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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기고2> 미국선교의 선교운동

영국신사77 2008. 9. 21. 23:30

<선교기고2> 미국선교의 선교운동
이상규

 

 

 

라토렛의 말처럼 19세기는 선교의 위대한 세기였다. 이 시기에 기독교 복음은 거의 모든 지역으로 확산되어 이 기간의 개신교 선교는 오순절 이후 가장 높은 비율로 확장되어 갔다.
 그 결과 기독교를 세계적 종교로 발전시켰다. 일반적으로 19세기는 자연과학의 발달로 인한교통, 통신, 식량생산, 의학의 발달, 산업혁명, 낙관주의와 진보사상의 대두, 민족주의의 팽창, 식민주의(제국주의, imperialism)의 대두 등 특징적인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바로 이런 이런 변화가 이 시기 선교운동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19세기 선교운동의 대표적인 국가는 미국이었다. 이제 ‘유럽의 시대’는 지나갔다. 미국에서의 선교운동은 1800년대를 거쳐가면서 젊은 학생들에 의해 추진되었지만 넓게 말해서 미국에서의 선교운동은 영국에서 일어난 복음주의 부흥운동과 1800년대의 제2차 각성운동이 가져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또 헌신적인 생애를 살며 아프리카선교를 개척한 위대한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의 사역보고는 1850년대 전후 미국의 선교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가 1857년 출판한 [남아프리카에서의 선교여행과 탐험](Missisonary Travels and Researches in South Africa)은 아프리카 지역의 선교활동에 대한 커다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또 187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의 각성운동, 1880년대 평신도 전도자 무디(Dwight L. Moody)의 부흥운동과 헬몬산집회(1886) 등은 미국교회에 선교에 대한 신선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이상과 같은 내외적인 요인때문에 미국교회도 해외선교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19세기 첫 10년 어간에 뉴 잉글랜드의 일군의 의식 있는 회중교회 신학교 학생들이 해외선교에 동참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1810년 최초의 선교단체, 곧 미국해외선교회(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ABCFM)가 조직되고, 1812년에는 5명의 선교사가 인도로 파송되었다.
얼마동안은 장로교회와 화란개혁파교회가 이 선교단체의 이름으로 해외에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그러다가 남북전쟁 당시 장로교회와 화란개혁파교회, 그리고 다른 교파들은 해 교회의 선교단체를 조직하고 선교운동을 시작하였다. 남북전쟁으로 잠시 선교운동이 중단되기도 했으나 곧 다시 재게되어 매우 적극적인 선교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1880년 이후 40년간 미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관심과 의제는 해외선교였다.
 1900년 뉴욕에서 개최된 에큐메니칼선교대회(Ecumenical missionary conference)에는 170,000명이 참가하는 대성황을 이루었고, 그 대회에는 대통령이었던 멕킨리(McKinley)와 해린슨(Harrison) 전대통령도 참가했을 정도였다. 미국에서의 선교의 기원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사무엘 밀즈와 해외선교단체의 조직

