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신학자들이 모더니즘에 순응하려 했을 때에 모더니즘의 도산을 예견하고 모더니즘 시대 이후의 신학 모델을 처음으로 제시한 신학자가 바로 칼 바르트(Karl Barth)였기에 그를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의 선각자로 보려는 이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바르트의 진정한 관심사는 포스트모더니즘 인식론에 입각한 신학 연구였다기보다는 교회의 선교를 위해 문화를 신학적으로 이해함에 있었다. 실로 그의 신학은 기독교 신앙이 모더니즘 인식론에 도전을 받고 있었던 문화 상황에서 기독교 복음 커뮤니케이션의 과제를 연구함에서 출발하였다. 그러기에 문화의 신학을 위한 그의 통찰이 21세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을 받는 우리의 상황에서의 교회의 선교를 위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실, 기독교회가 모더니즘의 도전을 받았던 19세기 상황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을 받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는 유사성이 있다. 만일 다른 점이 있다면 19세기에는 기독교 세계관이 합리론의 도전을 받았던데 비해, 오늘날에는 포스트모더니즘 인식론과 대중 문화의 도전을 양편에서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구보다도 오히려 문화가 더욱 급격히 변하고 있는 한국에서는 그 영향이 청소년 목회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관찰된다. 근래에 한국 사회에서 연령대별로 세대 차이를 느끼며 세대간 문화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 주요인은 대중문화의 영향이다.
포스트모던 대중 문화가 교회에 미치는 영향의 심각함을 주시하는 신학자 스텐리그렌쯔(Stanley J. Grenz)는 신학적 성찰에서의 대중 문화의 위치를 토론하는 그의 최근 에세이(2000)에서 문화의 변화에대한 교회의 선교적 대응을 위해 신학교에 대중 문화를 다루는 학과목이 개설될 필요가 시급함을 역설한다. 요컨대, 오늘의 목회 상황에서는신학이 대중 문화와 관련성을 갖는 것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불후의 에세이 “19세기 복음주의 신학”(1960)에서 바르트는19세기 신학자들이 당대 문화와의 관련성을 모색하였으나 전도에 역효과를 가져왔음을 지적함이 주목된다. 19세기 신학자들은 근본적으로18세기 기독교 계몽운동의 노선을 따랐었다. 그러나 바르트는 그들이 신앙의 가능성을 당대에 규범적이었던 세계관에 관련시켜 증명하려하였다는 데에 신학적 문제가 있음을 시사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당대의 세계관 중에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 메시지와 기독교신앙에 공감대를 가질 수 있는 세계관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이 주의를 기울였던 그들의 시대의 특정한 세계관이란쉴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가 말했듯이 "무한자(無限者)를 지각하고 체험할" 인간의 선천적이며 본질적인 역량이다.
 이런 세계관을 부각으로써 세상에서 기독교 신앙의 공감대를 넓히려는 19세기 신학자들의의도는 좋았으나 이것이 신학에 미친 영향은 이 목적을 위하여 신학자들은 한 특정한 세계관을 그들의 세계관으로 삼고 그 타당성을 긍정해야만했던 것이다. 성행하는 철학을 받아들임이 바로 그들의 작업을 위한 전제이다 보니 이런 우를 범하기가 더욱 쉬웠다. 요컨대, 그러한시도는 신학적 성찰에 비기독교적 세계관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철학 토론이 문화의 상층 구조를 지배하던 시대에 신학자들이 그 철학 토론에 동참할이유는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당대에 자신을 전문적 철학자로 여기지 않는 신학자가 드물었으며, 신학자와종교철학자의 구분이 애매 모호한 지경에 이르렀던 것은 그 도가 지나쳤음을 이렇게 지적한다. "이 종교 철학자들은 사람에게는 종교적본성이 있다는 세계관에 초점을 맞추고 일반 인식론을, 형이상학과 윤리학의 체계를 세워나갔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을포함한 종교의 가능성의 근거를 제시하려 하였다."
 19세기 신학자들이 세상과의 관계성(relatedness)을 이토록 강조한 배경에는두 가지 가정(假定)이 있었다. 즉, 세상과의 관계성이 신학의 일차적 과제라는 일반적 가정과 기독교 신앙의 보편적 영접이 가능하다는특수 가정이다. 그런데 이런 가정의 결과로 신학자들은 그들의 신학 작업에서 기독교 메시지보다는 기독교 신앙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신학 내용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하심보다는 인간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혹은 멜란흐톤(Melanchthon)의표현대로 그리스도보다 그리스도의 은전(恩典: beneficia Christi)에 더 관심이 있었다.
 세상과의 관계성에 대한 이 강조가 신학적 성찰에 미친 영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이 강조가 그들의 성경 해석에, 초대 교회 교리에 대한, 그리고 종교 개혁 고백에 대한 그들의 긍정적 혹은 부정적 태도에 영향을 미쳤다.그것은 그들의 교회사 연구와 표현에, 그리고 마침내 그들 자신의 신앙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이 신학자들의 관심사는 그의 과거와 그의현재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그의 대면과 연합에서의 신앙인에 집중되었다. 당대 세계의 신학적 토론은 신앙인의 존재를, 그리고 특히종교 철학은 이 존재의 가능성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혹자는 어째서 바르트가 이것을 문제삼았는가 의아해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어조와강조점이 미묘하게 바뀌었다는데서 바르트는 그들의 시도에서 인본주의의 요소들을 발견한다. 실은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교리일 뿐만이 아니라하나님과 인간에 관한 교리이다.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심에 근거하는 것이지, 그 역관계가 아니다.
 이처럼 19세기 신학자들이 "신앙"에 대하여 말하였으나 그들의 가정(假定)은 신앙을인간의 영적 생활과 자아 인식의 한 형태의 실현으로서 이해하게끔 하였다. 그들이 이 해석에 진지하면 할수록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감정과지식과 의지에 달려 있는, 즉, 신앙의 대상과의 관계없이 홀로 존재하는 유아독존(唯我獨尊: monad)처럼 여겨졌다. 이렇게 될 때신앙은 자기 스스로 양육하고, 자기가 자기를 다스리며, 자급자족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신앙을 유한자(有限者) 속에 무한자(無限者)를수용할 능력으로 이해하게 되면 신앙은 결국 근거도 없고 대상도 없고 내용도 없게 됨을 바르트는 지적한다.
 신앙에 대한 이런 그릇된 이해로 19세기 신학자들이 자초한 현상을 바르트는기독교 신앙이 물을 떠난 고기처럼 존재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비유한다. 기독교 교의학은 이 시기에 흥미진진한 질문을 던질 수도 생기있는 대답을 마련할 수도 없었다. 교의학이 철학적 전제들과 역사 비평의 문제들을 다룰 때를 즈음해서는 그 목소리는 가라앉았고 열정도식어 있었다. 이처럼 19세기 신학자들이 당시 대중적이던 세계관과 적당히 타협하여 신앙의 공감대를 넓히려던 시도는 오히려 기독교 영성의 샘을 막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사실이 21세기 교회의 선교를 위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앞서 그렌쯔가 역설하듯이 교회가 시대 문화의 조류에 민감해야 할 필요는 분명하지만 유의해야 할 것은 세상 문화의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의 타협이 전도 전략의 능사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세상과 교회의 문화적 거리를 좁히는 것이 당장은 전도에 유리할 듯 보이지만 거시적 안목에서 19세기 교회의 경험은 우리에게 기독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성별되어야 할 선교적 사명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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