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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 어거스틴과 데카르트: 믿음 대 의심의 사유

영국신사77 2008. 9. 21. 19:19
기독교의 복음과 우리의 문화(7)

  국제사회에서의 지난 주(2000년 3월 첫째 주)의 톱뉴스는사상 최악이라는 동아프리카 모잠비크 대홍수이다. 나무 위에 있는 동네라는말로 그 참상이 표현된다. 도시를 뒤덮은 물이 지붕보다 높으니 수해 지멱 주민 모두가 나무 위로 기어올라 갔으며 이런 수재민의 수가 무려 백 만을 헤아린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생명의 경이를 새삼 느끼게 하는 일이 있어서 온 세상의 이목을 모으고 있다. 나무에서 아이를 낳는 여인을 구조 헬리콥터가 발견하고 줄사닥다리를 내려 아기와 산모를 차례로 구출해 낸 것이다.

  언제부터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는 질문에 대해 도래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차오르는 물에 비유하여 설명할 수 있다. 모잠비크 대홍수처럼 하루 사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바뀌는 것은 아니어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분기점을 정하기란 퍽이나 어렵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 문명에서 계속 차오르고 있기에 어느 때고 범람하는 사조가 될 수 있다. 우리가 21세기의 기독교 신앙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제를 다루기에 앞서 살펴 보아야 할 두 사상가가 있다. 한 사상가는그리스·로마의 고전 문명과 중세 기독교 문명 사이에 징검다리를 놓았던 성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이요, 다른 한 사상가는 중세와 근대의분기점에서 계몽운동 사상가였던 데카르트이다.

  성 어거스틴은 “나는 알기 위하여 믿는다”고했다. 이 말이 라틴어 원어로는 “Credo ut intelligam”이요, 영어로는 “Ibelieve in order to know”라고 번역된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다.라틴어로는 “Cogito, ergo sum”이요, 영어로는 “I am thinking, therefore Iexist”이다. 이 두 사상가의 이 두 유명한 슬로건은 각기 상반된 인식론이 함축되어 있다. 진리를 얻으려면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의 질문에 둘은 전혀 정반대의 답변을 한다. 성 어거스틴은 진리를 구하는 출발점이“믿음"이라고 하고, 데카르트는“의심"이라고 한다. 확실한 지식을 붙잡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하였던데카르트는 심지어 “나는 내가 참으로 깨어 있는지를 어떻게 안단 말인가"라는 말까지 하였다. 하나님의 계시 신앙에 의거하였뎐 성 어거스틴은“나는알기 위하여 믿는다”라고 말했고, 자신의 생각하는 자아(the thinkingself)에 의거하였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러면 누구의 사유모형(paradigm)이 타당한가? 데카르트의 비평적 방법론이 근대의 과학 철학에, 따라서 과학의 발전에이바지한 공은 실로 과소 평가될 수 없다. 그의 이론 체계는 실로 휼륭하다. 그럼에도 지난 주의 글에서 살폈듯이 니체는 데카르트의 방법론이 성립 불가능함을 밝혀낸다. 가령 내가 “갑을 의심한다”고 말하고 누가나에게 그 이유를 대라고 할 때 나는 무어라고 대답해야 하는가? 나는 “을의관점에서 볼 때에”라고 대답하든지 “갑은 증명될 수 없기 때문에”라고대답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을의 관점에서”라고 말하면 내가 이미 을의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인데 그 선입견은 또 하나의 편견이 아니라고 어찌장담하겠는가? 그리고 만일 내가 “갑은 증명될 수 없기 때문에”라고대답한다면 그것은 이미 나에게 갑이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고 여기는소신이 있음을 반증한다. 결국, 데카르트가 말하는 객관적인 지식은 결코 객관적인 지식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의심을 지식을 구하는 일차적인 도구로 삼자는 데카르트의 초청은 결과적으로 회의론(skepticism)의 승리로그리고 니체(Nietzsche)가 예견하였듯이 허무주의(nihilism)의 승리로 이끌었을뿐이었다.

  근대사조(modernism)의 바탕이 허물어지는 이런상황에서 탈근대사조(postmodernism)적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모른다. 그러나, 뉴비긴이 밝히듯이 신앙(faith)과 의심(doubt) 양자 모두에 우리가 지식을 가지는 데 필요한 역할이 있다. 그러나 의심의 역할은 필요하나 이차적이요 신앙의 역할이 일차적이다.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알 지 못한다. 진리를 배울 때 우리는 "믿음"으로 아는 단계에서 출발하여 "증거 판단"으로 아는 단계로 나아간다. 신앙과 지식 사이에 절대적인 구분이란 없다. 주관적인 앎은 객관적인 사실을 보는 렌즈요 창구이다. 성 어거스틴이 말하였듯이 우리는 알기 위하여,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 우리의 앎이 처음부터 완벽하지 못할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믿음을 통한 우리의 앎은 우리의 지식의 성숙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문화사조의 도전을 받는 21세기의 교회가 문화 창출의 주체가 되어야 할 이유를 발견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우리는 알기 위하여 믿는다. 그리고 우리의 앎은 영원한 반석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의거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더니즘의 청중에게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청중에게도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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