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움직인 기도 -세계편 9.-존 R. 모트 (John R. Mott)
‘학생자원운동’(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주역
존 R. 모트 (John R. Mott)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에게 반드시 인생의 선택이 찾아옵니다. 위축되는 삶이냐, 확장되는 삶이냐? 작은 규모의 삶이냐, 넓은 안목과 보다 큰 포부를 가진 삶이냐? 자기만족, 또는 자아추구의 삶이냐? 이타적 또는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나눔의 삶이냐?
이 가운데 최선의 선택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나눔의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존 R. 모트*John R. Mott*1865~1955)
미국 감리교의 평신도로서 1946년 국제선교운동에서 쌓은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여 받은 존 R. 모트 박사는 1865년 5월 25일 뉴욕의 리빙스턴 매너(Manor)에서 존 모트(John Mott)의 4자녀 가운데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뉴욕에서 유명한 목재상이었으며,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따라서 그는 아들 모트에게 매일의 성경 묵상과 기도의 필요성, 시간의 소중함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존 R. 모트 (J. R. Mott) |
모트는 16살이 되던 해 예비 감리교도신자들을 위한 아이오와(Upper Iowa University)대학에 입학해 역사와 문학을 공부했다. 어린시절부터 사리 판단이 정확하고 지적 능력이 매우 뛰어났던 그는 이곳에서 여려 차례 웅변대회에 출전해 최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4년 후(1885) 모트는 코넬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이 시기 법학을 전공할 것인지,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 사업가가 될 것인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1886년 1월 14일) 모트는 영국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중국 복음화를 위해 힘썼던 유명한 선교사이자 교수였던 스터드(C.T. Studd)의 강연에서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태복음 6:33)는 말씀을 듣고 회심을 체험하게 된다.
모트는 회심 체험 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의 말이 끝났을 때 무엇인가가 내 영혼을 파고 들어옴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나는 전에 없던 태도로 구원 얻기를 간구하게 되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익을 얻기 위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포기 할 마음이 있음을 느꼈다. 나의 마음은 많은 감동적인 사상과 영적 투쟁으로 계속 가득 찼다.”
회심을 체험하게 된 모트는 이후 젊은이들의 자발적 선교운동 조직인 ‘학생자원운동’(SVM: 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에 헌신하게 된다. 학생자원운동은 1886년 여름 메사추세츠주 헐몬산(Mount Hermon)에서 있었던 두 주간 동안의 집회에서, 모트를 포함한 100명(참석인원 250명)의 대학생들과 신학생들은 “본인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해외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합니다”(I purpose, God willing, to become a foreign missionary)라는 `프린스턴 서약`(Prineton Pledge)에 서명한데서 발단이 되었다. 이 운동이 정식으로 발족되면서 존 모트는 의장이 되었다.
이 학생자원운동의 표어는 ‘이 세대에 세계를 복음화 하자’(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였다. 이 운동은 미국전역과 캐나다 그리고 세계 각국의 선교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이 단체가 주관하는 선교 대회가 매 4년 마다 열렸는데, 제1회 대회는 1891년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열렸다. 이러한 선교대회를 통해 해외선교자원자가 매년 증가했으며, 1920년에 열린 데스 모이네스(Des Moines)대회는 절정에 달했으며,1936년 인디아나 폴리스 대회를 끝으로 50년 동안 선교사로 자원한 학생가운데 2만 5백여 명이 해외선교를 위해 파송됐다.
한편 모트는 2년간 코넬 대학에서 ‘기독교청년회’(YMCA)학생부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면서 회원수를 3배나 증가 시켰으며, 코넬 대학 내의 YMCA 건물을 설립하는 기금을 모으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는 1888년 대학에서 철학과 역사학에 대한 학위를 취득했으며, 졸업과 동시에 성적이 우수한 미국 대학의 졸업생 모임인 ‘파이베타카파’(phi beta kappa)클럽의 회원이 됐다.
