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내에는 장로교, 감리교 등 여러 교파가 있고, 또 각 교파는 예수장로회, 기독장로회 등으로 구분되는데, 예수장로회 내에도 합동, 통합 등의 교단들이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한 복음을 전하면서도 교단이 다르면 남남으로 지낸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예수장로회도 기독(基督)장로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어진 교단명칭이요, 합동(合同)이나 통합(統合)이나 하나로 합친다는 뜻은 매한가지이건만 교단이 분열되어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 이렇게 다양한 교단이 있게 된 배경에는 서구 신학이 크게 보수신학과 자유주의 신학 양 진영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사실이 있다.
 그런데, 기독교 신학이 결코 처음부터 보수신학 따로 자유주의 신학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세기 신학의 주류를 이루었던 일군의 신학 운동이 그 신학 방법의 특성상 자유주의 신학 혹은 신(新)신학으로 일컬어지게 되고, 그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기독교 정통 교리를 수호하려던 또 하나의 신학 운동이 보수신학으로 일컬어졌다. 그런데 자유주의 신학과 보수 신학의 분열은 교리상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신학과 문화의 관계에 대한 이해의 차이 때문에 빚어졌다.
 그 영문판이 1960년에 출판된 그의 불후의 신학 에세이 『19세기 복음주의 신학』에서 칼 바르트(Karl Barth)는 자유주의 신학을 일으킨 19세기 신학의 과오는 결코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밝힌다. 당대 모더니즘 문명이 문화의 세속화를 부추기던 상황에서 19세기 신학자들은 기독교 진리를 변증하려 하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 신학은 인본주의 신학, 자유주의 신학으로 치닫게 된 것일까? 그것은 바르트가 밝히듯이 19세기 주류 신학이었던 자유주의 신학이 “위로부터의 신학”(theology from above)에서 출발하지 않고 “아래로부터의 신학”(theology from below)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된 진리 추구보다는 종교 철학적 담론에 치중하였던 이 신학을 “아래로부터의 신학”으로 규정한다. 종교 철학적 담론이 전혀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라, 신학적 진리와 종교 철학을 혼동한 신학은 참 신학일 수 없음을 그는 역설하는 것이다.
 사실, 19세기 신학은“의도적인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방향의 표류로 인한 “아래로부터의 신학”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신학의 시대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때는 바야흐로 과학 혁명의 전성기였으며, 근대 과학의 합리주의가 신앙에 도전하던 시대였다. 과학 이성의 세계관이 군림하던 이 시대에 과학적 진리는 상급 진리로 높이 평가되고, 종교적 진리는 하급 진리로 여겨졌다. 이처럼 기고만장한 신지식인들이 신앙을 경멸하는 시대에 어떻게 기독교 복음을 변증하며 전파할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19세기 신학자들은 그 해답을 신학이 문화와 관계를 갖게 함에서 찾으려 했다.
 사실 19세기 신학자들이 신학과 문화와 관계를 위해 노력하였던 그 필요성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신학이 문화와 동떨어져 있을 수만은 없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당면한 목회 상황에서도 자명하다. 21세기 교회의 선교의 과제를 토론하는 그의 저서 『영성과 감성을 하나로 묶는 미래 교회』에서 레너드 스윗은 성경을 믿는 교회에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 찬 문화 속에서 21세기 목회의 대안을 어떻게 찾을지를 논한다. 바로 이러한 복음과 문화 이슈가 있었던 상황에서 19세기 신학자들은 신학과 문화의 거리를 좁힐 방도를 구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런 신학적 과제는 오늘날에도 있다. 그럼에도, 19세기 신학의 결정적 결함은 신학과 문화의 관계에 대한 경솔한 가정(假定)에 기인함을 바르트는 지적한다.
 과학 이성의 세계관이 정신 문화를 지배하던 시대에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수단은 무엇이었을까? 세계관 형성에 신학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착안한 19세기 신학자들은 기독교 세계관과 세상의 세계관 사이에 교량 역할을 해 줄 세계관이 있다고, 다시 말해 세상의 세계관 중에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에 공감대를 갖게 해주는 세계관이 있다고 가정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주의를 기울였던 그들의 시대의 특정한 세계관이란 쉴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가 말했듯이 "무한자(無限者)를 지각하고 체험할" 인간의 선천적이며 본질적인 역량이다.
