에서 빌리 그래함의 주도로 한 인류, 한 복음, 한 의무 라는 주제를 가지고 개최된 세계복음전도대회는 근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복음주의적 사건들 중 하나였다. 국제적인 복음주의는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역사적 부흥주의와 이전 세기들의 복음주의의 특성들을 바로 이 베를린대회로부터 가져왔다. 구원의 인격적이며 개별적인 성격은 집단적이고 수평적인 에큐메니칼 신학의 입장들과는 대조적으로 일관성있게 주장되었다. 성경의 초자연성을 인간의 영적필요와 실제적 필요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보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들은 사회에 감명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기립투표에 의해 만장일치로 수락된 대회의 선언문은 대담하게 75년전에 사용된 학생자원운동의 표어인 우리 세대에 세계복음화 를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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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업살라에서 열린 W.C.C.의 제4차 총회는 이전 어느때보다도 더 많은 대표들과 참석자들이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라는 주제아래에 모였다. 전체 2,700명 이상의 사람들 가운데 235개의 회원교회들을 대표하는 704명의 투표권을 가지는 대표들이 있었다. 동방정교회들은 더욱 자유롭게 참가했으며 전보다 더욱 강하게 영향을 주었고 로마카톨릭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잠시 W.C.C.와 함께 일했던 연합사업단체를 시작했었다. 웁살라대회는 교회들을 정치신학으로 이끌었고 그 사명은 ?정당한? 혁명들에 참여함이 되는 것이었다. 선포와 복음전도도 새로운 인간성과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해석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웁살라에서 W.C.C.의 복음전도가 죽었다고 말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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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싱가폴대회는 1966년의 베를린 대회의 지역적 표현으로 4개의 대륙에서 개최된 대회들 중 하나로 세계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아시아 24개국으로부터 온 대표자들이 싱가폴에서 아시아남태평양복음전도대회로 모였다. 베를린 대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빌리 그래함은 재정을 비롯한 여러 가지로 이 대회를 후원하였다. 이 대회는 아시아와 남태평양에서 복음의 선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소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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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빌리그래함의 지원을 받은 두 번째의 지역대회가 미네아폴리스에서 개최되었다. 베를린대회의 결과로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교회지도자들의 마음이 움직여 빌리 그래함을 명예의장으로 오스왈드 호프만을 의장으로하여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다(눅 12:48) 라는 주제하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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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첫 번째 라틴 아메리카 복음전도대회(CLADE)가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개최되었다. 대회의 주제는 위기의 대륙을 위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행동 이었다. 빌리 그래함은 그 대회를 격려했으며 24개의 나라들로부터 온 920명의 대표들이 회합을 가졌다. 1966년의 베를린대회에 의하여 고무되어진 대회였기에 주제는 복음전도였다. 복음주의자들은 로마교회 내의 많은 사람들이 가진 새로운 성서적경향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분명치가 않았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오순절교파의 성장은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성령에 관한 그들의 방법들과 교리들에 대하여 질문을 제기하게 하였다. 보고타 복음주의선언문은 온전한 복음의 토착선교를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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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암스텔담대회는 1966년 베를린대회 이후 최종적 대회로 유럽복음주의연맹(European Evangelical Alliance)이 후원했으며 36개의 유럽국가들의 18개의 교파들로부터 1,064명이 참가하였다. 대회의 시작부터 복음의 성격과 정당성에 대해, 기독교 메시지의 본질에 대해 참가자들이 하나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논쟁으로 열려져있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기본적 일치가 대회를 특징지웠고 참가자들로 하여금 복음의 사회적 관계성과 세대간 의사전달의 갭을 메꾸기 위한 체제적 유동성의 필요성과 신약적 형태인 일대일 증거의 중요성에 대한 재발견에 관하여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일치된 행동안에서 서로 영향을 줄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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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방콕대회의 중요성은 이것이 W.C.C.