이후 그는 27년 동안 북미 지역의 여러 대학을 직접 방문하여 젊은 대학생들로 하여금 해외 선교 사역에 대한 사명감을 불어넣었으며, 총 60년간 YMCA를 위해 헌신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목숨 구하기도
모트 박사는 1895년 `세계학생선교연합`(World`s Student Christian Federation) 총장직을 맡은 후 2년 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해외 선교 단체를 조직하게 된다. 특히 그는 인도, 중국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를 비롯한 아시아와 태평양국가를 중심으로 선교 단체를 조직했다. 1912~13년 1년 동안 그는 한국, 일본, 중국을 여러 차례 방문해 수 많은 젊은 선교사들과 함께 선교 대회를 주도했다.
이와 같은 선교대회를 통해 19세기 초 세계 각지에서 기독교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실제로 1904년의 웨일즈 부흥운동, 1905년의 인도 카시아 부흥운동, 1907년 평양의 대부흥운동, 1908년 중국 호난성 부흥운동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특히 모트박사는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 한국을 방문 했다. 당시 그는 한국의 기독교 부흥운동과 관련해 미국으로 귀국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한국을 보십시오. 그 나라에서는 지금 전국이 영적인 부흥운동의 불길이 휩쓸고 있습니다.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은, 만일 한국에서 기독교가 이 정도의 속도로 계속 성장하게 된다면 근대 선교 역사상 완전히 복음화 된 유일한 비기독교국가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가 이 말을 남긴지 2년 만인 1909년, 한국은 비교적 짧은 기간의 복음화를 통해 평양신학교 1기 졸업생들 중심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결과를 낳게 됐다. (현재 국내 개신교의 총 해외 선교사는 1만442명으로 숫자상으로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이다.)
한편 모트 박사는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에게는 생명의 은인이다. 일제는 데라우치총독 암살미수 사건인 ‘105인 사건’(1910)이후 기독교 신자들을 탄압했다. 당시 YMCA 연락간사였던 이승만은 1912년 2월4일 윤치호(尹致昊)가 체포되는 것을 본 후 자신도 무사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때 이승만이 체포를 모면한 것은 질레트(Philip L. Gillet: 한국명 吉禮泰) 총무 등 YMCA 인사들과, 특히 때맞춰 한국을 방문한 YMCA국제위원회 총무인 모트 박사의 신속한 개입 때문이었다. 모트 박사는 일본인들에게 이승만은 미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인데, 그를 체포하면 심각한 말썽이 빚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승만이 YMCA국제위원회에서 봉급을 받게 한 것도 이런 경우에 대비한 모트 박사의 조치였다.(Robert T. Oliver, YMCA 선교사의 증언)
모트 박사는 1차 세계대전 기간(1914~1918)동안 YMCA 총재로서 오랜 전투로 지친 전쟁포로들을 위로했다. 당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모트 박사에게 중국 대사를 맡아달라고 부탁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멕시코와 러시아 등지에서 선교사 자격으로 민간외교를 하기도 했다.
자신을 항상 ‘복음전도자’로 소개
모트 박사의 생애는 엄청난 기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16권의 저서를 남겼다. 특히 대서양을 1백번을 횡단했으며 태평양은 14번 횡단했다. 이것은 50년 동안 매년 34일을 바다에서 지낸 것과 같다. 그는 일생동안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수천여차례 연설과 회의를 주재했다. 모트 박사는 중국, 체코슬로바키아, 핀란드, 프랑스, 그리스, 스웨덴, 헝가리, 이태리, 일본, 예루살렘, 폴란드, 포르투갈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 받았다. 특히 브라운, 에든버러, 프린스턴, 토론토, 예일과 아이오와 대학은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모트 박사는 1891년 오하이오에서 레일라(Leila Ada White ) 여사와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1955년 90세의 나이로 플로리다 올랜도의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는 임종하기 며칠 전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에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옛것은 지나가고 새 세상은 온다. 이것은 마법도 아니며 소망의 실현도 아니다. 새 세상은 반드시 자기희생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높이는 자들의 의지를 통해서만 구현된다.”
