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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롯의 족보

영국신사77 2008. 9. 3. 16:37
                        헤롯의 족보

 

                  (1)안티파테르(안티파텔, ?-BC 43)


   헤롯(헤로데) 1세의 아버지 안티파테르는 에돔 사람으로 아랍(이두메)인이었다. 안티파테르는 큰 영향력과 부를 지녔고, 당시 부흥하던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 페트라(요르단 강 남서부) 출신의 귀족 딸과 혼인하였다.

 

   BC 63년 폼페이우스(BC 106-48)가 유대를 침공하였을 때, 안티파테르(안티파텔)은 그의 원정을 지원하여 로마와 관계가 시작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안티파테르를 좋아하여, BC 47년 유대 총독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는데, 그 신분은 헤롯과 자녀들에게까지 계승되었다. BC 43년에 암살 당하였다.


 

   안티파테르를 기념하여 그의 이름으로 세운 도시가 '안디바드라'이다. 예루살렘과 가이사라로 가는 중간의 군용 도로상에 있다. 바울이 로마병사의 호위를 받으며, 밤에 이곳을 통과하여 가이사라에 수감되었다(행23:31).

 

 

 

 

                                (2) 헤롯1세(재위 BC 37-AD 4)

 

  헤롯대왕(BC 73-AD 4)은 비록 유대인 행세를 했으나, 부계와 모계 둘 다 아랍 혈통이었다.

  헤롯은 마르쿠스 안티니오(안토니우스)를 만나 평생 친구가 되었고, 안토니우스는 BC 41년 헤롯을 갈릴리 분봉왕으로 삼았다.

   헤롯은 그의 이름으로 안토니오 요새를 만들었고, 이곳에서 예수님을 로마 병사들이 조롱하고 매로 때리고 가시면류관을 씌웠다(마 27:28-29).

   BC47년 헤롯은 아버지로부터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받았다.

   BC 40년 파르티아 사람들이 유대를 침공하고 내전이 일어나자, 헤롯은 로마로 도망갔다. 로마의 원로원은 그를 유대왕으로 임명하고, 그 지역을 충분히 장악할 만한 군대를 주었다.

   BC 37년 유대의 통치자가 되어, 32년 동안 그 지위를 유지하였다.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아내 도리스와 이혼하고, 그녀를 아들과 함께 궁 밖으로 쫓아냈다. 그는 유대 민족의 지도자이며 제사장 가문인 하스몬가의 지원이 필요하여, 왕가의 공주 마리암과
재혼하였다. 그는 마리암을 깊이 사랑하여, 그녀가 죽은 후에도 시체와 7년간 잠을 잤다고 한다.

   BC 40년 36세인 그는 로마로 도망 가는 중에, 이집트를 지나다가 클레오파트라의 유혹을 받았으나, 미리암의 사랑 때문인지, 안토니우스와의 우정 때문인지는 몰라도 넘어가지 않아 그녀의 원한을 샀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 참조]

   안토니우스의 정부인 클레오파트라는, 헤롯을 미워하여 정부를 이용하여 헤롯의 가장 좋은 영토를 많이 차지하였다. 그럼에도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전쟁에 친구 안토니우스를 지원하였다.

   BC 31년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가 패배한 뒤, 헤롯은 승리한 옥타비아누스에게 편든 것을 솔직히 고백하였다. 전에 로마에서 헤롯을 만난 적이 있던 옥타비아누스는, 그가 유대를 다스릴 유일한 인물임이라 왕으로 인정해주었고, 클레오파트라가 차지했던 땅을 헤롯에게 돌려주었다.

   헤롯은 아우구스투스의 대행정관이고, 악티움 해전을 승리로 이끈 아그리파 장군과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의 이름을 따서 손자와 증손자의 이름을 지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에게 키프로스 구리 광산 감독권을 주고, 이익의 절반을 할당해 주었다. 아우구스투스는 BC 22, BC 20년에 헤롯의 영토를 2배로 늘려주어,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오늘날 요르단 왕국의 일부지역과 레바논 남부(베니게의 시돈, 두로) 및 시리아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그는 *나바테아 왕국의 후계자가 없을 때에 헤롯에게 줄려고 하였으나, 정신과 육체가 너무 쇠약하여 이루지 못하였다.