 마치 윌리엄 케리가 영국의 선교운동을 시작하였듯이, 사무엘 밀즈(Samuel J. Mills, 1783-1818)는 미국교회의 선교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자신은 선교사가 아니었으나 선교운동을 이끌어 갔던 중심인물이었기에 그는 흔히 미국선교의 창시자로 불리고 있다. 그는 1798년에 시작된 제2차 각성운동 기간 중에 회심하였고 세계선교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19세가 되던 해에 그는 “가련한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 그 이상으로 만족한 생활은 상상할 수 없다”는 기록을 남겨두고 있다. 1806년 그는 메서추세츠주 윌리암스타운(Williamstown)에 있는 윌리암스대학(Williams College)에 입학하였다.
 그 당시 이 학교는 종교적인 각성운동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학생들도 깊은 영적 관심을 갖고 있었다. 밀즈는 이 대학에서 영적 갈망을 가진 친구들과 함께 모여 기도회를 갖기 시작하였다. 이 기도회가 후일 ‘헤이스택 운동’(The Haystack Movement)이라고 불리는 기도운동과 ‘형제단’이라고 하는 선교운동 조직의 시작이 되었다. 이들은 주로 수요일과 토요일 오후 후사크강 언덕이나 대학 가까운 숲속에서 모였다.
 그해 8월 밀즈는 동료 4명과 더불어 기도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소나기를 만났다. 저들은 비를 피하기 위해 건초더미 아래서 폭풍우가 그치기까지 기도했는데, 이때 그들은 해외선교에 자각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했고, 이 기도회를 통해 해외선교를 헌신하게 되었다. 이 때 밀즈는 “우리가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다.”고 기도했는데 이것이 후일 그들의 표어가 되었다. 이 기도회로부터 미국최초의 (학생)선교회가 조직되었다.
 그래서 쉐드(P. Shedd)는 “기도하며 고개숙인 이 다섯명의 해외선교를 지망한 학생 자원자들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애를 적절하게 쓰시도록 생애를 헌신했고, 자발적으로 자신을 드림으로써 미국에서는 최초의 선교단체가 탄생했다.”고 평가했다. 라토렛은 이 헤이스택 기도회가 미국교회의 세계선교에 자극을 주었다고 했다.
 기도와 세계선교를 위한 모임은 계속되었고, 1808년에는 공식적인 모임을 결성하기로 마음먹고 준비하던 중 그해 9월에는 ‘형제단’(The Society of Brethren)이라는 모임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형제단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해외선교였다. 1810년까지 527명의 학생이 형제단에 가입했는데 그중 50%의 학생이 후일 선교사로 봉사하였다고 한다. 한 작은 기도회는 이처럼 큰 선교의 조직으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1809년 밀즈는 윌리암스대학을 졸업하고 안도버신학교(Andover Seminary) 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그는 자신과 동일한 선교의 비젼을 가진 브라운대학 출신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하바드대학교 출신 사무엘 뉴웰, 유니온 대학출신 사무엘 노트 등을 만나게 된다.
그가 신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1810년 6월 메사추세츠주 브라드포드에서 회중교회 연래총회가 열렸다. 이 때 밀즈는 저드슨을 포함하여 여러 동료들과 함께 선교부를 조직해 달라는 청원을 냈고 이 청원에 의해 회중교회 총회는 해외선교회를 조직했는데, 이것이 미국에서의 최초의 선교단체였던 ‘미국해외선교회’(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ABCFM)였다. 그 결과 1812년 2월 져드슨(1788-1850)과 사무엘 뉴웰(Samuel Newwell), 사무엘 노트(Samuel Nott), 골든 홀(Gorden Hall), 그리고 루터 라이스(Luther Rice, 1783-1836) 등 5명은 인도선교사로 미국을 떠났다. 이 당시 미국에서 인도까지는 선편으로 4개월이 걸리는 여행이었다. 이들 최초의 미국선교사들은 1793년부터 인도에서 사역하고 있던 윌리엄 케리와 함께 일했다.

밀즈는 복음증거와 사회봉사를 통한 사회계량운동을 분리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그는 1816년 뉴욕의 빈민가에서 빈민들을 위해 봉사하였고, 미국의 노예들을 위해 봉사하였다.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1817년 1월에는 ‘미국식민회’(The American Colonigation Society)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들을 자유케 하고 다시 그들의 땅으로 돌려보내는데 있었다. 밀즈는 1817년 선교사 파송을 위한 현지답사로 지금의 리베리아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병을 얻어 1818년 6월 5일 35세의 나이로 해상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후사크강 가까운 헤이스택에서 믿음의 친구들과 세계복음화를 꿈꾸며 기도한지 12년이 지난 후였다.
 미국의 인도지역 선교와 함께 실론(1816), 근동(1820), 중국(1830), 마두라(Madura, 1834) 등지에도 미국교회에 의한 선교사역이 시작되었다. 인도로 갔던 저드슨은 침례에 의한 신자의 세례가 성경적이라고 믿고, 인도에서 윌리엄 워드(William Ward)에게 침례를 받고 루터 라이스와 함께 곧 회중교회 선교회로부터 탈퇴하였다.
 그리고는 미국의 침례교회에 선교회 조직을 호소했는데, 그 결과 ‘미국침례교 해외선교회’(The American Baptist Foreign Mission Society)가 조직되었다. 이것이 미국에서의 두 번째로 선교 단체였다. 그 후 감리교감독교회(1819), 장로교회(1831), 복음주의 루터교회(1837) 등에 의해 선교단체가 조직되었다.