모트 박사와 같은 국제 선교운동가들의 노력으로, 19세기와 20세기를 거쳐 미국은 영국을 제치고 세계 선교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특히 1915년 에는 미국 선교사의 수는 1900년의 두 배가 되었고, 1925년에는 그 수가 1만 4천명으로 증가되어 전 세계 선교사 수의 50%를 넘게 됐다. 현재 미국의 해외 파견 선교사는 총 6만 400명으로 세계 1위이다.
미국이 세계 선교의 주도권을 행사했다는 사실 외에도 또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모트박사와 같은 복음주의 계통의 평신도나 교회, 단체가 해외 선교를 주도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1930년대 중반의 미국선교사의 약 90%는 복음주의 교회 출신이다.
,자신을 늘 ‘복음 전도자’(evangelist)라고 사람들에게 소개했던 모트 박사는 일생동안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해야한다는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신앙과 자유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해 있었으며, 모든 희망과 소망을 하나님과 가족, 그리고 동료들을 섬기는 데 두었다.
김필재 기자 spooner1@
수 십년간 젊은이들이 선교지로 몰려가도록 하는데 어느 누구보다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존 모트였다. 평신도였고, 엄밀한 의미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던 경험은 없었지만 선교사역에 미친 그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모트는 1865년 5월 25일 뉴욕의 리빙스턴 매너(Manor)에서 부유한 목재상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때 회심하였고, 감리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16세 때 대학에 입학한 그는 국제조직인 YMCA의 창립 발기인이 되고 복음전도에 헌신하게 된다.
모트는 학생자원자 운동의 창립회원과 지도자로서 많은 일들을 감당해야 했다. 그는 특히 “세계복음화는 우리 세대에”라는 구호를 액면 그대로 실현하기 위한 과제 중 하나는, 교파간의 협력이라고 보았다. 학생자원운동(SVM)은 다양한 교파와 신앙 배경을 가진 학생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이 일은 이상적인 해결책이라 생각했다.
또한 그가 SVM 운동과 함께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YMCA 활동이었다. 40년 이상 YMCA에서 활동하면서 16년 동안 총무로 사역했다. 그 기간 중 그는 해외여행이 거의 생활이라 할 정도로 많은 시간을 여행에 투자했는데, 그 기간 중 선교사를 만나고 각국의 학생들과 함께 일하고 연합적 선교활동을 전 세계적으로 연대시키기 위한 발전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를 위해 세계기독학생 연합회(WSCF)라는 조직도 만들었는데, 약 3000여개의 학교에 협회가 생겨날 정도로 성장하기도 했다.
모트의 가장 큰 공적은 1910년에 열린 에딘버러 선교대회(Edinburgh Missionary Conference)였는데, 이 회의는 그가 제창하고 주도하여 10일간 열렸다. 1,355명의 대표들이 참석한 최초의 초교파적이고 국제적인 선교사 연합회의였고, 그 뒤 수십 년 동안 진행된 교회연합운동(Ecumenical Movement)의 모체가 되었다. 이 회의 참석자들 중 어떤 이들은 “이 세대에” 세계복음화가 곧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쉬운 것은 후에 에딘버러 교단들의 선교에 대한 관심이 식어지고, ‘전통적인 선교사역의 문제’보다는 가까운 곳에서 눈에 드러나는 절박한 사회악을 해결하는데 노력을 집중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SVM운동의 방향이 바뀌면서, 에딘버러의 열기와 기대가 이어지지 못하게 된다.
모트는 세계복음화에서 사회적 중요성은 강조했지만, 그는 선교사역에서 전도의 중요성을 엄격하게 고수하는 보수적 자세를 지녔다. 그로인해 SVM 말기에는 그의 영향력이 감소되었고, 비판을 받는 일도 있었다.
모트는 말년에도 선교현지와 국내 활동으로 바쁜 시간을 보냈는데,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설립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이를 통하여 기독교가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즈음 국내외에서 불붙기 시작한 근본주의 대 자유주의의 논쟁에서 보수주의자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사랑을 잃지 않고 보수적인 신앙의 동료들과의 우정도 계속 유지했다.