 

   헤롯은 건축의 왕으로, 수많은 요새와 화려한 도시들을 건설하였다. 그 가운데서 가장 큰 두 도시는 항구도시 가이사라(카이사리아)[훗날 로마령 유대의 수도가 됨]와, 사마리아의 옛 터에 세워진 세바스테였다.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가장 웅장한 헤롯 성전 전체를 다시 건축하였다.
   또한 헤롯은 올림픽 경기의 의장이 되어 그것을 후원하였다.


   자기 왕국에서는 유대교의 주도적인 바리새(바리사이)파가 그를 외래인으로 간주하여 대립하였기 때문에 마음껏 자기과시를 하지 못하였으나, 최대한 유대인이 사는 지역 군주들의 환심을 사려하였다.


   불행하게도 헤롯은 노년에 잔인한 성격을 드러냈다. 장남과 며느리, 그의 아들 2명과 장모까지 죽였다. 죽기 직전에 베들레헴의 2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수 백명 학살한 일은, 그가 빠져 있던 혼란과 일치한다.


   그가 죽는 해에 그리스도가 탄생하였다고 주장하는 사학자도 있다.


   헤롯은 도리스와 마리암 외에도 8명의 아내가 더 있고, 6명의 아내를 통해서 14명의 자녀를 낳았다. 성서에는 4아들이 등장하는데, 아켈라오, 헤롯 안티파스, 헤롯 빌립보, 영주 빌립보이다.


   그는 영토를 3명의 아들에게 나누어주어, 아켈라오(아르켈라우스)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필립보와 안티파스에게는 분봉왕들로서 나머지 영토를 나누어 다스리도록 하였다.

 

 *나바테아(Nabataean) 왕국

 나바테아(아랍인)인은 유프라테스 강에서 홍해에 이르는 시리아와 아라비아 국경 지역에서 살았다. BC 1세기-AD 1세기에 팔레스타인과 그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아라비아인(아랍인)들을 일컬어 '나바테아인'이라 부른다.

   구약과 신약에는 이들이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이들과 연관된 기록으로 바울이 다메섹에서 아레다왕 4세의 방백이 그를 잡으려고 하자, 광주리를 타고 도망쳐온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고후11: 32) 이 사건에 대한 약간 다른 설명을 행 9: 23-25에도 하고있다. 바울이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되돌아갔다고 기록(갈 1: 17)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아라비아는 아라비아 반도가 아니라, 나바테아의 영토를 뜻하는 것 같다.

 

   요세푸스(AD37-100)는 유대 군대의 장군으로 유명한 유대 역사가이다. 그의 글에는 나바테아인들과 유대인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1812년 부르크하르트(Burckhardt)가 나바테아가 성서에 나오는 에돔의 수도 *페트라(Petra)인 것을 밝혀낸 후부터, 본격적으로 이들의 문명과 왕국이 알려지게 되었다.


   BC 13세기에 이곳에는 에돔인이 살면서 나라를 세웠다는 사실이 최근 고고학적 발견으로 밝혀졌다.

 

 에돔은 에서의 다른 이름으로 '붉다'는 뜻인데, 땅의 색깔과 관련된 이름인 것 같다

 출애굽시 유대인의 통과를 에돔이 방해하였다.(민20:14-21, 21: 4)
 다윗이 정복하였다.(삼 8:14, 왕하3:8)

 아마샤가 이곳을 정복함.(왕 14:7)
 이들이 유대 성읍을 점령함.(애 4:21, 겔 35장)

 

   마카비 시대에는 이곳을 '이두메'라고도 불렀는데, 헤롯(아랍인)이 여기 출신이어서 유대인들이 반감을 가졌다.(말 1:2,3 롬 9: 18) 선지자들이 그들이 가진 유대의 반감을 책망함(사 34:5-15, 63:1-6, 렘 49:7-12, 겔 25:13, 암1:11,12)등이 성서에 나온다.