의 조정적 선교신학의 첫 번째 완전한 표현이라는 사실에 있었다. 방콕대회에서 에큐메니칼-복음주의 간의 강경한 논쟁이 있었다. 또한 백인의 인종주의가 다른 문화들에게서 그들의 주체성을 빼앗았으며 그러므로 회심에 대한 외국적 모델이 복사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서구는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어떤 것이 기독교 공동체에 신학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것인지를 결정할 수 없는데 신학이란 상황적이기 때문이다. 방콕대회의 문서들과 결정들을 주의깊게 연구해 보면 에큐메니칼 신학이 무오한 성서로 시작하지 않으며 또한 성서적 복음으로 끝나지도 않기 때문에 북음주의적 종합적이나 신학적 양보는 착각이거나 위선적인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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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스위스의 로쟌에서 열린 국제세계복음화대회는 기독교 역사상 그 크기와 의미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종족과 민족적 다양성으로인해 최소한 6개국에로 통역을 해야했으며 150여개국 이상으로부터 2,700여명의 참가자들이 모였다. 로쟌선언은 경건주의와 부흥주의와 복음주의의 최선의 전통에 위치하는 탁월한 것이었다. 로쟌대회는 동떨어진 한 사건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한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대회의 의도는 대회 후의 출판들과 복음전도에 관한 지역대회들과 계속적인 위원회, 그리고 각 참가자에 의해 복음전도에 주어진 기동력안에서 이해되어지기 때문이다. 그 계획과 프로그램들은 대회의 비젼을 반영했다. 성서적복음전도의 장려와 고무는 대회발기인들의 명백한 관심사였다. 대회의 주제는 땅이여 주의 음성을 들으라 는 것으로 온 땅이 성서적 복음의 선포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그 음성으로 듣는다는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로쟌대회는 1910년 에딘버러대회보다 훨씬 더 웅변적으로 그리고 성서적으로 복음주의에 대한 신학적 위협들에 대하여 말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에큐메니칼의 다원주의 신학적 모호함에서 많은 것을 지켰다. 또한 선교사역의 노력을 16,000+의 숨은종족(오늘날의 용어로는 미전도종족)에게 집중시켜줄 것을 촉구하는 랄프 윈터의 열정적인 탄원은 종족선교를 선교전략의 최우선적 요소로 나타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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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로쟌 II 세계복음화국제대회에는 180여개국에서 온 참석자들로 전세계를 향한 온전한 복음의 전파를 위한 전 교회의 부르심 이라는 주제하에 모여 1974년 로쟌선언에 기술된 복음과 복음주의에 입각하여 세계곳곳의 기독교지도자들을 소집, 세계복음화 대과업의 완성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계획하며, 연구하고 동역함으로써 세계복음화 과업을 촉진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 대회에서 루이스 부시가 주창한 10/40창 개념은 미완성과업 달성에의 초점을 맞춰주는 선교적 전략개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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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한국 서울에서 열린 GCOWE'95 (The Global Consultation on World Evangelization)는 186개국에서 4,000여명의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1986년 마닐라 로쟌대회의 사무총장직을 맡았던 토마스 왕(Thomas Wang)이 창설한 기독교 21세기운동(AD2000 & Beyond Movement)의 주관으로 열린 이 대회는 미전도종족을 향한 전략적이고 협력적인 선교를 위하여 2000년까지 모든 민족에게 교회를,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이라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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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남아공 프레토리아에서 열린 GCOWE'97은 120개국에서 온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였으며 근대들어서서는 최초로 아프리카에서 다수가 참가한 대회가 되었으며 2000년을 42개월 앞둔 시점에서 그동안의 미전도종족 선교상황과 남은과업 달성을 위한 총체적전략에 전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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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암스텔담선교대회는 빌리그래함전도협회의 후원으로 6대주에서 11,000명의 참석자들을 모아 암스텔담에서 9일간 개최되었다. 암스텔담대회의 목표는 대회 후 100개의 각기 다른 국가들과 지역에서 선교대회를 후원함으로 100,000명의 전세계 기독교지도자들의 선교동원과 훈련에 두고 계속적인 운동을 펼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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