바쁜 와중에 있었지만, 그는 일생동안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는 그의 동역자로 세계의 여성 선교사들을 위해 일했고, 대학의 여학생들을 위한 강연도 함께 했다. 아내의 사후에도 계속된 사역을 감당하는 중에, 그는 한 기자에게 “나에게 죽음이란 차를 바꿔 타는 정거장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955년 1월 31일 그는 자신의 표현대로 차를 바꿔 탔다.
by http://dc.christianitydaily.com/view.htm?id=183785&code=oc
존 모트(John R. Mott)
1865년 5월 25일 뉴욕의 리빙스턴 매너(Manor)에서 존 모트(John Mott)의 4자녀 가운데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뉴욕에서 유명한 목재상이었으며,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이것이 대학생 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1888)의 입회서약이었다. SVM의 창립회원과 지도자로서 모트는 “세계 복음화는 우리 세대에”라는 구호를 액면 그대로 실현하려고 애썼다. YMCA 에서 40년간 활동하면서 16년간은 총무로 훌륭히 일했다.
존 모트를 통해 배우는 선교전략
1) 그가 주창하여 1910년에 열린 에딘버러 선교회의(Edinburgh Missionary Conference). 1335명의 초교파적인 국제 선교사연합회 대표가 참석하여 10일간 계속된 회의는 그 후 교회연합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2) 미션 스테이트먼트와 단계별 성장 그림을 그리는 하나님의 선교에 꿈을 꾸는 Dream Builder였다. 1910년 당시 45,000명의 선교사가 30년 후엔 3배가 넘는 선교사들이 전세계 오대양 육대주에서 사역할 것을 예견하고, 꿈의 실현을 위해 최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3) 모트는 세계복음화에서 줄곧 사회적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사회봉사는 우리세대에 가장 분명한 사명이라고 도전 하였다.
4) 선교사역에서 전도의 중요성을 엄격하게 고수하는 보수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5) 비기독교인을 개종시키는 것이 선교의 첫번째 목적이라고 했다. 말년까지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 설립을 위해 애썼다.
6)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선교하는 공인이었지만 가정도 잘 돌본 모범 가장이었다
그는 왜 매일 창문을 열고 잤는가-존 모트(John R. Mott)
큐티클리닉 그는 왜 매일 창문을 열고 잤는가 고직한 선교사 - Young2080 상임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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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누구인가? ●『미래교회의 지도력』이라는 책을 포함해 열여섯 권의 책을 썼다. 태평양을 14회 이상 건넜고, 50년 동안 연평균 34일 이상 배를 타고 다녔다. 포르투갈, 스웨덴 및 미국 정부로부터 명예로운 상들을 받았다.
받았다. 이 대단한 사람, 그는 과연 누구인가? 아마 거의 못 맞출 것이다. 바로 1865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존 모트(John R. Mott)이다. 그는 평생 선교동원가로 살았다.
심지어는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중국 대사로 일할 것을 제안 받았으나 거절했다. 왜인 줄 아는가? 오직 선교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아프리카 선교의 아버지였던 리빙스턴을 가장 존경했으며, 수십 년간 젊은이들이 선교지로 가도록 큰 영향을 끼쳤다.
열정의 선교동원가
그 후 1887년 매사추세츠 주의 헐몬산에서 무디가 주최한 한 달간의 기독학생수련회에 코넬대학교 대표로 참석한다. 이 때 100개 대학에서 온 250여 명의 학생들이 프린스턴에서 온 로버트 윌더에게서 선교 도전을 받았는데, 존 모트는 “하나님이 원하시면 어느 곳이든 선교사로 가겠다.”라는 프린스턴 서약에 서약한다.