 

  BC 6세기초에 나바테아인이 이곳으로 이동하여 에돔 땅을 점령하였고, 에돔사람은 유대의 남부로 쫓겨나 살게 되었던 것 같다.


 

  BC 4세기에 에돔과 모압 땅에 정착하였고, 네게브(Negeb)의 남부를 점령하였다. 처음에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또 침략도 받았으나 물리치고 점차 독립적인 지위를 얻었다.

  BC 2세기 셀레우코스 왕조가 쇠퇴하면서 그들은 차츰 세력을 동북쪽으로 확장해나갔다. 남쪽으로는 홍해 동쪽 해안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인다.


 

  BC 169년은 역사에서 최초의 분명한 연대로, 야손(Jason)이 아레다(Aretas)의 성전을 차지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야손은 유대 대제사장의 직위를 얻으려던 사람 중의 하나였으며, 아레다 왕은 나바테아의 폭군이었다.(마카베오 하 5:8에는 '아레타스')


 

  아레다 2세는 BC 96년까지 통치하였던 왕으로, 수리아 왕조의 전쟁을 중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때부터 왕과 통치기간이 알려지게 되었다.


 

  BC 85년 직후 아레타스 3세가 다마스쿠스와 코엘레시리아(레바논)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BC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자, 아레타스는 로마의 봉신(封臣)이 되어 다마스쿠스와 다른 정복지를 계속 장악하였다.


 

  그 뒤 로마 황제 네로가 다마스쿠스를 로마 제국에 합병하였다.


 

  헤롯 안티파테르(안디바)가 그의 조카딸이자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서, 나바테 왕의 딸과 이혼한 것이 동기가 되어 전쟁을 하였다.


 

  말기에는 로마의 동맹군으로서 번영을 누리며 살았고, 나바테아 왕실 주화와 페트라에 있는 바위를 깎아 만든 건축물을 보면 헬레니즘 문명의 영향을 받은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가 나바테아를 로마제국에 합병한 후 더 이상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고, 그들의 동질성을 잃어버린 채 그 지방의 다른 주민들 속에 동화되고 말았다.


 그들의 유적은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하여 보호 받고 있다.


 

 

  *페트라(Petra: 헬라어로 '바위'의 뜻)
  이 도시의 유적은 요르단의 '마안'주 무하파자에 있다.
  페트라는 동서방향으로 모세 계곡(Wadi Msa) 즉 *와디가 관통하고 있는 해안단구 위에 건설된 도시였다.

 

 전설에 의하면 이 계곡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바위를 칠 때 물이 솟아났다는 곳 중의 하나이다. 모세계곡은 연노란색으로 변해가는 빨간색과 보라색의 암맥을 가진 사암(砂岩)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때문에 페트라를 '빨간 장미 빛 도시'이라고도 부른다. 페트라는 아마도 성경에 나오는 '셀라'가 이렇게 바뀐 것 같다.
이곳에 갈 때는 대개 동쪽에서 좁은 시크 계곡을 따라간다.

 페트라는 나바테아인의 통치 밑에서 향료 교역의 중심지로 번창하였다. 106년 로마인들이 나바테아인을 몰아낸 뒤에도 로마제국 지배하의 아라비아지방으로 편입되어 계속 번영하였으나, 상인들이 통과세를 내지 않으려고 다른 무역로를 이용함으로 상업이 점차 쇠퇴하였다. 7세기에 이슬람 제국이 침입한 뒤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성경에 페트라의 이름을 가진 사람은 12제자 중에 베드로이다. 예수님이 '시몬'의 이름을 수리아어로 '게바'라는 별명을 주셨다. '게바'를 번역하면 '베다라'이고 이것을 영음으로 '베드로(Peter)'라고 한다. 즉 반석(페트라)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6장 18절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하셨다. 여기서 다시 번역하면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의 이름은 흔들리는 작은 돌(베드로)이니라. 내가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돌(반석)이 되게 하여 이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카톨릭에서는 이 성경구절을 이용하여 베드로를 교황의 1대(원조)로 우기며 교황의 정통성을 찾고 있다. 


