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십년간 젊은이들이 선교지로 몰려가도록 하는데 어느 누구보다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존 모트였다. 평신도였고, 엄밀한 의미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던 경험은 없었지만 선교사역에 미친 그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그는 아프리카 선교의 아버지였던 리빙스턴을 가장 존경했다고 하는데, 모트 역시 다른 학생자원자들과 마찬가지로 세계복음화를 위해 자신의 부와 명예를 포기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외교관 지위를 사절하고 물질적 이익을 포기했음에도 명성이 계속 올라갔고, 그는 결국 미국 대통령의 친구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이며, 20세기 종교 지도자들 중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이었다.

 모트는 1865년 5월 25일 뉴욕의 리빙스턴 매너(Manor)에서 부유한 목재상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때 회심하였고, 감리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16세 때 대학에 입학한 그는 국제조직인 YMCA의 창립 발기인이 되고 복음전도에 헌신하게 된다.
 
 그는 아이오와 대학을 마치고 코넬대학교로가 정치학과 역사학을 전공한다. 그는 그곳에서 C.T 스터드의 형제였던 J.C.K 스터드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 그의 삶의 최우선 과제에 변화를 맞게 된다. 스터드는 설교 당시 지위와 부를 포기하고 해외 선교에 전적으로 헌신한 캠브리지 7인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들려주었다.
 
 그 설교 이후 모트는 그 이듬해 매사츄세츠주 헐몬산에서 열렸던 첫 번째 기독학생 수련회에 참석한다. 그곳에서 그는 비로서 이 학생자원자 운동에 개인적으로 헌신하게 된다. 복음전도자였던 무디의 후원으로 100개의 대학에서 온 250여명의 학생들은 한 달간의 집회를 가졌는데, 모트는 코넬대학교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집회 마지막 날 프린스턴에서 온 로버트 윌더가 선교사로 헌신하자는 도전적인 제안을 하며 개인적 결단을 강력하게 호소하였고, 그 결과 100명의 학생들이 프린스턴 서약에 서명을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어느 곳이든 선교사로 가겠다.”라는 내용의 프린스턴 서약은 후에 학생자원운동의 기초가 되었고, 모트는 100명 중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고 이 후 30년 이상 이 모임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다.

 모트는 학생자원자 운동의 창립회원과 지도자로서 많은 일들을 감당해야 했다. 그는 특히 “세계복음화는 우리 세대에”라는 구호를 액면 그대로 실현하기 위한 과제 중 하나는, 교파간의 협력이라고 보았다. 학생자원운동(SVM)은 다양한 교파와 신앙 배경을 가진 학생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이 일은 이상적인 해결책이라 생각했다.

 또한 그가 SVM 운동과 함께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YMCA 활동이었다. 40년 이상 YMCA에서 활동하면서 16년 동안 총무로 사역했다. 그 기간 중 그는 해외여행이 거의 생활이라 할 정도로 많은 시간을 여행에 투자했는데, 그 기간 중 선교사를 만나고 각국의 학생들과 함께 일하고 연합적 선교활동을 전 세계적으로 연대시키기 위한 발전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를 위해 세계기독학생 연합회(WSCF)라는 조직도 만들었는데, 약 3000여개의 학교에 협회가 생겨날 정도로 성장하기도 했다.

 모트의 가장 큰 공적은 1910년에 열린 에딘버러 선교대회(Edinburgh Missionary Conference)였는데, 이 회의는 그가 제창하고 주도하여 10일간 열렸다. 1,355명의 대표들이 참석한 최초의 초교파적이고 국제적인 선교사 연합회의였고, 그 뒤 수십 년 동안 진행된 교회연합운동(Ecumenical Movement)의 모체가 되었다. 이 회의 참석자들 중 어떤 이들은 “이 세대에” 세계복음화가 곧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쉬운 것은 후에 에딘버러 교단들의 선교에 대한 관심이 식어지고, ‘전통적인 선교사역의 문제’보다는 가까운 곳에서 눈에 드러나는 절박한 사회악을 해결하는데 노력을 집중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SVM운동의 방향이 바뀌면서, 에딘버러의 열기와 기대가 이어지지 못하게 된다.

 모트는 세계복음화에서 사회적 중요성은 강조했지만, 그는 선교사역에서 전도의 중요성을 엄격하게 고수하는 보수적 자세를 지녔다. 그로인해 SVM 말기에는 그의 영향력이 감소되었고, 비판을 받는 일도 있었다.

 모트는 말년에도 선교현지와 국내 활동으로 바쁜 시간을 보냈는데,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설립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이를 통하여 기독교가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즈음 국내외에서 불붙기 시작한 근본주의 대 자유주의의 논쟁에서 보수주의자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사랑을 잃지 않고 보수적인 신앙의 동료들과의 우정도 계속 유지했다.

 바쁜 와중에 있었지만, 그는 일생동안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는 그의 동역자로 세계의 여성 선교사들을 위해 일했고, 대학의 여학생들을 위한 강연도 함께 했다. 아내의 사후에도 계속된 사역을 감당하는 중에, 그는 한 기자에게 “나에게 죽음이란 차를 바꿔 타는 정거장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955년 1월 31일 그는 자신의 표현대로 차를 바꿔 탔다.

  

                                                                         by   http://dc.christianitydaily.com/view.htm?id=183785&code=oc

 
 
 

                                                존 모트(John R. Mott)

 1865년 5월 25일 뉴욕의 리빙스턴 매너(Manor)에서 존 모트(John Mott)의 4자녀 가운데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뉴욕에서 유명한 목재상이었으며,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존 모트는 코넬 대학교에서 스터드의 설교에 감명을 받고 영적 성장과 전도를 최우선시하게 되었다. 메사추세츠 헐먼산에서 있었던 기독학생수련회에서 은혜를 받고 프린스턴 서약에 서명한 후 하나님이 원하시면 어느 곳이든 선교사로 가겠다고 헌신했다.

 이것이 대학생 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1888)의 입회서약이었다. SVM의 창립회원과 지도자로서 모트는 “세계 복음화는 우리 세대에”라는 구호를 액면 그대로 실현하려고 애썼다. YMCA 에서 40년간 활동하면서 16년간은 총무로 훌륭히 일했다.

                                                존 모트를 통해 배우는 선교전략
 1) 그가 주창하여 1910년에 열린 에딘버러 선교회의(Edinburgh Missionary Conference). 1335명의 초교파적인 국제 선교사연합회 대표가 참석하여 10일간 계속된 회의는 그 후 교회연합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2) 미션 스테이트먼트와 단계별 성장 그림을 그리는 하나님의 선교에 꿈을 꾸는 Dream Builder였다. 1910년 당시 45,000명의 선교사가 30년 후엔 3배가 넘는 선교사들이 전세계 오대양 육대주에서 사역할 것을 예견하고, 꿈의 실현을 위해 최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3) 모트는 세계복음화에서 줄곧 사회적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사회봉사는 우리세대에 가장 분명한 사명이라고 도전 하였다. 


  4) 선교사역에서 전도의 중요성을 엄격하게 고수하는 보수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5) 비기독교인을 개종시키는 것이 선교의 첫번째 목적이라고 했다. 말년까지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 설립을 위해 애썼다.


  6)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선교하는 공인이었지만 가정도 잘 돌본 모범 가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