수련회 마지막 날까지 100명이 서명했고, 이들이 모여 미국과 캐나다 대학을 순회하며 이 프린스턴 서약을 받는 일을 하자며 두 명의 학생을 뽑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존 모트이다. 그래서 약 2년에 걸쳐 순회하며 2천여 명의 선교 자원자를 모았다. 이것이 “우리 세대에 세계를 복음화하자!”라는 야심찬 슬로건을 내건 위대한 '학생선교자원운동(SVM)'이다. 존 모트는 그 후 30년간 이 일을 지속했는데, SVM 운동을 통해 10만 명의 선교 헌신자가 나왔고 그 중 2만 5천명의 선교사가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등에 파송되었다. 닫혀 있던 조선까지 찾아 온 대부분의 선교사가 바로 이들이다.
1907년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타오른 부흥의 불길을 보며 외국 언론들은 평양을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대서특필했다. 이 무렵 조선 땅을 밟은 존 모트는 “한국교회가 이만큼의 속도로 계속 성장한다면, 한국은 근대 선교 역사상 완전히 복음화된 유일한 비기독교국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열정의 비결
바로 매일 매일의 큐티 생활(Daily QT Life)이다. 그는 이른 아침에 큐티를 제대로 하기 위해 창문을 열어 두고 잠을 청했다고 한다. 창문 바로 옆에 닭을 키워 그 닭이 울어대면 일찍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27가지 작은 생활 규칙'(아래 참조)을 만들어 꾸준히, 치열하게 실천했다. 그 27가지란 신앙에 대해 열 가지, 정신에 대해 열 가지 그리고 신체에 대해 일곱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신앙에 대한 처음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신앙생활을 촉진할 수 있는 광범위한 계획을 세운다. “하루를 경건한 성경 공부와 기도로 시작함으로써 그날 벌어질 자아와 죄와 사단과의 싸움을 위해 무장을 갖추게 된다.” 바로 이것이 존 모트의 승리하는 삶의 비밀이었다.
젊은이 선교운동가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였던 존 모트(John R. Mott)의 '27가지 작은 생활 규칙' 존 모트는 20세기 종교 지도자 중 영향력이 가장 큰 사람이었고 바쁜 삶을 살았지만, 일생동안 가정적인 사람으로 90세까지 건강하게 살았다. 신앙 정신 신체 『크리스천은 공부하는 방식이 다르다』 외르크 크놉라우흐, 한스 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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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학생선교운동의 절정기
2004-03-22 온승연 |
세계선교사에 신기원을 연 것은 10만명의 학생 선교자원자를 배출하고, 2만5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SVM)'이다. SVM은 실행위원회·이사회·자문위원회 등 기구가 있지만, 선교사를 직접 파송하지 않았다. 지역교회와 유대관계를 갖고 각종 해외선교기관의 심부름꾼이 되고자 했다.
아울러 초기 10년동안 400개 대학과 100개 신학대학, 200개 의과대학, 300개 정규 선교연구기관에 학생선교운동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 애를 썼다.
훗날 SVM은 YMCA 대학부, YWCA 대학부, 범신학대선교연맹(ISMA), 캐나다범대학선교연맹(ICMA) 등과 함께 세계 선교의 지경을 넓혀 나갔다.
SVM의 출현은 앞서 1886년 메사추세츠주 헐몬산 수양회에서 로버트 윌더, 존 R 모트 등 선교운동가 및 선교지원자 100명을 배출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헐몬산 수련회와 10개국 모임
1886년 여름 D L 무디가 인도한 헐몬산수련회는 미국 학생선교운동의 새로운 동력을 탄생시켰다. 프린스턴대 대표로 참석한 로버트 윌더의 누이인 그레이스 윌더가 이같이 예언했다.
“우리의 기도는 헬몬산수련회에서 응답될 것이다. 프린스턴에서 시작한 선교자원운동은 범대학운동이 될 것이다. 수양회 참석자 가운데 100명의 자원자가 나올 것이다.”
1886년 7월6일부터 8월1일까지 열린 헐몬산수련회에 250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윌더는 첫날 참석자 중 21명의 대표들이 선교사가 되기 위해 이미 진지하게 고민해 왔다는 것을 발견했다. 무디는 수양회에서 하루 한 차례만 설교했다.