 

 *와디(Wad)
 반 건조지역으로 사막지역에서 볼 수 있는 물이 말라버린 강이나 하천을 말한다. 계절적인 강우나 불규칙적인 강우, 또는 적은 강우에도 잠시 홍수가 나기도 한다. 여행 때에 시나이 반도에서 모래 속에 파묻힌 차들을 종종 볼 수 있었는데, 이것은 갑자기 홍수가 나 차가 나오지 못한 경우라고 한다.


 

 사막은 물이 없어 사막이 되지만, 물이 없는 이유는 물이 땅으로 흡수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적은 강우에도 홍수가 지게 된다. 이것은 급격한 침식, 운반, 퇴적 작용을 일으킨다. 60년 동안 2m 이상에 달하는 퇴적현상이 나타난 예가 있다. 명칭은 북아프리카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는 와디 또는 우에로, 미국의 남서부 지방에서는 드라이와시 또는 아로요로 불린다.

 

                                                                  출처:"歷史 속으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

혜롯[아그립바 1세]의 최후       행 12:20-23

 

   헤롯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은 신약 성경에 여러 사람이 있습니다.

 

 (1)첫째는 아기 예수님과 처음 악연을 맺기 시작한 인물인데, 이를 헤롯 1세 혹은 대 헤롯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재위 B.C 37에서 AD 4년까지 41년동안 팔레스타인을 다스린 인물입니다. 헤롯 1세가 다스릴 때 예수님께서 탄생하셨고, 그의 핍박을 예고 받은 요셉과 마리아가 애굽으로 피난을 하고 있을 때, 그는 죽었습니다(마 2:1, 눅 1:5).

 

 (2)두 번째 헤롯은 헤롯 안디바 혹은 안티파스라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헤롯 1세의 아들인데, BC 4년에서 AD 39년까지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을 통치한 사람입니다. 분봉왕이라는 의미는 문자적으로는 4분의 1의 군주라는 뜻인데, 이런 칭호가 이 사람에게 붙었습니다(마 14:1, 눅 3:19, 9:7, 행13:1). 그는 이 명칭대로 유대의 일부를 통치하였으나, 백성들에게는 왕으로 통했습니다(막 6:14, 22, 25-27. 요 4:46).

  헤롯 안디바는 자신의 불륜을 책망한 세례 요한을 처형한 인물입니다(막 6:14-29). 뿐만 아니라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그와 상봉하기도 하였습니다.

 

 (3)세 번째 헤롯은 헤롯 아켈라오입니다. 이 사람도 역시 헤롯 1세의 아들이며, 주전 4년에서 주후 6년까지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두매를 다스렸습니다(마 2:22). 그가 다스리던 지역은 그 후 로마 총독의 관할에 속하게 됩니다.

 

  (4)네 번째 헤롯이 오늘의 주제를 장식하는 인물로서,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이 사람은 헤롯 1세의 손자이며, 그는 매우 짧은 기간동안(주후 41-44년) 할아버지가 다스리던 전 지역을 자기의 통치권 아래 통합했기 때문에, 통속적으로 그를 헤롯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아그립바 1세는 교회를 핍박하였고, 요한의 형제인 사도 야고보를 처형하였을 뿐 아니라, 베드로를 투옥한 인물입니다(행12:1-23).