 그런데, 이 목적을 위하여 신학자들은 한 특정한 세계관을 그들의 세계관으로 삼고 그 타당성을 긍정해야만 했던 것이며, 여기서부터 이 신학은 “위로부터의 신학”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신학”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이 모더니즘의 비평 이론을 그들의 신학 방법에 도입하게 되었던 연유이다. 여하튼, 특정 세계관에 관한 19세기 신학자들의 가정이 옳았는지를 확인해 보기 위해 바르트는 다음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이 신학자들로부터 그러한 교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는가?" "그들은 그들의 세계관이 보충되는 것을 허락하였는가?" "그들은 종교와 기독교 신앙에 사람들이 개방되어 있다는 것에 민감하였으며, 그것을 활용하기를 바랐는가?"
 첫 번째 질문은 과학 합리주의의 전성기였던 당대에 그런 세계관 교훈이 청중에게 호소력이 있었을 지를 묻는다. 두 번째 질문은 모더니즘의 인본주의가 사상계 주류로 정착되었던 19세기 사람들은 그들의 세계관에 신학인이 간섭하도록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을 것임을 암시한다. 세 번째 질문은 기독교 신앙심이 세계관에서 우러나는 것인지를 진지하게 질문한다.
신학이 문화와 관계를 가지게 할 필요가 있다고 해서 모든 시도가 타당할 수는 없다. 세계관의 종교철학적 담론에 치중하였던 19세기 신학은 결국 “아래로부터의 신학”이었으며, 모더니즘의 비평 이론을 그들의 신학 방법에 끌어들인 신학이었다. 그리고 그 신학은 전도 목회 환경을 향상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척박하게 만들었다.
요컨대, 19세기 신학자들은 기독교와 세상의 공유할 수 있는 세계관을 찾아내면 전도가 쉬워진다는 가정 하에 그들의 신학 작업을 하였다. 그러나 전도의 문을 열려는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그들의 노력의 결과로 오히려 전도의 문이 닫혔다. 그들은 세상의 세계관을 받아들였으나, 세상은 기독교의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상은 기독교 신학을 하나의 종교 철학으로 간주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의 구원의 복음 선포를 오히려 어렵게 만들었다. 세계관에 대한 종교철학적 토론은 신앙부흥운동도 일으키지 못하였을 뿐더러 전도의 열매도 맺지 못하였다. 17세기 청교도 설교자들은 단순 명료한 말로 복음 메시지를 선포하여 신앙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이에 비해 19세기 신학자들의 종교철학 용어들은 신앙부흥운동을 일으키기는커녕 오히려 기독교 운동의 침체를 초래하였다.
바르트의 이런 관찰이 21세기 교회의 선교를 위해 시사하는 바는 자못 중대하다. 대중문화의 세속화 영향이 너무도 큰 오늘날에도 문화와 관계를 가지는 신학을 정립할 필요는 절실하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와 문화가 관계를 갖게 하기 위한 모든 시도가 다 합당한가? 선교를 위해 우리에게 세상에 갈 사명이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마 28:19). 그러나 그와 동시에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성별될 사명이 또한 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벧전 2:9).
이 글의 주제를 영문판 칼럼으로 보기 |
---|
'선교 ·선교사 · 신앙偉人 > 海外선교* 선교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성 어거스틴과 데카르트: 믿음 대 의심의 사유 (0) | 2008.09.21 |
---|---|
[스크랩] 칼 바르트는 포스트모던 신학자인가? (0) | 2008.09.21 |
[스크랩] 선교를 위한 신학과 문화의 관계: 칼 바르트의 견해(1) (0) | 2008.09.21 |
[스크랩] 칼 바르트의 설교/ 그럼에도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0) | 2008.09.21 |
[스크랩] `로잔 선언`(Lausanne Covenant)과 존 스토트 목사 (0) | 2008.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