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러시아인들에게 우주선 미르호의 활동 정지는 슬픈 날이요, 그 선체가 태평양에 추락하는 것은 러시아가 첨단 기술 초강대국에서 가난에 찌든 원료 수출국으로 전락함의 상징이다. 러시아어 "미르"에는 "평화"와 "세계"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일부 러시아인들은 마치 우주정거장 미르호의 폐기와 그 둘 다 끝장이 난 것처럼 반응해 왔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 속에 미르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다. 정부에 최종 순간의 유예를 호소하는 모스크바 시위대 중 한 사람은 "만일 우리가 이 정거장을 잃으면 우리는 세계에서의 우리의 지위를 잃게 되지요. 여러 다른 나라들이 우리를 강대국으로 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러시아 신문의 칼럼들도 우주비행사들이 영웅이었던, 소련의 우주 공학이 세계 정상급이었으며 의무와 애국심이 돈 이상의 것을 의미하였던 보다 이상적인 시대에 대한 러시아인의 기억을 표현한다. “향수가 국민성의 당연한 특징인 나라에서 미르의 마지막은 지나간 시대에 대한 눈물을 자아낸다"고 칼럼니스트 세고드냐는 말한다.
"세계는 때로 신바람이라도 난 듯이 미르 정거장의 노망을 보고하여, 그 영화스러운 시대가 사실상 세상에서 잊혀지게 하였다"고 3월 넷째 주 모스크바타임즈지 영문판 사설은 기록하였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미르호는 우주 탐험의 엄청난 성취였다는 것이다. 모스크바타임즈지가 “미르호여, 안녕히 가라. 우리가 그대를 예포로 환송하노라”고 말할 때에 그 언외(言外)의 뜻은 러시아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라는 새로운 경제 환경에 순응하고자 분투하는 동안에 러시아의 우주 과학은 쇠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리처드 니버(H. Richard Niebuhr)는 1935년의 그의 저서 “세상을 대적하는 교회”(The Church Against the World)에서 교회가 현대의 문화적 환경에 순응하려 애쓰는 동안에 교회의 영적 영향력이 쇠퇴하였음을 언급한다. 오늘날처럼 당시에도 절박한 주제들 중 하나가 문명과 그 제도들이 직면한 자명한 위험이었다. 여러 방면으로부터 교회는 현대의 실재(實在: realities)들에 순응함으로써 스스로를 위기에 처한 이 세상에 교회가 관련이 있게 만들도록 충동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 본질적 문제는 교회는 세상의 위기가 교회의 위기가 될 만큼 세상에 순응하여 왔었다는 것이다. 교회는 시대를 분별하며 하나님을 위하여 선택할 의지와 통찰력이 결여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거짓신들에 아니오라고 말할 의지와 통찰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교회가 세상에 보조적인 한 교회는 4급 세력에 지나지 않능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니버는 복음이 오랜 기간 동안 문화의 일부일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를 논한다. 교회가 아직 요람기에 있고 소수일 때는 그 정체성이 선교와 그 문화의 활발한 전도에 의해 정의된다. 이 선교적 이해에서 그 문화 속에 특유의 정체성과 활발한 전도가 있는 공동체가 탄생된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신앙심을 가짐에 따라 교회는 선교적 교회에서 목회적 교회로 옮아간다. 교회는 이제 새 결신자들을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점차적으로 사회의 권력과 제도를 갖춘 운영 배정이 발달한다. 복음에 점점 더 문화가 스며든다. 문화는 이전처럼 이교를 신봉하는 문화가 아니므로 교회와 문화 사이의 긴장 관계가 누그러진다. 그 결과는 “신앙이 그 힘을 잃고, 기강이 흐트러지며, 회개는 형식적이 되고, 우상 숭배와 더불어 부패가 들어오며, 교회가 후원하였던 문화에 매인 교회는 문화와 더불어 부패함을 겪는다." 그 마지막 단계는 교회가 문화에 길들어지고 흡수되는 부패이다. 그 마지막 결과는 문화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교회가 자본주의에 감금되어 있다. 자본주의는 그 현대적 형태에 있어서 경제적 재화 의 소유와 분배 제도 이상의 것이다. 자본주의는 하나의 신앙이요 하나의 생활 방식이다. 자본주의는 부(富)를 인생의 모든 행복의 원천으로서 그리고 곤궁으로부터의 인간의 구세주로서 삼는다는 점에서 신앙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활동이 경제적 재화의 생산이라는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이에 예속되어 있다는 교의(敎義)이다. 복음과 자본주의 신앙은 극과 극의 정반대이다. 교회는 애초부터 돈의 사랑이 악의 뿌리라는 것을,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땅은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기심이 아니라 사랑이 인생의 첫 번째 율법이라는 것을 알아왔다. 그럼에도 교회는 자본주의 신앙 및 도덕과 타협하여 세상의 종이 될 만큼 자본주의자 문명과 관계를 맺어왔다.
포로가 된 교회는 이 세속 지배 체제와 관계를 맺어온 교회이다. 그것은 문명이 요구하는 대로 문명에 대한 교회의 유용성을 증명하려는 교회이다. 그것은 기독교적 인생 수양의 특이한 특징과 진지함을 상실하고--모든 종교 제도에 그런 경향이 있듯이--유행하는 도덕률 교사와 사회적 신들의 만신전이 되어버린 교회이다. 더욱이, 그것은 그 세력과 위신 증가에 대한 갈망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은 그리고 세상적 불안감을 공유하는 교회이다.
니버는 이제 그의 세대가 "후퇴하고 있는 그리고 사상과 조직 및 수양에서 적과 타협한 교회"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여야 함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질문은 교회가 사회적 기대에 하는가가 아니라, 교회가 교회 자체와 그 머리되신 분께 진실한가이다. 이렇듯 교회가 스스로 물어야 하는 질문은 "어떻게 하여야 우리가 구원을 받느냐?"이다. 교회가 구원을 받으려면 교회는 그 충만한 교회적 정체성을 가져야 하며, 또 세상적 권력과 사상 체계의 우상화에 등을 돌려야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교회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구속적인 역할을 감당한다.
니버에게 있어서 그의 세대의 사명은 교회를 부패한 문명에의 그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우상 숭배가 우세한 문명과 짝을 지은 교회는 그 문화뿐만 아니라 그 세속적임과도 관계를 맺어왔다. 그 해방은 교회의 근본적인 목적의 적극적인 재발견에 의해 일어날 것이다. 교회는 그 소명을 충분히 알아차릴 때 참으로 자유로워진다.
교회가 그 특성을 발견할 희망은 세상에 맛을 낼 소금을 교회에 회복시키기 위하여 그 기원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그 과정을 되풀이하여 시작하는 것이다. 타협된 교회는 그 선교를 저버린 교회이다. 우리가 교회의 정체성의 회복을 판단할 표준은 교회가 회복된 선교 의식을 가지고 있느냐이다. 교회사는 수많은 갱신 운동들이 약화시키는 타협으로부터 교회를 건져내는데 유용하지 않았기에 교회를 속속들이 변화시키는데 실패하였음을 예시한다. 풀러신학교의 솅크(Wilbert R. Shenk) 박사가 밝히듯이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위하여 제정되었으며, 이것이 여전히 그 본질적인 목적이다. 교회의 갱신을 위한 유일한 원천은 하나님의 선교이며, 선교로 갱신된 교회로 귀착하지 않는 갱신은 진정한 갱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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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rch and Culture in Richard Niebuhr's Mission 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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