 

  (5)마지막 다섯 번째는 헤롯 아그립바 2세입니다. 이 사람은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며, 팔레스타인의 북쪽에 위치한 작은 영토를 주후 50년에서 94년까지 다스렸을 뿐입니다. 아그립바 2세는 예루살렘 성전 일에 관한 한 로마 사람들이 신뢰하던 인물이었고, 총독 벨릭스의 처남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스도는 죄수 바울을 아그립바 2세 앞에 세우기도 하였습니다(행 25:13-26:32).

 

                       오늘 말씀의 배경

   헤롯 아그립바 1세는 해변 도시인 두로와 시돈과 더불어, 일종의 무역 전쟁을 벌린 것 같습니다. 그는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그의 영토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공급을 일시적으로 봉쇄했습니다. 이 곡물은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의존하는 생명줄이었습니다(왕상 5:25). 그러나 이런 갈등이 원만하게 해결되면서, 이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공개적인 축제를 벌린 모양입니다.

 

   가이사랴 백성들은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축제가 벌어지는 기회에 아그립바 왕에게 아첨을 하였고, 그를 땅 위에 나타난 신이라고 추켜세웠습니다. 이런 찬사는 당시 성행하는 헬라 문화권에서는 거부감이 없는 일이었고, 또 로마황제는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통치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자연스런 존칭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의 통치자인 헤롯은 그것을 거절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인간이기에 자신을 신으로 추앙하는 그 말을 거절하기보다는, 오히려 교만스럽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그립바 왕은 곧바로 중병에 걸려서, 5일 후에 죽었습니다.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행 12:21~23).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도 그의 역사서에 이 사실을 기록하였는데,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징벌로 보았습니다. 사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도 아그립바 왕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행했던 악행을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처리하셨다는 뜻으로 오늘의 본문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에는 “주의 사자가 치니 충이 먹어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방법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전형적인 징벌의 수단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결말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행 12:23).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명제로 다가옵니다.

 

   첫째로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장로교회의 명제는, 인간의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까? 열심히 찬송하고 큰 소리로 기도하면 영광을 받으십니까? 열심히 전도하고 봉사하면 영광을 받으십니까? 어떻게 하여야 영광을 받으십니까?

 

   그것은 아주 쉽고 간단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해 드리면 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속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지존하심을 인정하고, 그것을 옹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간단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러나 잘 되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아담이 에덴에서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범죄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행동이 어찌하여 범죄가 되고 에덴에서 추방될 뿐 아니라 그의 후손들까지 대대로 죄인이 되어야 했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금령을 어겼다는 사실이 범죄가 되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제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 5).

 

   이 말씀은 마귀가 하와를 유혹하면서 한 말인데, 여기서 가장 주목을 해야 할 부분은 “하나님과 같이 되어”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금령을 어긴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입니다.

 

   이런 일의 원조는 물론 마귀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마귀는 피조물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완전하며 영광스런 한 존재였습니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겔 28:14-15).

 

   그가 들어낸 불의란 하나님의 권좌를 넘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악한 생각의 출발은 교만입니다.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열왕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겔 28:17).

   

   그의 교만은 결국 영광스런 하늘의 보좌 곁에서 추방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피조물인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을 심어주었습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였고 그 결과 그들도 마귀처럼 에덴에서 추방이 되었습니다. 마귀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교만이란 근본적으로 마귀의 생각이고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뿌리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의 금령을 어겼다는 표면적인 것보다,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내면적인 생각과 마음의 표현이 금령을 어기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의 범죄를 이해하는 척도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아담만이 아닙니다. 그 후에도 인간들은 부단히 하나님의 권좌를 노리는 행동들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의 구체적인 표현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를 좇아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이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면서 반항하게 된 것은 그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통일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도 자신을 위해 탑을 쌓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합니다. 이것도 역시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 행동입니다.