7월16일 아서 T 피어슨 박사의 ‘모두가 가야 하며 모두에게로 가라’는 주제강연에서 참석자들은 크게 감동받았다. 윌더는 이날 오후 선교에 관심있는 학생들을 모아,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기도회는 자연스럽게 ‘10개국 모임’이라고 명명됐다. 학생들이 직접 강사가 돼, 일본· 페르시아· 미국인디언· 독일· 아르메니아· 덴마크 ·노르웨이· 중국· 인도 등 10개국에 대한 선교의 시급성을 역설했다.
윌더는 선교사 자녀로서 인도에서의 생활을 소개하며, ‘왜 당신이 가야 하는가’가 아니라 ‘왜 당신은 가지 않으려고 하는가’라며 도전의 메시지를 전했다.
10개국 모임이 시작된지 8일째 되는 날, 78명이 선교자원서인 프린스턴 선언문에 서명했다. 수련회가 끝나갈 무렵 마지막 1명이 서명, 총 100명이 이 선언에 동참했다.
윌더는 존 N 포먼과 함께 학생자원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1년간 휴학하고 미국과 캐나다의 162개 대학을 방문했다. 그 결과 1887년말까지, 2,106명이 선교사 자원 선언서에 서명했다. 그중 500여명이 여성들이었다. 미주대학생선교운동의 대명사인 SVM은 이렇게 시작됐다.
1888년 50명의 학생대표들이 매사추세츠주 노트필드에 모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해외선교를 위한 SVM을 정식 출범시켰다. 코넬대 출신 존 R 모트가 의장 겸 실행위원장에 선출됐다.
SVM은 다섯 가지를 목적으로 삼았다.
1. 첫째, 학생들로 하여금 그들의 개인적인 생업으로서의
해외 선교 사역을 생각해 보도록 한다.
2. 둘째, 학업에서나 활동 분야에서 선교를 위해 지원한 학생들을
교회 선교부에서 직접 활동할 수 있도록 돕는다.
3. 셋째, 전체 지원자들을 하나의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활발한 운동에
참여케 한다.
4. 넷째, 여러 선교부에서 필요로 하는 양질의 지원자를 확보한다.
5. 다섯째, 국내에 남아있는 학생들에게 기도와 헌금으로
선교사업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한다.
1891년 SVM에 의해 미국의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제1차 국제학생전도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1940년까지 1차 세계대전 기간을 제외하곤 정기적으로 열렸다. 1945년까지 선교단체와 교회의 후원하에 2만여명의 학생들이 SVM 선언에 동참한 뒤 선교지로 떠났다.
SVM은 ‘우리 시대에 세계복음화’라는 구호를 통해 청년 학생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선교의 십자군’으로 세계 곳곳으로 떠나갈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1892년 4월 영국에서 SVM이 조직된 이래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등 유럽에도 SVM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는 로버트 윌더의 개척정신의 열매였다.
1891년 장로교 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인도로 떠났던 윌더가 그해 영국 케스위크수련회에 참석, 선교비전을 대학생들과 나누었기 때문이다.
윌더는 1906년 존 B 슬레만에 의해 시작된 평신도선교운동(LMM) 탄생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1913∼14년 독일 헝가리 오스트리아 체코 폴란드 등 유럽 전역에 세계기독학생연맹(WSCF)을 조직하는 데도 앞장섰다.
<국민일보>
-존 모트(John. R. Mott)의 명언-
“그리스도인들의 걱정스러운 약점은 기독교적 체험과 기독교적 신앙을 생산하는 것보다, 더빨리 기독교적 활동들을 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영혼의 훈련과 깊이 있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전례가 없는 부흥의 기회를 체험케 하고, 시대에 대한 책임을 직시하게 함을 충분하게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존 모트(John. R. Mott)-
Nobel PEACE Prize Winners노벨 평화상 수상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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