2. 학생자원운동  

 미국에서 헤이스택기도회(1806)에서 무디가 주도하던 헬몬산집회(1886)에 이르기까지 많은 선교운동은 젊은 학생들이 주도하였다. 이 학생운동은 마침내 해외선교를 위한 학생자원운동(The Student Volunter Movement)로 발전하였다. 이 운동의 발전과 성장에는 프린스톤대학 졸업생이었던 로버트 월더(Robert P. Wilder)의 선교비젼, 무디의 영적 감화력, 그리고 당시 코넬 대학 학생이었던 존 모트(John R. Mott)의 탁월한 조직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 운동은 1886년 여름 헤르몬산의 무디수양관에 모인 100여명의 학생들이 “본인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해외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합니다.”(I purpose, God willing, to become a foreign missionary)라는 프린스톤서약(Princeton pledge)에 서명한데서 발단이 되었다. 이 운동이 정식 발족되면서 존 모트는 회장이 되었고, 윌더는 해외순방 총무(Travelling secretary)가 되었다.
 이 학생자원운동의 표어는 “이 세대에 세계를 복음화 하자”(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였다. 이 운동은 미국전역과 캐나다 그리고 세계 각국의 선교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단체가 주관하는 선교대회가 매 4년마다 모였는데, 제1회 대회는 1891년 오하이오주 클리브랜드에서 여렸다. 선교자원자가 매년 증가하였고, 1920년에 모였던 데스 모이네스(Des Moines) 대회는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그후 점차 위력을 상실하였고, 1936년의 인디아나폴리스 대회는 마지막 대회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지난 50년 동안 선교사로 자원한 학생가운데서 2만 5백명이 선교사로 해외에 파송되었다.
이 단체가 “세계복음화”를 우선과제로 삼았을 때는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었으나, 인종차별 철폐, 경제적 정의 추구, 제국주의 비판 등 사회-정치적인 문제에 우선순위를 두게 될 때 곧 힘을 상실하고 결국 와해되고 말았다.

3. 미국교회의 선교운동

 19세기를 거쳐가면서 미국이 선교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선교사의 수에 있어서도 분명히 난타난다.
그 동안 영국출신의 선교사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당시의 미전도 지역 선교를 석권하고 있었으나 미국출신 선교사들의 수가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20세기를 넘어 오면서 이 점은 더욱 분명해 졌다.
 예를 들면, 1900년도의 개신교의 총 선교사 수는 1만 3천 6백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중 영국 출신이 5천 9백명이었고 미국출신 선교사수는 4천명에 달했다. 이 자료를 보면 영어사용권의 선교사 수가 전체 개신교 선교사의 4분지 3을 점하고 있었고, 미국출신 선교사 수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1915년에는 미국선교사의 수는 1900년의 두배가 되었고, 1925년에는 미국선교사의 수는 1만 4천명으로 증가되어 전 세계선교사수의 50%를 넘었다.  
 말하자면 20세기를 거처가면서 해외선교의 주도권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갔다는 점이다. 이것은 미국이 국제사회에
서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 미국인들의 실용주의적 사고와 그 정책은 선교영역에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결과로 선교사의 사역을 선교지에서의 사역만이 아니라 선교를 위한 호소, 선교교육 그리고 본국에서의 사역 등 선교를 보다 광범위한 교회적 사역으로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또 선교사의 안식년 제도도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또 1980년대 중반에 와서 미국교회가 파송한 선교사의 수는 3만 9천명에 달했고, 단기선교사의 수는 약 3만명 이었다.
 미국이 세계선교의 주도권을 행사하였다는 사실 외에도 또 한가지 주목할 사실은 복음주의 계통의 개인이나 교회, 단체가 선교를 주도하였다는 점이다. 미국교회의 지난 40년간의 선교사역에서 절대다수의 선교사들이 복음주의 계통의 교회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예컨데 1930년대의 미국선교사 12,000명중 40%는 복음주의 배경에서 나왔고, 1980년대 중반의 미국선교사의 약 90%는 복음주의 교회 출신이라는 점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대로 19세기를 거쳐가면서 미국교회는 세계선교의 주도하였다.


선교타임즈 200101/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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