 

   오늘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헤롯도 역시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마귀가 범하였고, 아담이 에덴에서 범한 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징치한 것입니다. 마치 아담을 에덴에서 추방한 것처럼 그를 인간 세상에서 영원히 추방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지금도 이 지상에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중동의 후세인은 대통령보다는 이라크의 신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망한 것입니다.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도 그 지역을 통치하는 통치자가 아니라 신이며 우상입니다. 이런 세력은 우리 곁에서 영원히 떠나야 하고 또 하나님은 추방시킬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정치적 인물 말고도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자칭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자주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신앙의 이름으로 때로는 성경을 인용하여 때로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명칭으로 자신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양 절대 순종을 요구하며 교회 안에서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하는 사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입니다.

 

   교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가짐이라면, 그 반대로 겸손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마음가짐입니다.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겸손을 요구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겸손으로 옷을 입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십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말씀의 흥왕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행 12:24).

 

이 말씀은 헤롯의 죽음과 깊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 결과가, 말씀의 흥왕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해 지려면, 인간의 교만이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해 지면, 반드시 교회의 부흥이 뒤따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행 13:44).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 19: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해야 교회가 부흥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교만은 살아지고 겸손이 찾아와야 합니다. 믿습니까?

 

   여기서 잠시 한국교회의 부흥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에 복음이 유입이 되면서 신앙의 선조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웠습니다. 지금 부흥회의 시작은 사경회였고 사경회는 성경을 배우는 모임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경회는 일주일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개월간씩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경회가 부흥회로 바뀌면서 기간이 단축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광복직후에도 사경회 기간은 꼬막 일주일이었고 부흥강사는 월요일에 시작하여 다음 주일 낮 예배 설교까지 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경회가 부흥사경회가 되었고 토요일까지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주일저녁에 시작하여 수요일이면 끝이 납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낮 성경공부시간은 생략된 채 저녁집회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국 성도들의 가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점차 살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이 힘을 잃어가면서 교회의 부흥과 성장이 멎었다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각성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교회의 부흥은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말씀은 사람들의 영혼에 평안과 안식을 주고 미래의 희망을 약속하고 그곳을 향하도록 힘과 용기를 줍니다. 말씀은 끊임없이 도전을 주어 자아를 개선하게 하고 신선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성취되었을 때 인간은 평안을 누리고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 만족 혹은 영적 충족이라고 합니다. 이런 영적 만족은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지식이 주지 못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만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교만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지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말씀 외에 다른 것으로 이런 것을 대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결국 말씀의 빈곤은 성도들의 영혼을 충족시키지 못하게 되었고, 그 결과 사람들은 교회를 외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것에서 이런 충족을 찾아 헤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왜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곤해 졌습니까? 인간의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지식을 우선하는 인간의 교만입니다. 세상적인 즐거움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보다 더 우선하는 인간의 교만입니다. 이런 인간의 교만이 무너져야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할 수 있고 교회는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맺는 말

    헤롯의 가문은 처음부터 주님과 악연으로 만납니다. 그리고 그런 인간의 장막이 무너졌을 때, 말씀이 흥왕해 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을 버리고 그에게 온전한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개인의 영적 생활이 부흥되고 가정에 말씀이 가득 채워질 때, 개인도 가정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곳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 이 땅에는 말씀이 다시 흥왕해 질 것입니다.

 

                                        출처;http://www.kimdi.net/Sermon/10Acts(2)/20acts(2).htm

 

 

 

 

                     헤롯 아그리파 2세[Herod Agrippa II]

 

                                                                            

  27~93경.

  남부 레바논 칼키스의 왕, 남부 시리아의 바타나이아와 트라코니티스의 분봉왕(分封王).

 

  66~70년 유대인 반란 때 반란군들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헤롯 대왕의 증손자로, 로마 황실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았다.

 

  44년 아버지 아그리파 1세가 죽었을 때 17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유대를 왕국에서 속국의 상태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는 어린 나이에도 유대인들의 번영에 관심을 기울여, 유대인들에게 온건령(edict of moderation)을 내리도록 도왔다.

 

  48년에는 예루살렘의 성전 업무에 관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50년에 칼키스의 왕이 되었으며, 53년 이 땅을 필리푸스 총독이 이전에 소유하던 땅과 바꾸었다.

 

  54년 로마의 새로운 황제 네로는 갈릴리 해 근처의 영토를 아그리파가 지배하던 왕국에 합병시켜주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그리파 2세도 로마와 매우 열성적인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로마인과 유대인 사이의 분쟁을 막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으나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52~60년 여러 명의 대제사장을 임명해 반대파들의 증오를 사기도 했다. 그리스화된 사람들과 분쟁을 겪고 있던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의 권익을 옹호했지만 유대에서는 어떠한 정책도 시행하지 않았는데, 이는 유대에 테러 집단인 열심당원들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60년 사도 바울이 체포되자 그곳의 지방 행정관은 아그리파에게 바울의 처리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했으며, 아그리파는 바울의 무죄를 입증했다.

 

  66년 지방 행정관 게시우스 플로루스가 카이사리아에서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자, 예루살렘에서 열심당원들이 봉기했다. 아그리파가 플로루스를 지지하면서 자제할 것을 촉구했으나,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열심당원들은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의 왕국 내에서도 점차 위협이 고조되었다.

 

  66년 여름 그가 예루살렘으로 파견한 군대가 패배했고, 반란군들은 로마군을 섬멸했다.

 

  67년 베스파시아누스의 군대가 도착하자, 아그리파는 로마군의 작전을 도왔다.

 

  70년 아그리파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를 도와 예루살렘을 최종적으로 점령했다.

 

  전쟁이 끝난 뒤 아그리파의 영토는 티투스에 의해 더욱 확장되었으며, 아그리파는 93년까지 생존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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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니케(Bernice): 헤롯 아그리파 2세의 누이
                [“이기다, 정복하다”를 의미하는 어근에서 유래]

베로니케는 헤롯 아그리파 1세가 아내 키프로스를 통해 얻은 딸로, 서기 28년경에 태어났으며, 드루실라의 자매이고 헤롯 아그리파 2세의 누이였다.
 
베르니케와 그의 오라비 아그리파는 기원 58년에 카이사레아에 있는 총독 페스투스를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그 두 사람은 페스투스의 초대로 “아주 뽐내는 태도로 와서 사령관들과 그 도시의 저명한 사람들과 함께 공청실에 들어갔다.” 그때 수감 중이던 사도 바울이 불려 들어와서, 허락을 받고 이 모든 고관들 앞에서 강력하고 웅변적인 변명을 하였다. ―사도행전 25:13, 23; 26:1~30.
 
베르니케는 매우 어린 나이에 알렉산드로스 리시마코스의 아들인 마르쿠스와 결혼하였다. 그는 마르쿠스가 죽은 뒤에, 자기 삼촌인 팔레스틴 북부 칼키스(Chalcis= 지금의 레바논 지역)의 왕 헤롯과 결혼하였다. 베르니케는 칼키스의 왕 헤롯을 통해 두 아들을 낳았는데, 헤롯은 기원 48년에 죽었다.
 
그 다음에 베르니케는 자기 오라비와 함께 지냈는데, 그들이 근친상간을 범하고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유대교로 개종하기로 한 길리기아의 왕 폴레모와 결혼하였다. 하지만 그는 오래지 않아 폴레모를 버리고, 다시 자기 오라비와 동거하였다. 베르니케와 아그리파가 카이사레아를 방문한 것은 이 기간의 일이었다.
 
주후 65년에 베르니케는 예루살렘에서 유혈 분쟁을 일으키던 플로루스를 대적하는 유대인들을 옹호하려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썼다. 후에 베르니케와 오라비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충성의 맹세를 하였다. 심지어 그 황제의 아들 티투스는 베르니케가 자기보다 열 살이나 연상이었지만 아내로 삼으려고 로마로 데려갔다. 하지만 로마 국민이 유대인 황비를 맞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티투스는 그 관계를 청산하였다.
 

 

                                                                                                                                                                                                                                               출처:아름다운 친구